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저드 베이커리 (양장) - 제2회 창비 청소년문학상 수상작 소설Y
구병모 지음 / 창비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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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인간의 예측 가능한 영역을 벗어나 자리해 있다. 우리가 삶에 대해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건 무엇일까? 시작이 있고, 끝이 있다는 것? 우리는 삶에 대한 진실의 한 조각이라도 얻기 위해 간절히 매달리지만, 진실은 현실과 이상의 경계 언저리에서 표류하며 잡힐 듯, 잡힐 듯 잡히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삶에 대해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그렇게 많지 않다. 인간의 삶은 평범한 사건들이 빚어낸 기적이고 역사다. 사소하고 시시콜콜한 삶의 순간순간들이 누적되어 이루어진 인생은 누구에게나 값지고 귀한 것이다. 그런 순간순간들이 모여서 시간과 역사를 이루고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개별적 세계가 빚어지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이별, 아픔, 상처, 억센 슬픔의 순간들을 겪게 된다. 하지만, 당시에는 감당할 수 없을 것만 같았던 상실과 결핍의 경험들도 치유의 시간을 거치고 나면 곧 일상이 되어 인생의 한 부분으로 녹아든다.

 


삶이 궤도를 이탈하였을 때 우리는 어디에서 다시 살아갈 이유를 찾을 수 있을까? 삶을 완전히 통제하여 온전히 행복한 상태에 도달하는 것이 가능한 것일까? 아니 행복을 논하기 전에 우리의 삶 속에서 완벽히 통제가 가능한 영역이 존재할 수 있을까? 우리는 우리에게 일어날 일을 완벽히 통제하고 선택하지 못한다. 다만 이미 발생하여 현실이 되어버린 상황에 대해 대처하는 방식을 선택할 수 있을 뿐이다. 우리는 저마다 삶이 던지는 질문에 답하며 세상을 살아간다. 우리를 만드는 것은 경험 그 자체가 아니라 그 경험에 반응하는 태도와 신념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태도와 신념들이 결국 우리가 삶을 대하는 자세가 되고, 행복에 대한 가치를 만드는 것일 것이다.

 


영화 <매트릭스>에서 모피어스는 매트릭스는 진실을 보지 못하도록 눈을 가리는 세계를 의미하며, 이는 모든 곳에 존재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네오에게 두 가지 형태의 알약을 건넨다. 파란 알약은 비록 허구로 이루어진 세계이지만 그러한 현실에 안주하며 살 수 있는 약이고, 빨간 알약은 참혹하고 고통스럽지만 거짓을 꿰뚫고 불편한 진실을 바라볼 수 있는 약이다. 네오는 단 한 번의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의 순간에 빨간 알약을 삼키고 진실을 택한다. <위저드 베이커리>는 성장 소설이지만, 고통과 상처, 수없이 밀려드는 갈등과 난관을 극복하고 극적인 결말을 맺는 성장소설의 문법을 거부한다. 마치 매트릭스의 빨간 알약을 삼키고, 마법과 판타지의 프리즘으로 들여다 본 리얼리즘의 세계라고나 할까? 삶을 살아가면서 우리는 갈등을 극복하고 행복에 도달해 있을 때보다는 때론 환경에 순응하고, 때론 맞서고 극복하면서 삶을 견디고 이어 나가는 측면이 많다는 걸 깨닫는다. 정글과 같은 삶을 살아가며 피할 수 없는 상실과 결핍, 아픔들은 자연스럽게 삶의 한 부분으로 녹아든다. 이런 측면에서 인생을 살아가는 간다는 것은 어쩌면 조금씩 퇴보하고 소멸해가는 과정인지도 모른다.

 


갓 구운 빵과 같은 온기가 혈관을 타고 번져 나갔다.” (p. 115)

 


우리는 저마다의 역사와 존재 이유를 가진 하나의 섬이다. 서로의 고유한 존재방식, 상실과 결핍의 기억들은 우리 각자를 섬으로 만든다. 하지만, 섬은 단절된 듯 보이지만 연결되어 있는 이중적 성격을 띠는 특별한 공간이다. 수면 위 드러난 부분을 기준으로 보면 섬은 단절된 공간이지만 드러나지 않은 수면 밑으로 섬과 섬들은 단단하게 연결되어 있다. 서로의 존재 방식을 인정하고, 이해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이는 타인과 삶의 온도를 맞춰가는 일이며, 상대적 성숙의 시간을 요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함께 살아갈 수밖에 없다. 삶의 흔적, 아픔을 매개로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고 이해하고 위로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한 과정을 거치며 우리는 삶의 고통을 무조건적으로 거부하거나 부정하지 않고 서로의 온기를 느끼며 진정한 위로의 경험을 얻는다. 초월적인 존재를 통해서도 치유 받을 수 없는 오직 사람에게서만 구할 수 있는 마음이 존재하는 것이다. 밝은 곳에서는 어두운 곳이 보이지 않지만, 인간은 서로 간에 존재하는 적당한 어둠 속에서 희미한 빛과 온기로 서로를 알아볼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영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살인마는 안톤 시거는 우연히 만나는 사람들을 살인의 대상으로 선택하고 동전 던지기를 통해 살인 여부를 결정한다. 이는 개인의 의지와 노력만으로는 극복할 수 없는 삶의 우연성을 상징하는 것이다. 동시에 '전부를 걸어야만 전부를 얻을 수 있다.'는 안톤 시거의 말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한 번씩 주어진 삶에 임하는 진지한 탐구 자세와 의지를 상징하는 것이기도 하다.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에 있어 모범답안은 존재하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이 삶이 던지는 시험에 제대로 답을 하지 못하고 어려움을 겪는 이유는 각자가 다른 시험지를 받았다는 사실을 미처 알지 못했기 때문이 아닐까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를 깨닫지 못한 채 타인의 답을 모방하거나 존재하지 않는 모범답안을 찾다가 실패하게 된다. 우리는 우리에게 부여되고 스스로 계발한 재능을 토대로 세상이 던지는 질문에 각자의 답안을 작성하면 되는 것일 뿐이다. 내가 그랬듯이 다른 독자들이 이 소설을 읽으며 현실의 삶을 견디는데 도움을 받았으면 한다.

 


삶이 던지는 질문에 답을 해야 할 때 무조건적인 부정이나 외면, 현실을 도외시하는 만능 답안 제시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질문의 의도를 파악할 수 있게 때론 거칠고 날이 서있다 하더라도, 다소 고통스럽고 마주하기 힘든 진실을 대면하게 해주는 것이 도움이 될 수 있다. 그러한 과정을 거치며 우리는 삶을 무조건적으로 거부하거나 부정하지 않고 흐릿하게 잡힐 듯 떠오르는 희망에 대해, 삶의 온기에 대해 느낄 수 있는 것 아닐까? 고단한 삶 속에서 예기치 못한 순간에 만나게 된 카스텔라의 폭신한 감촉과 찬바람 속에서 온기 어린 위로를 건네는 대보름 빵처럼 말이다. 어쩌면 우리가 그토록 잡고자 했던 불분명한 현실의 경계를 넘어 표류하고 있는 삶에 대한 진실의 조각은 이것 아닐까? 과거와 현실을 딛고 미래를 가능하게 하는 진실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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