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굵직한 질병들은 각각의 표상을 가지고 있다. 결핵은 아름다운 슬픔의 병, 문둥병은 천형(天刑), 두창은 두신(痘神)의 왕림, 매독은 성도덕의 문란, 페스트는 돌연한 습격, 암은 통제할 수 없이 번져나가는 세포, 에이즈는 동성애의 질병.




2.

변강쇠가가 처음으로 겪는 일은 이 사회가 성담론을 금기시하는 사회로 바뀌었다는 점이다.

…(중략)…

두 번째로 겪은 일은 병을 이해하는 세계관이 완전히 거꾸로 바뀌었다는 점이다. 변강쇠가에서는 장승을 뽑은 강쇠의 행위는 오만 가지 악병의 보복으로 응징당했다. 아니, 이런! 20세기의 병리학은 도리어 강쇠의 행위를 칭송한다. “참 사람이 타 죽어도 아무 탈이 없었는데 나무 깎은 인형을 가졌은들 패어 때어 관계(關係)한가. 인불언귀부지(人不言鬼不知)니 요망한 말 다시 말라” 이 얼마나 당당한 태도인가. “병은 세균 때문에 생기는 것이지 귀신 때문에 생기는 것이 아니다”라는 근대 병리학 정신과 일통하지 않는가.

…(중략)…

세 번째로 겪은 일은 시체의 취급과 시체에 대한 관념이 완전히 바뀌었다는 점이다. 시체의 취급은 강력한 권력의 감시 아래 놓이게 되었다. 특히 역병사망자의 경우 시체를 함부로 처리하는 것이 법으로 금지되었다.

…(중략)…

게다가 20세기의 과학은 송장을 돌같이 여긴다. 이 과학은, 이 세상은 물질과 진공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곳에서는 물질의 기계적 운동만 있을 뿐이라고 설파한다. 생명체도 마찬가지여서 정신활동도 물질적 영역의 연장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생명이 끊기게 되면 영혼이라는 것은 없고 오직 시체만이 남아 해체의 길을 겪게 되는 것이 진리라고 한다. 이것은 종말론적 세계관이다. 죽어 시체가 된 후 그 이후가 없다. 진공처럼 공허하다. 이 세상과 저 세상이 넋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보던 중세사회의 믿음이 깨지고, 종말적인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훨씬 더 커진다. 이런 세계관 안에서 시체담론은 엄청난 금기가 되었다.




3.

변강쇠가는 하나도 아니고 둘도 아니고, 셋 모두 근대가 강하게 부정하는 것들로만 이루어져 있었다. 이렇듯 온몸으로 근대와 맞부딪친 작품은 단연코 없다. 성기와 성행위의 낄낄거림, 병들고 병 고치는 행위의 호들갑, 송장놀음의 우스꽝스러움, 이 셋 중 어느 하나도 근대의 검열을 통과해 살아남기 힘든 종자들이었다. 뒤바뀐 근대 세상에서 변강쇠가의 인기를 뒷받침하던 중세적 세계관에 대한 공감대 또한 크게 엷어졌다.

명창 박동진은 이 점을 분명하게 의식했다.

…(중략)…

결정적으로 박동진은 변강쇠가의 내용을 송두리째 부정하는 사설을 슬그머니 집어넣었다. “이 모든 사설이 웃자고서 한 일이라. 더질더질 살아보자”는 내용이 그것이다. ‘웃자고서 한 일’이란 내용이 황당무계하니 신경 쓰지 말고 그냥 웃고 즐기라는 뜻이다. 이렇듯 그는 혐오스러운 송장놀음, 낯뜨거운 성애장면, 황당한 치병놀음 모두를 현실로부터 떼내려고 한다. 여기에는 근대의 자기검열적 시선이 묻어있다.

이러한 태도는 19세기 신재효본과 거리가 멀다. 신재효본은 비장하며 진지하다.

…(중략)…

그들은 공감했는데, 우리는 공감하지 못한다.




4.

<조선총독부월보> 1911년 4월호를 보면, 조선총독부 의원을 비롯하여 각 자혜의원에서 병을 치료한 한국인들이 ‘감격하여’ 적은 여러 편의 감상문이 실려 있다. 이 잡지에 실린 내용은 각 원장의 보고 중 몇 가지 예만 추린 것으로 한국인의 감상문은 훨씬 많았던 듯하며, 이 감상문은 일본의 시혜, 곧 식민정치의 정당성을 옹호하는 선전자료로 이용되었다.

…(중략)…

그런데 몇 해 전 초등학교 교사용 사회과목 지침서의 자혜의원 항목을 보다가 깜짝 놀란 적이 있다. “자혜의원이 세워져 한국의 의학발달이 이루어지게 되었다”는 말이 나와 있는 게 아닌가?




5.
아마 한국인 대다수의 의사윤리관을 지배하고 있는 두 어휘를 들라하면 인술과 히포크라테스 정신일 것이다. 언론도 마찬가지이다.


…(중략)…

이 윤리는 차별적이고 이윤을 추구하는 의사의 무한한 질주를 가로막는 안전판 구실을 해왔다. 하지만 현대사회의 의료문제를 푸는 데는 별로 도움이 되지 못하는 개념들이다. 그 뿐만이 아니다. 인술과 히포크라테스 정신은 숭고한 의술을 가정하며, 그것의 봉건적․수혜적 특성은 의학의 탈권위를 요구하는 현대사회의 장애가 된다.




6.

현대 한국인에게 히포크라테스 선서가 의미있게 다가온 것은 1955년 이후부터이다. 이 해에 연세대 의대에서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시행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그 선서는 원래 히포크라테스의 선서가 아니라 1948년 세계의사협회에서 제정한 제네바 선언을 번역한 것이다. 히포크라테스 선서 형식을 모방해서 만든 이 선서에 히포크라테스의 권위를 붙인 것이다.




7.

인술윤리, 의사윤리 또는 히포크라테스 의사윤리는 상한 가부장적 온정주의에 입각한 당위론적 윤리관이다. 환자는 불쌍한 존재이기 때문에 의사가 의술을 베풀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의술의 차등을 낳는 사회적 구조를 무시한 채 의사 개인의 도덕심에 의존하는 형식이었다. 역설적으로 이런 윤리는 의료의 문제점을 해결하는 데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 헛된 문장에 불과했다. 의학은 결코 숭고하지 않으며 현실의 의료문제는 이런 관념을 깨뜨리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8.

이익은 생리설을 칭찬했지만, 모든 것을 그대로 추종하지는 않았다. 그는 뇌가 감각의 중추임을 인정했지만, 사고의 중추라는 아담 tif의 주장에는 동의하지 않았다.

…(중략)…

한의학에서는 심장을 마음과 정신활동이 머무는 기관으로 간주했고, 성리학에서는 이런 가정에 입각해서 인간의 본성을 논했다. 서양의 뇌주설(腦主設)은 이에 대한 도전을 의미한다. 그것을 받아들이는 순간, 한의학의 토대는 물론이거니와 성리학 전체의 전제가 흔들리게 된다.

조선후기의 여러 학자들이 서양의 새로운 설에 관심을 가지면서도 이 주장을 선뜻 받아들이지 못한 근본적인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사실 이러한 태도는 조선 실학 유학의 융통성과 경직성을 동시에 보여주는 것이다.




9.

묻혀 있던 지석영을 갑자기 다시 불러낸 것은 “우두법 도입 50주년”이라는 행사였다. 1929년(1879년 지석영이 일본인에게서 종두법을 최초로 배운 것을 기점으로) 당시 매스컴에서는 그를 찾아내 그 업적을 기리는 대대적인 선전을 펼쳤다. 총독부 기관지였던 <매일신보>에서는 우두법을 최초로 개발한 영국인 젠너를 빗대러 “조선의 젠너-송촌 선생”에 대해 길게 연재했다.

…(중략)…

이보다 20년 전인 1908년 의학교 교장인 지석영을 학생감으로 끌어내리고, 결국에는 쫓아냈던 그들이 거꾸로 재야에서 ‘의생’으로 은둔해있던 지석영을 다시 불러낸 까닭은 그에게서 일본의 식민통치를 정당화해줄 어떤 요소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지석영이 우두법을 일본인에게 배웠다는 점이 그것이다. 또한 그의 행적을 통해 조선인의 무지와 조선정부의 무능함을 부각시킬 수 있었다.




10.

우두법에는 틀림없이 무속이, 한의학이, 인두법이 담지 못한 실험과 계량이라는 근대적 정신이 담겨 있다. 그 정신이 우두법에 저항하거나 경쟁하는 다른 것을 물리치는 원동력이 된 것도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19세기 조선의 우두법 승리에 대한 전사를 집필하는 데는 그 이상의 것이 게재되어 있다. 감동과 흥분, 과장과 축소, 은폐와 왜곡이 그것이다. 모두 근대적 정신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들이다. 그러나 그 전사는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다. ‘정설’이 만들어졌고, 그것이 교과서와 각종 매체를 통해 유포되었다. 비판적 이해보다 밑줄 긋기식 암기가 성행했고, 그 자체가 ‘진실’이 되었다. 근대적 정신을 통해 우리가 계몽되고 성숙한 것인가? 아니면 꾸며진 ‘진실’을 통해 우리가 ‘근대’를 학습한 것인가? 우두법의 승리를 극화하고, 더 나아가 그 사례를 과학 일반으로 확대하고, 궁극적으로는 그것의 원천인 그릇된 권력까지 미화하는 논리와 방식을 생각하면 ‘근대’란 정말로 끔찍한 괴물이다. 그 수선스러움과 반복이 얼마나 지겨운지!




11.

의학의 권위가 높지 않은 만큼 의학에 대한 기대감도 높지 않았다. 모든 병을 고친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으며, 잘못된 의료에 대한 비난도 그다지 크지 않았다.




12.

의료이용의 확대가 가능하게 된 것은 의사의 자비 때문도, 국가의 선심 때문도 아니었다. 산업과 군사적 측면에서 인구의 건강가치에 대한 사회적 요구가 증가했기 때문이며, 국민 개개인의 권리의식이 향상되었기 때문이다.

…(중략)…

참으로 기나긴 어려운 역정이었다. 일찍이 지금만큼 의료를 누렸던 시절은 없었다. 병에 걸렸을 때 의약을 찾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 되었다. 물론 돈이 없어서 병원과 약국을 이용하지 못하는 사람이 없지는 않지만, 병에 걸려도 의(醫)와 약(藥)을 쓰지 않겠다고 생각하는 한국인은 몇 안 된다. 모든 사람이 병들면 의사와 약사를 찾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정말로 역사적인 사건이다.

…(중략)…

하지만 오늘날만큼 의료가 근본적인 회의에 직면한 적도 없었다. 인간이 그토록 갈망해왔던 끔찍한 역병을 몰아내자마자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이다. 의학은 “그것이 발달할수록 더 나은 건강을 추구하고, 그것을 의학이 만족시키지 못하는” 역설적인 상황에 빠져버렸다.

…(중략)…

병을 잘 고치는 의학이 있고, 개인 차원에서 의료 장벽이 과거 어느 때보다 낮은 시대이다. 그렇지만 사회라는 집단의 차원에서 볼 때 의료에 투입되는 비용이 엄청날 정도이다.

…(중략)…

또 의학 자체가 권력이 되었다. 한 예로 의사집단의 막강한 힘은 지난 해 의약분업 파동 때 분명하게 확인되었다. 또 다른 차원에서 환자는 자기 병의 치유주체로 서지 못하고 의사에게 의존하는 존재로 왜소해졌다. 치료대상인 인간이 물질처럼 다루어진다. 무엇보다 큰 문제는 ‘의학의 발전이 모든 병을 고쳐줄 것이라’는 끔찍한 맹신이 자리 잡았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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