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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한 행복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21년 6월
평점 :

<완전한 행복>은 정유정 작가가 <7년의 밤>, <28>, <종의 기원>으로 이어지는 악의 3부작을 마무리하고, 인간의 내밀한 욕망이란 새로운 화두를 던진 욕망 3부작의 문을 여는 소설이다. <완전한 행복>이란 제목처럼 소설은 완전한 행복을 이루기 위해서 불행의 요소를 제거하는 방식을 선택한 한 나르시시스트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소설에서 신유나는 행복은 어떠한 결함도 결핍도 없는 가족의 무결, 즉 완전성을 이룬 상태라고 확신하고, 이를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노력한다.
삶은 인간의 예측 가능한 영역을 벗어나서 자리해 있다. 우리가 삶에 대해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건 무엇일까? 시작이 있고, 끝이 있다는 것? 우리는 삶에 대한 진실의 한 조각이라도 얻기 위해 간절히 매달리지만, 진실은 현실과 이상의 경계 언저리에서 표류하며 잡힐 듯, 잡힐 듯 잡히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삶에 대해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그렇게 많지 않다. 인간의 삶은 평범한 사건들이 빚어낸 기적이고 역사다. 사소하고 시시콜콜한 삶의 순간 순간들이 누적되어 이루어진 인생은 누구에게나 값지고 귀한 것이다. 그런 순간 순간들이 모여서 시간과 역사를 이루고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개별적 세계가 빚어지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이별, 죽음과 같은 억센 슬픔의 순간들을 겪게 된다. 하지만, 당시에는 감당할 수 없을 것만 같았던 상실과 결핍의 경험들도 치유의 시간을 거치고 나면 곧 일상이 되어 인생의 한 부분으로 녹아든다.
삶을 완전히 통제하여 온전히 행복한 상태에 도달하는 것이 가능한 것일까? 아니 행복을 논하기 전에 우리의 삶 속에서 완벽히 통제가 가능한 영역이 존재할 수 있을까? 우리는 우리에게 일어날 일을 완벽히 통제하고 선택하지 못한다. 다만 이미 발생하여 현실이 되어버린 상황에 대해 대처하는 방식을 선택할 수 있을 뿐이다. 우리는 저마다 삶이 던지는 질문에 답하며 세상을 살아간다. 우리를 만드는 것은 경험 그 자체가 아니라 그 경험에 반응하는 태도와 신념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태도와 신념들이 결국 우리가 삶을 바대하는 자세가 되고, 행복에 대한 가치를 만드는 것일 것이다.
“행복한 순간을 하나씩 더해 가면, 그 인생은 결국 행복한 거 아닌가.”
“행복은 뺄셈이야. 완전해질 때까지. 불행의 가능성을 없애가는거.”
<완전한 행복>에서 차은호와 신유나는 부부이지만, 완전히 대비되는 행복관을 가지고 있다. 행복을 이루는 공식은 덧셈에 가까울까? 뺄샘에 가까울까? 어떤 것이 더 나은 행복관인지에 대한 질문은 의미가 없다. 행복이라는 가치 자체가 상대적인 것이고, 각자가 처한 상황에 따라 그 답이 달라지는 질문이기 때문이다. 또한, 행복을 추구하고 행복해지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인간의 본능에 가까운 것이지만, 행복이라는 지향점을 바라보는 시각은 누구나 다르고, 그 지향점에 도달하기 위한 방안에 대한 선택도 누구나 다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왜 신유나는 행복에 도달하지 못했을까?‘는 질문은 의미가 있지 않을까?
“반달늪에 뭐가 있니?”
“가보시면 알아요.”
“길에서 벗어나면 안돼요.” (p. 41)
소설에서 ’반달늪‘은 주요 사건들이 발생하는 장소이자 소설 전개상의 중요한 복선으로 작용하고 있다. 소설의 전반부에서 반달늪으로 가는 길은 한정되어 있는 것으로 묘사된다. 반달늪은 지름길이나, 샛길로 가지 못하고, 가는 과정에서도 잠깐이라도 길을 벗어나 다른 장소를 향해도 안된다. 이는 불행의 가능성을 제거하는 것이 행복으로 가는 유일한 길임을 확신하는 신유나의 잘못된 행복관에 대한 상징이다. 또한, ’반달늪‘이라는 이름은 ’보름달‘처럼 충만한 상태가 되지 못하고 항상 상실과 결핍, 파멸이 예정되어 있는 신유나의 자기애에 대한 집착과 행복에 대한 강박의 결과를 상징하고 있다. 또한, 신유나의 행복관은 과정이 아닌 결과에만 주목한다. 삶이라는 속성을 토대로 생각해 보면 행복은 결과가 아닌 과정에 가깝다. 그 모든 변수를 통제하고 반달늪에 도착한다고 하더라도 그 자신조차 그 결과에 만족하지 못하고, 반쪽짜리의 결과를 만들어 내기 위해 무시했던 과정들이 자신은 물론 자신 주변의 삶들까지 불행하게 만들 것이다. 욕망, 행복에 대한 맹목적인 집착이 타인을 불행하게 만들고, 종국에는 타인의 삶을 파괴하게 만들 것이다.
“습지에 가실 거예요?”
“어쩌면 그래야 할지도 몰라.”
“그럼 샛길로 가야 해요. 샛길은 제가 잘 알아요.” (p. 494)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서 일련의 사건을 겪은 ’지유‘는 반달늪을 원래 부르던대로 부르지 않고 ’습지‘로 부른다. 또한, 습지로 가는 것도 모두에게 알려진 길 보다 샛길로 가길 권한다. 인생을 살아가는 간다는 것은 어쩌면 조금씩 퇴보하고 소멸해가는 과정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인간이 죽음을 예정하고 있는 유한한 존재라는 것과 그러한 운명에도 불구하고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주체적으로 개척하는 것은 존재와 소멸의 문제와는 또 다른 차원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삶을 무조건적으로 거부하거나 배척하지 않고 진지하게 탐구해나가는 것, 자신의 생각을 타인에게 강요하지 않고 타인과의 온도를 맞춰 나가는 것, 또 그러한 과정에서 나름의 대안과 답을 찾아가는 것이 우리가 삶을 바라보는 자세, 행복을 맞이하는 자세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행복을 추구할 권리는 모든 사람에게 있지만, 행복을 추구하면서 또는 행복의 기준이나 지향점, 행복한 상태에 도달하기 위한 수단 등으로 인해 우리는 타인의 행복에 영향을 미칠수 있고, 결국 타인의 행복에 일정부분 책임을 갖게 된다는 것을 <완전한 행복>은 우리에게 일깨워주고 있다.
“행복은 덧셈이 아니야. 행복은 뺄셈이야. 완전해질 때까지. 불행의 가능성을 없애가는거. 나는 그러려고 노력하며 살아왔어.” (p. 1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