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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밟기
요코야마 히데오 지음, 최고은 옮김 / 검은숲 / 2015년 3월
평점 :
“여러분, 모자를 벗고 경의를 표하십시오. 여기 천재가 나타났습니다”
2020년 올해는 슈만 탄생 210주년이 되는 해이다. 또한, 동시에 그와 동갑내기 피아니스트인 쇼팽의 탄생 210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낭만주의를 대표하는 작곡가 슈만은
그만의 감성이 담겨 있는 독창적인 음악으로 유명하지만, 쇼팽, 멘델스존, 브람스 등을 발굴해낸 음악 비평가로도 많이 알려져 있다. 특히, 무명의 작곡가 쇼팽의 천재성을 단번에 알아보고, 천재의 탄생을 대중에게
알렸던 음악사상 최대의 찬사가 담겨 있는 그의 평론은 쇼팽이 거장의 반열에 오르는데 기여했을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도 음악 애호가들에게 널리 회자되는
유명한 에피소드 중 하나다.
“여러분, 모자를 벗고 경의를 표하십시오. 거장의 숨결이 느껴지는 새로운 작품이 탄생하였습니다”
다소 낯 간지러운 표현이 될지는 몰라도, 요코야마 히데오의 <그림자 밟기>를 읽고 나서 내가 느낀 소회는 쇼팽의 음악에
대한 순수한 경이와 찬사, 존경이 담겨 있는 슈만의 표현을 빗댄 위와 같은 문장으로 요약해볼 수 있다. 사실 요코야마 히데오는 이미 거장의 반열에 오른 작가다. 그의 전작 <64>는 12년의 기자 경험과 치밀한 자료조사, 10년에 걸친 집필 기간이 쌓아 올린 걸작으로 요코야마 히데오를 명실상부한 거장의 자리에 올려놓았다. '일본소설의 수준을 단번에 끌어올렸다'는 어마어마한 극찬을 받은 <64>는 2012년 일본 최고의 소설로 꼽혔고, 영국추리작가협회상 인터내셔널 대거 최종후보, 독일 미스터리 대상
해외부문 1위에 오르며 영화로도 제작되었다. '천재' 대신 '거장'이라 표현한
이유는 그의 오랜 팬으로서 이제는 '천재' 라는 표현 보다
'거장' 이라는 표현이 더 자연스럽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그림자
밟기>를 '거장의 숨결이 느껴지는 새로운 작품'로 표현한 이유는 따로 있다.
나는 요코야마 히데오를 사회파 미스터리라는 장르에 휴머니즘이라는 코드를 조합하여 그만의 독창적인 세계를 창조해낸 작가라고 생각한다. 미스터리 장르를 다루면서, 또 경찰 조직에 관한 여러 편의 소설을
써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소설에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압도적인 추리력과 통찰력으로 사건을 해결하는
형사나 탐정은 등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수많은 시행착오와 노력을 거친 후 절망과 좌절 속에서 흐릿해진 눈으로 스쳐 지나가는 한 조각의 진실을 바라보는 한 인간이
있을 뿐이다. 소설 속에서 미스터리를 쫓으며 진실을 갈구하는 인물들은 내면에서 욕망과 갈등이 꿈틀대는
우리 주변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인물들이다. 작가는 이러한 등장인물을 통해 인간에 대해 탐구하며, 인간 성장의 드라마를 그려내고 있다.
<그림자 밟기>도 추리소설의 외형을 하고
있지만, 삶에서 직면한 저마다의 숙제를 해결하기 위해 번민하고 고민하면서 조금씩 변화하는 모습을 그린
성장 드라마라는 점에서 그의 전작들과 맥을 같이 하고 있다. 주인공 마카베는 전도유망한 엘리트였지만
일순간에 밀려온 삶의 소용돌이로 인해 사랑하는 가족을 잃고 절망 속에서 살아가는 인물이다. 세상에 홀로
남겨진 아픔 보다 더 비극적인 것은 떠나간 가족에 대한 오해와 원망 속에서 스스로 밑바닥 인생을 선택하여 자신의 삶을 무너뜨리고 있다는 점이었다. 마카베는 기구한 팔자를 타고난 여자, 부패한 형사, 비정한 야쿠자, 사고로 부모를 잃은 소녀, 아들을 기다리는 노인 등 다양한 인물과 관련된 사건을 겪고 해결하면서 자신이 품고 있는 삶의 화두에 대해서
탐구해 나간다.
<그림자 밟기>는 동일한 등장인물과 배경이
반복되면서도 각각의 이야기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피카레스크식 구성'을
취하고 있다. 주인공 마카베가 겪게 되는 개별적 사건들이 하나의 단편소설로 구성되어 한편 한편의 이야기가
그 자체로도 완결성을 가지고 있지만, 시간의 흐름에 따라 연결되는 시리즈물로서 같이 읽으면 이야기의
완성도가 높아지는 구성이다. 더군다나 <그림자 밟기>는 앞서 언급했듯이 성장 드라마의 성격을 띠고 있고, 여타의
사건들을 겪은 주인공이 기나긴 여정의 마지막에 자신이 직면하고 있는 삶의 진실에 다가가는 구조이기 때문에 단편소설집이 아닌 하나의 소설로 모든
에피소드를 같이 읽는 것을 추천한다.
주인공 마카베는 정의로운 법조인을 꿈꿔왔지만 가족을 잃는 비극적인 사건 이후, 충격과 죄책감
속에서 스스로 도둑이라는 삶을 선택하여 살아간다. 이것이 그의 전작들과 대비되는 차별화된 요소를 만들어내는
기본 구도가 되고 있다. 그의 전작들이 세상을 사회의 빛을 지켜내는 경찰과 제도권의 시각에서 바라보았다면
이번 소설에서는 빛 뿐만 아니라 빛에 가려진 그림자를 어둠의 시각에서, 사회의 사각지대에서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다. 밝은 곳에서는 바라보면 어두운 곳이 잘 보이지 않지만,
어두운 곳에서 바라보면 밝은 곳이 잘 보이기 마련이다. 주인공 마카베는 음지에서 화려한
스포트라이트가 비추는 밝은 곳을 바라보고, 또, 빛의 사각지대에서
벌어지는 사회의 부조리를 빠짐 없이 조명하고 있다.
경찰 소설의 거장이 그 정반대에 위치한 범죄자의 시각에서 소설을 썼다는 점도 놀랍긴 하지만 이 소설의 가장 독창적인 부분, 거장의 숨결이 살아있다고 표현할 만한 부분은 따로 있다. 바로 사고로
세상을 떠났지만 소설 내내 그의 곁에 머무는 주인공 마카베의 쌍둥이 동생 '게이지'의 존재다. 셜록 홈즈의 든든한 동료로 그의 곁에 머물면서 홈즈의
지성을 이끌어내는 왓슨이 연상되기도 하고, 아이언맨의 인공지능 비서 자비스가 연상되기도 하는 '게이지'라는 캐릭터는 개인적으로 모자를 벗어 경의를 표하고 싶을 정도로
소설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이었다. 지금까지 추리소설 팬으로서 수많은 작품 속에서 주인공을 보조하는 역할을 하는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캐릭터를 봐왔지만
'게이지' 같은 독특한 형식과 매력을 가진 캐릭터는 보지
못했다.
"쌍둥이란 서로가
서로의 그림자를 밟으려 하며 살아가는 존재였다. 마카베가 나라면 이렇게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은
곧 게이지 역시 그럴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뜻했다. 가슴이 시커멓게 타 들어갔다. 생김새는 물론 자신과 마음속까지 똑같은, 복사판이나 다름없는 인간이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저주했다. 차라리 사라져버려. 그렇게
빌었다." (p. 134)
<그림자 밟기>라는 소설의 제목처럼 쌍둥이라는
존재에서 나오는 캐릭터의 특징과 사고로 죽은 후 영혼이 되어 주인공의 곁에서 대화하면서 주인공의 심리와 사건 전개에 영향을 미친다는 설정은 이
소설에서만 느낄 수 있는 독특한 매력 포인트다. 또한, 동시에
'게이지'의 존재 자체는 작가가 독자에게 던지는 수수께끼이자
질문이기도 하다. 쌍둥이 동생 '게이지'의 영혼은 정말로 실존하면서 주인공 마카베에게 머물렀던 것일까? '게이지'의 존재는 물리적인 이별의 한계를 넘어서서 영혼의 동반자를 이루는 쌍둥이로서의 숙명이 만들어낸 기적일 수도 있다. 또한, 동생의 존재를 부정하고 저주했다는 죄책감에 괴로워하고, 늘 곁에 있던 형제의 죽음이라는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한 마카베의 내면이 만들어 낸 허구의 존재일 수도 있다. 어차피 정답은 없다. 소설을 읽는 독자들이 스스로 답을 찾아내면
될 뿐이다. 더 중요한 질문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작가가 독자들에게 남기는
궁극적 질문은 주인공 마카베가 동생과 진정한 이별을 하며 한 단계 성숙한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는 마지막 대목에 있다. 바로 소설의 제목에도 등장하는 '그림자'란 무엇인가에 대한 것이다. '그림자'란 무엇을 상징하는 것일까? 그림자는 고단한 일상에서 미처 신경쓰지
못하고 지나친 내면의 목소리, 삶의 본질을 상징하는 것이다. 내가
내린 나름의 답이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타인과 또 세계와의 상호작용을 통해 한 시대와 삶을 이룬다. 그것이 되풀이되고 순환되면서 빛이 되고, 그림자를 만든다. 그림자는 시시각각 변하는 환경 속에서 불완전한
형태와 빛깔을 띠지만 나와 완전히 분리할 수 없는, 필연적으로 나를 구성하는 일부분이다.
삶을 탐구하는 여정의 끝에서
마카베는 죽은 동생의 영혼에 얽매여 지나쳤던, 혹은 애써 외면했던 자신의 내면과 대면한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 마카베의 영혼의 목소리가 사라졌을 때, 그는
아스팔트에 드리워진 자신의 옅은 그림자를 보았다. 그 옅은 그림자는 마카베가 다시 고개를 들어 연인
히사코의 자전거의 페달을 밟자 그림자는 점점 짙어지며 꼬리를 끌며 그를 따라왔다. 마카베가 긴 방황을
거친 후에 비로서 그림자를 만난 것처럼 앞으로의 삶은 행복의 빛을 향해서 나아갈 수 있길 바란다. 그의
그림자는 빛을 따라 묵묵히 그의 삶을 지지해줄 테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