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 더다 책 보다 썼던 노트엔 이런 것도 있었다.  

내가 아직 젊던 (30대. 쓰고 보니 그 시절이 내게도 있었다. 내가 제일 예뻤.. 이진 않고 젊었.. 던 때. 제일 아니고 조금 젋었던 때) 시절이라 지금보다 아주 많이 순진하고 (유치하고) 기운이 넘친다는 걸 알아봄. 10년은 안 되는 세월이 흘렀는데 그 사이 "what beasts human beings really are"에 관한 내 몫의 배움을 피하지 못한 것같다. 




1960년대에 심리학자 R. D. Laing은 가족이 광기를 유발하도록 고안된 기계라고 선포했다. 그러고 보면, 상대는 비난하고 자기는 면죄하는 게 가족내 의사소통의 핵심적 방법인 듯하다. 어떤 아이이든, 자기 부모와 형제들이, 가족내 불화에 관한 유진 오닐의 파란만장한 드라마 <밤으로의 긴 여로> 속 인물들과 다를 바 없다고 느끼게 되는 때가 온다. 자, 그럼 우리도 그들처럼 가슴을 쥐어 뜯으며 소리 지르고 흐느끼며 울도록 하자!

 

최근 인기 있는 장르, 회고록에 대해 잠깐 생각해 보라. 회고록이 성공하려면, 주인공이 불행한 가족에 태어나는 것이 좋다. 술 취한 어머니. 폭력적인 아버지. 조울증에 걸린 형제들. 약물 중독에 빠진 자매들. 성추행을 일삼는 삼촌들. 이런 것이 유년기와 사춘기를 다루는 현대의 몽상 속에 반드시 등장하는 주요 인물들이다. 일찌감치 공포와 정신적 외상을 겪은 다음이라야, 영적 개종이나 지적 에피파니와 함께 이야기를 끝낼 수 있다. 이것이 유일한 방법이다. 게다가, 행복한 유년기라니? 그것만큼 감상적인 것도 있는가.

 

이 모두를 우리가 알고 있더라도, 그럼에도 우린 다수의 엄마와 아빠들이 그들의 최선을 다한다는 걸 기억해야 한다. 이들은 날이면 날마다 카풀을 하고, 직장에 출근하고, PTA 모임에 늦더라도 나가며, 세탁을 하고, 설거지를 하고, 아이들과 축구 경기를 한다. 이들은 그들을 필요악 정도로, 아니면 자기들 용돈의 출처로만 아는 십대의 자식들과 토론을 한다. 아버지와 어머니들이 거울 속에 비친 그들의 얼굴을 볼 때, 한때 빛났던 얼굴들 대신 푹 꺼지고 주름이 깊이 패인, 우리가 사진으로 보아 알고 있는, 19세기 네브라스카에서 사이클론이 앨펄퍼 수확을 날려 보낸 직후 오두막 앞에 웅크리고 서 있던 농부들처럼 먼지 붙어 창백하고 핼쓱한, 얼굴을 볼 것이다. 흐릿한 잿빛의 어둠 속을 들여다보며, 그들은 다음의 타격을 기다린다. 그들을 이렇게 만든 건 그들의 - 나이가 열살이든, 스무살이든 아니면 마흔살이든 - 자식들이다.

 

그러니 나는 젊은이들에게 조그만 조언을 하고 싶다. 부모는 그만 원망하라 (Cut the old folks some slack).

-"Domestic Unrest," 79-80.

 

   R. D. Laing. 60년대 구루같은 모습.

 

 


 

*맨 마지막 문장은, 꼭 맞게 번역하기가 쉽지 않은 문장. (모자란 면이 있더라도) 좀 봐줘라. 눈감아줘라. 이런 뜻이긴 한데,

그게 우리말로 그렇게 말하면 영어엔 있지 않은 서열이 (그것도 전도되어) 등장한다고 해야겠지. 그러고 보면 한국어라는 언어 자체에, 서열 따지기의 무의식이 있다고 말할 수 있는지 모른다.

 

*대출했던 책들 반납 운동을 하는 중인데,

마이클 더다의 이 책 반납을 할까 말까 결정하려고 펴서 넘기다 마주쳤던 대목. 처음 읽을 때도 인상적이었던 대목이다.

왜 인상적이었느냐. "부르주아를 향한 혐오, 이것이 모든 윤리의 출발점이다" 플로베르의 말. 그 말이 생각나게끔, 부르주아의, 자기는 알지 못하는 악덕을 잘 보여주는 문단들이라 생각했다.

 

*그 악덕이 무엇이냐.

그 어떤 급진성, 전복성도 무력화시키는 힘으로써의 (멍청하고 오만하고 탐욕적인) 자기애?

태양 아래 새로운 것이 없으므로, 그 무엇에도 놀라지 않는 능력. 가족이 광기를 유발하기 위한 기계라는 R. D. Laing의 아이디어에서 출발하여 짧은 세 문단만에 아무렇지 않게 "노인네들, 봐줘라"로 끝낼 수 있기도 쉽지 않을 것이다. R. D. Laing이 급진적이었다고 하면 코웃음칠 사람도 있을지 모르지만 (*R. D. Laing 저서 두어권을 뒤적이면서 받았던 인상은, 깊이 혁명적이고 전복적이면서 동시에 의식적으로 시대의 조류를 타고 또 이용했던, 그런 아이디어들을 제시했던 이. 과연 60년대의 자식이라 할 만한), "가족이 광기를 유발하는 기계" 요 아이디어는 맥락과 상관없이 그 자체로 급진적이라고 말하고 싶다.

 

*무엇이 급진적인가. 

그로 인해, 거기 동의하기 위해서든 동의하지 않기 위해서든, 내 경험의 전반적 검토가 불가피할 때. 
"가족은 광기를 유발하는 기계"란 아이디어도, 거기 비춘 내 경험의 진짜의 점검이 있은 다음에야 논평할 수 있는 아이디어일 것이다. 위에 옮겨 온 대목에서 마이클 더다의 목적이, 이 아이디어의 논평에 있던 건 아니겠지만, 그렇다면 이렇게 "나야 물론 이런 것도 다 알고 있어" 식의 인용은 (그 아이디어의 가치엔 무관심하면서 말이다) 하지 않는 게 좋지 않을까.

 

*라고 어쩌고 저쩌고 쓰고 있다보니,

부르주아니 급진적이니를 떠나 세상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는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

1. 그게 어떤 아이디어든 거기 반응하기 위해 (그것의 가치를 평가하기 위해) 그에 비추어 자기 경험을 검토하는 사람,

2. 1번과 같이 하지 않는 사람. ㅎㅎㅎ;

 

오스카 와일드의 말을 빌어 "가치엔 무관심하고 가격엔 관심이 많은" 사람을 부르주아라고 한다면,

그런 이유에서 2번에 속하는 부르주아들이 있는 거겠지. 마이클 더다와 같은 경우엔, 가치에도 민감하고 올바르게 관심을 갖는 듯한 때가 있지만 그게 거의 공정한 (그가 보기에 공정한) 가격을 매기고자 함에서라고 ...., 참 아침부터 쓸데없는 생각을. 

 

 

 

  

 

 

(*덧붙임. 밤이 되어 술마시고 있는 중).

*조금 더 생각하면, "술 취한 어머니. 폭력적 아버지. 약물 중독에 빠진 자매들..."

등등의 주요 인물들이 벌였던 가족 드라마, 거기서 고통 겪은 이들을 끌어오면서 하는 '가족'이 주제인 얘기를,

이따위로밖에 할 수 없음에 대하여 점점 더, 어이없을 수도 있다. 그와 동시에, 이 정도의 생각이라도 하는 사람이 어딜 가든 0.1%나 될까말까임 또한 알기 때문에, 어떻게든 존경을 보내고 긍정해야할 거 같은 갈등의 상황에 빠진다.

 

*사랑이란 건, 누가 누구를 사랑하는 것이든,

진짜로 '대인배'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거. 말하자면, 깊고 진실하게 느끼고 생각하는 사람.

에고는 작고 프라이드는 큰 사람. 등등. 뭐가 '대인배'인지 정의는 여러 가지로 할 수 있을 것이다. 어쨌든, 아예 그걸 할 수가 없는 사람들이 실은, 다수라는 거. 가까운 타인을 향해 내가 행사할 수 있는 권력의 중요한 (어쩌면 유일한) 한 방법이 그를 사랑하지 않기이며, 부모가 자식에게 그러는 일도 언제나 일어난다는 거. 그런데도 "그래도 그들은 최선을 다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인지. 사랑을 거둠, 이것도 사랑의 중요한 한 방법이라고 우길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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