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의 진보. 그것은 

우리가 몰랐다는 걸 알게 되는 일." 


평범하고 하나마나한 말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바슐라르 과학철학 안에 놓고 보면 좀 심오해지는 말이 아닌가 하게 된다. 어디선가 그는 

"과학사를 읽으며 비이성과 마주칠 때마다 우리는 양심의 가책을 느껴야 한다" 이런 말을 하는데, 그에게 인간이 무얼 "몰랐다" 이건 거의 도덕적 퇴보, 타락. 해서 개혁의 대상. 조상이 몰랐던 것에 후대가 느껴야 할 책임. 바슐라르 과학철학의 이런 면모를 미셸 세르가 '극혐'했다. 나는 너무 좋음. 비이성과 마주칠 때 양심의 가책.......... 이 말 너무 심오하다고 거의 눈물을 흘리며 감동, 감탄. 


과학적 합리성의 면모로 그가 강조하는 하나가 "discursivity"다. 

저렇게 명사형으로는 거의 쓰지 않고 (두세 번 정도?) 형용사 형으로 (discursif. discursive) 아주 많이 쓰신다. 이 단어를 그의 책에서 처음 접하면, 난데없게 느껴진다. "담론(언설)에 관한" --> 단어의 사전적 의미에 충실하게 이런 의미를 적용해 보면 말이 되지 않는다. 아니 여기서 discursive라니 도대체 무슨 말씀이십니까. (....) 나만 그랬던 게 아니구나 했던 게, <새로운 과학 정신> 영어 번역 보면 저 단어를 debatable로 번역하기도 하고, 제대로 번역하지 못했다. 저 책의 역자 또한 깊이 어리둥절. 




저 단어로 그가 말하고자 한 건 

합리성의 미완의 성격, 그리고 진행의 성격. 

즉각적인 것, 최종적인 것의 정반대의 성격. 

우리는 단번에, 최종적으로 인식하지 않는다. 우리의 인식은 미완이고 진행 중이다. 


저 면모들을 특히 강조하는 어휘이지만 그와 함께 합리성의 대화적 성격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다. 합리성, 그리고 인간의 인식 행위를 바슐라르가 말하는 "discursive"의 의미에서 이해할 때, 거의 구원을 성취할 수 있지 않나, 여기 구원이 있는 거 아닙니까, 나는 생각했다. 


특히 당신이 선빵에 지쳤다면. 

혹은 당신이 거의 늘 혼자라면, 당신의 생각을 언제나 이어가기 위하여. ;;;;;;; 하튼 바슐라르의 "discursivity" 이것엔, 잘 용서하기와 잘 이끌기의 미덕이 담겨 있지 않나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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