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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복의 성자
아룬다티 로이 지음, 민승남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2월
평점 :
<지복의 성자>는 제도권에 편입되지 못한 채 어느 누구에게도 주목 받지 못하고 어느 누구의 수호의 대상도 되지 못하는 ‘히즈라’ 안줌이 부조리로 가득찬 세상에서 희망의 불씨를 살리며 작은 잔나트 (파라다이스)를 만들고 지켜나가는 이야기다. '위로받지 못한 이들에게' 헌정된 이 책은 “현실의 그림자로 살다가 역사의 얼룩으로 스러지는 가장 비속하고 성스러운 이들에게 바치는 찬가”다. 도저히 희망을 찾을 수 없는 상황 속에서도 소설 속의 등장인물들은 “희망은 없는 듯 하지만, 희망에 차 있는 것처럼 가장하는 것이 자신들이 가진 유일한 품위”(p. 356)라 말하며 불굴의 의지로 절망을 헤쳐나간다. ‘히즈라’는 인도에서 남성도 여성도 아닌 중성적인 성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을 지칭하는 용어이다. ‘히즈라’는 어느 쪽에도 속하지 못하고 어느 쪽에도 환영 받지 못하는, 존재 자체를 부정당한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다. 평범한 사람들이 해결 가능한 외적인 문제를 고민할 때, 이들은 해결 자체가 불가능한 내부 문제로 고통 받는다.
“전부 우리 내부에 있어. 폭동도 우리 내부에 있지. 전쟁도 우리 내부에 있고. 그것들은 절대로 해결이 안 돼. 해결될 수가 없으니까.” (p. 39)
하지만 동시에 이들은 모든 사람이기도 하다. 정상성을 가지고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는 이들이 확실성으로 인해 축소되었다면, 그들은 자신들의 모호성으로 인해 확대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늘 옳다고 믿었다. 그녀는, 자신이 완전히, 늘 잘못되었다고 믿었다. 그는, 자신의 확실성으로 인해 축소되었다. 그녀는, 자신의 모호성으로 인해 확대되었다.” (p. 166)
이러한 “모든 사람과 아무도 아닌 사람, 모든 것과 아무것도 아닌 것“ (p. 14)의 이중적이고 모순적인 속성을 가진 ‘히즈라’는 역설적으로 화해와 포용, 희망의 상징이 된다. 기득권들의 질서, 상식, 규범, 문화와 관습에 속하지 못하는 상처 입은 사람들의 손에서 새로운 씨앗이 피어난다는 것은 큰 감동을 준다. 역설적으로 하키라트 (현실)에 속하지 못한 이들이야말로 현실의 높은 장벽을 뛰어넘어 세상에 정의와 평등, 사랑의 가치를 구현할 수 있는 ‘지복의 성자’가 될 수 있는 것일까?
또한, 이들의 존재는 양극단의 이분법적인 프레임에 내포한 폭력성을 비판하는 것이기도 하다. 소설은 구자라트 폭동, 인도와 파키스탄의 대립, 카슈미르 분쟁, 이슬람교와 힌두교의 종교 갈등, 카스트제도의 폐해, 자본주의의 추악한 민낯 등 인도사회의 어두운 역사를 빠짐없이 조명하고 있다. 이러한 분쟁과 갈등은 성별과 인종, 국가, 종교, 신분 등 이분법적인 가치관의 충돌에 기인한다. 따라서, 소설 속 등장인물인 ‘안줌’이 세상에서 외면 받은 묘지 위에 게스트 하우스인 '잔나트 (파라다이스)'를 건설한 것은 큰 의미가 담겨 있다. 이는 “모든 곳에 죽음이 있었고, 죽음은 모든 것이었다. 죽음은 또 다른 방식의 삶이 되었다.” (p. 415)는 표현이나 “죽은 사람들이 영원히 살게 된다는 것, 그리고 살아 있는 사람들은 살아 있는 척하는 죽은 사람들일 뿐이라는 것.” (p. 452)이라는 표현처럼 삶과 죽음, 남과 여, 빛과 어둠을 포용하면서 더 큰 가치를 지향하는 것이다.
“어둠에서 빛으로, 빛에서 어둠으로
검은 마차 셋, 흰 수레 셋
우리를 한데 모으는 것은 우리를 갈라놓는 것.
떠나간 우리 형제, 떠나간 우리 사랑.“ (p. 355)
또한, 소설은 여전히 마이너리티로서 피해자로 살아가는 여성에 관한 서사이기도 하다. 페미니스트 역사학자 거다 러너는 “남성은 새로 시작할 필요가 없다. ‘아버지’의 어깨 위에서 인류의 지적 전통을 자연스레 전수 받으며 세계를 조망하기 때문이다.”고 했다. 이는 세계는 아버지의 이름에 의해 호명되고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남성은 세계를 잘 익히기만 하면 되는 반면, 여성은 끊임없이 자신을 단속해야 하며 아버지의 어깨 위로 올라가 세상을 조망하는 것이 어렵다는 의미이다.
“콰브가에서는 잘못된 몸에 갖힌 신성한 영혼들이 해방된다. 신성한 영혼이 여성의 몸에 깃든 남성인 경우 어떻게 되는지의 문제는 다루어지지 않았다.” (p. 78)
우리는 모두 삶의 형태는 다르지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벌어진 사건들과 그것이 누적되어 이루어지는 역사와 사회구조에 좌우되는 삶을 살고 있다. 살아가면서 우리는 인종과 국가, 성별, 문화 등에서 기인한 수많은 차별을 마주하게 된다. 인생을 살아가는 것은 다수자들이 진리라고 강요하는 것, 불편한 진실에 맞서 소수자로서, 꺼져가는 희망의 불씨를 살리며 세상을 향해 작지만 의미 있는 목소리를 내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거나 말거나 상관없다는 듯 무심하게 흘러가는 세계 속에서 상실과 결핍, 몰이해라는 인간의 한계를 딪고 저마다의 속도와 방향으로 한 조각의 진실과 삶의 의미를 구하려 애쓰는 것이 우리네 ‘인간‘이라는 존재 아닐까?
상실과 결핍, 좋았던 기억, 행복했던 추억들이 모여 하나의 삶을 이루고, 그렇게 쌓아올린 하나하나의 삶들이 모여서 시대와 역사가 되고 하나의 별자리를 이룬 채 조용히 빛난다. 우리는 수많은 경험을 하고 그에 적절히 대응하며 세상을 살아간다. 우리를 만드는 것은 경험 그 자체가 아니라 그 경험에 반응하는 태도와 신념이라고 할 수 있다. <지복의 성자>가 궁극적으로 말하고 싶었던 것은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흘러가는 세상의 흐름에 떠밀리지 말고 저마다의 속도와 방향으로 조금씩이라도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 아닐까? 그것은 불가능 속에서도 절망하지 않고 티끌 같은 희망이라도 진지하게 대하는 태도에 관한 것이었고, 또한 고통과 비탄으로 가득 찬 세계 속에서 살아가는 사랑하는 이들을 위해 그 세계에 함께 맞서는 일에 대한 것이었다. 즉, 이해와 관심을 바탕으로 타인을 향해 손을 뻗는, 인간이 지닌 ‘온기‘에 대한 것이었다.
“중요한 건 그것이 존재했다는 사실이었다. 한낱 낄낄거림으로라도 역사에 존재하는 건 부재하는 것, 완전히 누락되는 것과 천지 차이였다. 그 낄낄거림은 결국 미래라는 깎아지른 듯한 절벽을 오르는 하나의 발판이 되었으니까.” (p. 76)
아룬다티 로이의 <지복의 성자>를 읽으며 한 점의 그림이 떠올랐다. 바로 윌리엄 터너의 명화 <전함 테메레르>다. 1805년 넬슨 제독이 이끄는 영국 해군은 나폴레옹의 유럽제패를 저지하고 자국을 수호하기 위해 트라팔가 해전에 임한다. 전장에서 테메레르는 위기에 처한 영국의 기함 (flagship) 빅토리호를 구하는 전적을 올린다. 이를 기반으로 한 트라팔가 해전의 승리는 19세기 영국을 '해가 지지 않는 제국'으로 만들었다. 하지만 윌리엄 터너의 그림에 표현된 테메레르는 찬란하게 빛났던 트라팔가에서의 영광의 모습이 아닌 시대의 흐름을 이기지 못하고 구시대의 유물로 쇠락한 모습이다. 역사의 한 페이지를 빛낸 존재였지만 더 이상 자신의 힘으로 동력을 만들어내지 못하는 덩치 큰 범선은 그림 속에서 작은 증기선에 의해 예인되며 해체되기 전 마지막 항해를 하고 있다.
트라팔가 해전 승리 후 런던에는 트라팔가 광장이 조성되었고 광장의 중앙에는 승장 넬슨 제독의 동상이 세워졌다. 넬슨이 승선했던 기함 빅토리호는 포츠머스 해군기지에 영구 보존되고 있다. 반면 1838년 영국 해군은 테메레르호를 런던의 운수업자에게 팔아넘겼고 배를 산 운수업자는 배를 해체하기로 결정했다. 템즈 강가로 산책을 나간 터너는 이 위대한 선박의 마지막 항해를 그림으로 남겼다. 윌리엄 터너는 시대를 빛내고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지는 영웅에 대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찬사를 보냈다. 모두가 기억하는 넬슨 제독, 빅토리호도 있었지만 우리에겐 테메레르도 있었다고… 그것은 자랑스러운 우리의 과거였고 우리의 현재를 있게 한 또 하나의 영웅이라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존재에 대한 최대의 찬사는 그를 오래도록 기억해주는 것이다.
역사의 뒤안길로 스러져간 이름 없는 민중들, 수많은 ‘안줌‘과 ‘틸로‘들을 역사는 어떻게 기록하고 있을까? 아니 그 이전에 역사의 페이지에 그들의 몫도 있을까? 역사의 거대한 물줄기를 바꿔놓은건 그동안 세계와 인류를 위한 진심을 보이고 이름 없이 사라져간 수많은 평범한 개인들이었다. 우리는 윌리엄 터너가 되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그들을 기억해주어야 한다. 그들의 정신과 투쟁, 숭고한 희생은 <전함 테메레르>가 되기에 충분하기 때문이며, 그들은 자랑스러운 우리의 과거였고 우리의 현재를 있게 한 또 하나의 영웅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들은 자신의 삶을 희생해가며 세상의 진보를 위해 고독한 걸음을 내디딘 이름 없는 수많은 '지복의 성자'들이기 때문이다.
“너희 모든 남자들과 여자들은 집으로 돌아가 내기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라.“ 왕의 명령을 거스를 수 없었던 남자들과 여자들은 집으로 돌아갔다. 오직 히즈라들만이 꼬박 십사년을 숲가에서 충성스럽게 왕을 기다렸는데, 그건 왕이 그들에 대해 언급하는 걸 잊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우린 잊힌 존재로 기억되고 있는 거네?“ (p. 76)
소설 속에서 델리의 잔타르만타르는 “정의를 위한 싸움, 악에 대항하는 선의 싸움이 벌어지고 있는 오늘날의 카르발라 (이슬람교 시아파의 성지)” (p. 162)이며, “누군가는 관심을 가져줄 거라는, 누군가는 그들의 말을 들어줄 거라는 믿음” (p. 168)이 존재하는 곳으로 그려진다. 이곳에서 ’안줌‘과 ’틸로‘가 마주치고, 동시에 새로운 세대와 희망의 상징인 ’미스 제빈 2세‘가 태어났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는 쉽사리 변하지 않는 세상에 절망하지 않고 신뢰하고 연대하며 협력과 공생의 질서를 만들어나가는 것, 그것이 비록 사소하고 미약한 성공에 불과하다고 할지라도 삶이 빛나는 사회로 나아가는 동력은 그러한 곳에서 나온다는 것 아닐까? 차별과 질책에 굴하지 않고 지금도 치열하게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희생과 헌신이, 그리고 그들을 지지하고 응원하는 작지만 끊이지 않는 목소리들이 세상을 바꾸는 원동력이 될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