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상반기에 읽은 책 중에서 가장 좋았던 책이다. 

저자는.... 아직 무명. 신예. Pietro Terzi. 2020년에 프랑스에서 (파리-낭테르) 박사 학위 받았고 박사 학위 논문은 프랑스에서 책으로, 학위 논문의 챕터 하나를 확장하면서 영어로 쓰고 낸 것이 저 책. 


책 표지의 인물, 제목의 "레옹 브렁슈빅"은 

저자의 표현으로는 "잊혀진 철학자." 지금 아무도 모르는, 아무도 관심 없는 이 철학자를 왜 탐구하는가... 투로 도입부에서 몇 번 말한다. 


이름을 "브렁슈빅"으로 읽으면 불어 발음과 비슷은 한가도 모르지만 (그냥 저렇게 내가 부르는 이름으로 정해 둠), 어쨌든 내겐 완전히 생소한 건 아니고 꽤 오래 이름은 알아왔던 철학자인데, 그건 그가 바슐라르의 지도교수였기 때문에. 


지도교수. 지도교수까지 알아야 해? 하다가 이름이 수시로 여기저기서 등장하므로 모를 수가 없게 되고, 이름을 아는 걸로 족하지 않습니까, 두 사람의 관계는 청출어람이 다였겠죠 하다가 그게 다가 아니었음을 알게 되고. 그렇다. 이름만 알아두고 건너 뒬 수가 없는 인물이었다. 그리고 조금씩 찾아보기 시작한 브렁슈빅의 책들은 거의 무슨 (과장하면) 기절초풍. 


여기서는 

그냥 숨만 쉬어도 

내 무덤 파는 삽질이지. 

프랑스에서는 

너 브렁슈빅의 책을 열어라. 

숨만 쉬어도 그것이 정신의 삶이다. 

여기 와서 정신의 삶 살고 가세요~~~ 


저런 느낌이었다. 


저런 느낌이 있었기 때문에 브렁슈빅 연구서, 박사 학위 논문의 챕터 하나를 확장한 책까지 보게 되었던 것인데, 처음엔 별 기대 없었다. 내내 지루하고 아마도 침소봉대하겠지. 학위 논문도 아니고 챕터 하나를 확장한 책이라니. (....) 그런데 얼마나 그것이 틀린 기대였는지. 이 책에도 기절함. 프랑스. 위대한 나라네. 이런 박사가 나오네. 아씨. 나는 때려쳐야지. 이제 미련이 없다, 곧 완전히 미련이 없어질 것이다, 나는 이제 편한 마음이 되어 다 그만두겠다.  



Edge of Objectivity an Essay in the Hist: Gillispie, Charles C: Amazon.com:  Books




<객관성의 칼날> 쓴 길리스피가 프랑스 과학사 주제로 2권 연작을 쓰기도 했다. 

1권은 구체제 시기, 2권은 혁명기와 나폴레옹기. 이 중 2권을 보면 "이 시기 프랑스의 문학과 음악, 미술은 침체했다. 그러나 프랑스의 과학은 자체의 은하를 형성했다. 라브와지에, 라플라스, 라그랑주, 카르노, 퀴비에, 라마르크, 프레넬, 푸리에..... (*목록이 실제로 엄청 김)" 이런 대목이 앞에 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실제로 깊이 경탄한다는 인상이 든다.  


나는 브렁슈빅과 브렁슈빅을 연구한 Pietro Terzi에게 경탄함. 

"---의 아버지"라는 말에, 실체적인 의미가 있게 되는 일까지 일어났다. 

그는 베르그송과 함께 프랑스 20세기 철학의 아버지였다... 고 말한다면, 20세기 프랑스에서 철학을 한 모두가 그가 먹여준 밥을 먹고 자란 것인 것이다. 매일 매일. 은 아니라면 어쨌든 중요한 어느 시기, 어느 날들에. 그가 그들을 위해 put food on the table 한 것이다. 


우리에게 아버지가 있었는가. 

"아버지 없이 자랐다" 이건 지성의 삶에서는 정말이지 극히 실제적인 의미로 할 수 있는 말이었던 것이다. 




*아이고. 오랜만에 서재 와서 이런 글 씁니다. 

6월, 12월, 반년간지 성격으로다 ㅎㅎㅎㅎㅎㅎㅎ 포스팅이 있게 되는 거 아닌가 하는 중. 

정규직 아니면서 지속가능한 공부 생활. 이것을 실현시키겠다고 지금 생고생하는 중이지 말입니다. 

회고록도 저 실현에 속하는 것인데, 모두 다들 회고록 쓰자고 촉구하는 포스팅을 잠시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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