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들은 다음의 사실에서 시작한다. 20세기에 과학과 기술의 진보는 전쟁, 기근, 억압 없는 세계가 더 이상 유토피아가 아니게 하는 수준에 도달했다. 그러나 그 세계는 실현되지 않았다. 왜? 저자들에 따르면, 현대의 기술적 진보가 "이론적 의식의 후퇴"와 함께 하기 때문이다. 기술의 진보는 사회의 자연 지배, 유례 없는 수준에서 사회의 자연 지배를 뜻했다. 이 진보한 세계에서 기술적 이용의 대상이 아닌 모두가 무가치하다. 진리, 자유, 정의, 인간성의 원칙들은 모두 현실성을 상실하고 공허한 말로 남을 뿐이다. 사회에서 이 원리들을 실현하겠다는 야망이 실체를 갖지 못한다. 자유가 무엇인지 모른다면 정치적 층위에서 자유를 위한 투쟁에 나설 수 없다. 


진보의 이념은 "이성"의 기치 하에 진행된 18세기 부르주아 계몽 철학의 핵심 요소였다.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는 어떻게 이 철학 운동이 사회적 실천으로 이어지기도 전에, 그들이 "계몽의 변증법"이라 부르는 과정에 의하여, 자체의 가치를 상실하는가 분석한다.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는, 진보의 이념에 내재하는 모호성이 분명히 인식되고 극복되지 않는 한, 이성의 자기 파괴가 미래에도 계속될 것임을, 그와 함께 전체주의의 새로운 형식들이 생산될 것임을, 보여준다." 



3년을 읽었는지 4년을 읽었는지 (찾아보면 확인 가능한데 찾아보지 않는다) 매일 한 문단씩 오래 읽은 <부정변증법>이 이제 끝나기 1페이지 전. 이 어려웠고 때로 (아주 가끔) 공허했던 책에 이어 읽을 것은 불어판으로 (ㅎㅎㅎㅎ 웃어야 할 거 같. 실제로 웃) <계몽의 변증법>. 위에 대강대강 옮겨 본 두 문단은 불어판 뒷표지에 실린 소개글이다. 영어판 뒷표지에 실린 소개글과 많이 다르다. 특히, 기술적 진보가 "이론적 의식의 후퇴"와 함께 하기 때문에, 가능한 유토피아가 실현되지 못했다.... 는 게 저자들의 출발 지점이다, 이 대목. "이론적 의식의 후퇴" : 이 구절에 이렇게 밑줄을 긋는다는 그것이 프랑스적이라 느껴진다. 영어판에서는 (문화산업, 반유태주의, 2차 대전 중에 쓰인 책으로서....) 구체적 사항들에 집중하는 소개. 


















<진보의 종언>. 

이 책 부제는 Decolonizing the Normative Foundation of Critical Theory. 

프랑크푸르트 학파가 식민주의의 문제에 얼마나 둔감했나 살피고 탈식민주의 문제 의식과 프랑크푸르트 학파가 만나게 하기를 도모하는 책. 지금 이 주제로 연구하는 연구자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굉장히 호평받은 책인데, 나는 읽다가 더 이상 읽을 힘이 남지 않아 책을 치우고 그런 후 별로 아쉽지 않은 상태에서 오래 살아왔다. 이런 문장, 공허하다. 그게 15회 반복되면. 그러면 읽을 힘이 남지 않음. 특히 미국에서, 유능한(유망한) 학자들이 이 경로로 가는 경우 적지 않은 거 같다. 무얼 하든 순수히 아카데믹함. 물론 그렇지 않은 (아카데믹하고 사회적 실천력도 강력한) 학자들도 많다. 


<계몽의 변증법>. 처음 읽을 때부터 지금까지 감탄하고 때로 과몰입하고 옹호하고 그래온 책. 나는 이 책에 편파적이고 이 책이 받은 어떤 비판에든 (누가 나보고 그래 보라면) 그 비판에 맞서 이 책을 옹호하기 위해 칩거하고 머리 싸맬 의지, 등등 있다. 그렇긴 한데 이 책 포함 아도르노 저술들에 그가 해결하지 못한 곤경, 그의 딜레마... 이런 것이 점점 더 보이기도 한다. 만일 이성의 자기 파괴, 새로운 형태로 부활하는 전체주의, 이 문제들을 아도르노와 같이 생각하면서, 그러나 그의 곤경, 딜레마는 피하고 싶다면, 내 경험으로는 바로 그와 관련해 프랑스 저자들에게서 극히 중요한 도움 얻을 수 있다 쪽이다. 프랑스 저자들 중에서도 특히 제국(제국주의) 프랑스를 지옥으로 살았던 사람들. 그들이 알았던 특별한 지옥에서 같이 한 철을 살아보기.


사실 저걸 (아도르노의 딜레마를 프랑스 사유로 해결하기) .... 써보려고 하는 중인 것이긴 합니다. ;;; ㅎㅎ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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