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플갱어의 섬 일본 추리소설 시리즈 4
에도가와 란포 지음, 채숙향 옮김 / 이상미디어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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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도가와 란포는 일본 추리소설의 대부라 불리는 미스터리 추리문학의 거장이다. 그는 미스터리 문학의 원형을 만들어낸 에드거 앨런 포라는 대작가의 이름을 스스로 짊어지고 작가로서의 커리어를 시작했지만, 그 이름의 무게를 극복하고 자신이 창조해낸 세계와 인물을 통해 미스터리 추리 장르에 깊은 발자취를 남겼다. 일본이 현재의 미스터리 강국이 될 수 있었던 건 장르문학의 가치를 드높인 그의 빛나는 창작물과 평론들, 또 추리소설의 발전과 보급을 위해 일본추리작가협회를 설립하고 추리문학상을 제정한 그의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에도가와 란포 상>은 저 유명한 히가시노 게이고도 이를 통해 데뷔했을 정도로 신인 작가의 등용문이자 일본 추리 소설계의 가장 권위 있는 상이 되었다. 하지만 그 명성에 비해 한국에 출간된 작품이 많지 않아 추리소설 애독자로서 개인적으로 아쉬웠는데, 이번에 일본 추리소설 시리즈로 표제작인 <도플갱어의 섬>을 포함한 4편의 란포의 소설이 한 권으로 출간되어 무척 반가웠다.






4편의 소설들은 란포가 왜 거장으로 불리는지 느낄 수 있는, 그의 미스터리 스타일을 대표하는 주옥같은 작품으로 구성되어 있다. 4편의 소설 모두 독자에게 처음부터 범인이 누구인지와 어떤 트릭을 구사하고 있는지 빠짐없이 공개하는 한편, 탐정이 이 완벽해 보이는 범죄의 빈틈을 파고들어 사건을 해결하는 도서(倒叙) 미스터리 형식을 취하고 있다. 4편의 소설에 등장하는 탐정은 물론 란포가 만들어낸 동양 최초의 사립 탐정 캐릭터 아케치 고고로. 일본 추리만화의 쌍벽을 이루는 <명탐정 코난>모리 고고로에도가와 코난’, <소년 탐정 김정일>아케치 경감아케치 고고로가 있었기에 존재가 가능했다. 이 캐릭터들은 란포가 닦아 놓은 길을 따라 걷는 후세의 작가들이 그가 창조한 세계에 바치는 일종의 헌사이자 오마주라고 할 수 있다. 특히 동서양을 대표하는 두 작가 에도가와 란포코난 도일이 결합된 <명탐정 코난>의 캐릭터 에도가와 코난은 장르문학에서의 에도가와 란포의 위치가 어느 정도인지 가늠할 수 있게 해준다.






단편집의 포문을 여는 <심리 실험>은 일본의 도서(倒叙) 미스터리 원조로 평가받는 소설이다. 가난한 대학생이 부유한 노파를 살해하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의 스토리 라인을 그대로 따르고 있는 이 소설은 언어 연상 테스트의 형태로 행해지는 심리 실험과 범죄 심리를 이용한 아케치 고고로의 추리가 빛나는 작품이다. 가장 좋은 추리는 심리적으로 사람의 속마음을 알아보는 것이라는 아케치 고고로의 대사처럼 인간 내면의 심리를 이용한 추리를 전개한다는 점이 물적 증거를 기반으로 트릭 해결에만 집중하는 여타의 미스터리물과 차별화되는 점이다.



<지붕 속 산책자>는 에도가와 란포의 몽상가적인 면을 엿볼 수 있는 초기 대표작이다. 지루하고 무의미하게만 느껴지는 현실의 삶 속에서 회의하고 방황하는 염세적 인물이 우연히 발견하게 된 하숙집 지붕으로 통하는 통로를 발견하게 되면서 밤의 세계와 범죄의 유혹에 눈을 뜨게 된다는 이야기다. 란포는 현실은 꿈, 밤의 꿈이야말로 진실이라는 말을 좌우명처럼 자주 사용했다고 알려져 있다. 이 소설이 추리소설의 고전의 반열에 오를 수 있었던 건 나의 관심은 오직 진실을 아는 것이라는 아케치 고고로의 말처럼 이상과 현실 속에서 진실을 찾아 방황하는 범시대적인 고뇌를 다뤘기 때문이 아닐까?



<도플갱어의 섬>에는 신에 의해 만들어진 대자연에 만족하지 않고, 스스로 신이 되어 자연을 새롭게 창조하고자 하는 히토미 히로스케가 등장한다. 그는 항상 자신만의 유토피아 건설을 꿈꾸지만, 현실의 그는 두 평 남짓한 지저분한 하숙방을 전전할 뿐이다. 이상과 현실의 괴리로 괴로워하던 그는 자신의 이상향을 구현할 일생일대의 기회를 만나게 된다. 하지만 유토피아 (Utopia)’'없는(ou-)''장소(toppos)'의 합성어인 것처럼 엽기적인 범죄를 통해서 이룩한 이상향은 그가 내딛는 현실의 기반을 무너뜨리며 그를 파국으로 안내한다.



<검은 도마뱀>은 란포의 작품에서 유일하게 걸출한 여도둑 미도리카와 부인이 명탐정 아케치 고고로의 호적수로 등장하여 지혜를 겨룬다. 미도리카와 부인은 범죄를 예고하고, 물질적 가치뿐만 아니라 괴로움에 몸부림치는 인간의 표정을 즐기고, 싱그러운 젊음을 박제하여 수집하는 등 편집증적 광기를 지닌 괴도(怪盜, phantom thief)로 묘사된다. 작품 전체에 걸쳐 어두운 심연에 자리 잡은 인간의 추악하고 비뚤어진 욕망, 광기가 번뜩이는 몽환적인 세계가 연출되지만 이를 거부하지 못하고 빠져드는 건 인간의 본성 그 이면에 존재하는 어떤 것을 건드리기 때문이 아닐까? 이 작품은 아케치 고고로가 등장하는 마지막 작품이라는 의미도 있다.



란포의 위대함은 그가 일본 미스터리의 아버지라는 것뿐만이 아니다. 자기 내면에 숨어 있는 욕망을 알고 그것을 인정하고 즐길 수 있게 한 것이 란포의 진정한 업적이다. 일본에 란포라는 작가가 있어서 정말 다행이다.” - 온다 리쿠 -



에도가와 란포가 추리문학의 거장으로 불리는 이유는 일본의 미스터리 장르를 확립한 선구자적 역할을 한 것, ‘아케치 고고로라는 독보적인 캐릭터를 만든 것, 범죄 심리를 이용하여 사건을 해결하는 그만의 스타일을 창조해낸 것 등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본 작품집을 읽으며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과학적 추리로 대표되는 현실과 이성의 세계와 이에 대비되는 그로스테크한 욕망과 서리얼 (Surreal)한 환상의 세계가 교차하는 순간을 포착하여 이를 유려한 문체로 표현한 부분이었다.



어둠 속을 걷고 있으니 자꾸 문득 두세 시간 전의 격정이 되살아났다. 그의 전 애인 사키코가 목이 졸리면서 이 사이로 혀를 내밀고 입가에 주르르 피를 흘리며 소처럼 큰 눈으로 그를 노려보던 얼굴과 허공을 할퀴는 듯한 단말마의 손가락 다섯 개가 거대한 환상이 되어 그를 위협했다.” (P. 253)



처음으로 살인이라는 범죄를 저지른 사람이 느끼는 불안과 흥분, 공포로 점철된 감정의 결을 세밀하게 묘사한 것과 애인을 교살하는 과정을 소처럼 큰 눈허공을 할퀴는 단말마의 손가락 다섯 개로 이미지화시킨 표현을 보며 인간 내면의 심리를 탐구하는 에도가와 란포의 진면목을 느낄 수 있었다.



두 눈에는 어린아이처럼 눈물이 가득 차올랐다. 반짝거리는 눈물방울이 남자의 하얀 몸을 감싸며 일그러져 빛나는 것 같았다.” (P. 397)



슬픔이라는 감정에 대해 절제된 언어로 감각적으로 표현한 부분은 아름답기까지 하다.



란포는 위트와 유머도 잊지 않는다. <검은 도마뱀>에서 아케치 고고로는 여도둑의 트릭에 대해 이번 발상 같은 경우는 완전히 옛날이야기예요. 어느 소설가의 작품에 <인간의자>라는 게 있습니다. 이것 역시 악인이 의자 안에 숨어서 장난을 치는 이야기인데, 그 소설가의 황당무계한 공상을 검은 도마뱀은 감쪽 같이 실행해 보인 겁니다.” (P. 337) 라고 말한다. 란포 자신을 어느 소설가로 언급하면서, 자신이 작품에서 선보인 트릭을 올드하고 황당무계한 공상으로 평가하고 있는 것이다.



100여 년 전의 작품이지만 에도가와 란포의 소설에서는 시대적 이질감을 크게 느낄 수 없다. 세월의 흐름을 느끼게 하는 건 작품에 가끔 등장하는 시대상과 현대과학에 비해 다소 낙후된 당시의 기술력을 마주할 때뿐이다. 그의 소설들이 아직도 꾸준히 읽히는 이유는 그가 특정 시대의 산물이 아닌 인간의 본성과 욕망을 근원으로 반복되는 삶 그 자체에 주목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이런 의미에서 란포의 도서(倒叙) 미스터리는 한 세기 이전에 있었던, 이미 확정되어 결말을 향해 질주하는 이야기가 아닌 현재진행형의 우리 삶을 다루고 있다고도 할 수 있다. 정말 그렇지 않은가? 우리들 자신도 <지붕 속 산책자>의 사부로처럼 이상과 현실을 넘나들며 내면에 들끊는 욕망들을 다스리며 살아가고 있으니 말이다.



본 리뷰는 출판사 경품 이벤트 응모용으로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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