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 에세이집에 

히친스가 타계하기 전, 그러나 투병 중이었고 그가 쓰는 글들이 "죽기 전 쓰는 부고"처럼 

읽히던 때 히친스와 우정을 회고하는 내용 에세이가 있다. 


특히 와닿은 건 

히친스가 타고난 반항아였다는 대목. rebel. 이 유형이 흔할 거 같지만 극히 드물고 

에이미스 자신은 그 유형으로 히친스 포함 (그 자신은 제외) 단 세 사람만 알았다고 한다. 

반항아를 어떻게 규정할 것이냐. 일단 정의한다면: 누구에게도 무엇에게도 자동적인 존중이 없는 사람. 

이들은 그들보다 우위에 있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에게 굽히지 않으며 심지어 예의도 갖추지 않는다. 이건 

말할 필요 없이 명백하겠고, 이들은 그들보다 아래에 있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에게도 굽히지 않으며 심지어 

예의도 갖추지 않는다. (*예의로 번역한 단어는 "civility". 이렇게 옮겨 보니 원문 의미가 약간 비틀리는 

느낌이다. 실제로 글 전체를 번역한다면 다르게 번역해야... 아무튼 "그래야 한다면 무례할 수 있는" 정도로...) 


에이미스는, 도덕성의 출발이 매너인 건 당연하고 히친스가 

평소 대단히 매너가 뛰어난 사람이긴 했지만, 히친스의 매너는 언제나 

사안 자체에 의해 결정되었다고 한다. 그것이 반항아의 방식이다. 


이런 반항아 곁에서 

평범한 인간은 진화가 덜 된, 덜 떨어진 인간으로 보인다. 

평범한 인간은 흔적 기관같은 편견과 신념, 공경, 잠재의식과 의식 사이에 존재하는 금기와 억압, 군중 본능, 이것들을 

불안하게 통제하며 살아간다. 두려움 없이 편애(편가르기)도 없이, 아무 내면의 북소리도 듣지 않으며, 말하고 글 쓴다는 것. 그러는 이들의 목소리는 우리에게 소중하다




특히 저 마지막 문장. 

To speak and write without fear or favor (to hear no internal drumbeat): such voices are invaluable. 


내면의 북소리. 이게 없는 사람. 

한국에선 누가 그런 사람인가? 


아도르노가 특히 <부정 변증법>에서는 

정신의 자율성. 인식의 객관성. 의미의 구속력. 이렇게 정리할 만한 세 사항을 

연결, 탐구한다고 생각하는데, 이 세 사항 모두가 한국에서 극히 허약하지 않나. 

여러 미묘한 차이, 뉘앙스를 담아내는 형용사들이 많다. 노랗다 하나가 아니고 노르스름, 노르께, 노릿노릿 등등. : 한국문학이 노벨문학상 받지 못한 이유로 어휘들의 번역불가성 말하면서 나오던 저런 얘기. 


저런 얘기가 지목하는 건 "인식론적 재난" 아닌가? 

정신의 자의성만 (자율성이 아니라) 존재하며, 해서 인식의 객관성이 부재하고 

의미 구속력도 허약하다는 재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