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1982년의 여름은 그렇게 급박한 것이었다. 별 생각 없이 세상을 살아오던 사람들의 삶이 어느 한순간 어마추어와 프로의 분명한 기로 위에 서게 되었고, 그것을 느끼건 말건, 혹은 좋건 싫건 간에 분명한 선택을 해야만 했던 것이다.
…(중략)…
아닌 게 아니라 세상에는 속속 ‘땅 끝까지 전하라’의 성격을 띤 프로의 복음들이 출몰하기 시작했다. 예컨대 이런 것들이고, 한결같이 방송인과 지식인, 광고인과 경영인들의 슬기를 모은 것들이었으며, 과연 줄기찬 것이었다.
①이젠 프로만이 살아남는다: 당시 가장 많이 회자되던 프로복음 1호 되겠다. 프로가 안 되면 아마 죽을 거라는, 최후의 통첩이 실린 무게 있는 복음이다.
②난, 프로라구요: 과거의 삶을 회개하고, 앞으로는 잔업이든 휴가 반납이든-아무튼 불꽃 같은 프로의 삶을 살겠다는 자신의 의지를 뚜렷이 공고한 프로복음 2호 되겠다. 한편 당돌해 뵈면서도 목숨의 부지를 위한 비장한 각오와 잔잔한 애수가 서려 있는 복음. 과거 유신복음 중에는 같은 맥락의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가 있다.
③프로의 세계는 약육강식의 세계 아닙니까?: 주로 비열한 방법으로 목적을 이룬 자들이 내뱉던 프로복음 3호 되겠다. <동물의 왕국>을 인간의 삶에 적용시킨 친(親)환경주의, 동물애호주의의 복음. 이 복음을 토대로 어쨌든 이기면 된다. 어쨌든 돈만 벌면 된다는 새로운 세계관이 빠르게 형성될 수 있었다.
④하루빨리 프로가 되게: 주로 회사의 상사들이 신입사원들에게 쓰던 프로복음 4호 되겠다. 쉽게 말해, 할 일이 태산 같다는 말이다.
⑤허허, 이 친구 아마추어구먼: 미전향 아마추어들에게 전도의 목적으로 쓰이던 프로복음 5호 되겠다. 가벼운 멸시와 조롱을 담아서 그들의 전향을 유도했다.
⑥맛에도 프로가 있습니다: 요식업계를 통해, 민간에서 처음으로 창출된 프로복음 6호 되겠다. 거창한 문구로 위장해 있으나, 그 어원은 ‘옆집보다 우리 집이 더 맛있어요’라는 소박한 것이다.
⑦이러고도 프로라고 말할 수 있나?: 주로 실수를 범한 부하직원에게 상사가 내뱉던 프로복음 7호 되겠다. 쉽게 말해, 나가 죽으라는 말이다.
⑧프로의 정식 명칭은 ‘프로페셔널’이다: 아직 멀었다. 더 높은 경지의 프로 세계가 있으니 분발하라는 메시지를 담은 프로복음 8호 되겠다. 주로 대학교수나 무슨 연구소의 소장이란 사람들의 입을 통해 개발도상국의 최대 급소인 무식(無識)의 혈을 찌른 고급 복음이다.
⑨프로는 끝까지 책임을 진다: 아무추어 음해와 더불어 야근의 생활화 고착을 목표로 한 프로복음 9호 되겠다. 이후 아마추어는 책임감이 없다는 사회적 무의식과 야근은 당연한 거 아니냐는 기업 풍토가 널리 확산된다.
⑩그녀는 프로다, 프로는 아름답다: 한국 경제사에서 여성 고급 인력의 필요성이 대두될 때 나온, 그러나 여성 고급 인력의 필요성과는 아무 상관 없는 프로복음 10호 되겠다. 역시 거창한 문구로 위장해 있으나, 그 원래의 뜻은 ‘옷 사세요’라는 말이다.
⑪프로주부 9단: 자칫 느슨해지기 쉬운 주부들에게 그럴 틈을 주지 않기 위해 만든 프로복음 11호 되겠다. 주부가 앞장서서 살림도 프로로 하고, 애들도 프로로 키우라는 거시안적 포석이 깔린 복음. 승단 심사와 발표를 어디서 하는지는 알 수 없다.
그랬다. 불과 4개월 만에, 세상은 프로들로 넘쳐나고 있었다. 왠지 모르게 나도 프로 중학생이 되어야만 할 것 같은 분위기 속에서, 아버지의 귀가 시간도 눈에 띄게 늦어져만 갔다. 나도 이젠 프로란다. 지친 표정으로, 그러나 세상의 흐름을 받아들여 안심이란 눈빛으로, 어느 날 아버지는 그런 말씀을 내뱉으셨다. 누가 묻지도 않았고
온 식구가 모여 카레라이스를 먹고 있던 저녁 무렵이었다. 그러니까 카레를 먹다가, 문득 그런 말씀을 하신 걸로 나는 기억하고 있다. 또 그런 말을 듣고도 다들 묵묵히 카레를 먹기만 했다는 사실 역시 나는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 생각해보면 무척 이상한 풍경이 아닐 수 없었다고, 지금의 나는 생각한다.
2.
마찬가지로 한 인간이 평범한 인생을 산다면, 그것이 비록 더할 나위 없이 평범한 인생이라 해도 프로의 세계에서는 수치스럽고 치욕적인 삶이 될 것이라 나는 생각했다.
…(중략)…
아무리 봐도 3위와 4위가 그럭저럭 평범한 삶처럼 보이고 6위는 변명의 여지가 없는 최하위의 삶처럼 보이는 것이다. 이것이 프로의 세계다. 평범하게 살면 치욕을 겪고, 꽤 노력을 해도 부끄럽긴 마찬가지고, 무진장, 눈코 뜰 새 없이 노력해봐야 할 만큼 한 거고, 지랄에 가까운 노력을 해야 ‘좀 하는데’라는 소리를 듣고, 결국 허리가 부러져 못 일어날 만큼의 노력을 해야 ‘잘하는데’라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중략)…
무진장 노력하고, 눈코 뜰 새 없이 노력하는 결코 평범하지 않은 사람들이-
“남들 사는 만큼 사는 거죠.”
“그저 평범하게 살고 있습니다.”
“더 열심히 해야죠.”
라고 말하는 이상한 세상이 온 것이다.
3.
그날의 선거에서 우리는 노태우 씨를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부정이다! 개표 현황을 지켜본 나는 내일 아침이면 또 난리가 나겠구나, 라는 생각을 했다. 부정은 이내 밝혀질 것이고, 그날의 함성은 다시 세상을 뒤흔들겠지.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어쩌면 올해의 대입도 취소되기가 쉬워. 혁명의 과도기야. 일찍 자자.
다음날 아침. 그러나 세상은 조용했다. 음 혁명 세력도 아침은 먹어야지, 라고 나는 생각했다. 하지만 점심이 지나도 마찬가지. 음 어디가 아픈가, 라고 생각했지만 저녁이 되자 세상은 평화롭기까지! 옳거니, 폭풍 전야구나, 엄청난 규모의 혁명이다. 각오해!
그 다음 날 아침. 역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음 오늘도 아침은 먹어야지. 그러나 점심이 지나도 마찬가지. 저녁엔 어제보다 더한 평화가 찾아왔다. 죽었나?
4.
원서를 썼다. 생각보다 갈 만한 학과는 그리 많지 않았다. 이상한 일이지만 우수한 성적에게도, 평범한 성적에게도, 저조한 성적에게도 그것은 마찬가지였다. 인생의 진로는 불과 일주일 사이에 결정났고, 4지 선다형의 교육은 4지 선다형의 진로만을 펼쳐놓았다.
원서를 쓰면서, 나는 교육의 목표 역시 ‘소속’을 가리는 데 있었다는 중요한 비밀을 알게 되었다. 똥배짱이 아닌 이상은, 타고난 저마다의 소질을 개발했다간 큰일이 나는 것이다.
5.
그런데 세상을 둘러보니 다들 그런 거야. 다들! 다들 돼지발정제를 마신 것처럼 땀을 흘리고 숨소리가 거칠어져 있어. 아무래도 놈들이 원하는 건 돈과의 교미가 아닌가 싶어. 이미 마신 이상은…… 그 끝을 보지 않을 수 없는 거지. 어쩌면 우리가 대학을 간 것도 다 그걸 마셨기 때문이야. 지금은 느끼지 못해도 좀더 시간이 흐르면 알게 되겠지. 여하튼 땀이……나도 숨소리가 거칠어질 테니까. 내가 왜 이러지? 난 결백해…… 하며 똑같은 짓을 하게 될 거라구. 분명해. 그래, 분명 누군가가 우리에게 그걸 먹였어. 우리가 마셔온 물에, 우리가 먹어온 밥에, 우리가 읽는 책에, 우리가 받는 교육에, 우리가 보는 방송에, 우리가 열광하는 야구 경기에, 우리의 부모에게, 이웃에게, 나, 너, 우리, 대한민국에게…… 놈은 차곡차곡 그 약을 타온 거야. 너도 명심해. 그 5분이 지나고 나면, 우리도 어떤 인간이 되어 있을지 몰라……
6.
10년 후에 분명 국회위원이 되어 있을 놈을 추대하기 위해, 저마다 노선이 중요하다는 둥 연설을 듣고 결심하겠다는 둥 법석을 떠는 모습들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저 말을 믿는다면 바보고, 믿지도 않으면서 동조하겠다면 범죄가 아닌가!
7.
이를테면-모처럼 부서를 방문한 이사와 함께 오찬을 나눌 때였다. 무척 긴장된 자리였는데, 이사가 꺼낸 서두는 전혀 뜻밖의 것이었다. “된장이 그렇게 몸에 좋다는군.”
이사가 된장 얘기를 꺼냈기 때문에, 한동안 모두가 고개를 끄덕이며 된장 얘기를 주고받았다. 부장은 서대문의 유명한 우렁된장집 얘기를 했고, 입사 동기지만 조기 승진을 한 과장은 된장에게 음악을 들려주는 첼리스트 얘기를 늘어놓았다. 나는-고추장은 순창이 유명하다는 뜻밖의 소리를 내뱉어, 모두를 놀라게 했다.
직장에서 승리하는 인간은-그런 상황에서 된장에게 음악을 들려주는 첼리스트 얘기를 꺼낼 수 있는 인간이다.
8.
터무니없을 만큼 세상은 여전했다. 세상이 여전한 이유는 반드시 누군가가 여전하지 않기 때문이다.
9.
‘착취’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고통스럽게 행해진 게 아니었어. 실제의 착취는 당당한 모습으로, 프라이드를 키워주며, 작은 성취감과 행복을 느끼게 해주며, 요란한 박수 소리 속에서 우리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형이상학적으로 이뤄지고 있었던 거야.
10.
시간이 없다는 것은, 시간에 쫓긴다는 것은-돈을 대가로 누군가에게 자신의 시간을 팔고 있기 때문이다.
11.
필요 이상으로 바쁘고, 필요 이상으로 일하고, 필요 이상으로 크고, 필요 이상으로 빠르고, 필요 이상으로 모으고, 필요 이상으로 몰려 있는 세계에 인생은 존재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