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부터의 내일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93
하라 료 지음, 문승준 옮김 / 비채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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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드 보일드'"원래 계란을 완숙하다라는 뜻을 내포한 형용사이지만, 계란을 완숙하면 더 단단해진다는 점에서 전의(轉義)하여 비정 ·냉혹이란 뜻의 문학용어가 되었다. 개괄적으로 자연주의적인, 또는 폭력적인 테마나 사건을 무감정의 냉혹한 자세 또는 도덕적 판단을 전면적으로 거부한 비개인적인 시점에서 묘사하는 수법을 의미한다. 불필요한 수식을 일체 빼버리고, 신속하고 거친 묘사로 사실만을 쌓아 올리는 이 수법은 특히 추리소설에서 추리보다는 행동에 중점을 두는 하나의 유형으로서 하드보일드파를 낳게 하였고, 셜록홈즈를 창조한 코넌 도일 류의 계획된 것과는 명확하게 구별된다.


 

하드 보일드라는 장르의 거의 대부분을 창조한 작가라면 흔히 레이먼드 챈들러가 거론된다. 코난 도일이나 아가사 크리스티로 대표되는 고전 미스터리의 우아한 세계에서 탈피하여 피와 땀으로 점철된 어두운 뒷골목, 정의가 아닌 이익과 탐욕이 동력이 되어 움직이는 거친 남자들의 세계를 그린 작가이다. 51세의 늦은 나이에 빅슬립 (Big Sleep)으로 데뷔한 챈들러는 평생 미완성작 한 편을 포함해 단 8편의 소설만 남겼다. 석유회사의 간부 (부사장까지 승진했다)로 일하다가 알콜중독으로 해고를 당한 챈들러는 직장에서의 은퇴 이후 생활고를 겪다가 아내의 격려로 소설을 쓰기 시작해 소설가로서 큰 족적을 남기게 된다.

 


영미권 하드 보일드 문학에 레이먼드 챈들러가 있다면 일본에는 하라 료가 있다. 일본의 추리소설은 영미권과 함께 양대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그 규모가 상당히 큰 편이다. 하라 료는 데뷔작 <그리고 밤은 되살아난다>를 통해 챈들러의 필립 말로에 비견되며 이후 작가의 분신이 되는 사립탐정 사와자키를 창조해내었다. 이후 하라 료는 탐정 사와자키 시리즈물인 <내가 죽인 소녀>로 나오키상을 수상하는 등 일본 하드보일드 문학의 대표 기수로 떠올랐다. 하라 료는 여러 면에서 챈들러와 유사하다. 본업을 따로 가지고 있다가 40대의 다소 늦은 나이에 작가로 데뷔했다는 점, 하드 보일드의 거장으로 불리지만 그 명성에 비해 그리 많은 작품을 발표하지 않은 대표적인 과작 작가라는 점에서 그렇다. 이번 소설도 04년 탐정 사와자키 시리즈의 시즌 2를 알린 <어리석은 자는 죽어야 한다> 이후 무려 14년 만에 출간되었다. 오랜 팬으로서 작가 하라 료와 사와자키의 귀환이 너무나 반가웠다.

 


 

"니시신주쿠 변두리 쇠락한 거리에 있는 '와타나베 탐정사무소'를 찾아오는 건 의뢰인만이 아니었다. 낡은 문을 노크만 하면, 기억을 잃은 사격 선수도, 성전환 수술을 받은 대필 작가도, 탐정을 지망하는 불량소년도 얼마든지 들어올 수 있었다. 1억 엔을 빼앗긴 폭력단 조직원도, 나를 죽이고 싶어 하는 악덕 경찰도 나타났다." (p. 9)

 


 

여전히 '와타나베 탐정 사무소'를 지키고 있는 사와자키에게 어느 날 한 신사가 찾아와 사건의뢰를 한다. 그는 자신이 저축은행의 지점장임을 밝히며, 대출이 예정되어 있는 요정집 여주인의 뒷조사를 부탁한다. 하지만, 사와자키는 조사에 착수한지 얼마 되지 않아 그 여주인이 이미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 사실을 알리고자 의뢰인을 찾지만, 의뢰인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고, 이에 사와자키는 그가 일한다는 저축은행을 방문하게 된다. 하지만, 폐점 시간이 다 되어갈 때 은행에 갑자기 복면을 쓴 2인조 강도가 난입하며, 사와자키는 복잡한 사건의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 들어가게 된다.

 

 


소설 <지금부터의 내일>은 큰 두 개의 에피소드를 큰 축으로 복잡한 사건들이 뒤엉키며 독자들에게 즐거움을 선사하고 있다. 그 하나는 앞서 소개한 탐정사무소를 찾아온 신사가 의뢰한 이미 죽은 여인의 뒷조사이고, 다른 하나는 그 의뢰를 수사하는 과정에서 사와자키가 겪게되는 은행강도 사건이다. 그 일련의 사건을 겪는 동안 사와자키의 오랜 팬들이라면 익숙한 형사와 야쿠자들이 등장도 참 반갑다. 하라 료의 '하드 보일드''사와자키'를 통해 시작되고 완성된다고 생각한다. 이는 그가 사건에 중심에 서 있는 주인공이기 때문에 어느 정도 필연적인 것이긴 하지만 사와자키라는 매력적인 캐릭터가 없었더라면, 그 아무리 빛나는 웰메이드 스토리가 있었다 한들 시리즈의 성공을 없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사와자키는 인간적인 매력을 가진 탐정이다. 물론 탐정이라는 직업과 하드 보일드라는 장르의 특성상 낯설고 거리감이 느껴지는 건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는 탐정 일을 삼십 년 가까이 해왔지만, 의뢰인이 친구가 된 적은 한 번도 없다. 일이 끝난 뒤 내 일처리에 만족하지 않은 의뢰인은 별로 없었으리라. 친구 삼고 싶은 의뢰인이 없었던 것도 아니다. 하지만 의뢰인이 친구가 된 적은 없었다. 탐정 일이란 그런 것이다.“ (P. 17)라는 사와자키의 말을 통해서도 분명히 느낄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의뢰 받은 사건을 제외하면 주위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완전 무관심한 것 같으면서도, 어느 순간이 되면 적극적으로 나서 문제를 해결하는 모순된 매력과 친근감을 가진 캐릭터다. 이는 사와자키가 그와 함께 살아가는 이들에 대한 걱정과 애정에서 비롯된 행위라는 점에서 냉혈한처럼 보이는 그가 실상은 온기를 가진 존재임을 느낄 수 있게 해준다.

 


"오십 년 이상 살다 보면 놀랄 일이 더는 없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잘못이었다. 탐정 업무를 하는 탓에 죽음의 위험에 빈번히 노출되기도 하지만, 땅속에서 올라오는 거대한 폭력이 상대라면 악담을 내뱉는 것조차 용납되지 않았다. 미세하게 떨리는 손가락에 들린 담배를 다시 물고 연기를 천천히 빨아들였다. 나는 아무래도 아직 살아 있는 것 같았다." (p.423)

 


또한 그가 구시대적인 (Old Fashioned) 인물이라는 점도 사와자키에게 고유한 매력을 불러일으키는 요인이다. 휴대폰도 없이 전화 서비스를 이용해 메모를 받아 일을 진행하고, 여전히 낡은 블루버드를 타고 돌아 다닌다. (이번 작품에서는 좀 달라졌지만) 최첨단을 달리는 디지털 시대지만 아날로그적인 방식이 추억과 향수를 불러온다. 시대와 기술의 변화는 많은 것들을 바꿔 놓았지만 결코 사라지지 않는 명반처럼 우리의 가슴을 울리는 것들이 있기 때문이다. 워크맨과 카세트테이프로 음악을 듣는 히어로가 등장하고 대중은 이제 다시 LP판을 찾는다. 누군가가 종이책 시대는 끝났다고 했지만, 이북은 아직 종이책 시장을 넘보지 못한다. 구시대적인 습관과 방식을 고수하지만, 탐정의 본연의 임무에 충실하며, 이토록 깊은 감성을 가진 탐정이라니... 독자들은 이러한 사와자키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탐정의 업무란 참으로 애잔한 것으로 내가 지금까지 해온 일은 나 이외에 누구도 모른다. 흥신소에 소속된 탐정이라면 개략적인 사항을 보고서로 작성할지 모르지만, 와타나베 탐정사무소에서는 어디를 찾아도 보고서 한 장 발견할 수 없다. 내가 관여한 조사의 의뢰인이나 관계자들은 나의 일을 기억할까? 기억한다 해도 대개 하루빨리 잊고 싶은 불쾌한 기억이리라. 불평하려는 것이 아니라 나는 그런 탐정의 일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P. 354)

 

 


<지금부터의 내일>'소설의 진정한 재미, 그것만을 생각하며 쓰고 또 썼다. 그 밖의 것은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작가 하라 료의 자신감 있는 표현에 걸 맞는 작품이다. 14년이라는 현실의 시간이 흐른 만큼 소설 속 시간도 흘러 이제 사와자키도 50대의 중년이 되었다. 속절없이 흐르는 세월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신주쿠의 어두운 뒷골목을 조용히 비춘다. 오랜 시간 고단한 현실을 겪으며 그를 기다려온 독자는 그의 건재함을 확인한 것만으로도 큰 위안을 얻는다. 세월이 많이 흘렀지만 사와자키도 우리처럼 낡은 사무실에서 고단한 현실을 이겨내며 탐정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는 타인을 적절히 이용할 줄도 알고 하나를 받으면 하나를 줘야 하는 것이 세상을 살아가는 이치라는 것을 보여주는 사와자키처럼 독자들도 자신만의 아포리즘을 지키며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 과거와 미래 보다는 바로 지금’, 현재를 딛고 다가올 미래를 대비하며 살아가는 사와자키를 바라보며, 독자들은 현실을 헤쳐갈 힘을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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