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없는 여자의 여덟 가지 인생
이미리내 지음, 정해영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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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회에서 여자로 살아가는 일, 그 공포, 피로, 당황, 놀람, 좌절의 연속에 대한 인생 현장 보고서“

 


이는 조남주 작가의 소설 <82년생 김지영>의 뒷 표지에 쓰여있는 문장이다. 소설은 82년생 여성 중 가장 흔한 이름을 가진 주인공 '김지영씨'가 대한민국에서 살아가는 30대 여성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직간접적으로 경험했을 법한 사건들을 다루고 있다. 소설의 주인공이 '김지영'이 아닌 '김지영씨'인 이유는 '김지영씨'가 한국의 에코세대 여성들을 대표하고 있기 때문이다. 작가는 지극히 평범한 “김지영씨”의 평균적인 삶을 각종 기사와 통계자료를 통해 객관적으로 재현해냄으로서 독자들이 이를 동시대를 살아가는 여성들의 보편적 체험이자 삶이었음을 비로소 인식할 수 있게 한다. 그럼으로서 그 보편적인 일상이 얼마나 차별적이고 불합리한 것이었는지 깨닫게 해준다. 이 소설이 많은 이들에게 지지와 공감을 얻을 수 있었던 이유는 우리 주위에 보편적인 평범한 삶을 살아가며 아픔과 상처를 겪었던, 또 겪고 있는 수많은 ‘김지영’들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소설 <82년생 김지영>이 "한국사회에서 여자로 살아가는 일, 그 공포, 피로, 당황, 놀람, 좌절의 연속에 대한 인생 현장 보고서"라고 한다면, 이미리내 작가의 <이름 없는 여자의 여덟 가지 인생>은 “일제 강점기, 해방, 한국전쟁과 분단으로 이어지는 엄혹한 시절을 거치는 동안 살아 남기 위해 여덟 가지 형태로 삶의 모습을 바꿔가면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세상을 향해 온기 어린 손을 건냈던 한 여성의 삶에 대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인간의 삶이란 참으로 알 수 없는 것이다. 정말 그렇지 않은가? 안정된 상태라고 느끼는 순간, 기다렸다는 듯 미지의 것이 느닷없이 닥친다. 이렇게 질서가 무너진 혼돈 속에서 우리 삶은 현실부정과 절망, 미래에 대한 두려움에 잠식되어 간다. 삶은 질서와 혼돈으로 점철되어 있다. 안정된 질서 속에 갑자기 혼돈이 찾아오기도 하는 반면, 모든 것을 상실한 듯한 절망적 순간에 새로운 질서가 나타나기도 한다. 삶의 길을 걸어간다는 것은 질서와 혼돈의 경계 위에 있다고도 말할 수 있다. 삶에서 인생의 의미가 빛을 잃어가고, 절망과 두려움이 고개를 드는 순간과 마주칠 때 우리는 무엇에 의지하며 세상을 살아가야 할까?


이미리내 작가는 그 어느 시대보다 변곡점이 많았던 한국 현대사의 큰 물줄기 속에서 주변부로 밀려나 희생과 착취를 강요 받았던 여성들을 무대 위로 올려 그들의 삶을 조명하고, 이를 통해 삶의 다양한 형태를 조망하면서 우리는 삶을 어떻게 대하고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해 독자들과 대화를 시도한다. 소설은 인생의 노년기를 보내고 있는 요양원의 노인들을 대상으로 부고 쓰기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는 화자로부터 시작된다. 어느 날 그녀는 괴상한 외모와 '묵'이라는 생소한 성을 가진 할머니를 만난다. 인생을 대변할 수 있는 단어 세개를 골라달라는 요양사의 요구에 '묵 할머니'는 자신의 인생을 설명하기에 세 개의 단어는 너무 적고, 요양사가 지적했듯이 아홉개는 너무 많은 듯 하니 여덟로 타협하자고 말한다. 그녀의 인생을 채우는 단어들은 '노예, 탈출 전문가, 살인자, 테러리스트, 스파이, 연인, 어머니"였고, 그 단어들이 내포하고 있는 삶을 설명하기 위해 '묵 할머니'는 긴 이야기를 하기 시작한다.


그녀의 삶은 역사의 주변부에서 이방인으로 차별과 억압을 받았던 삶이었고, 수많은 부조리와 불합리를 경험한 삶이었다. 역사적 굴곡이 없었다 하더라도 남성중심주의 문화 속에서 ‘거인’의 어깨 위에서 인류의 지적 전통을 자연스레 체득하며 세계를 조망해온 남성에 비해 그 혜택의 범주에서 벗어난 채 끊임 없이 자신을 단속해야 했던 것이 그 시절 여성들의 삶이었다. 하지만 두 번의 전쟁과 분단된 조국이라는 역사적 소용돌이를 거치며 그녀의 삶은 삶의 기반 자체가 무너지고, 주체적인 삶이 불가능한 절망적인 상황에 놓이게 된다. 작가는 한 인간이 자신이 가진 아이덴티티로부터 일방적인 추방과 부정을 겪으며 정체성이 분열되는 과정, 나아가 이로 인해 빚어진 세대에 걸친 삶의 일그러짐을 세밀하게 그려내었다. 작가가 최고령 탈북자 중 한 명인 이모할머니, 고(故) 김병녀 님의 인생에서 영감을 밝힌 이 소설은 사실에 기반을 두고 있어 더 실감 나게 느껴진다. 하지만 다시 조명된 그녀의 삶은 피해자, 희생자로 점철된 삶이 아니었다. '묵 할머니'가 제시한 단어들처럼 그녀는 때로는 살인자, 테러리스트, 스파이로 살았고, 때로는 평범한 한 가정의 배우자이자 한 아이의 어머니로 살았다.


"하루가 멀다 하고 빨갱이 사냥과 반역자 사냥이 반복되었고 날마다 날선 전쟁의 칼날을 양쪽에서 휘둘러 마을 사람들을 닥치는 대로 도륙했다.나는 무력한 희생자가 되기를 거부했다. 나는 여전히 마음 한구석에 살아 있는 엄마와 여동생과 상봉하겠다는 철없는 꿈을 꾸며 남으로 향했다." (p.86)


거스를 수 없는 역사의 물줄기 속에서도 인간은 자신이 믿는 사상과 신념에 따라 저마다의 속도와 방향으로 걸음을 내딪는다. 그렇다면 '묵 할머니'는 이념 갈등 속에서 자신의 신념에 따라 삶을 선택하고, 그 선택의 대가로 기구한 삶을 살았던 것일까? 이념은 현실의 순수한 열망이 빚어낸 결정체다. 각각의 사상에는 열망의 실현을 약속하는 희망의 메시지가 담겨져 있다. 욕망을 꿰뚫고 있는 시대적 사상들에 인류가 매혹 당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다. 사상의 발전사는 인류의 욕망과 희망의 변천사이기도 하다. 사상은 ‘인류를 위해서’, ‘인류에 의해’ 탄생하였지만, 사상 중에서는 ‘인류의 사상’이 되지 못하고 스러져간 것들이 많았다. 사상이 ‘현실’의 일면만을 반영하거나, ‘인간’을 담지 못하고 변질되고, 때론 시대의 흐름에 적응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묵 할머니'는 이념이나 자신의 신념을 관철하기 위함이 아닌 사랑하는 연인, 가족과 함께 하는 평범한 삶을 위한 선택을 했다. 분단을 가져온 정치나 이데올로기 따위에는 조금도 관심이 없고, 설령 적이라 해도 '얄루'의 안녕을 바랬던 소년의 마음처럼 그 시절의 많은 민중들이 이러한 평범한 삶을 택했다.


"가난허고 무식헌 것들이 믿고 의지헐 디 웁는 판에 빨갱이 시상 되먼 지주 다 처웁애고 그 전답 노나준다는디 공산당 안헐 사람 워디 있겄는가요. 못헐 말로 나라가 공산당 맹글고, 지주들이 빨갱이 맹근당께요." (소설 태백산맥 中)

 


조정래 작가의 태백산맥은 사상의 생몰(生沒)을 잘 표현하고 있다. 태백산맥의 무대인 벌교는 당시 오만의 읍민들 중 팔할이 농민이었고, 그 농민들 중에서 구할이 소작인이었다. 벌교뿐만이 아니라 해방 당시 한국은 전 농가의 86%가 소작농이었고, 전농지의 64%가 소작지였을 정도로 농업은 핵심적 경제기반이었고 인구의 대부분이 농업에 종사하고 있었다. 갑오농민혁명, 일제하의 소작쟁의에 이어 토지제도의 모순이 당시 주요 사회갈등의 원인으로 등장한 이유는 여기에 있다. 민중의 대다수를 구성하는 농민들은 지식을 통해 현실의 모순구조를 인식하고 있지는 않았지만 그들의 삶을 통해, 체험을 통해 그 문제상황의 핵심을 꿰뚫고 있었고, 시대 상황 속에서 이데올로기 대립 속으로 흘러 들어갔다. 개인적 동기는 사회갈등으로 구체화되었고 이는 다시 집단적 이념으로 확장되었다. 소설 속 문서방의 한 맺힌 외침은 이를 잘 표현하고 있다.


우리는 “묵 할머니”를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우리 주변의 수많은 ‘김지영들’은 일상의 부조리 앞에서 눈을 감고 입을 닫고 살아야 했다. 기득권 가해자들이 작은 것 하나를 잃을까 전전긍긍할 때 피해자인 여성들은 삶의 전부를 잃을 각오를 해야 했기 때문이다. 또한 그들이 하고 싶은 말을 한다고 하더라도 세상은 변하지 않았고 오히려 피로와 보복, 무력감 속에서 괴로워해야했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가 지나온 과거와 현재 속에도 “묵 할머니”를 떠올리게 하는 인물은 존재한다.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시대에 체념하거나 순응하지 않고 다양한 형태로 자신의 목소리를 그러한 삶을 지향했던 이들은 분명 있었다. 세상이 변하지 않는 이유는 어쩌면 가시화되고 권력화된 악 때문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의 악의 없는 무심함, 선의로 포장된 무례가 누적된 결과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나는 한 아이의 아버지로서 앞으로 딸이 살아갈 세상은 여성들에게 더 많은 기회와 선택지가 주어지길 바란다. 딸이 성장해나가면서 가장 많이 받게 될 질문 중 하나는 꿈과 장래희망에 대한 것일 것이다. 아이에게 꿈이 무엇인지 나중에 커서 뭐가 되고 싶은지 묻는 건 상당히 흔하고 자연스러운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질문이 담고 있는 의미는 딸이 성장해가면서 '너는 도화지와 같아서 어떤 그림으로든 완성될 수 있단다. 너의 무한한 가능성을 맘껏 펼쳐보렴'에서 "이제는 무슨 일을 하며 살 것인지 정해야 하지 않겠니?"로 바뀌어 갈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여자인 네가 그걸 한다는 게 가능할까?"로는 변질되지 않길 바란다.


“그리하여 우리는 조류를 거스르는 배처럼 끊임없이 과거로 떠밀려 가면서도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So we beat on, boats against the current, borne back ceaselessly into the past.)” - <위대한 개츠비> 中에서 –


소설 속에서 '얄루'의 안녕을 진심으로 바랬던 소년은 잿빛 실안개에 감싸인 달을 지그시 바라본다. 분단국가, 이념갈등 등 인간들의 드라마에는 관심도 없이 고요히 떠 있는 보름달을 바라보면서 소년은 자신이 사라지고 서로에게서 멀어지거나 혹은 그냥 변하는 동안 달은 항상 똑같이 아름답고 무심할것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이미리내 작가의 <이름 없는 여자의 여덟 가지 인생>을 읽으며 <위대한 개츠비>의 마지막 문장이 떠올랐다. 상실과 결핍, 몰이해라는 인간의 한계와 그러거나 말거나 상관없다는 듯 무심하게 흘러가는 세계 속에서 저마다의 속도와 방향으로 한 조각의 진실과 삶의 의미를 구하려 애쓰는 '인간'과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세계’를 조망하는 시선이 서로 닮아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 소설을 통해 거스를 수 없는 역사의 물줄기 속에서 차갑고 어두운 현실을 견뎌내며 자신이 믿는 지향점을 따라 뜨거운 발걸음을 내디뎠던 삶들, 그리고 이념의 소용돌이 속에 매몰된 이념과 상관없이 평범한 삶을 지향했던 수많은 삶들이 다시 조명 받고 위로 받을 수 있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그들의 삶을 집어삼킨 이념이란 것의 탄생도 결국 인간에 대한 지극한 애정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사실에서 위안을 받을 수 있길 바래본다. 그들의 삶을 기억하는 누군가의 기억 속에서 '유령'의 삶이 아닌 삶의 온기가 느껴지는 '인간'으로 살아가길 진심으로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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