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핑거포스트, 1663 1 - 네 개의 우상
이언 피어스 지음, 김석희 옮김 / 서해문집 / 2004년 12월
평점 :
절판
오랜시간동안 이 책의 독후감을 어떻게 써야할까 고민했다. 안 쓰는 것이 이 고민에서 벗어날 수 있는 가장 쉽고 간단한 방법이겠지만 그렇게는 하고싶지 않다. 내 말은 거짓말이 될 수도 있겠지만 나는 쉬운 길로는 가지 않겠다.
내가 고민한 것은 이제 더 이상 누가 보든 말든 상관하지 않고 쓴다는 것, 비밀일기처럼 글을 쓴다는 것이 자기기만임을 아는 이상,(이건 글쓰기에도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한다.) 누군가가 이 글을 읽는다는 가정하에 글을 쓸 수밖에 없는데 요즘에는 소위 '스포일러'라고 하는 것에 대한 민감도가 큰 것 같기 때문이다. 이런 추리물에 있어서는 말할 것도 없다.(아니면 그런 것에 분개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스포일러를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그렇기 때문에 침묵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보다는 크게 느껴지기 때문이거나)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예의'라고까지 말하는 것 같다.
내 고민의 요는 그거였다. 이 책은 퍼즐을 맞추듯 독자로 하여금 머릿속에 그림을 그리게 하고 스스로 생각해보게 만들고 있는데 책의 내용을 언급할 것인가 말것인가. 스포일러가 될 것인가 말것인가.
하지만 인터넷 시대의 글쓰기는 너무나 편리해서 나는 '제목'이라는 도구가 있다는 것을 한참 후에나 생각해 낼 수 있었다. 종이에 쓰는 글과는 달리 인터넷 게시판의 글은 처음에는 대부분 제목만을 볼 수 있을 뿐이고 그것을 클릭해야 내용을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안심하고 '예의 없는' 사람이 되기로 했다. '영화나 소설의 재미를 크게 떨어뜨리는 사람'이 되려고 한다. 과연 그렇게 될런가는 미지수지만.
사실 '제목'이라는 보호막 이외에 내가 스포일러가 되기로 자처한 결정적인 이유는 아무리 고민해봐도 책의 내용(그것이 재미를 느끼는데 결정이라 하더라도)을 쓰지 않고는 '글 쓰는 재미'를 못느낄 것 같기 때문이다.
서두가 너무 길었다. 이 세상에 태어난지 20년이 지나고 2007년을 맞이한 사람이라면, 아니 이렇게 말하는 것은 과거에 대한 모욕일 수 있다. '사람은 자기가 보고싶은 것만 본다.'는 맥락의 말(기억하고 싶은 것만 기억한다, 알고 싶은 것만 안다,믿고 싶은 것만 믿는다 등등)은 결코 현대의 발견이 아니기 때문이다. 과거에도 그랬듯 지금도 이 생각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많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신과 관계가 없을 경우의 일이다. 일단 자신의 문제가 되면 자신도 역시 보고싶은 것만 보게 된다. 여기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물론 내가 자유로울 수 있느냐하는 것은 말을 포함한 행동까지 그럴 수 있느냐하는 관점에서다. 아무튼, 이런 '바보의 벽'은 알만한 사람은 알고 모르는 사람은 알게 될 그런 성격의 진실이다.
나는 책이 그 내용 뿐 아니라 제작 상태 또한 여러 의미에서 '훌륭해야'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물론 내용이 우선이다.) 이런 책을 보면 안타깝다. 내용의 훌륭함에 비해 적절하지 못한 작은 판형을 선택해서 책의 두께는 두꺼워지고 잘 펼쳐지지 않는 책을 펼쳤을 때 양 페이지의 안쪽에 있는 글씨들은 읽기에 피곤하기 때문이다. 출판사가 이런 것을 몰랐을리는 없고 내가 모르는 다른 필연적인 이유가 있었으리라 생각한다. 하지만 역자의 후기가 2권이 아닌 1권의 끝에 가서 붙어있는 것은 아무래도 이해하기 힘들다.
<장미의 이름>을 읽기 위해 중세와 성서를 공부할 필요가 없듯, 이 책을 읽기 위해 17세기 영국의 정치와 종교에 대해 공부할 필요는 없다. 이 책은 크게 4부로 구성되어 있고 각각 네 명의 인물이 사건을 회고하는 방식으로 되어 있다. 간단하게 이야기하자면, (간단하게 이야기한다는 것은 많은 것을 생략한다는 것이다. 내가 고민했던 부분도 구체적으로는 다음의 표현을 써야할지였다.) 1부는 거짓말이고, 2부는 정신병자의 헛소리다. 3부는 망상에 사로잡힌 사람의 복수담이고 4부는 진실이다. 내가 4부를 진실이라고 말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소설 속에서 그렇다는 것이다.(물론 소설은 허구다.) 역자 후기나 각종 서평에서 1부테서 3부까지가 각각 시장의 우상, 동굴의 우상, 극장의 우상이라는 소제목을 붙였듯이 4부는 남은 하나의 우상 즉 종족의 우상이 아닐까라고하며 독자에게 생각할 여지를 빼앗고 있는데, 나는 구체적 장면이나 결말을 제시하는 것보다도 이런 친절이야말로 책의 '재미를 크게 떨어뜨리는' 스포일러라고 생각한다. 그만큼 '종족의 우상'과 '핑거포스트'의 관계를 생각해보게끔 만드는 4부의 제목이야말로 이 책의 매력이다.
4개의 우상이라는 큰 틀, 예수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모티브의 변용의 적절함만으로도 이 소설은 대단히 잘 된 작품이다. 게다가 스케일이 걷잡을 수 없이 점점 커지는 작품이 흔히 저지르기 쉬운 실수(라고 할 수 있다면)조차 없다. 이 소설에는 '결정적 단서' 혹은 '반전'이라는 가면을 쓰고 나타나서는 독자의 허를 찌르기는 커녕 허탈함만 가져다주는 그런 장치가 없다. 허탈함만 가득 안겨주고 책을 끝내버리는 '무례함'도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다른 미스테리를 던져주는 '예의'가 있다.
독자의 머리를 복잡하고 불편하게 만드는 이 책은 칭찬받아 마땅하다.
(여기까지 쓰면서 나는 마음을 바꿔 제목에 '스포일러있음'을 사용하는 보호막을 포기하기로 했다. 이 정도의 정보로는 독서의 재미가 크게 떨어질리 만무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글을 읽고 나의 '예의 없음'에 분개하며 이 책을 포기할 필요는 전혀 없다. 자신을 위해서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