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구려 여인숙의 밑바닥 인생들 앞에 한 노인이 찾아온다. 노인은 죽지 못해 하루하루를 버티는 이들에게 귀를 기울이고 더 나은 삶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독려한다. 반신반의하던 사람들은 점차 그의 희망 섞인 말에 기대를 걸고 꿈꿔왔던 삶을 살겠다고 다짐한다. 이후 노인은 사라지고 희망에 가득 차 있던 이들은 냉혹한 현실에 직면해 꿈꾸던 삶과 현실의 간극 (間隙) 만큼의 충격을 안고 이전보다 더 밑바닥으로 추락한다.



 "때론 희망도 어떤 이들에겐 독(毒)이 된다."



서위 작가님의 <파랑새>를 읽으며 고리끼의 희곡 '밑바닥에서'가 떠올랐다. '밑바닥에서'는 희망과 절망에 관한 이야기이다. 처절한 현실을 하루하루 힘겹게 견뎌내고 있는 이들에게 미래에 대한 희망 섞인 말은 약이 될까? 아니면 독이 될까? 이는 결국 희망의 진정성의 문제로 귀결된다. 이들의 마음에 희망을 심어주는 것은 큰 비용이 소요되지 않는다. 희망에 부푼 이들이 현실과 꿈의 간극을 재확인하고 더 깊은 심연으로 침몰해도 그에 대한 책임은 전적으로 그러한 꿈을 꾸고 그러한 삶을 살아온 그 자신에게 있다. 희망은 이들에게 절실한 것이지만 현실에 기반하지 않은 장밋빛 희망은 더 깊은 절망으로 이끄는 '독(毒)'이 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진정한 절망은 '헛된 희망'을 동반한다.



<파랑새>는 현실 감각을 잃어버린채 감금되어 살아가던 소녀가 우연히 파랑새를 만나며 삶의 한줄기 희망을 발견한다는 이야기다. 파랑새를 보면서 소녀는 두려움을 극복하면서 온전한 자신의 의지만으로 자유를 향한 선택을 한다. 용기를 가지고 내린 선택의 대가로 소녀는 상상 속에서 그리던 낙원의 풍경들과 나른한 햇살의 따뜻함, 시원한 바람, 새들의 지저귐을 느낀다. 하지만 소녀는 온몸을 꿰뚫는 통증과 물리적인 무력감도 함께 느낀다. 마지막 대목에서 소녀는 파랑새를 향해 그녀의 의지대로 걸음을 옮기지만 그건 그녀의 정신적인 해방일뿐 그녀가 내린 선택의 대가로 그녀의 육체는 또다른 구속과 속박을 겪는 것은 아닐까? 과연 그녀가 내린 선택은 자유를 향한 '약'이었을까? '독'이었을까?



파랑새 – 브릿G (britg.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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탕수육의부먹찍먹논쟁의 기원은 무엇일까? 여러가지설이 있지만 가장 설득력 있는 설은 탕수육을 배달하게 되면서배달 도중에 튀김이 눅눅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고기튀김과 소스를 따로 포장하여 배달하기 시작한 것이부먹찍먹 둘러싼 기나긴 전쟁의 서막이 되었다는 것이다. , 탕수육이 배달음식으로 탈바꿈하면서부터 논쟁이 시작되었다는 것인데 근거로 중식조리사자격증 실기시험의 탕수육 규정에 탕수육은 소스를 부어먹는 요리라고 정의되어 있고, 중국집을 방문하여 탕수육을 주문할 경우 소스가 부어져서 나오거나 소스와 함께 볶아져 나온다는 것을 들고 있다.



부먹파와 찍먹파 각각 나름의 이유가 존재한다. 물론 그렇기 때문에 논쟁이 종식되지 않는것이겠지만... 부먹파들은 소스가 튀김에 스며들어 고기와 어우러지는 맛과 식감을 좋아하며 이것이 탕수육이란 요리의 본연의 존재형태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또한 찍먹시에 여러 사람들의 입과 침이 닿은 젓가락과 튀김이 반복적으로 소스 그릇에 담궈진다는위생상의 이유를 내세우기도 한다. 반면에 찍먹파들은 바삭한 튀김에 소스를 가볍게 입힌 맛을 선호하는 부류다. 따라서, 소스를 부어 버리면 튀김이 과도하게 눅눅해져 고기튀김의 바삭한 식감이 사라질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부먹찍먹논쟁은 짜장면이냐 짬뽕이냐처럼 별개의 요리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는 문제가 아닌 특정음식의 섭취방식에대한 논쟁이기 때문에 사소하고 소모적인 논쟁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녹차백만잔 작가님의 <탕수육 전쟁의 서막에 대하여> 사례처럼 부먹이 과연 죽을죄에 달할 만큼 중요한 문제냐믄 것이다. 하지만 한국의부먹찍먹논쟁과 유사한 논쟁이 세계 각국에서 끊임없이 벌어지는 것을 보면 이를 사소하고 시시콜콜한 문제로만 치부할수도 없는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호주에서는 핫도그를 만들 양파볶음을 소시지 위로 올리느냐, 아니면 소시지 아래로 까느냐에 관해 총리까지 논쟁에가세할 정도로 열을 올리고 있고, 영국에서는 밀크티를 만들때 우유를 먼저 넣느냐 홍차를 먼저 넣어 먹느냐로 논쟁중이다. , 미국에서는 시리얼을 먼저 붓고 우유를 붓느냐, 아니면 우유를 붓고 시리얼을 붓느냐로 각을 세우고, 일본에서는미소 국에 밥을 말아먹는냐, 아니면 밥에 국을 부어 먹느냐로 입씨름을 벌이고 있다.



물론 음식을 조리하고 섭취하는 데에는 정답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각자의 취향과 방식에 따라 즐기는 것이 정답이라면 정답일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유사한 형태의 수많은 논쟁 중에서도 탕수육의부먹찍먹논쟁이 유독 중요한 이유가있다. 탕수육은 여러 사람들이 함께 먹는 경우가 많은 음식이기 때문에 상호간의 취향이 충돌하는 경우가 발생할수 있기때문이다. 여럿이서 함께 먹을 다수의 동의를 구하지 않고 바로 소스를 부어버리면 찍먹을 선호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게 되어서 결국 <탕수육 전쟁의 서막에 대하여>처럼 돌이킬 없는 사태가 일어날수도 있다. 결국부먹찍먹논쟁은 상대방의 취향에 대한 존중과 배려의 문제로 귀결된다. 글을 읽는 그대, 혹시 부먹파인가? 그리고누군가와 같이 탕수육 한접시를 마주하고 있는가? 그러면 잠시 마음을 진정시키고 상대방의 의중을 먼저 파악하는게 어떨까?



탕수육 전쟁의 서막에 대하여 – 브릿G (britg.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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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한 소소한 일 하나하나의 무한한 집적이 나라는 인간을 이러한 형태로 만들어놓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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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종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코로나19)가 기승을 부리는 2020 2 김설단 작가님의 <붉은방> 만났다코로나 바이러스는 치사율 자체가 높고 본격적인 증상이 나타나기도 전에 사망에 이르는 <붉은방> 그것과는 다르지만원인 모를 전염병에 대한 두려움과 병의 확산으로 국가의 치안과 경제가 파탄에 이를 것을 염려하는 소설의 분위기가 2020년의 코로나사태와 상당부분 닮아 있었다.



마스크와 손세정제의 값이 폭등하고출근길에 마주치는 사람들이 모두 마스크를 착용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질병관리본부에서 발표하는 감염자의 수는 연일 증가하는 것을 보면서 새삼 전염병의 위력을 실감하게 된다전염병에 대한 두려움은 우리가 그것에 대해 무지하다는 것에서 기인한다정확한 발병원인을 모르고치료방법을 제시하지 못하며병의 전파속도와 범위를 몰라 확산을 방지하기 위한 대책이 부재하는 동안 대중의 불안과 공포는 극대화된다.



<붉은방> 이러한 상황을 스토리에  녹여내고 있다전염병에 대응하고자 작전지역에 투입된 전문가 집단인 ‘붉은손들이 차례로 희생되고상황을 통제하는 대대장이 자신만의 방식을 고수하는 과정에서 병이 확산되고 공포와 불안이가중되는 상황이 소설상에  묘사되어 있다하지만짧은 분량 200 원고지 450매)상의 한계 때문인지 스토리 전개가 단선적인 것은 조금 아쉬운 부분이다긴장의 고저와 장단을 조율하는 다양한 사건  돌발변수다채로운 캐릭터 설정이 있었다면 보다 입체적이고 완성도 높은 구성이 가능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사실 김설단 작가의 소설은 <저수지의 시체들> 통해서 먼저 접했었다. <저수지의 시체들> 논두렁 하드보일드 스릴러를 표방하는 작품으로 ‘무령이라는 가상의 촌동네를 배경으로 일어나는 범죄를 겪으며 변화하는 등장인물들의 감정의결을 섬세하게 조각해나가는 인상적인 소설이었다따라서 <붉은방> 접하면서도 이에 대한 막연한 기대감이 있었는데<붉은방> <저수지의 시체들>과는 달리 풍경이나 감정에 대한 묘사 보다는 추리소설 본연의 속도감을 살리는데 주력하고 있었다뒤늦게 작가의 말을 보며 깨달은 사실은 <붉은방> 거의 20 전에 씌여진 작가의 초기(?)작이라는 사실이다스타일을 변화시키기 위해 작가가 얼마나 많은 고민과 노력을 해왔을지 짐작이 된다작가의 다음 작품도 기대가 된다.



https://britg.kr/novel-group/novel-about/?novel_post_id=25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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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는 항상 유토피아를 꿈꿔왔다. 유토피아는 단순한 공상에 그칠 수밖에 없는 것일까? 꿈을 간직하고 희망을 노래하는 것은 더 깊은 절망으로 이끄는 결과를 초래할 수밖에 없는 것일까? 하지만 우리는 희망하고, 실패하는 반복되는 과정을 거친 이후에야 비로소 진정으로 희망을 꿈꿀 수 있다. 현실의 디스토피아에 대한 대안으로 유토피아가 제시되고 디스토피아로 변질된 유토피아를 극복하기 위해 또 다른 유토피아를 추구하면서 인류는 발전해왔다. 앞으로도 거듭되는 실패를 감내하는 과정을 거치며 인류는 진보해나갈 것이다. 이상향은 혼자서 완성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타인에게 강요하면서 달성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공동의 삶을 위해 희생하면서 또, 자발적으로 희생할 용의가 있는 이들이 모여 거대한 결속을 이루면서 이들이 함께 꾸는 꿈은 유토피아가 된다.




서위 작가의 <쥐들의 세상>은 절망에 쌓여 있는 어두운 세상의 일면을 그리고 있다. 물론 각자의 상황과 가치관에 따라 절망이기도 희망이기도 한 것이 세상이다. 소설 속 한 쌍의 연인도 서로를 진정으로 이해하지 못하고 세상을 다른 시각으로 바라본다. 한 사람을 감히 안다고 말하는 것, 또 이해한다고 말하는 것이 얼마나 오만하고 단편적인 생각인지 다시 한 번 깨닫게 된다. 비극적인 이야기의 결말을 보며 어쩌면 더 큰 결속을 위해서는 기억과 이해 보다 망각과 용서가 필요한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말의 충격을 극복할 수 있는, 인간의 새로운 존재방식과 이상향에 대한 가능성도 여기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함께 하는 삶을 위한 자발적 희생과 기억을 이겨낸 용서는 유토피아를 향하는 길이 될 수 있다. 똑같은 풍경이라 할지라도 고독 속에서 홀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과 누군가와 함께 바라보는 것은 분명 다를 것이므로... 저 빛나는 한줄기 달빛을 더러운 쥐들이 우글거리는 하수구를 벗어날 수 있는 ‘희망의 빛’이 아닌 자신을 감시하는 ‘절망의 빛’으로 받아들여야 했던 그녀의 상황이 아프게 다가온다. 행복했던 기억이 있고, 또 함께 할 누군가가 있다면 그것들을 기반으로 어떻게든 힘을 내줄 수는 없었을까?




https://britg.kr/novel-group/novel-about/?novel_post_id=104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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