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일 일요일자 Writer's Almanac이 읽어준 시는 

스티븐 도빈스라는 시인, 올해 9월 출간된 위의 시집에서 "Prague"라는 시였다. 



The day I learned my wife was dying
I told myself if anyone said, Well, she had
a good life, I’d punch him in the nose.
How much life represents a good life?


Maybe a hundred years, which would
give us nearly forty more to visit Oslo
and take the train to Vladivostok,
learn German to read Thomas Mann


in the original. Even more baseball games,
more days at the beach and the baking
of more walnut cakes for family birthdays.
How much time is enough time? How much


is needed for all those unspent kisses,
those slow walks along cobbled streets?



아내가 죽을 것을 알았던 날 

누구라도 내게 그녀가 좋은 삶을 살았다 말한다면 

그의 코에 주먹을 날리겠다고 나는 결심했다. 

좋은 삶이라고 부르려면 얼마나 많은 삶이 있어야 하나?


어쩌면 백 년, 백년이라면 

우리에게 사십 년이 더 주어지고 우리는 오슬로를 

방문하고 기차로 블라디보스톡을 가고 

독일어를 배워 토마스 만을 

원어로 읽을 터인데. 야구 경기도 더 많이 가고 

더 많은 날들을 바닷가에서 보내고 우리 가족의 생일 축하를 위한 

더 많은 호두 케익을 구울 터인데. 

얼마의 시간이 충분한 시간인가? 얼마의 


시간이, 하지 못한 그 모든 키스들을 위해 

자갈 깔린 그 길 위에서의 느린 산책을 위해 필요한가? 


*시집의 표지나 제목, 시 자체를 보아도 

이건 키치. 그런데 그렇다 해도 특히 "독일어를 배워 토마스 만을 / 원어로 / 읽을 텐데" 이 구절이 

뜻밖의 생명을 주지 않나. 으흠 으흠 으흠 하다가 응? 하게 되는. 그 구절 하나만으로도 흥미로운 ("interesting" 이 단어를 우리는 깊이 이해해야 한다, interesting한 무엇은 "interests us"라는 의미임을 온전히 이해하자...... 같은 얘기를 한 사람 이상의 문학연구자가 한 것 같은데, 그런 취지에서 "interesting") 시가 된다고 생각했다. 


<두이노의 비가>에 있는 아래와 같은 연: 

Being-here is much, and all this here,

which disappears so, seems to need us and strangely

concerns us. Us, the most disappearing. Once

each, only onceOnce and no more. And we too,

once. Never again, but this

having been once, even if only once:

having been of the earth, seems irrevocable.


이 삶이 우리 각자에게 단 한 번일 뿐임 ("once each, only once"), 이것을 말하는 릴케의 시가 

더 좋은, 우월한 시일 것이다. 그런데 그렇다 해도, "독일어를 배워 토마스 만을 / 원어로 / 읽을 텐데" 같은 

릴케라면 절대 쓰지 않을 구절(토마스 만을 릴케가 사랑했고 원어로 읽고 싶었을 저자 이름으로 바꾼다 해도)도 

우리는 읽고 듣고 싶을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