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대하고 게으르게
문소영 지음 / 민음사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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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007 스카이폴>에는 인상 깊은 하나의 장면이 있다. 영광스러웠던 과거를 뒤로하고 나이가 들어 노쇠한 제임스 본드가 한 점의 그림을 응시하고 있는 장면쓸쓸한 뒷모습을 여과 없이 노출하며 그가 바라본 그림은 윌리엄 터너의 <전함 테메레르>. 1805년 넬슨 제독이 이끄는 영국 해군은 나폴레옹의 유럽제패를 저지하고 자국을 수호하기 위해 트라팔가 해전에 임한다. 전장에서 테메레르는 위기에 처한 영국의 기함 빅토리호를 구하고 두 척의 배까지 나포하는 전적을 올린다. 이를 기반으로 한 트라팔가 해전의 승리는 19세기 영국을 '해가 지지 않는 제국'으로 만들었다






하지만 윌리엄 터너의 그림에 표현된 테메레르는 찬란하게 빛났던 트라팔가에서의 모습이 아닌 시대의 흐름을 이기지 못하고 구시대의 유물로 쇠락한 모습이다. 역사의 한 페이지를 빛낸 존재였지만 더 이상 자신의 힘으로 동력을 만들어내지 못하는 덩치 큰 범선은 작은 증기선에 의해 예인되며 해체되기 전 마지막 항해를 하고 있다. 은퇴의 기로에 선 스파이는 그림 속 범선을 보며 세월의 무게와 시대의 변화를 읽었던 것일까? 저자의 전작 그림 속 경제학에 소개된 <전함 테메레르>와 관련된 내용을 보며 인간의 고통을 직접적으로 표현하지 않고서도 이렇게 처절하고 애잔하게 표현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해 새삼 놀라고 감동받았던 기억이 있다.

  





광대하고 게으르게는 예술이 일상이고 글쓰기가 직업인 저자 문소영의 신작에세이다. 전작들이 명화를 중심으로 당시의 시대상과 역사를 가로지르는 삶에 대한 통찰을 전문가적인 시각으로 다루었다면, 이번 에세이에서는 저자의 발걸음이 한결 가볍고, 자유분방하다. 미술을 포함하여 영화, 음악 등 예술 전반과 사회, 경제, 정치, 철학 등 광대한 주제들을 개인적 성향 및 취향을 드러내며 다소 인간적이고 친근한 모습으로 게으르게 독자들에게 들려주고 있다. 다양한 주제를 다룬 42편의 에세이 중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삶과 죽음에 대해 다룬 <메멘토 모리에서 카르페 디엠으로>였다




신은 존재할까? 영혼이란 무엇이고, 사후세계는 존재하는 것일까?’ 이러한 질문들은 누구나 쉽게 떠올리지만 그 누구도 답할 수 없는 질문이다. 과학적으로 증명된 바 없는, 아직 인류가 탐구하지 못한 미지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번 생에서 우리가 지각하는 삶은 한번뿐이라는 사실이다. 누구에게나 단 한번 주어지고, 결코 되돌릴 수 없는 것이기에 삶은 소중한 것이다. 삶을 소중히 여기며 살아간다는 것은 생의 마지막 단계인 죽음에 대해 성찰하면서 그것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삶의 마지막이 죽음이라는 사실을 담담히 받아들일 수 있을 때 우리는 현재의 삶에 더 충실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메멘토 모리카르페 디엠이 어떻게 절묘한 한 쌍을 이루는지 프란츠 할스와 존 윌리엄 워터하우스의 그림을 통해 설명하고 있다. 해골을 든 청년과 꽃을 든 처녀는 누구나 언젠가 맞게 될 죽음을 일깨우고 있다. 싱그러운 젊음이 해골로 변하고, 오늘 미소 짓는 꽃이 내일은 지듯이 삶은 유한한다는 것을 유념하고, 오늘의 이 시간을 잘 누려야 한다는 것을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다. 죽음을 잘 준비할 수 있는 방법은 현재의 순간순간을 온전하게 살아나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늦게 핀 대가를 꿈꾸며, 프랭크 매코트의 서늘하고 무거운 조언에 귀기울이라는 저자의 충고에 고개가 끄덕여지는 이유이다.

 

계속 끄적거리세요! 뭔가가 일어날 겁니다.” (P.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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