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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글 긴 침묵 - 개정판
미셸 투르니에 지음, 김화영 옮김 / 현대문학 / 2004년 4월
평점 :
이 산문집에는 집, 도시들, 육체, 어린이들, 이미지, 풍경, 책, 죽음 등 8개의 주제 아래 저자의 예지가 번득이는 짧은 글들이 실려 있습니다.
저는 이 책을 읽으면서 글 읽는 재미를 새삼 느꼈는데요, 제 감상을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저자의 눈에 포착된 이 글의 소재들은 특별한 것들이 아닙니다. 이를테면 <집>을 주제로 한 글들에 등장하는 '열쇠와 자물쇠', 지하실과 다락으로 서로 다른 방향을 향하는 '계단', '전화', '연료탱크와 정화조, 유수조' 이런 것들입니다. 그러나 이 평범한 소재들은 저자의 예리한 눈에 파헤쳐져 그동안 그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은 내밀한 비밀을 드러내보이고 맙니다.
<고양이와 거북이>라는 글에서 저자는 집의 가치는 아름다운 실내장식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비어 있음'에 있다고 말합니다. 저자의 글을 인용하면 이렇습니다.
'…<아무 것도 없음>이야말로 내가 볼 때 집의 필수적인 출발점이다. 그 나머지는 시간이 알아서 만들어준다. 매일, 매년의 세월이 그 자취를 남겨놓게 되어 있는 것이다.…'
또 어느 집안에든 있게 마련인 열쇠와 자물쇠에 대해서도 이렇게 놀라운 상상력을 펼쳐보입니다.
'…자물쇠는 닫힘의 관념을 상기시킨다. 열쇠는 여는 행동을 상기시킨다. … 열쇠가 없는 자물쇠는 해명해야 할 비밀이요, 밝혀져야 할 어둠이요, 판독해야 할 암호이다. … 그러나 자물쇠 없는 열쇠는 여행에의 초대다. 자물쇠 없는 열쇠를 가진 사람은 … 열쇠를 들고 자물쇠를 닮은 것이면 무엇이든 다 넣어 돌려보면서 오대양 육대주를 돌아다녀야 한다.…' 이어서 저자는 열쇠를 유목민에 자물쇠를 칩거족에 비유하기도 합니다.
이런 식으로 저자의 눈에 포착된 사물은 비로소 제 이름값을 세상에 드러냅니다. <육체>라는 주제 속의 '엉덩이 예찬'라는 글도 재미있는 발상을 보여줍니다.
'… 말(馬)이 인간들에게서 예외적일 정도의 대단한 인기를 차지하면서 멋있고 민감한 동물로 찬상되고 있는 것은 전쟁과 노동에 있어서 말이 수행한 역할 덕분이라고 믿지 말라. 그까닭은 오로지 다른 동물과는 달리 매력적인 엉덩이를 가진 동물이기 때문이다… ' (육체-엉덩이 예찬)
저자의 날카로운 관찰력은 이런 글도 만들어냅니다.
'… 오래된 옛날 책의 페이지에 찍힌 갈색의 얼룩들은 아마도 독자들이 그 책을 크게 소리내어 읽다가 튀긴 침의 흔적일 것이다.…' (책)
이런 식으로 우리가 존재하는 모든 대상에 대해 정직하게 바라보면 세상이 새롭게 보일 것입니다. 저는 이 책을 읽으면서 급하게 달리는 눈길을 책 속의 글이 계속 제동을 걸면서 찬찬히 읽을 것을 요구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산문(散文)이란 운율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게 쓰는 글을 말하죠. 그런데 저는 이 책을 읽으면서 산문이란 산책(散策)하는 마음으로 읽어야 하는 글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이 글이 외국작가에 의해 쓰여져서 정서적으로 낯선 느낌을 주긴 합니다만 저는 이 책을 아주 새로운 기분으로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