핵시대의 우화
앨런 니들 / 현암사 / 199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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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의  저자는 1957년부터 미 국무성과 군비축소기관에서 핵무기 감축협상에 직접 참여했던 앨런 니들이란 분입니다.
    이 책은 우화의 형식을 빌어 현실 국제정치의 다양한 이슈들을 풍자하고 있습니다. 국제분쟁, 강대국과 약소국과의 관계, 독재자와 민중의 관계, 전쟁은 어떻게 일어나면 또 반대로 어떻게 방지되는 지... 하는 내용들이 소재로 주요한 다뤄지고 있습니다.
    책 내용을 조금 소개해드리겠습니다. '해결사 코끼리'라는 글에는 딱정벌레에게 시달리던 달팽이가 코기리에게 도움을 청하는 얘긴데요, 달팽이의 딱한 사정을 들은 코끼리가 바위 틈을 뒤집고 딱정벌레를 밟아죽이지만 뒤집혀진 바위 때문에 달팽이들은 오히려 집을 잃고 새로운 터를 찾아 떠나게 된다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멋쟁이 지도자를 뽑은 바다동물들'이란 글에서는 바다 동물들이 돛새치와 늙은 바다거북 중에서 지도자를 뽑는 얘긴데요, 바다 동물들은 잘 생기고 운동 신경이 뛰어난 돛새치를 택합니다. 그러나 이 멋진 지도자를 쫓아다니느라 지친 물고기들은 오히려 큰물고기의 밥이 되고 드디어는 멋쟁이 지도자를 버리고 바다거북을 후임자로 선출한다는 얘깁니다.
   또 '사자 흉내를 낸 양'이란 글에서는 돼지와 사슴과 닭을 잡아먹는 사자를 지켜보던 양이 하루는 사자 흉내를 내서 닭에게 달려들어 잡아먹자 다른 동물들이 기존 사회 질서를 어지럽힌 죄로 양을 사형에 처한다는 얘깁니다.
   저자의 소망이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얘기는 마지막에 있는 '두 번째 기회를 얻은 공룡'이란 글입니다. 이 책의 내용은 이런 것인데요, 중생대 공룡들 사이에 분쟁을 방지하기 위한 의회가 열립니다. 이 회의에는 거대한 공룡들이 모두 모였는데요, 그러나 회의는  오히려 난장판이 되고 대혼란이 일어납니다. 공룡들의 대소동으로 갑자기 땅바닥이 꺼져버리는데 이때 마침 원숭이처럼 생긴 작은 포유류 조물주가 그물을 쳐 이들을 구해냅니다. 그리고 모든 이들에게 새로운 기회를 줍니다. 뛰어난 두뇌를 갖고 싶어하는 울트라사우르스에겐 원자력공학자가 되게 해주고요, 꼬마공룡에겐 육군과 해군을 지휘하는 권한을 줍니다. 이런 식으로 무시무시한 턱을 가진 티라노사우르스에겐 평화운동가가, 땅바닥을 기어다니던 노도사우르스에겐 무용가가, 머리에 날카로운 뿔을 세 개나 가진 트리케라톱스에겐 풍자가가 되게 해주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다시 핵폭탄을 만들고 서로 힘의 우위를 갖기 위해 안달복달합니다. 모두가  다 죽을 줄 알면서도 배짱을 부리기 위해 끊임없이 핵폭탄을 만들고 서로를 위협했습니다. 이렇게 전쟁을 획책하다가 이들은 또다시 땅속으로 굴러떨어집니다. 그러나 조물주는 그물을 쳐 이들을 다시 한번 구해냅니다. 그리고 지상의 모든 생명체를 위태롭게 하면 더 이상은 용서하지 않겠다고 경고하고 다시 기회를 줍니다. 이들은 이번에는 평화를 이루는 타협을 해내 핵폭탄을 없애고 군비축소를 하는 것으로 끝이 납니다. 해피엔딩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우화의 끝은 해피인뎅이지만 현실 정치는 해피하지가 않습니다. 중생대.. 공룡의 몰살에 이어 핵전쟁이라는 제2의 대재앙이 눈앞을 가로막고 있는 것이죠. 이쯤 오면 이 우화집은 결코 느긋하게 읽을 수 있는 내용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제 새 천 년이 불과 반 년의 시간 만을 남겨두고 있습니다. 새 천 년의 가장 중요한 화두는 역시 평화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 우화집은 우리에게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드는 평화의 정신, 공존의 지혜를 가르쳐주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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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갈 때가 되면 돌아가는 것이 진보다
천규석 / 실천문학사 / 199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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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의 저자는 농민 천규석 씨인데요, 1938년 경남 창녕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1965년 농촌으로 돌아가 지금까지 농사를 짓고 있습니다.
    저자는 그동안 만 평 전후의 소규모 농장을 네 번째 만들었는데요, 최근에는 경남 창녕에서 자신의 평생 이념인 소농공동체를 실현하기 위한 '공생농두레농장'을 가꾸고 있습니다. 그간 천규석씨의 마음 고생은 몹시 심한 것이었습니다. 투기바람이 불었고 농촌은 이른바 구조조정으로 황폐화돼갔습니다. 저자의 꿈은 수도 없이 좌절당해야 했습니다. 저자는 이 심정을 이렇게 토로하고 있습니다.
    '…농민운동을 함께한 나보다 나이 많은 사람들은 먼저 땅 속으로 갔고, 나보다 젊은 이들은 개발 성장 광풍에 휩쓸려 다 떠나갔다. 이것까지는 견딜 만했는데 설상가상으로 함께 농장을 만들고 농사짓던 아내마저 저 세상으로 떠나버렸다. … 아내가 간 뒤 10년 동안 나는 이를 악물고 이 농장을 지키려고 했으나 뜻대로 되질 않았다. 모두가 농사 아닌 다른 일로 돈을 벌러 가거나, 민주화 운동이니 노동운동이니 한다고 도시로 더난 텅 빈 들, 텅 빈 집의 외로움과 적막을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저자가 주장하는 바람직한 농업형태는 소농공동체입니다. 소농은 상업농에 대항하는 것이고 가족농의 형식을 띠는 것인데요, 이 공생농은 지역을 중심으로 한 자립농이어야 한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입니다.
    이밖에도 농촌과 관련한 저자의 다양한 관심은 꼼곰하며 구체적으로 드러납니다. 최근 바람이 불고 있는 귀농문제에서부터 자동차 문제, 대안교육운동, 북한의 식량위기 문제, 농촌의 진정한 신명은 무엇인가, 그리고 장묘문제에 이르기까지 옹골찬 생각을 드러내고 있는데요, 그러나 저자의 주장은 대개 시류와 정면으로 역행하는 것들이어서 독자들의 마음을 안타깝게 합니다. 그러나 이런 안타까움이야말로 우리 시대가 필요로 하는 자극제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저는 이 책의 마지막 대목이 가장 감동적이었습니다. 저자는 장묘문제에 대해서 화장보다는 매장을 주장하는데요, 화장을 반대하는 이유로 화장하는데 너무 많은 연료가 쓰이고 공해가 발생하며 주검을 자연으로부터 원천 격리한다는 점을 들고 있습니다. 그러나 매장을 하더라도 돌로 묘비나 석실을 만드는 것은 역시 반대합니다. 저자가 주장하는 매장은 주검을 흙으로 돌려서 땅과 식물의 거름이 되는 방식입니다.
    그래서 저자는 이렇게 유언합니다.
    '… 아이들아, 이 밭 한구석의 저 한그루 설중매 아래 봉분 없는 평장으로 나를 묻어다오, 한송이 매화꽃이든, 한그루의 이름 모를 풀꽃이라도 좋으니 내 땅에서 나를 거듭 살게 해다오…'
    대부분의 사람들은 시류에 따라 삽니다. 그것이 가장 안전한 것이기 때문이죠. 그러나 이 책의 저자인 농사꾼 천규석 씨는 원칙에 몸을 묶고 일생을 시류와 역행해 살았습니다. 그런 점에서 그는 어떤 시인의 표현처럼 '사람들 사이의 섬'과 같은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시류에 지친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한 번 쯤은 이 섬에 내려앉고 싶을 지도 모르겠다라는 게제 저의 독후감이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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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글 긴 침묵 - 개정판
미셸 투르니에 지음, 김화영 옮김 / 현대문학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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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산문집에는 집, 도시들, 육체, 어린이들, 이미지, 풍경, 책, 죽음 등 8개의 주제 아래 저자의 예지가 번득이는 짧은 글들이 실려 있습니다.
   저는 이 책을 읽으면서 글 읽는 재미를 새삼 느꼈는데요, 제 감상을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저자의 눈에 포착된 이 글의 소재들은 특별한 것들이 아닙니다. 이를테면 <집>을 주제로 한 글들에 등장하는 '열쇠와 자물쇠', 지하실과 다락으로 서로 다른 방향을 향하는 '계단', '전화', '연료탱크와 정화조, 유수조' 이런 것들입니다. 그러나 이 평범한 소재들은 저자의 예리한 눈에 파헤쳐져 그동안 그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은 내밀한 비밀을 드러내보이고 맙니다.
    <고양이와 거북이>라는 글에서 저자는 집의 가치는 아름다운 실내장식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비어 있음'에 있다고 말합니다. 저자의 글을 인용하면 이렇습니다.
   '…<아무 것도 없음>이야말로 내가 볼 때 집의 필수적인 출발점이다. 그 나머지는 시간이 알아서 만들어준다. 매일, 매년의 세월이 그 자취를 남겨놓게 되어 있는 것이다.…'
   또 어느 집안에든 있게 마련인 열쇠와 자물쇠에 대해서도 이렇게 놀라운 상상력을 펼쳐보입니다.
   '…자물쇠는 닫힘의 관념을 상기시킨다. 열쇠는 여는 행동을 상기시킨다. … 열쇠가 없는 자물쇠는 해명해야 할 비밀이요, 밝혀져야 할 어둠이요, 판독해야 할 암호이다. … 그러나 자물쇠 없는 열쇠는 여행에의 초대다. 자물쇠 없는 열쇠를 가진 사람은 … 열쇠를 들고 자물쇠를 닮은 것이면 무엇이든 다 넣어 돌려보면서 오대양 육대주를 돌아다녀야 한다.…' 이어서 저자는 열쇠를 유목민에 자물쇠를 칩거족에 비유하기도 합니다.
  이런 식으로 저자의 눈에 포착된 사물은 비로소 제 이름값을 세상에 드러냅니다. <육체>라는 주제 속의 '엉덩이 예찬'라는 글도 재미있는 발상을 보여줍니다.
   '… 말(馬)이 인간들에게서 예외적일 정도의 대단한 인기를 차지하면서 멋있고 민감한 동물로 찬상되고 있는 것은 전쟁과 노동에 있어서 말이 수행한 역할 덕분이라고 믿지 말라. 그까닭은 오로지 다른 동물과는 달리 매력적인 엉덩이를 가진 동물이기 때문이다… ' (육체-엉덩이 예찬)
    저자의 날카로운 관찰력은 이런 글도 만들어냅니다.
  '… 오래된 옛날 책의 페이지에 찍힌 갈색의 얼룩들은 아마도 독자들이 그 책을 크게 소리내어 읽다가 튀긴 침의 흔적일 것이다.…' (책)
    이런 식으로 우리가 존재하는 모든 대상에 대해 정직하게 바라보면 세상이 새롭게 보일 것입니다. 저는 이 책을 읽으면서 급하게 달리는 눈길을 책 속의 글이 계속 제동을 걸면서 찬찬히 읽을 것을 요구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산문(散文)이란 운율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게 쓰는 글을 말하죠. 그런데 저는 이 책을 읽으면서 산문이란 산책(散策)하는 마음으로 읽어야 하는 글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이 글이 외국작가에 의해 쓰여져서 정서적으로 낯선 느낌을 주긴 합니다만 저는 이 책을 아주 새로운 기분으로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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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서운, 멋진 신세계 - 새로운 세기의 풍경들
김병익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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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학평론가 김병익 씨가 지은 '무서운, 멋진 신세계'라는 제목의 문명비평서를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이 책은 '새로운 세기의 풍경들'이란 부제를 달고 있는데요,  문명의 변환기에 선 한 인문주의자의 꼼꼼한 성찰이 실려있습니다.
    이 책의 첫 글은 저자가 핸드폰과 노트북을 살 것인가 말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저자는 새로운 문명의 이기가 주는 필요성을 느끼면서도 왜 고민까지 해가며 그 편리한 기구들의 구입을 망설이는가에 대해 의문합니다. 저자는 그 원인을 '현대의 전자문명이 주는 신속함과 정확함에 대한 저항'이라고 설명합니다. 또 이러 저항의 근원에는 '속도를 버리고 평온을 누릴 수 없을 까... 사회가 불편한 것을 편하게 견딜 수 없을까...'에 대한  안타까움이 자리하고 있음을 숨기지 않습니다.
    이렇게 노트북과 핸드폰 말고도 우리 주위에 새로운 밀레니엄을 상징하는 단어들은 많습니다. 문화가 상품이 된다거나... 생명을 복제하는 기술이 일상화될 전망이라든가... 인터넷이 세상을 하나의 단위로 엮어 종래의 개념을 일시에 뒤바꾼다거나 하는 것들이 그 실례들입니다. 저자는 새로운 밀레니엄의 우윳빛 환상을 유포하는 담론과 코드들을 예리한 눈으로 주목합니다. 그리고 그 배후를 집요하게 들쳐내는데요. 저자는 자본과 과학을 그 배후로 지목합니다. 즉, 새로운 밀레니엄의 지향이란 것은 결국 자본과 과학의 확대재생산을 위해 봉사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새로운 밀레니엄은 자본가들의 밀레니엄, 상품의 주소비자이며 이른바 N세대라고 불리는 통신세대들만의 밀레니엄으로 귀착될 수밖에 없는 것이죠. 바꾸어 말하면 우리가 얘기하는 밀레니엄도 결국은 전인류적 차원의 가치는 애초부터 결여된 채 진행되고 있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인류 정신사에서 절대적인 위치를 차지하던 문학도 결국 자본의 논리에 밀려 대중문화의 한 부속으로 전락하고 마는 것은 극단적인 실례가 될 것입니다.
    이렇게 얘기하다 보니 제 독후감이 저자의 애기보다 더 우울하게 진행되는 것 같은데요, 이제 저자의 얘기 한대목을 조금 길게 인용하면서 제 얘기를 마치겠습니다.
   '… 새로운 세기는 무한한 가능성과 희망의 시대이다. 그러나 그 꿈과 꿈의 실현에 대한 믿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새로운 세기가 두렵다, 아니 끔찍하다. 풍요하기 때문에 공허해질 것 같고, 편리하기 때문에 가벼워질 것 같으며 활기차기 때문에 동물적으로 될 것 같다. 건강해서 우리는 외로움을 즐길 수 없을 것이며 재미있기 때문에 희망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고 여가가 풍부해서 정처가 없을 것이며 정보와 지식이 너무 많기 때문에 그것들에 짓눌려서 차라리 없느니만 못한 맹추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런 때문들로 두려워지는 것은 아니다. …… 내가 두렵고 끔찍해지는 것은 이 안락하고 풍성하고 편리해진 세상에서 인간이란 존재는 어떤 위상 속에 놓여질 것인가, 지금 우리가 가치 있다고 믿어온 신념들은 어떤 자리에 던져질 것인가에 대한 어두운 예상 때문이다. 그 예상은 한번 젖어들기 시작하면 한없이 캄캄한 미로에 빠지는 듯한 절망을 안겨준다… '
    인간 존재의 문제, 인간이 지난 두 천 년 동안 소중하게 받들어온 신념과 가치의 허망한 붕괴를 딛고 일어서는 것이 자본이라면…, 자본이 헤게모니를 쥐고 인간 위에 군림하는 새로운 천년이라면 그 천년은 멋진 천 년일 수 없습니다. 그것은 무서운 천년일 수밖에 없는 것이죠. 그래서 요즘 매스컴을 통해서 우리의 눈과 귀를 간지럽히는 새로운 밀레니엄에 대한 각종 담론들을 지켜보는 김병익 씨의 우려와 걱정은 결코 노파심일 수 없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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쎄느강은 좌우를 나누고 한강은 남북을 가른다
홍세화 지음 / 한겨레출판 / 199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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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자인 홍세화 씨는 남민전 사건으로 지난 79년부터  20여년간 빠리에서 망명생활을 했는데요, 지난 95년에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라는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한국의 독자들에게도 널리 알려졌습니다.
    이번에 나온 책은 지난 책과는 조금 성격이 다릅니다. '나는 빠리의 택시 운전사'가 자전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면 이번 책은 프랑스와 한국을 비교하며 쓴 문화비평서의 성격이 강합니다. 저자는 지난 20여년 동안 한 번도 한국을 방문하지 못했지만 한국 사회를 꼼꼼이 관찰해왔습니다. 그런데 이런 저자의 눈에 비친 한국 사회에는 탁류(濁流)가 흐르고 있었습니다. 이 탁류가 풍기는 냄새는 크게 세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요, 하나는 뻔뻔스러움의 냄새이고 또 하나의 냄새는 약삭빠른 냉소이며 마지막 냄새는 절망과 체념의 냄새였습니다. 
   저자는 이렇게 한국 사회를 향해 쓴소리들을 뱉어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저자의 지적은 한국 사회를 치료할 약냄새를 풍기고 있습니다. 저자의 얘기들을 주만간산 격으로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저자의 관심은 교육, 문화, 정치 등 다양하게 펼쳐져 있습니다. '영국은 제국이고 독일은 민족이며 프랑스는 개인이다.'라는 말처럼 개성을 중시하는 프랑스 사회는 유행이라는 이름으로 획일화되는 한국 사회와는 문화적 토양이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예를 들면 사르트르는 프랑스의 대표적 지성이었지만 알제리의 독립운동을 지원하기 위해 프랑스 경찰의 눈을 피해 무기 자금을 빼돌리는 반역행위를 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그를 향해 당시 드골 대통령은 '그도 프랑스야'라는 말로 사르트르를 포용했습니다. 이와 비교할 때 한국 사회는 조금의 차이로 서로를 배척합니다. 이른바 '왕따현상'이란 게 그 대표적인 예죠.  '너는 우리가 아니야'라는 태도가 이 왕따현상에 숨어있는 것이죠. 또 프랑스 사람들은 말하기, 토론을 좋아합니다. 그런데 이 말하기는 남의 사생활을 도마 위에 올려놓고 즐거워하는 수다가 아니라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여행 등 무궁무진한 주제를 다루는 것입니다. 그래서 프랑스 입시제도에서 철학이 필수과목으로 되어있는 것은 프랑스의 자랑이기도 합니다. 또 저자는 우리나라 일각에서 제기되고 있는 영어공용화론에 대해서도 신랄하게 비판합니다. 영어를 배우는 것이 그 나라의 경쟁력을 배양한다거나 세계화에 절대적으로 기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미국 의회에서 영어로 연설한 우리 대통령과 일본에서 일본어로 연설한 우리 총리의 모습은 씁쓸한 우리의 자화상이기도 합니다.    이런 점에서 프랑스는 한국 사회의 반면교사로서 훌륭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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