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의 중독자로서 아침에 걸을 때도 그렇지만 집안일 할 때도 강의 자주 듣는다. 

"장기 19세기, 유럽 1789-1917" 이런 강의도 있는데 내 관심사와 일치하는 주제고 요즘 틀어놓는다. 

프랑스 혁명에서 시작하고, 혁명은 (30년, 48년 혁명까지 이어지면서) 내내 아주 많이 논의된다. 


기억에 남는 한 대목. 

"혁명가들은 교육도 개혁하고자 했다. 

교육은 인간의 정신 형성에 관한 것이다. 인간의 정신을 어떻게 형성할 것인가. 

혁명가들 자신이 대부분 가톨릭 학교에서 교육받은 것을 생각하면, 이 관점이 그렇게 맞는 관점이라고 할 수 없다. 나는 나 자신 학교에 있는 입장에서 학교에서 배우는 것과 인간 정신이 바로 연결되는 게 아님을 안다" 



조금은 농담으로 의도된 것 같기도 했지만 

재미있다, 웃기다 보다는 "아이고 그렇기도 하지만 그래도 동의하지 않습니다" 쪽이었던 말. 


캐롤 사임즈였다면 

어떻게 가톨릭 학교에서 혁명가가 나왔는가. 이게 질문이면 그 질문을 꽉 물고 좋은 답이 나올 때까지 놓지 않았을 것이다. 답이 나오게 하려고 도서관에 매일 갔을 것이다 (도서관에서만 볼 수 있는 핵심 자료가 있을 거같은 주제). 설득되지 않을 수 없는 관점과 사료를 우리에게 주었을 것이다. 가톨릭 신학의 무엇이 반역과 적대적이지 않은가. 뭐 기타 등등. 등등. 그녀가 주는 답에는 인간에 대한 깊은 관심과 이해가 있었을 것이다. 


몽테뉴가 동양인들을 "아직 문명을 모르는 어린이"로 본 것에 대해 강하게 비판하면서 그것과 연결해서 그럼에도 몽테뉴의 정신이 얼마나 섬세하고 오류의 수정에 무한히 열려있는 정신이었나 이런 얘기를 하기도 하는데, 사실 몽테뉴에 대해 정답 같은 논의일 것이지만 그럼에도 몰라볼 수 없었다. 관심과 이해의 깊이. 


학교와 인간의 정신. 

타인과 있으면 그의 정신을, 그의 존재를, 내가 흡수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내게 고독이 필요하다. 릴케가 했던, 대강 이런 취지의 말. 그게 릴케만 그런 게 아닐 것이다. 정신의 외부 지향이 아예 없는 특별한 사례 제외하고, 모든 인간이 그럴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타인과 함께 할 때, 달라지려 하지 않아도 달라지고, 배우려고 하지 않아도 배우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며들다" 이 말이 유행어 된 이유가 일부 여기 있는 거 아닌가? 내가 만나는 사람의 인간관, 세계관, --관들이 어김없이 내게 스며들고 말지 않나? 


"인간에게 자기 이득보다 중요한 게 없다" 이게 다수의 신념인 곳과 "인간의 정신은 오류의 수정에 무한히 열려 있고자 한다"가 다수의 신념인 곳. 전자의 학교와 후자의 학교. 전자의 학교에서도 혁명가가 나오고 후자의 학교에서도 버러지의 눈으로 국가의 앞날을 보는 사람들이 나오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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