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무해한 사람
최은영 지음 / 문학동네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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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럼바인 고교 총기난사 사건이 발생한 1999 4월 나는 대학 신입생이었다. 자의와 타의가 뒤섞인 고통과 인내로 점철된 고3 시절을 지나 꿈에 그리던 대학 캠퍼스의 낭만과 여유를 느끼기 시작할 무렵의 내게 이 사건은 더욱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유난히 싱그럽게 느껴졌던 캠퍼스라는 공간이 누군가에게는 살인과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 그 대조적인 상황적 간극이 내게 무겁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대학을 마치고 대학원에 진학했을 때에는 버지니아 공대 총기난사 사건이 일어났다. 아침에 출근하면서 연구실 문 앞에 놓여진 신문 1면의 조승희의 사진과 사건에 대한 헤드라인을 보고 받은 강렬한 인상은 지금도 생생하다.


 '샤덴프로이데 (Schadenfreuse)'... 연쇄적으로 발생하는 타인을 향한 무차별적인 공격을 지켜보면서 내가 주목하게 된 용어이다. '샤덴'은 상처를 주는것, '프로이데'는 환희라는 뜻으로 '샤덴프로이데'는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줌으로서 느끼는 환희를 의미한다. 총기난사사건의 범인들처럼 우리는 삶의 어느 한 순간에 세상의 멸망을 꿈꾸고 자살충동을 느끼는 등 부정적 파괴욕구를 경험한다. 우리 마음속에는 나의 행위로 인해 타인이 처하게 되는 고난적 상황을 기뻐하는 심리가 있기 때문일까? 사회를 향해 날이 서 있는 가시적 폭력을 간접 경험하면서 나는 '관계'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내게 무해한 존재』의 주인공들은 지나온 삶에서 가장 뜨거웠던 시절 관계의 '형성'이 아닌 '단절'이 남긴 균열의 흔적들을 세월이 지나 되새기고 있다. 그 과정에서 소설은 가시적이고 의도된 폭력이 아닌 가시화되지 않은 무의식적인 폭력을 조명한다. 미주의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절은 다른 사람들은 알지 못하는 자신의 작은 모서리를 쓰다듬어주는 진희와 언제나 자신의 편을 들어주는 주나가 있었던 학창시절이었다. 하지만, 세월이 지나서야 비로소 그 행복은 상대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했기 때문에 가능했음을 깨닫는다. (『고백』, 196) 또한, 자신이 눈빛으로서 주나가 진희에게 했던 말 보다 더 가혹한 말을 했었다는 것을, 지금까지 애써 부정해 오던 잔인한 진실을 인정하게 된다. (『고백』, 207) 모래는 공무의 사진 속 어느 순간처럼 영원을 꿈꾸지만 (『모래로 지은 집』, 131), 그들의 관계는 프레임의 중심에서 벗어나 있는 사진 속 모래의 모습처럼 불안정했고, 결국 영원이 아닌 멈춤과 단절을 향해 나아간다. 혜인은 사람으로부터 받을 수 있는 행복이 얼마나 위태롭고 위험한 것인지, 또한 사람은 그런 식으로 쉽게 행복해질 수 없다는 사실을 관계가 남긴 흔적을 통해 깨닫는다. (『손길』, 226)


인간의 삶은 평범한 사건들이 빚어낸 기적이고 역사다. 사소하고 시시콜콜한 삶의 순간 순간들이 누적되어 이루어진 인생은 누구에게나 값지고 귀한 것이다. 그런 순간 순간들이 모여서 시간과 역사를 이루고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개별적 세계가 빚어지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모두는 저마다의 역사와 존재이유를 가진 하나의 섬이다. 섬은 연결과 단절의 이중성을 가진 특별한 공간이다. 수면 위 드러난 부분을 기준으로 보면 섬은 단절된 공간이지만 드러나지 않은 수면 밑으로 섬과 섬들은 연결되어 있다. 공무와 모래, 나비가 함께 길고 흔들리는 다리를 건너 서로의 섬에 발을 내디뎠 듯이 (『모래로 지은 집』, 181) 우리는 서로에게 의지하며 삶을 살아갈 수 밖에 없다.


서로에게 상처를 주지 않는, 이로움만을 건네는 관계가 성립할 수 있을까? 중력도 마찰력도 없는 세계에서 멈추지 않고 영원히 굴러가는 구와 같은 삶은 바람직한 삶일까? 이경은 수이와의 마지막 만남에서 차마 하지 못한 말이 있었다. "너에겐 아무 잘못이 없어. 넌 나에게 상처를 주는 사람이 아니야 (『그 여름』, 49) 이경은 관계의 미숙함으로 인한 상실의 경험을 훗날 아프게 회고하지만, 넌 나에게 상처를 주는 사람이 아니라는 그 말만큼은 어리숙했던 시절의 그녀도 상대에게 위안이 아닌 상처를 주는 말임을 알았다. 랄도는 비록 부정적인 방향이지만 자신이 엄마를 아직 요동치게 하는 사람이라는 사실이, 그런 식으로라도 감정적인 교류를 나누며 관계에 아직도 피가 흐른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는 그 사실 자체에 기뻐한다. (『아치디에서』, 248)


어쩌면 세상이 변하지 않는 이유는 반복적으로 발생하는 가시화된 폭력과, 권력화된 악 때문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의 악의 없는 무심함, 선의와 배려로 포장된 무례, 자기기만과 이기적 방어기제 등이 누적된 결과가 아닐까? 상처와 균열은 삶을 영위하고 관계를 형성하는데 있어 불가결한 요소라는 것을 부정하고, 나는 누군가에게 무해한 존재였다는 자기기만과 진실에 대한 외면이, 그 오만한 태도와 피상적 단면에 대한 섣부른 판단이 세상의 진화를 막고 있는 것은 아닐까?

"당신 정말 육아휴직 갈꺼니?"


작년 세상에 태어난 딸에 대한 축하인사 다음으로 회사의 지원부문 임원이 내게 건넨 말이다. 일과 가정의 균형을 위해 회사는 작년부터 남성육아휴직을 의무화하기로 하였지만 아직 안정적으로 정착이 되고 있지 않은 상태였다. 이런 상황에서 회사의 인사와 복지정책을 총괄하는 지원부문 임원의 농담인 듯 진담인 듯 건넨 말 한마디는 내게 항거할 수 없는 압박이었고 보이지 않는 권력이었다. 이는 특별한 계기가 없는 한 평범한 남자들은 모르는 게 당연하다는 대한민국에서 여자로, 아내로, 엄마로 살아가는 것의 고충을 간접적으로 느끼게 된 순간이었다. 또한, 가시적인 폭력의 파괴력을 넘어서는 비가시적 폭력의 힘을, 그 지난한 세월을 거치면서도 변하지 않은 편견과 관습의 실재를 체감하는 순간이기도 했다. 인간은 의도의 유무를 떠나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고 해를 끼치며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존재다. 하지만 상처와 균열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함께일 수 밖에 없다. 함께라면 타인의 고통을 느낄 수 있고 자신의 아픔도 진정시키는 순간을 맞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서로의 고유한 존재 방식, 상실과 결핍의 기억들은 흩어지는 안개와 모래, 이름 없는 고양이처럼 우리 각자를 섬으로 만들지만, 우리는 삶의 흔적, 아픔을 매개로 서로의 존재를 인지하고 이해하고 위로하게 되는 것이다.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고 이해하고 이해 받는 과정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이해라는 것은 마음이 구겨져 있는 사람 특유의 과시와 타인의 배려에 대한 무시와 거부 (『모래로 지은 집』, 127) 넘어서야 하고, 또한 어떻게든 살아보기 위해 세상 속으로 비집고 들어가기 위해 이해를 이용하는 위선 (『모래로 지은 집』, 121) 극복해야만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것은 타인과 삶의 온도를 맞춰가는 일이며, 상대적 성숙의 시간을 요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러한 과정을 거치며 우리는 삶의 고통을 무조건적으로 거부하거나 부정하지 않고 서로의 온기를 느끼며 진정한 위로의 경험을 얻는다. 초월적인 존재를 통해서도 치유 받을 없는 오직 사람에게서만 구할 있는 마음이 존재하는 것이다. (『고백』, 209) 밝은 곳에서는 어두운 곳이 보이지 않지만, 인간은 서로간에 존재하는 적당한 어둠 속에서 희미한 빛과 온기로 서로를 알아볼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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