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와 만난 사람들
이현주 외 지음 / 생활성서사 / 199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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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는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너무 단순하게 읽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는데요, 예를 들면 마가복음 1장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갈릴리 바다를 지나가시다가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가 바다에서 그물을 던지고 있는 것을 보셨다.  그들은 어부였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였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들은 곧 그물을 버리고 예수를 따라갔다...' 16절부터 18절까지의 말씀인데요. 그런데 이렇게 이 짧은 말씀이 기록되기 이전에 시몬 베드로와 안드레가 예수를 따라가는 사건이 있었겠죠.  
   그런데 여기서 한번 더 생각을 깊이 해보면 이런 사건이 있게 된 상황이란 게 틀림없이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가 베드로와 안드레를 만난 것은 우연이었을까? 그냥 갈릴리 호수가를 지나가다가 만난 것일까? 시몬 베드로와 안드레는 당시 어떤 상황에 처해있었을까? 마음 속에 어떤 갈망이 있었을까? 우리 최 목사님의 경우를 빗대면 최 목사님은 하필이면 왜 청량리를 사역의 장으로 택했을까? 또 청량리의 부랑자들은 왜 이렇게 비참한 삶을 살게 되었을까? 도대체 이렇게 된 상황은 어떤 것이었을까? 이렇게 상상의 나래를 펼쳐보면 우리는 말씀을 통해 사건을 만나고 사건을 통해 사건이 일어나게 된 상황과 만날 수 있게 됩니다.
   우리가 성서를 이 정도까지 읽게되면 예수와 또 예수를 만난 사람들을 보다 구체적으로 생동감 있게 만날 수 있게 됩니다. 비로소 이해하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저는 오늘 생활성서사가 낸 이현주 목사의 '예수와 만난 사람들'이란 책을 여러분께 소개해드리고자 합니다. 이 책에는 예수시대에 예수와 만난 사람들의 얘기가 있습니다. 삭개오가 만난 예수, 사마리아 여인, 바리새인, 날 때부터  소경이었던 사람, 간음한 여인, 엠마오 도상에 선 예수의 제자들, 과부... 이런 사람들의 얘기가 펼쳐져 있습니다. 여기서 얘기란 말은 그저 단순한 뜻이 아니라 정말 긴 사연이 숨어있는 것인데요. 예를 들면 교사가 한 학생을 사무실에 불러서 너의 얘기를 해보아라! 하고 말할 때 이 학생이 펼쳐놓을 얘기는 간단치가 않은 것이겠죠.
  우리는 이 책을 읽으면서 예수가 만난 사람들의 그 많은 사연, 얘기들 때문에 가슴앓이를 함께 나누게 될 것입니다. 또 이들이 예수와 만나는 만남의 사건에 이르러서는 솟아오르는 눈물을 감출 수가 없게 될 것입니다. 만남이란 이렇게 엄청난 것이구나... 예수와의 만남이란 이런 것이었구나 하는 것을 느끼며 말이죠.
   예수는 여러 남자에게 몸을 팔아온 사마리아의 여인에게는 '어여쁜 여자여, 하나님의 딸이여 사람들이 그대를 개처럼 여긴다고 그대 자신까지 그대를 개처럼 여겨서는 안된다오... 사람이 짓는 죄 가운데서 가장 고약한 것은 남을 버리는 것보다 자기를 버리는 것이라오. 왜냐하면 그것은 자신을 버리고 하느님을 버리는 것이니까요.' 라고 말합니다.    또 예수에게 매달려 귀신 들린 딸을 고친 수로보니게 여인은 딸을 고친 뒤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에게는 알 수 없는 용기와 자신감이 샘물처럼 솟구쳐 올랐다. 절망의 끝가지에 매달려 온몸으로 그분의 이름을 불러본 사람은 내 이제 더 무슨 말 아니해도 이 가슴 벅찬 감격을 더불어 나눌 수 있으리라'
 저는 가끔 이런 상상을 합니다. 예수님이 갈릴리 호수가를 거닐다가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는 언덕 한 곳을 차지하고 앉아서 호수를 바라봅니다. 그의 얼굴에는 연민이 가득합니다.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미움과 싸움을 보면서 그의 가슴 속에도 깊은 상처가 패입니다.    그는 사랑 때문에 오늘도 갈릴리 사람들 속에 서서 사랑의 말씀을 전하고 몸으로 사랑을 실천합니다. 그러다가 사랑 때문에 고향에서 배척받고 쫓겨납니다. 그는 또 사랑 때문에 십자가에서 목숨을 거둡니다. 그러나 그 사랑 때문에는 그는 다시 우리들 한가운데에 부활하고 있습니다.
  저는 아침 저녁으로 선듯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면 갈릴리의 젊은 예수를 상상합니다. 그리고 오늘도 사랑 때문에 깊은 시름에 잠겨 있을 그분을 눈물로 만납니다. 청취자 여러분께서도 나름대로의 최대한의 상상의 나래를 펴서 2천년 전 갈릴리의 예수를 오늘의 예수로 만나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깊은 은혜를 체험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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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독 - 세계문화예술기행 1
박완서 지음 / 학고재 / 199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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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행복하게 산다는 것에 대한 어떤 고정적인 관념이 형성돼있죠. 사람들과의 경쟁에서 적당히 이기고, 경제력도 있고 또 가족과 친척 친지들과 즐거운 모임도 가지면서 예쁘고 똑똑한 자식들의 성장을 지켜보고 또 때로는 외국여행도 다니면서 선행도 베풀고 그러면 최고 아닌가 하는 것일텐데요.  모독을 읽다보면 이런 우리 생각에 대해 다시 곰곰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게 만듭니다.
  우선 티벳과 네팔 지역의 시퍼런 하늘과 우리의 60년대 모습 같은 이 지역 사람들의 표정을 사진으로나마 보게되면 도시의 분주함을 벗어나 때 뭍지 않은 자연과 함께 삶을 같이해보고 싶다는 열망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또 5천 미터가 넘는 풀 하나 없는 고산지대를 보면 신발을 벗고 하나님이 떨기나무의 불꽃으로 현현하는 모습과 만나야할 것 같은 느낌마저 던져줍니다. 우리에게는 가난이 어리석은 것, 또 때로는 죄가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곳 사람들에게 가난은 결코 부끄러운 게 아닌 것처럼 보입니다.
  이들의 종교적 열정 또한 대단합니다. 이 턱없이 가난한 나라에 어울리지 않는 금빛 찬란한 불상과 사원들은 작가의 눈에 즉각적으로 부조리를 느끼게 해줍니다. 그러나 가난을 돌보지 않는 이 불상과 사원을 향해 이들은 오체투지의 절대복종으로 순례의 행렬을 잇습니다. 그리고 미움도 노함도 없는 이들의 맹목적 신앙 앞에 결국 작가의 분노는 한풀 꺽이고 '이 신비의 나라는 이해하기에는 버겁고 난해한 나라'로 새롭게 자리매김하게 됩니다.   
   책의 제목이 모독인데요. 저자는 '...이곳에 관광 온 행위 자체가 이 순결한 완전순환의 땅에 모독이었으니 당신들의 정신이 정녕 살아있거든 우리를 용서하지 말아주오...'라고 고백합니다. 이 순결한 땅에 부자나라 사람들이 버리고 간 것은 폐기물, 쓰레기, 그리고 피곤하고 고단한 정신들입니다. 그러나 이 가난한 땅은 이들에게 때 뭍지 않은 자연과 삶의 새로운 활력을 선물합니다. 비록 모독 받았으나 순결을 선물하는 것입니다. 
  박완서 선생에게 이번 여행이 네팔로는 세 번째 기행이 됩니다. 그는 이 여행을 보약 먹는 대신 가는 여행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이 책의 말미를 이런 말로 장식합니다. '...네팔에서 어쩌다 우리 사람을 만날 수 있다면 그는 걸으러 온 사람이다. 그게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타는 사람보다도 나는  사람보다도, 기는 사람보다도 걷는 사람이 난 제일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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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락 한알 속의 우주
장일순 지음 / 녹색평론사 / 199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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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녹색평론사에서 나온 무위당 장일순 선생의 이야기 모음집, '나락 한 알 속의 우주'를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이 책은  글모음집이 아니라 그야말로 이야기 모음집입니다. 장일순 선생은 지난 94년 위암으로 세상을 떠나셨는데요, 생전에 이렇다할 글을 남기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 책은 선생을 기리는 사람들이 생전에 선생이 행한 강연을 글로 풀어쓴 것과 또 이러저러한 잡지에 게재된 인터뷰 기사를 실은 것을 모은 것입니다.
  장일순 선생은 원주에서 태어나 배재고등학교와 서울대학교 미학과를 나와서 정치운동과 교육운동, 사회운동을 활발히 펼쳤습니다, 특히 박정희 정권 때는 지학순 주교 등과 함께 원주를 근거지로 반독재 운동을 벌였구요. 그러다가 1970년대 후반 이런 식의 운동방식만으로는 안되겠다는 한계를 느끼고 이른바 생명운동을 시작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런 생명운동을 실천하는 조직으로 도농직거래 조직인 한살림을 발족합니다. 이 책은 바로 선생의 생명철학, 생명정신이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선생이 생전에 이렇다할 글을 남기지 않은 이유를 발문을 쓴 이현주 목사는 이렇게 얘기하는데요. '우리가 초등학교 때 세계 4대 성인이라고 배운 예수, 석가, 공자, 소크라테스 모두가 생전에 글을 남기지 않았던 사실과 장일순 선생이 글을 쓰지 않는 내력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이들 성인들은 신통하게 생전에 꽤 말이 많으셨다... 한번 말씀을 내어놓으면 흐르는 강물처럼 막힘이 없었다.... 그렇게 쏟아넣고는 맨뒤에 혼자 남아 참담한 허탈을 남몰래 삼키셨을 것이다...'
  저는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말은 사람을 직접 보면서 하는 것이죠. 그러나 글은 글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사람과 만납니다. 글이 다분히 이성적인 성격을 갖는다면 말은 감성적입니다. 어떻게보면 장일순 선생이 선호한 것은 이렇게 상대의 눈과 얼굴을 직접 보면서 하는 것이었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일 겁니다. 마음과 마음으로 만나는 것... 이것이 말의 진정한 힘이죠. 그런데 이 책은 장일순 선생의 말을 글로 풀어쓴 것이어서 선생의 말이 지녔을 원초적인 감성은 많이 약해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이 책이 여전히 귀하게 느껴지는 것은 우리 시대에 드문 '제대로 된 말다운 말'을 들을 수 있다는 데 있습니다.
 이 책은 글과 강연, 대담으로 구성돼있는데요.
 제목 몇 개를 소개하면 이렇습니다. '거룩한 밥상', '나락 한 알 속에 우주가 있다', '섬기는 것이 대하여', '반체제에서 생명운동으로', '한살림 운동과 공생의 논리' 등인데요. 이런 제목으로도 대중 책의 내용을 그려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책에 복음에 대한 언급이 있는데요. 이런 겁니다. '...아름다운 이야기가 있으면 사람들에게 전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얼마 전에 듣고 기뻤다라고 사람들에게 전할 수 있겠지요. 그것이 오늘날의 바이블입니다.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떨어져 있어도 아름다운 이야기는 그 역할을 다합니다. 복음이란 만남 속에 있는 것으로 그밖에는 없습니다...'
  또 생명사상을 잘 요약한 이런 글도 있죠. '...쥐를 위해서 밥을 언제나 남겨놓는다. 모기가 불쌍해서 등에다가 불을 붙이지 않노라. 절로 푸른 풀이 돋아나니 계단을 함부로 딛지 않노라...' 쥐나 모기는 인간에게 해를 끼치는 미물이지만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이들 속에 깃들어 있는 생명이라는 사실을 일깨워주는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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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를 심은 사람
장지오노 지음, 김경온 옮김 / 두레 / 200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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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를 심은 사람'

  장 지오노의 아주 짧은 소설 '나무를 심은 사람'을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이 소설은 동화책보다 짧아서 그늘이 시원한 나무 밑에서 한 시간 정도만 짬을 내면 다 읽을 수 있을 것입니다.
  먼저 이 책의 줄거리를 소개해드리겠습니다.
  '프랑스 남부 프로방스라는 지역의 한 황무지에 혼자 살면서 나무를 심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엘제아르 부피에라는 이름의 50대 중반의 남자였습니다. 이 사람이 하는 일은 매일 세심하게 골라낸 도토리 백개를 들고나가 땅에 구멍을 파고 나무를 심는 일이 전부였습니다. 1차대전이 한창일 때는 자작나무를 심었고 이후에는 너도밤나무를 심었습니다. 엘제아르의 꾸준한 나무심기로 황무지는 점차 울창한 숲으로 변화됐습니다. 말라붙었던 시내에는 물이 흐르기 시작했고 떠난 사람들은 다시 돌아와 마을을 이루기 시작했습니다. 그동안 엘제아르가 해온 일을 모르는 사람들은 이 숲이 스스로 자라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죽을 때까지 나무를 심어 황무지를 희망의 땅으로 바꾸어놓은 엘제아르 부피에는 89세를 일기로 숨을 거두었습니다.' 이것이 이 이야기의 모두입니다.
  여기에서 묘사된 주인공의 모습은 이렇습니다. 거의 말을 하지 않는 사람... 작가는 이런 특성을 확신 속에서 자부심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또 담배를 피우지 않으며 오두막이 아닌 제대로 만들어진 돌집을 지어 살고 있었으며 고독 속에 물러앉아 한가하게 사는 것을 기쁨으로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이런 삶을 살게 된 동기는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이 죽고 또 뒤이어 아내도 죽게된 일이 있은 이후부터입니다.
  일생동안 나무를 심은 사람... 엘제아르 부피에의 삶은 태산같은 안정을 보여주는 삶이죠. 거의 말을 하지 않고 담배를 피우지 않는다는 것은 삶에 불필요한 장식을 걷어낸다는 얘기겠구요. 오두막이 아니라 돌집을 만들어 산다는 것은 허투로 살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것이겠죠.
   저는 이 책의 우리말 제목이 '나무를 심은 사람'이라고 되어있어서 원어인 불어를 아는 동료에게 확인해봤더니 역시 나무를 심다의 동사가 과거형이 맞다고 합니다. 번역이 정확한 거죠. 그런데 저는 사실 제목을 '나무을 심은 사람'보다는 '나무를 심는 사람'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봤거든요. '나무를 심었다' 그러면 결과에 강조가 되는 것 같고 '심다' 그러면 현재하는 행위에 강조가 주어지는 것 같아서 제 생각으로는 나무를 심는 사람이 훨씬 더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습니다.
  우리나라 시에 이런 구절이 있죠. '...왜 (사냐건)사느냐고 묻거든 그냥 웃지요...' 저는 이 싯구에서 '그냥'이라는 표현이 무척 마음이 끌렸습니다. 사람들은 흔히 이렇게 묻지요. 왜 사느냐... 왜 그일을 하느냐... 왜 그런 사람과 만나느냐... 그런데 사람들이 왜라고 묻는 그 까닭은 무엇일까요? 많은 경우 그것은 말하는 사람에게 확신이 없기 때문이죠.
   또 이렇게 왜라는 질문을 받으면 사람들은 여기에 맞는 대답을 만들어내려고 애를 씁니다.  그런데 이렇게 대답을 만들어내려는 태도 역시 곰곰히 생각해보면 
스스로의 삶에 확신이 안서기 때문일 때가 많죠. 아마도 제 생각엔 자신의 살아가는 방식에 확신이 있다면 이렇게 끊임없이 쏟아지는 '왜'라는 질문에 '그냥 웃는 것'으로 대답이 충분할 것 같습니다. 사람들이 부피에게 '당신은 왜 나무를 심느냐'고 물어봤다면 그는 '그냥' 한번 웃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면 이 태산같은 웃음 앞에 '왜'라고 물어본 사람의 마음은 무너지고 말았을 것입니다.
  아무도 없는 황무지에서 절대고독 가운데 살면서 나무를 심는 단순한 일상을 반복하는 부피에... 그런데 이런 지극히 평범한 일상이 결국은 비범한 것이 되고 맙니다. 그것은 반복되는 일상 속에 주인공의 확신이 들어차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는 남의 삶에서 자기 삶의 대답을 얻어보려 합니다. 그러나 결국 남의 삶은 남의 삶이고 자기의 삶은 자기의 삶이죠. 자기가 자기 삶을 살려하지 않는 한 아무리 훌륭한 남의 삶에 대한 얘기를 들어도 무의미한 것입니다. 스스로 자기 삶 때문에 고독해지고 이런 고독 속에서 스스로 확신을 얻고 이 확신 속에 거하는 삶을 사는 것.. 저는 이것이 나무를 심은 사람이 주는 가장 큰 교훈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조금 부언하면 장 지오노의 소설 '나무를 심은 사람'은 환경운동의 주요한 교육자료로 쓰이고 있구요, 13개 언어로 번역돼 전세계 사람들에게 읽히고 있습니다. 또 이 내용은 프레데릭 바크라는 세계적인 화가에 의해 애니메이션 영화로도 민들어졌다고 합니다. 이 영화는 우리나라에서도 비디오로 구해볼 수 있습니다.
  자꾸만 남에게 기대고만 싶어지는 연약한 사람들의 시대에 진정으로 강한 사람의 모습을장 지오노의 짧은 소설 '나무를 심은 사람'에게서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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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 속에 떠오르는 소리
에르네스또 까르데날 지음 / 분도출판사 / 197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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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니카라과의 신부 에르네스또 까르데날의 명상집 '침묵(沈默) 속에 떠오르는 소리'를 여러분께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이 책의 원제는 영어로 하면 'To live is to love'... 우리말로 하면 삶은 사랑이다... 이런 내용이겠죠. 요한 1서의 '하느님은 사랑이시다' 라는 말씀이 생각나는 제목입니다.     홍수(洪水) 속에서 사람들은 오히려 심한 갈증(渴症)을 느낀다고 합니다. 물은 많은 데 정작 마실 물은 없는 것이죠. 어떤 시인은 70년대 상황을 '타는 목마름'의 시대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디만. 요즘 우리 시대도 이런 갈증, 목마름이 부쩍 늘어나 있는 때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말은 많지만 정말 필요한 말다운 말은 없는 시대... 소리는 많지만 사람들의 가슴을 울리는 소리는 빈곤한 시대... 어떻게 생각하면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침묵의 시간이 상실된 그런 시대가 오늘날 우리가 사는 시대의 모습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까르데날 신부는 이렇게 사막 같은 삶을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깊은 침묵 속에서 건져올린 아름다운 사랑의 잠언을, 해갈(解渴)의 말씀을 전해줍니다. 이 책에 나온 한 구절을 소개해드리겠습니다.
 ''... 한밤 중에 이리가 외로이 울부짖을 때, 그는 너를 향해 부르고 있는 것이다. 어미소를 부르는 송아지는 너를 부르고 있는 것이며, 으르렁대는 사자의 울음도 너를 부르는 것이고, 개구리들은 네가 들으라고 개굴개굴 울어대는 것이다. 이와같이 森羅萬象이 수많은 목소리로 너를 부르고 있다. 시인의 언어, 강물들의 언어, 기도하는 수도자의 언어는 서로 다른 말로 너를 부르고 있다.....
  모든 인간존재의 눈동자 속에서는 달랠 길 없는 욕망의 불길이 타오르고 있다. 어린이와 늙은이의 표정 속에는, 어머니들과 그리고 연애하는 여인들의 표정 속에는, 노동자들, 암살범들, 혁명가들, 독재자들, 그리고 거룩한 성인들의 표정 속에는 달랠 길 없는 바로 그 욕망의 불씨가, 숨어있는 바로 그 불길이, 깊이를 모를 바로 그 심연이 그리고 모든 노력의 궁극적 목적과 눈동자 속에는 하나의 깊은 우물이, 사마리아 여인의 우물이 들어있다. 이 목마름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다...
  시편 작가는 이렇게 노래한다. '암사슴이 시냇물을 그리워하듯, 내 영혼은 당신을 목말라합니다...' "
  사랑에 상처 받은 모든 사람들.. 어쩌면 이런 상처는 인간 모두에게 실존적인 것이겠죠. 저자는 우리에게 이런 실존적인 상처와 진지하게 만날 것은 요청합니다. 저자인 까르데날 신부는 수도자이면서 동시에 남미의 혼란기를 온몸으로 겪은, 또 그 자신이 혁명투쟁에 참여한 혁명가였습니다. 까르디날 신부의 언어는 육체는 물론이고 이런 정신의 극심한 혼란 중에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결핍이 심할수록 본질에 대한 추구가 강렬해지기 마련인데요. 그래서 이런 사랑의 언어는 가장 혁명적인 언어가 됩니다.
 제가 이 책을 처음 만난 것은 군대에서였습니다. 그러다가 얼마 전에 실로 오랜 만에 다시 이 책을 들었을 때 저의 갈증과 허기를 다시 확인할 수 있었죠. 이 책'침묵 속에 떠오르는 소리'는 분도출판사에서 나왔는데요. 저는 이 방송을 들으시는, 사랑하는 여러분들이 이 책을 구해서 이 책의 첫구절을 읽다가 책을 덥고 한동안 멍하니 침묵하는 시간을 갖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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