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정규직 특별잡지 꿀잠 - 10개 언론사 현직 기자 20명과 사진작가들이 기록한 2016년 노동
비정규직 특별잡지 '꿀잠' 편집부 엮음 / 꿀잠 / 2016년 9월
평점 :
절판




세상을 보고 무수한 장애물을 넘어 벽을 허물고 더 가까이 다가가

서로를 발견하고 느끼는 것이것이 바로 삶 (LIFE)의 목적이다.

 


이는 잡지 라이프(Life)의 모토이다정확히 표현하자면 영화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가 실제 라이프의 창간사이자 모토인 '라이프를 통해 세상을 보라'를 영화적으로 변형시킨 것이다라이프는 20세기를 대변하는 잡지였다전성기 시절 1,300만부가 넘는 발행부수와 900만장에 이르는 사진 아카이브, 500여명에 이르는 당대 최고의 사진 작가진 등 라이프지는 필름 시대의 아이콘이었으며 '포토 저널리즘'을 개척한 사진잡지였다공황세계대전냉전을 거친 1930년부터 1960년대까지는 글의 장황함 보다는 사진의 강렬함을 원했던 시대였다. 1960년대 미국 전체 잡지판매액의 14%를 차지할 정도로 자타공인 최고의 저널이었던 라이프는 TV와 인터넷의 등장으로 인해 쇠락하기 시작했다. 73년에 라이프지는 주간지 시대를 마감하였고월간지와 특별호 체제로 명맥을 유지해오다가 2007년 3월 종이 잡지로서 마지막 호를 발간하고 온라인 잡지로 전환되었다.



영화 속에서 42세의 '소심남' 월터는 잡지사 라이프에 다니는 평범한 미혼의 직장인이다입사 후 16년 동안 그가 맡은 업무는 필름을 현상하는 것이었다글 보다 한 장의 사진에 담긴 힘을 믿었던 잡지사 라이프에서 현상부서는 핵심부서였지만 디지털 사진이 보편화되면서 필름 사진은 퇴색되어 갔고수작업으로만 가능했던 인화기술 또한 디지털 보정기술로 대체되었다. 시대의 흐름 속에서 라이프는 종이 잡지를 폐간하고 온라인 잡지로 거듭나기 위해 구조조정에 들어가게 되고경영진은 마지막으로 발간될 종이 잡지의 표지를 전설적인 사진작가 숀 오코넬의 사진으로 결정한다그러나 '삶의 정수'를 담고 있다는 말과 함께 숀이 월터에게 보낸 필름은 어디에도 없었고 월터는 필름을 받기 위해 숀을 찾아서 모험을 떠난다.



영화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는 위대한 잡지 라이프에 바치는 헌사다온갖 고난과 역경 끝에 숀을 만나게 된 월터는 필름의 행방에 대해 묻지만 숀은 자네가 깔고 앉고 있잖아진정 아름다운 것들은 관심을 바라지 않아.라고 답할 뿐이다숀의 말은 결국 삶의 정수는 모험과 개척을 통해서 쟁취하는 것이 아님을오히려 음지에서 묵묵히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한 일상 속에평범하고 지루하기 때문에 더 고귀하고 위대하게 느껴지는 일상의 삶 속에 있음을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다우여곡절 끝에 완성된 마지막 표지에 담겨진 의미는 진솔한 삶의 가치를 만들어 가기 위해 같은 시공간에 머물며 함께 노력해왔지만 화려한 축제 뒤편에 가려진 숨은 공로자들그들의 헌신에 표하는 경의와 존경이었다그들의 헌신과 노력은 히말라야 고산지대에 서식하며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아 실재하지 않는 유령으로 불리지만실존 동물 중 가장 아름답고 신비로운 동물로 꼽히는 눈표범과 닮아 있다진정 아름다운 것은 관심을 바라지 않는다는 숀의 말은 아름다운 것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관심과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의미도 될 수 있기 때문이다.



2013년 말에 개봉된 이 영화의 전 촬영과정은 디지털이 아닌 필름 카메라로 진행되었다고 한다또한 실제 현장을 방문해 촬영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여 세트 촬영이나 컴퓨터그래픽 등을 거의 사용하지 않고 아이슬란드와 히말라야의 대자연을 그대로 카메라에 담았다영화를 보면서 디지털화가 진행되면서 사라져간인간의 온기가 느껴지던 아날로그적인 것에 대한 아련한 기억들이 되살아났다그리고 내 삶 속에 녹아 들어있는 수많은 잊혀지고 사라져간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다른 형태와 이름으로 여전히 내 곁에 남아 있는 잡지와의 추억이 떠올랐다학창시절의 근간이 된 음악잡지 핫뮤직과 영화잡지 키노항상 비장한 마음으로 구입하지만 작심삼일로 끝나는 경우가 많았던 굿모닝 팝스와 입이 트이는 영어 시리즈들한창 몸만들기에 빠져 있을 때 쿨가이 콘테스트까지 나가게 만든 멘즈헬스최근에 구독하고 있는 계간 문학동네와 Axt를 비롯한 문학잡지들에 이르기까지 잡지는 내 삶을 구성하는 하나의 영역으로 존재하고 있었다.



행복은 잡지 안에 있다.(Happiness in Magazines.)

 


브릿팝의 아이콘으로 추앙 받았던 밴드 블러(Blur)의 기타리스트 그레이엄 콕슨의 5번째 솔로앨범 제목이다내 취향이 온전히 고려되어 있는 한권의 잡지는 나에게 나의 영웅이 가장 화려하게 빛나던 시절의 이야기를 들려주었고최신 트렌드를 온몸으로 표현해내고 있는 잡지광고 속 모델들의 미소에서는 향긋한 행복이 느껴졌다그레이엄 콕슨의 말처럼 이곳에 행복이 없다면 대체 어디에 행복이 있단 말인가?

 


2018년 서울국제도서전에서는 <잡지의 시대>라는 기획전이 열렸다잡지의 시대라는 이름이 무색하게도 인산인해를 이룬 유명 출판사의 부스에 비해 너무나 한산했다이곳에서 최근 독자들의 선택을 받고 있는 전문 에디터들이 만든 다양하고 독특한 형태의 잡지들을 만날 수 있었다기획전과 더불어 진행된 라운드테이블 분전에서는 편집장들의 생각도 들어볼 수 있었다.



기존의 잡지는 광고주와 독자를 안정적으로 확보할 수 있던 풍요로운 시대의 잡지다지금은 더 이상 풍요로운 시대가 아니라는 사실을 절감하며 보스토크가 태어났다우리는 매호 새로운 주제로 새로운 독자를 만나는 것을 꿈꾼다구성디자인컨셉표지와 종이에 이르기까지 언제나 새로움을 모색하고 있다.
잡지 보스토크 박지수 편집장 -

 


과거의 잡지는 발행부수가 중요했다잡지는 판매수익만으로는 유지될 수 없었고 또 다른 수익원인 광고를 필요로 했다하지만 광고 유치는 많은 부수로 대표되는 인지도와 영향력이 있어야 가능했다메인 스트림 잡지가 '매스 저널리즘'을 지향하면서 대중의 흥미를 유발하며 빠르게 소비되는 '스낵 컬처'가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이다잡지를 폐기 처분하더라도 일단은 많이 찍어내야 했고잡지의 중요한 목적 중 하나는 광고에 실린 물건을 사게 만드는 것이 되었다기자나 편집자를 꿈꿨지만 잡지를 계속 유지시키기 위해선 사업가가 되어야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토로하는 버진그룹 회장 리차드 브랜슨의 말은 기존의 잡지에서 광고가 차지하는 비중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최근 광고와 자본으로부터 독립을 추구하면서 컨텐츠에 온전히 집중하는 형태의 독립잡지들이 많이 늘어나고 있다독립잡지는 타겟 독자층을 명확히 하고그들이 공감할만한 주제를 선정하여 심층적이고 다각적인 시선으로 분석된 컨텐츠를 제공한다다수 대중을 위한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선택한 독자층이 필요로 하는 깊이 있는 정보를 전달하는 것이다자신만의 취향을 추구하고 관심 있는 주제에 대해 깊이 알고 싶어 하는 독자들이 많아지면서최근의 잡지는 단순히 읽을거리가 아니라 자신을 대변해주는 브랜드가 되었다인터넷이라는 지식의 바다 속에서 통찰력 있는 전문 컨텐츠를 제시하는 잡지는 네비게이션으로정보의 큐레이터로 기능한다이슈를 회고적인 관점에서 다루는 느린 저널리즘인 최근의 잡지는 정보백화점이 아닌 정보미술관을 지향하고 있다.



이렇게 변화하는 잡지 가운데서도 유독 기억에 남는 잡지가 있다. 10개 언론사의 기자 20명의 재능기부로 탄생한 비정규직을 위한 특별잡지 꿀잠이었다지상에서 가장 따뜻한 잡지라는 슬로건처럼 꿀잠은 노동자들의 삶과 그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며 잡지 판매수익금 또한 비정규 노동자의 꿀잠을 위한 쉼터 건립기금으로 사용하고 있다.

잡지 꿀잠의 첫 페이지를 넘기며 나도 모르게 가슴 깊은 곳에서 뜨거운 것이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잡지 꿀잠의 첫 페이지는 잡지 속 화려한 광고에 익숙해진 내게 어쩌면 무심코 넘겨질 페이지였는지도 모르겠다잘 차려입은 여성 모델들의 모습은 충분히 눈길을 끌만한 것이었지만별다른 특별한 것이 없는 광고라고 생각했고광고의 대상 또한 내 관심 분야가 아닌 여성복이었기 때문이다페이지를 넘기려는 손가락을 주저하게 만들었던 건 여성모델의 사진 아래에 남겨진 글이었다.



아름다워요또렷하고 밝게 빛납니다오늘 당신의 하루 어땠나요?
어둡군요흐릿합니다누구인지왜 거기에 있는지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청소를 하고 계셨군요깨끗해야 하는 것을 닦느라 더러워진 당신 손안의 걸레를 이제야 보았습니다오늘 당신의 하루 어땠나요?



문구를 읽고 나서 다시 사진을 보았다사진은 스튜디오에서 광고를 위해 촬영된 것이 아닌 LED조명으로 환하게 밝혀진 대형 옥외광고물을 찍은 것이었다그리고 사진 속에는 문구를 보고나서야 비로소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이 또 하나 있었다모델의 밝은 미소를 부각시켜주는 조명판을 더 빛나게 하기 위해 청소 아주머니가 걸레로 닦고 있는 모습이 불빛에 비춰진 실루엣으로 남아 있었던 것이다자본주의의 꽃이라는 광고는 이윤추구를 위해 사람들의 눈을 잡아끌며 상냥한 인사를 건네고 있는 반면 사회의 버팀목인 노동은 어둠 속에 가려져 있었다.



어두운 곳에서는 밝은 곳이 잘 보이지만 밝은 조명 안에서 바라보면 어두운 부분이 잘 보이지 않는다어쩌면 우리는 특정부분만을 강조하는 스포트라이트로 인해 땀의 눈물과 소중함을 잊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노동으로 일군 삶이야말로 자랑스럽고 떳떳해야 하고그 땀의 웃음이 밝고 아름답게 빛나야 하는 것은 아닐까노동이 웃음이 되는 세상노동이 보람이 되는 세상을 간절하게 꿈꾼다는 잡지 꿀잠의 존재이유와 지향점을 나는 첫 페이지를 넘기며 깨달았다한 장의 사진을 통해 잡지가 가지고 있는 정체성을 이 보다 더 잘 표현할 수 있을까잡지 꿀잠은 내게 '당신의 노동은 안녕한가?'라고 묻고 있었다.




'편의점의 코리도라스'라는 제목의 김별아 작가의 에세이도 가슴을 울렸다코리도라스는 우리에게 익숙한 금붕어 보다는 조금 비싸지만기타 열대어 중에서는 가장 싼 어종이다싸다는 건 쉽게 구할 수 있고또한 쉽게 갈아 치울 수 있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열대어를 처음 길러보신다면 코리도라스죠그놈은 어항 바닥에서 생활하면서바닥에 남아 있는 먹이까지 깨끗하게 처리하거든요물을 갈지 않아도 안 죽고먹이를 안줘도 바닥을 헤집고 다니며 스스로 해결하지요온순하고 부지런해서 정말 키우기 쉽고 청소도 잘하는 어종이예요고마운 쓰레기 처리 담당이죠.




작가는 도시의 깊은 검은 어둠 속에서 덩그렇게 홀로 빛나는 편의점을 어항에 비유한다편돌이라 불리는 편의점의 비정규직 아르바이트생은 그 어항 속에서 코리도라스가 된다자야 할 때 깨어 있어야 하고 제 때 식사도 하지 못하는 그들은 유통기한이 지나 폐기대상인 제품으로 배를 채운다사람이 음식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음식이 폐기 대상이 되어 사람에게 선택을 강요하는선택의 주체가 역전된 아이러니한 상황이다갈비찜과 간장게장 등 고급 요리의 이름으로 포장된 인스턴트 제품은 저렴한 가격으로 진짜 맛을 시늉한다.




편의점은 80년대 후반 소비 트렌드의 변화를 주도하며 등장했다드라마 속의 연인들은 최신 먹거리가 질서정연하게 정돈된 편의점에서 데이트를 즐겼고샐러리맨들에게 편의점은 창업 아이템 1순위였다하지만 요즈음의 편의점은 을()들의 공간을 대표한다편의점을 주로 찾는 고객들은 컵라면으로 허기를 달래는 취업준비생들과 소주 한잔으로 고단한 하루를 마무리하는 노동자들이다최저임금 인상을 둘러싼 논쟁은 졸음과 진상손님들에게 시달리는 아르바이트생들과 임대료와 인건비카드 및 가맹점수수료에 허리가 휘는 점주간의 을()과 을()의 전쟁으로 불린다.



코리도라스들은 편의점이라는 도시의 어항에서 서로를 마주한다.
나는 코리도라스 팬더너는 코리도라스 스터바이...



기술의 발전은 무인 편의점까지 등장시켰다인공지능을 탑재한 결제 로봇이 안면인식을 통해 고객을 관리하고 대화와 상품추천결제 등의 고객 응대 서비스까지 제공한다어항 밖으로 밀려난 코리도라스들은 어디로 가게 될까문득 평창올림픽에서 화제가 된 로봇 물고기가 떠올랐다로봇 물고기는 중앙처리장치가 센서들의 신호를 읽어, 3등분된 몸을 연결하고 있는 모터에 신호를 보내 몸체와 지느러미를 순차적으로 움직여 살아 있는 물고기의 유영을 흉내 낸다스스로 장애물을 인지할 수 있고, 1회 충전만으로 하루 이상의 활동이 가능하다고 한다.



코리도라스는 영역싸움을 하지 않고여러마리씩 무리를 지어 뭉쳐다녀요.



디지털화되어 가는 세상 속에서도 우리는 워크맨과 카세트테이프로 음악을 듣는 히어로에 열광하고 대중들은 다시 LP판을 찾는다폴라로이드와 필름 카메라의 느림의 미학이 다시 주목받고여전히 종이에 매끈하게 인쇄된 잡지들을 읽는다최신 디지털 기술이 우리의 가슴을 울리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 가슴 속에는 초월적인 존재를 통해서도 치유 받을 수 없는오직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에서 구할 수 있는 따스함의 영역이 여전히 존재하기 때문이다다양한 형태와 모습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코리도라스들의 삶에 꿀잠이 깃들길 간절히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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