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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생초 편지 - MBC 느낌표 선정도서 ㅣ 야생초 편지 2
황대권 지음 / 도솔 / 2002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집 근처의 공원을 거닐다가 잠시 걸음을 멈추고 눈을 들어 주변의 나무들을 둘러본다. 플라타나스, 소나무, 은행, 자귀, 목련, 산수유.... 그러다가 문득 고개를 숙여 발 밑의 이름 모를 풀들을 바라본다. 사람의 정다운 손길을 받지 못한 생명들이다. 스스로 자라고 이름도 알려지지 않아 사람들이 잡초(雜草)라고 부르는 것들이다.
한 잡초학자는 가장 이상적인 잡초를 이렇게 정의했다고 한다. '...쓸데없이 크고, 생장속도가 빠르고, 못생겼고, 쓸모가 없고, 꿀이 없고, 야생적인 가치가 없고, 숫자가 많고, 쉽게 번식하고, 맛이 없고, 가시가 많고, 알레르기를 일으키고, 독성이 있고, 역겨운 냄새를 내고, 잎이 금방 무성해지고, 재배하기 까다롭고, 제초제에 내성이 강하고, 뿌리가 울퉁불퉁하다...' 이렇게 사람들은 저 스스로 가만히 있는 이름 모를 풀들에게 온갖 나쁜 말을 다 갖다 붙였다. 과연 잡초는 쓸모 없고 뽑아버려야 할 생명인가?
1985년 미국에서 유학하던 중 학원간첩단 사건에 연루돼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1998년 마흔 네 살이 될 때까지 13년 2개월 동안 감옥에서 청춘을 보냈던 황대권 씨는 한평의 작은 공간에서 잡초와 만난 얘기를 우리에게 들려준다.
'...지구상에 지금까지 알려진 식물의 종류는 약 36만 여종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들 중 인간이 재배해서 먹고 있는 것은 약 3천 종 가량이 된다고 합니다. 그러면 35만에서 3천을 빼면 숫자가 어떻게 됩니까? 이것들을 전부 잡초라고 없애버리는 그런 우를 지금 인류가 범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어째서 잡초입니까? 그래서 저는 잡초라는 말을 안 씁니다. 대신에 저는 야초(野草)라는 말을 쓰고 있어요...'
이 책의 제목-<야생초 편지>-에는 저자의 이런 깨달음이 담겨 있다. 저자는 수감생활에서 얻은 병(만성 기관지염)을 고치기 위해 야초들과 처음 만났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야초에 대한 인식은 점차 확장되었다. 도감을 통해서 이름을 익히기 시작했고 어렵게 씨를 구해 야생화들을 키웠다. 사회참관(장기수들을 교도소 담밖으로 데리고 나가 세상 구경을 시켜주는 것)이 있는 날이면 교도소 담 밖에서 자라는 들풀의 씨를 구해 키웠다. 이런 과정을 통해 교도소 담 안에는 황대권 씨가 정성껏 가꾸는 'Kwon Field'가 형성되기에 이르렀고 여기엔 백여 종의 야생초가 제 존재를 뽐내며 자라게 되었다.
저자에겐 야초는 쓸모없는 풀이 아니었다. 음식으로도 훌륭한 것들이었다. 명아주, 쇠비름, 쇠별꽃, 뽀리뱅이, 부추, 제비꽃, 조뱅이, 민들레, 씀바귀, 질경이, 방가지똥 등 온갖 풀을 뜯어모아 된장에 무쳐먹는 '들품모듬'과 '모듬풀 물김치'를 만들어 먹었다. 십전대보잼이란 것도 있다. 이것은 민들레 뿌리에 냉이, 도라지, 시금치 뿌리를 푹 고은 뒤 고구마, 호박, 마늘, 사과, 인삼가루 등을 함께 졸여서 만든 특별음식이다.
이 책의 또 다른 즐거움은 저자가 야생초를 그린 그림들이다. 도감을 보고 그린 그림이 아니라 수감생활 중 운동시간을 이용해 틈틈이 화단 곁에 쭈구리고 앉아 꼼꼼이 그린 그림들이다. 저자의 야생초 그림은 한때 미술대학 입학을 생각해보았을 정도로 뛰어난 실력의 갖춘 저자의 작품이다. 게다가 거미와 사마귀, 청개구리의 관찰을 통해 깨달아진 저자의 통찰력 있는 사색도 이 책이 독자에게 주는 즐거움이다.
<야생초 편지>는 저자가 교도소 생활을 하면서 작은 엽서를 통해 세상에 전달한 옥중일기이며 구도의 기록이다. <야생초 편지>는 생태주의를 가르치는 21세기의 뜻깊은 옥중기이다. 이제 우리도 발 밑 풀들에 대한 명상의 시간이 필요하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