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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3 1 운동 새로 읽기 [개정판] - 이 땅의 젊은이들을 위한
3.1문화재단 지음 / 예지(Wisdom) / 2017년 4월
평점 :
한반도 내에서 적대적으로 공존하는 하나의 민족, 두 개의 한국, 이 민족적 비극의 기원은 무엇일까? 오늘날 북한이 왜 악의 축 (axis of evil), 악당국가 (rouge state)로 불리게 되었고, 남한은 반공주의 속에서 군사 쿠데타에 이은 군부독재를 겪게 되었을까?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일제 강점기에 우리 민족이 겪은 고통스러운 기억과 그 이후의 역사적 사실들을 객관적으로 냉철하게 바라보아야 한다. 이는 민족적 비극의 근원인 동시에 올바른 현실인식을 기반으로 한 통일 민주국가 수립이라는 민족사적 과제 달성의 단초이기 때문이다.
하나. 오늘 우리들의 이 거사는 정의, 인도, 생존, 존엄을 위하는 민족적 요구이니,오직 자유의 정신을 발휘할 것이요, 결코 배타적 감정으로 치닫지 말라.
하나. 최후의 일인까지. 최후의 일각까지 민족의 정당한 의사를 쾌히 발표하라.
하나. 모든 행동은 질서를 최우선으로 하여, 우리들의 주장과 태도를 어디까지나 광명정대하게 하라.
3·1 운동 기미독립선언서 - 공약 삼장 中
집회 횟수 1,548회, 집회 인원 2,046,938명, 사망자 7,509명, 부상자수 15,849명, 수감자수 46,306명. 박은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 기록된 3·1운동의 규모와 피해상황이다. 일본의 폭압적 진압도 독립을 향한 우리 민족의 열망을 막을수는 없었다. 만세운동의 열기는 서울뿐만 아니라 경기도, 황해도, 평안도, 강원도, 충청도, 전라도로 퍼져나갔다.
“내 손톱 빠져나가고, 내 코와 귀가 잘리고, 내 손과 다리가 부러져도 그 고통은 이길 수 있사오나, 나라를 잃어버린 그 고통만은 견딜 수가 없습니다 나라에 바칠 목숨이 오직 하나 밖에 없는 것만이 이 소녀의 유일한 슬픔입니다.”
천안 아우내 장터에서 만세 운동에 참여해 순국한 유관순 열사가 남긴 말이다. 역사란 과거에 일어난 단편적 사건들의 단순 합이 아니라 시대를 구성하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 요소들의 총체인 동시에 이들이 빚어낸 유기적 결합물이라고 할 수 있다. 3·1 만세운동의 진정한 주역은 어쩌면 민족과 국가를 위한 진심을 보이고 사라져간 민중들, 이름 없이 사라져간 수많은 유관순들이었다. 민중이란 특정 계급이나 계층을 지칭하는 것이 아닌 국가와 사회를 이 루며 역사를 구성하는 유동적인 계급, 계층의 연합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민중의 대다수를 구성하는 학생, 노동자, 농민, 상인들은 당시 시대상황을 정확히 꿰뚫어보지는 못했지만, 민족의 앞날을 위해 모든 것을 걸고 행동하였고, 이를 통해 독립을 이룰 수 있다고 믿었다. 이들은 역사의 물줄기를 바꾸는 위대한 힘의 존재기반은 민중에게 있으며, 이는 핍박과 분열, 갈등이 빚어낸 시대의 소음 속에서 일순간에 타오른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오늘날의 3·1 운동이 가지는 의미를 생각할 때 떠오르는 하나의 그림이 있다. 바로 윌리엄 터너의 명화 <전함 테메레르>다.
영화 <007 스카이폴>에는 영광스러웠던 과거를 뒤로하고 나이가 들어 노쇠한 스파이 제임스 본드가 한 점의 그림을 응시하고 있는 장면이 등장한다. 쓸쓸한 뒷모습을 여과 없이 노출하며 그가 바라본 그림은 윌리엄 터너의 <전함 테메레르>였다. 테메레르는 절체절명의 위기순간에 조국을 구하고 영국의 전성기를 이끈 영웅이었다. 1805년 넬슨 제독이 이끄는 영국 해군은 나폴레옹의 유럽제패를 저지하고 자국을 수호하기 위해 트라팔가 해전에 임한다. 전장에서 테메레르는 위기에 처한 영국의 기함 (flagship) 빅토리호를 구하고 두 척의 배까지 나포하는 전적을 올린다. 이를 기반으로 한 트라팔가 해전의 승리는 19세기 영국을 '해가 지지 않는 제국'으로 만들었다.
윌리엄 터너의 그림에 표현된 테메레르는 찬란하게 빛났던 트라팔가에서의 모습이 아닌 시대의 흐름을 이기지 못하고 구시대의 유물로 쇠락한 모습이다. 역사의 한 페이지를 빛낸 존재였지만 더 이상 자신의 힘으로 동력을 만들어내지 못하는 덩치 큰 범선은 작은 증기선에 의해 예인되며 해체되기 전 마지막 항해를 하고 있다. 은퇴의 기로에 선 스파이는 그림 속 범선을 보며 세월의 무게와 시대의 변화를 읽었던 것일까? 인간의 고통을 직접적으로 표현하지 않고서도 이렇게 처절하고 애잔한 느낌을 표현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해서 새삼 놀라고 감동받았던 기억이 있다.
윌리엄 터너와 그의 대표작 <전함 테메레르>는 '보이지 않는 손'으로 유명한 경제학자 아담 스미스를 대신하여 2020년부터 영국 20파운드 지폐의 새로운 모델이 될 예정이라고 한다. 또한 <전함 테메레르>는 BBC에서 선정한 가장 위대한 영국 그림으로 꼽히기도 했다. 터너와 그의 작품 <전함 테메레르>가 영국인들에게 이토록 오랫동안 사랑 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트라팔가 해전 승리후 런던에는 트라팔가 광장이 조성되었고 광장의 중앙에는 승장 넬슨 제독의 동상이 세워졌다. 넬슨이 승선했던 기함 빅토리호는 포츠머스 해군기지에 영구 보존되고 있다. 반면 1838년 영국 해군은 테메레르호를 런던의 운수업자에게 팔아넘겼고 배를 산 운수업자는 배를 해체하기로 결정했다. 템즈 강가로 산책을 나간 터너는 이 위대한 선박의 마지막 항해를 그림으로 남겼던 것이다.
트라팔가에서 테메레르는 넬슨 제독의 생명을 구하진 못했지만 조국 영국을 구했다. 테메레르의 빅토리호 구원이 없었다면 19세기 영국은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이 아닌 저물어가는 일몰이었을지도 모른다. 윌리엄 터너는 시대를 빛내고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지는 영웅에 대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찬사를 보냈다. 모두가 기억하는 넬슨 제독, 빅토리호도 있었지만 우리에겐 테메레르도 있었다고… 그것은 자랑스러운 우리의 과거였고 우리의 현재를 있게 한 또 하나의 영웅이라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존재에 대한 최대의 찬사는 그를 오래도록 기억해주는 것이다.
우리는 1919년 고통스럽고 핍박 받는 현실 속에서도 시대의 요구를 외면하지 않고 응답했던 사람들, 그들의 정신, 투쟁을 기억해야 한다. 그것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죽음까지도 기꺼이 감수한 그들에 대한 최소한의 도리라고 생각한다. 또한 이 과정에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나라와 민족을 배반한 이들이다. 그들은 일제에 협력하여 부귀영화를 누리고 집안을 일으켰으며, 해방후에도 단죄되지 않고 살아남아 우리 사회의 주류를 형성했다. 진정한 역사 바로잡기는 바로 이 지점에서 시작해야한다고 생각한다.
역사의 뒤안길로 스러져간 이름 없는 민중들, 수많은 유관순들을 역사는 어떻게 기록하고 있을까? 아니 그 이전에 역사의 페이지에 그녀의 몫도 있을까? 우리는 윌리엄 터너가 되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그들을 기억해주어야 한다. 그들의 정신과 투쟁, 숭고한 희생은 <전함 테메레르>가 되기 충분하다. 그들은 자랑스러운 우리의 과거였고 우리의 현재를 있게 한 또 하나의 영웅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의 삶을 희생해가며 세상의 진보를 위해 고독한 걸음을 내디딘 이름 없는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의 다른 이름이기 때문이다.
2016년 10월 광화문을 밝힌 촛불은 2017년 4월까지 이어졌고, 오히려 전국 150여개 시군으로, 전세계 31 개국 71개 도시로 퍼져나갔다. 누군가는 촛불은 바람이 불면 꺼진다고 했지만, 1,700만여개의 빛은 대한민국 헌정 사상 첫 대통령 파면을 이끌어내며 찬란하게 빛났다. 독일의 공익정치 재단 '프리드리히 에버트 재단'은 박근혜 퇴진을 위한 촛불집회에 참여한 우리 국민을 2017년 '에버트 인권상' 수상자로 선정했다. 특정 국가의 국민이 수상자로 선정된 것은 상이 제정된 이래 최초의 사례였다. 재단은 민주적 참여권의 행사와 평화적 집회의 자유는 생동하는 민주주의의 필수적 요소이기 때문에 집회에 참여한 모든 분들을 대상자로 선정했다고 밝혔다. 3·1 운동의 정신은 아직 살아있다. 우리는 자랑스러운 그들의 후손으로서 꺼지지 않는 촛불로 세상의 진보를 이루어나아가고 있다. 쉽사리 변하지 않는 사회에 절망하지 않고 신뢰하고 연대하며 협력과 공생의 질서를 만들어나가는 것, 그것이 비록 사소하고 미약한 성공에 불과하다고 할지라도 '사람'과 '삶'이 빛나는 사회로 나아가는 동력은 그러한 곳에서 나온다고 나는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