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다리를 오를 능력이 있는 이들은 올라간 다음 사다리를 치우거나, 

아니면 그들의 친구, 그들과 같은 편, 그들의 친척들이 올라올 수 있게 선별적으로 사다리를 (낮은 곳으로) 내려보낼 

길을 찾을 것이다. 이걸 달리 말하면, "능력주의는 과두제다."" 


이 말 출전인 크리스 헤이스는 79년생. 언론인. 브라운 대학 철학과 졸업. 

이 주제로 책을 쓰기도 했다. Twilight of the Elites: America after Meritocracy (2013). 

기회의 평등이 모두에게 보장되지 않는 한, 능력주의는 허구일 뿐. 이런 주장에도 물론 진실이 있지만 

기회의 평등이 제도로는 붕괴했고 (혹은, 실은 존재한 적도 없었고) 허약한 이상으로만 근근히 존재한다 해도 

그래도, 결과 평가의 공정성이 어느 정도 보장되기만 해도, 능력주의가 평등을 재분배하는 역할을 할 것 같다. 


한국에선 기회의 평등이, 그게 제도로는 꽤 오래 강고히 존재한 편임에도 이념으로는 부재했나? 

지금은, 제도로든 이념으로든 완전히 붕괴했나. 


어쨌든 한국에선, 아직 "after meritocracy"를 말할 수 없고 "before meritocracy". 

한국의 거의 모든 조직에서, 플라톤이 한 적 없는 말인데 플라톤이 출전이라며 돌아다닌다는 "정치 외면의 대가는 열등한 인간에게 지배 받기"와 비슷한 일이 언제나 일어나고 있을 것 같다. 박근혜 최순실처럼 말하므로 번역기, 가 없다면 녹음기라도 필요한 상사들도 곳곳에 있겠지. 노무현과 문재인, 노무현과 안희정, 이들 관계에 과하게 감격하게 되는 건 내가 한국인이기 때문. 그렇지 않나. 


청년들의 꿈이 공무원, 교사인 나라에 무슨 미래가 있느냐. 

청년들이 그러는 건, 잘하고 하고 싶은 일을 열심히 한다면 오게 될 보상. 그게 극히 불확실함도 이유 아닌가. 

그러니까, 어디서도 사실 능력주의 하지 않는다는 것. 어떤 분야에서 성공하려면 그걸 잘하는 데다 하고 싶으며 열심히 함. 그걸로 족하지 않고 이것들 외에, 어쩌면 그보다 더 중요한 게 "영혼을 팔 준비 되어 있음" 혹은 "영혼은 일찌감치 팔았음" 아닌가? 아닙니까? 이런 생각은, 내게 온 망상의 순간인가. 영원히 절박하게, 끈을 찾아서. 사다리 내려 줄 은인을 찾아서. 


"1883. 공립, 세속, 무상, 의무 교육 법령 선포. 이를 통해 민중의 침대에서 태어난 아이들이 공화국의 사다리를 오를 수 있게 하다. 1884. 가스통 바슐라르 출생...." 어쨌든 바슐라르의 이런 연보는 감동적이고, 교육에서(교육에서만이라도) 기회의 평등은 영원히 제도와 제도의 이념으로 정착하고 남아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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