1.

말하자면 에티켓을 가르치는 책인 <사람답게 사는 즐거움>에 실린 내용은 대개 이런 식이었다. ‘무릇 생선이나 고기를 구울 때는 젓가락으로 뒤집고, 맨손으로 뒤집지 말라. 그리고 손에 묻어도 빨아먹어서는 안 된다.’ ‘무나 참외를 먹다가 남을 줄 때에는 반드시 칼로 이빨 자국을 깎아버리고 주어야 한다.’ ‘아버지에게는 공경하면서 너무 무서워하고 어머니에게는 사랑하면서 버릇없이 구는 경우가 있는데, 너무 무서워하면 애정이 펴지지 못하고 버릇없이 굴면 공경심이 행해지지 못한다.’

…(중략)…

그러니까 온갖 금지 사항만을 늘어놓던 이덕무가 어느 결엔가 이런 문장을 썼기 때문이다.

‘나의 아버지와 숙부들이 다 살아 계실 때는 매우 우애가 돈독하였다. 다섯 분 형제가 한 방에 모이시면 화기가 가득하였다. 어머니께서는 이분들을 공경히 섬겨 아침저녁 식사를 반드시 손수 장만하시어 다섯 그릇의 밥과 다섯 그릇의 국을 반드시 큰상에 차려서 드렸다. 다섯 분은 빙 둘러앉아서 똑같이 식사를 드시는데 화기가 애애하였다. 나는 어릴 때 그 일을 보았다. 지금은 네 분 숙부가 다 작고하고 어머니도 세상을 떠나셨으며, 아버지만이 홀로 계시는데, 때로 그 일을 말씀하실 때마다 눈물을 흘리지 않으신 적이 없었다.’

이 문장을 쓰면서 이덕무는 그저 ‘어릴 때 그 일을 보았다’며 ‘어머니도 세상을 떠나셨다’고만 말했다. 자기 마음은 하나도 밝히지 않고 은근슬쩍 그 일을 말씀하실 때마다 눈물을 흘리시는 아버지 얘기만 하더니 다시 ‘~하지 마라’는 식의 글이 이어진다. 이 문장에서 이덕무는 별말이 없었는데, 나는 그가 어머니와 네 분 숙부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그들을 여의고 난 뒤 집이 얼마나 조용해졌는지, 아버지와 둘이 앉아 옛 일을 얘기하노라면 슬피 우시는 아버지 때문에 눈물도 보이지 못한 이덕무의 가슴이 얼마나 아팠겠는지 알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제야 나는 이 책에 실린 말들이 사실은 이덕무의 말이 아니라, 그 어머니의 말이라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손에 묻어도 빨아먹지 말아라, 얘야. 참외를 먹다가 남에게 줄 때는 꼭 칼로 이빨 자국을 깎아버리고 주어야 한다.

 

 

2.

집이 있어 아이들은 떠날 수 있고 어미새가 있어 어린 새들은 날개짓을 배운다.

 

 

3.

예컨대 기호학자였던 움베르토 에코는 “너는 중세에 대해서도 잘 알고 추리소설에 대해서도 잘 아니 중세를 다루는 추리소설을 한번 써보라”는 여자친구들의, 삼단논법에 가까운 권유에 혹해서 거의 쉰 살이 가까워 <장미의 이름>을 썼다. 이건 좋은 여자친구를 뒀을 때 가능한 얘기니까, 쉰 살이 가까워지더라도 여자친구는, 그것도 최소한 삼단논법 정도는 구사할 수 있는 여자친구는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교훈을 준다.

 

 

4.

삶의 여백이자 죽음의 적막을 언어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어 귀를 때리는 한여름 매미소리를 역설적으로 사용하는 것이다. 매미소리가 천지를 울리다가 문득 멈춘 상태. 그 찰나적인 상태가 바로 견딜 수 없는 삶의 여백이자, 죽음의 적막이니까.

 

 

5.

여류시인 이시바시 히데노가 폐병을 앓다가 죽은 것은 그녀의 나이 서른여덟 살의 일이다. 그녀에게는 여섯 살짜리 딸이 하나 있었다. 어느 여름이겠다. 그녀의 병이 깊어져 구급차가 집으로 달려와 그녀는 병원으로 운송되고 있었다. 구급차로 옮겨지는 동안, 매미가 어찌나 큰소리로 울던지……. 그 와중에 딸아이는 제 엄마가 구급차에 실려가는 게 무서워 울면서 엄마를 쫓아오고 있었는데, 어느 결엔가 그 애의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이었다. 이시바시 히데노가 ‘매미소리 쏴-/아이는 구급차를/못 쫓아왔네’라는 겨우 17자로 표현한 일은 바로 이 일을 뜻한다.

 

 

6.

그러고 보면 인간은 참 서로에게 쓸쓸한 존재다.

 

 

7.

거리의 모습은 그대로인데, 이제 우리는 서로의 소식을 애써 알려고 하지 않는 사람이 됐다.

 

 

8.

그 아이를 보낸 뒤, 내가 한 일이란 그동안 내가 사귀었던 여자아이들을 기억해내고 그녀들에게 내가 얼마나 나쁜 일을 했는지 참회하거나 문장마다 후회에 가득 찬 일기를 쓰는 일이었다. 이제는 얼굴도 감감한 여자아이들에게 왜 그렇게 용서를 빌고 싶었을까? 그 공허감이란 결국 새로 맞닥뜨려야만 하는 세계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도피해 들어가는 자폐의 세계였던 것이다.

 

 

9.

내가 아는 한, 김광석이 부른 노래란 그런 노래다. 그의 노래에는 청춘의 결정적 순간에만 맛볼 수 있는 설득력이 있다.

 

 

10.

평균적인 한국 남자라면 다 알 테지만, 어쨌든 입영통지서를 받게 되면 삶은 애매해질 수밖에 없다.

…(중략)…

새 양말 한 짝도 살 수 없는 처지라니!

…(중략)…

내 개인적 경험으로 보자면, 그런 인간들, 그러니까 지금 자신의 삶에 대해서는 조금의 계획도 세울 수 없는 처지가 된 인간들이 열중할 수 있는 것은 세 가지뿐이다. 바로 음주와 연애와 여행이다. 매달 계좌에서 종신보험료가 자동으로 빠져나가는 샐러리맨들이 마음 놓고 하지 못하는 세 가지이기도 하다.

 

 

11.

어설프게 관심을 보여주는 사람이라도 있으면 그를 향해 내 모든 것을 던져버리겠다는 식으로 매달렸고 내 예민한 신경을 건드리는 사람에게는 마음속으로 죽여버리겠다는 욕설을 퍼부었다.

 

 

12.

한번은 치과에서 사랑니를 빼고 관사로 돌아온 적이 있었다. 나를 부엌 한쪽에 앉혀두고 혼자서만 술을 마시던 대대장이 그날따라 날더러 가까이 오라고 했다. “이병 김연수. 예, 알겠습니다.” 우여곡절은 있었지만, 그래도 서로 인간적인 친밀감은 들었으니까 대대장도 내게 술 한 잔 정도는 다라주고 싶었던 모양이다. 대대장은 내게 군납용 캔맥주를 건넸다. 그 캔맥주를 바라보며 내가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오늘 낮에 치과에서 이를 뽑았는데, 의사가 당분간 술을 마시지 말라고 했습니다.” 대대장의 동공이 순식간에 확장되면서 아득해지기 시작했다. 뭐라고 설명하기 곤란한 그 표정은 여태 잊히지 않는다.

 

 

13.

살아오는 동안, 그 누구도 내게 그런 식으로 말한 사람은 없었다. 내 성적과 생김새를 지적하는 사람은 많았지만, 내 안에 어떤 가능성이 있는지 직접 가리켜 말한 사람은 없었다.

내가 시를 쓰게 된 것도 그가 내게 던진 말 때문이었다. 한번은 내가 무슨 일로 약간 비꼬는 투를 섞어 “저도 시나 써야겠어요”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그는 정확하게 내게 이렇게 말했다. “그거 좋은 생각이구나. 네가 어떤 시를 쓸지 꼭 보고 싶다.”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을까? 그의 격려 덕분에 내 안에 가시덩굴처럼 쌓여 있던 수많은 두려움들, 예컨대 “이제까지 백일장은커녕” 같은 것들이 하나 둘씩 떨어져나가기 시작했다.

…(중략)…

스승이라고 부를 만한 사람들이 우리 삶에 존재하는 뜻은 우리 같은 사람들도 이 세상을 더 밝고 멀리 보라는 까닭이다.

 

 

14.

재촉하는 만큼 빨리 흐르지는 않는다고 해도 나이가 들고 싶다는 아이의 소원쯤이야 들어준다는 것, 삶이 너그러운 건 그때뿐이다.

 

 

15.

열일곱 살이라고 하더라도 남자와 여자가 함께 있으면 어떤 식으로든 역할 분담이 생기기 때문에 즉석떡볶이는 그 아이가 만들었다. 국자로 떡볶이 국물을 아직 숨이 죽지 않은 재료 위에 연신 들이붓는 그 아이를 보면서 과연 함께 살면 음식은 잘 만들 것인가 혼자 상상한 것은 오버 중의 오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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