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 3장, "유년기로 향하는 몽상"에 이런 대목이 있다: 



<공간의 시학>을 쓰면서, 우리가 보기에 집의 "심리학"을 구성했던 주제들을 취합하던 때, 우리는 사실과 가치의, 현실과 꿈의, 기억과 전설의, 기획과 환영의 변증법들이 벌이는 끝없는 유희를 보았다. 이 변증법들 안에서 검토될 때, 과거는 고정되어 있지 않다. 과거가 기억이 되어 복귀할 때, 그 기억은 언제나 같은 특징을 가지며 언제나 같은 빛 속에 있는 기억이 아니다. 과거가 인간적 가치의 그물 안에, 잊지 않으려 하는 사람의 내면적 가치 안에 놓이자마자, 과거는 기억을 담당하는 정신과, 자신의 충실성에서 자양을 취하는 영혼, 이 둘의 이중의 힘과 함께 나타난다. 영혼과 정신은 같은 기억을 갖지 않는다. 그 분리를 알았던 설리 프루동은 이렇게 썼다. 

 

오 기억이여, 내 영혼은 물러선다

놀라서, 너를 갖기가 두려워.



(옮겨 오면서 다시 확인. 바슐라르, 그의 옹고집. 바슐라르가 최고다. 이런 거 그 아닌 누가 했으랴...). 

끝부분이 영어판에선 이렇게 되어 있다: The soul and the mind do not have the same memory. Sully Prudhomme, who has experienced this division, wrote: 


O memory, the soul renounces, 

Frightened, to conceive you. 


<공기와 꿈> 한국어판 보다가 4장에서, "그러한 통합은 공기의 상상력에 관한 이미지들을 통해 용이해진다. 셸리적인 교감들은 여기서 심오한 심리학적 의미를 갖게 된다. 여기서 영혼이 형성된다." 이런 문장을 보고 "여기서 영혼이 형성된다" 이 한 마디가 순간 참으로 심오하게 들려오면서, <몽상의 시학>에서 위의 대목을 기억했다. 기억엔 사회적 기억이 있고 그것은 정신이 담당하지만, 사회와 역사에서 떠난 영역에서 살아가는 영혼의 기억도 있다. <물과 꿈>에서 한 문장, "물의 고통은 무한하다" 혹은 <공기와 꿈>에서 쓰인 구절로 "공기적 존재" "공기적 전도" 이런 것들의 체험이 영혼의 기억. 바슐라르의 문학책들 전부가 영혼의 기억의 탐사에 바쳐진 책이라 해도 아주 틀린 말이 아닐 것인데. 


<공기와 꿈> 4장엔, 정신의 현실주의에 맞서는 시적 초자아(영혼)의 이상주의.. 의 힘을 찬미하는 문장들이 있는데 

중요하고 재미있고 신비롭지만, 이것들도 인용하고 논의하려면 얼마나 어려울까도 함께 알아보이니 

중요하고 재미있고 신비로운데 동시에 좌절스러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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