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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틀 미스 선샤인>에서 폴 다노.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읽는 고등학생. 




<차라투스트라> 1부 "읽기와 쓰기에 대하여"가 이런 식으로 끝난다: 

"나는 걷기를 배웠다. 그 후, 나는 내가 뛰게 했다. 나는 날기를 배웠다. 

그 후, 나는 내가 움직이기 전 누가 날 미는 걸 원하지 않는다. 


이제 나는 가볍다. 이제 나는 난다. 이제 나는 나 자신 밑에 있는 나 자신을 본다. 

이제 신이 나를 통해 춤춘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중력의 정신에 대하여"에서는: 

"언젠가 날기를 배우고 싶은 이는 우선 설 줄 알아야 하고, 

걷고 뛰고 오르고 춤출 줄 알아야 한다. 단번에 날 수는 없다/날기 속으로 날아갈 수는 없다 (one cannot fly into flying)." 


바슐라르의 니체 읽기는 바로 이런 대목들에 붙인 

(그 이상 탁월할 수 없는) 논평들인데, 이것들은 오직 그 자신의 문장으로 읽기만 가능하달까 

하여튼 (서재에서 이미 다섯 번은 쓴 것 같지만) 남이 다시 쓰기가... 참 어렵다. 소문으로라도 (word of mouth, second-hand) 그의 상상력 이론이 전해지지 않은 이유가 바로 여기 있는 건지도 모른다. 다른 사상가들은 (예를 들어, 아도르노) 직접 읽기 전에도 혹은 직접 읽지 않아도 그들 사상의 '개요'는 알 수 있지 않나. 바슐라르의 경우 '개요'를 만든다면, 빈약하고 미미해서 바로 부서져 내릴 것 같다. 


예를 들면 이런 문장: "하지만 수직성은 오랜 수련을 요구한다. But verticality requires a long apprenticeship." 

공기적 수련. 공기적 자유. 공기적 본성...... : 이런 구절들 모두. 





이건 <공기와 꿈>에서 니체 장은 아니고 그보다 훨씬 앞의 "나는 꿈" 장인데 

어제 자기 전 이 대목 읽다가, 세상을 떠나기 직전까지도 이런 글을 쓸 수 있었던 바슐라르에게 새삼 감탄함. 

(*이 책은 그의 만년의 책은 아니다. 그러나 아주 만년의 문장들에서도, 하나도.......... 감성이나 지성이나 퇴행, 없다.)  


오늘 잠에선 나는 꿈을 꾸자. 

늘 꿈없는 잠만 자게 된 건, 내게 불행이 너무 많았기 때문인가. 

왜 행복한 꿈은 더 이상 꾸지 않는가.. 면서 잤는데 오늘 새벽 나쁜 꿈 꾸다 깸. 


어제 수업에선 

고등교육의 역할. 대학이 사회에서 해야 할 일. 이런 주제였는데 

"대학에서 가장 중요한 건 학생이 자기 전공에서 가장 뛰어난 선생님을 만나는, 보는 거라 생각한다"

고 말한 학생이 있었다. 나도 정말 그렇다고 생각한다면서, 이 점에서 하나 다행인 건, 이건 이상한 다행이지만 

그런 선생님을 만날 수 있는 학교는 한국에 없다고 생각해도 된다는 것..... 


이 지점에서 정신차리고 내가 한 말을 복기함. 학생들은 이미 다수 벙찜...;;; 음 말조심 자나깨나 말조심해야 하긴 한다. 

그렇긴 한데, 아주 틀린 말을 한 건 아니라고도 생각됨. 한국에 진정한 일류대가 없다는 것도 사실 어떤 점에선 다행.... 같은 생각도 진심으로 한 적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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