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부러진 경첩
존 딕슨 카 지음, 이정임 옮김, 장경현 감수 / 고려원북스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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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추리소설 팬의 한 사람으로서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딕슨 카의 대표작을 따끈따끈한 신간으로 이렇게 읽을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는다는 말부터 해야겠습니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추리소설 중에 가장 기본적인 셜록 홈즈 책조차도 완역본은 헌책방이 아니면 구할 수 없던 때가 있었습니다. 추리소설 팬들을 모두 헌책방으로 내몰았던 암울한 시기가 바로 엊그제 같은데 이제는 대체 어떤 책을 골라야 될지 난감할 정도로 하루가 멀다하고 추리소설 신간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으니 격세지감이 절로 실감난다고 하겠습니다.

이런 추리소설 출간 홍수 속에서도 유독 구하기 힘든 작가가 있었으니 바로 이 책 '구부러진 경첩'을 쓴 '존 딕슨 카'였습니다. 물론 다시 부활한 동서 미스터리 북스라든지 몇몇 출판사의 책들을 통해 예전에 소개됐던 카의 작품들이 일부 재간되긴 했지만, 코난 도일이나 모리스 르블랑, G.K.체스터튼, 애거서 크리스티, 엘러리 퀸 등처럼 전집화 또는 미번역된 작품이 새로 소개되는 재평가 대열에는 여전히 끼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의 작품들이 추리소설에 미친 영향이나 그의 대표작들이 지닌 역사적 가치 등을 봤을 때 딕슨 카는 이들 작가들에 결코 뒤지지 않는 거장인데도 우리나라에선 그동안 이상할 정도로 홀대를 받아왔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최근에 코난 도일 아들과 합작해서 셜록 홈즈를 충실하게 재현한 '셜록 홈즈 미공개 사건집'이 번역되더니 마침내 그의 전성기 대표작인 '구부러진 경첩'마저 선을 보이고 말았습니다. 오매불망 기다려왔던 딕슨 카의 작품이다 보니 기대가 많이 됐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셜록 홈즈 미공개 사건집'이 깔끔한 셜록 홈즈물이라면, 이 작품은 골수 딕슨 카물입니다. 그의 불가능 범죄 취향과 오컬트적 기호가 십분 발휘된 작품인 것입니다.

사실 딕슨 카는 웬만한 추리소설 독자라면 누구나 그 이름을 알 정도로 유명한 주류작가지만 다른 관점에서 보면 비주류 작가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왜 그런고 하니 정통파인 코난 도일이나 애거서 크리스티, 엘러리 퀸 같은 작가들에 비해선 이른바 B급 정서를 많이 내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B급 정서란 그가 데뷔작 때부터 줄곧 집착해 온 특유의 어두운 분위기들, 마녀라든지 몽마라든지, 길로틴, 흡혈귀 전설, 밀랍인형, 강신술 등등 동원할 수 있는 온갖 초자연적 현상과 사악한 흑마술 등에 대한 그의 지나칠 정도의 관심에서 우러나온 독특한 작품 경향을 두고 하는 얘깁니다.

이런 그의 남다른 취향은 이런 걸 좋아하는 독자들에겐 그의 작품에 더욱 열광하게 만들었지만, 다른 한편으론 그의 작품을 꺼리게 만든 원인이 됐던 것도 사실입니다. 그동안 일종의 컬트 작가로 불려왔던 것도 다 이런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선 예전에 이런 딕슨 카를 온전히 받아들이기엔 아직 소화불량에 걸릴 여지가 다분했던 모양인지 다른 정통파 작가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관심이 적었던 거 같습니다. 하지만 최근 들어 우리나라 독자들도 기이하고 괴기스런 작품들에 거부감이 적어지면서 오히려 이런 작품들을 일부러 찾아서 읽으려는 단계까지 도달했기에 카의 작품은 이런 독자들의 요구에 부응할 수 있는 최적의 작품이 되었다고 하겠습니다. 딕슨 카의 작품이 우리나라에서 각광받을 수 있는 절호의 시기를 드디어 맞이한 셈이죠.

위에서 설명한 딕슨 카의 암흑 취향은 이 작품 '구부러진 경첩'에서도 유감 없이 발휘되고 있습니다. 책 도입부에선 영국 추리소설에서 가끔 볼 수 있는 누가 진정한 유산 상속자인가를 다투는 치밀한 법정 공방을 보는 듯한 대결이 흥미진진하게 펼쳐지지만, 결국 뒤에 가서 본색을 드러내더군요. 처음엔 멋모르고 느긋하게 관전하고 있다가 갑자기 기분 좋게 당한 기분이었습니다. 움베르토 에코가 지은 '푸코의 진자'에서 볼 수 있는 '서양 문화 뒤에 감춰진 어두운 그늘'에 대해 개인적으로 깊은 관심을 가진 저에겐 '이런 분야까지 관심을 뻗칠 줄이야...' 하고 감탄했을 정도로 아주 유쾌한 시간이었습니다. 미처 몰랐던 사실들을 알게 되어 많은 공부가 됐다고나 할까요? 저처럼 이런 분야에 관심이 많으신 분이라면 분명 마음에 드실 겁니다.

한편 딕슨 카의 또 다른 기호이자 특기인 '불가능 범죄'에 대한 도전도 이 작품에서 역시 제대로 다뤄지고 있습니다. 딕슨 카 하면 흔히 '밀실파 작가'로 불리기도 하는데요. 아무도 빠져나올 수 없는 철통같은 밀실에서 시체만 남겨둔 채 홀연히 사라진 범인의 수수께끼를 기막히게 풀어내는 귀신 뺨치는 솜씨에 절로 경탄하게 되기 때문이겠죠. 이번엔 오픈 된 정원에서 사건이 벌어지기 때문에 '이런! 밀실이 아니구나' 하고 내심 실망했지만, 그게 아니었습니다. 일종의 '변형된 밀실'로서 역시 변함 없는 불가능 범죄였습니다. 불가능 범죄에 대한 딕슨 카의 정열은 정말 끝이 없는 것 같습니다.

트릭에 있어선 불가능 범죄를 다루는 대부분의 본격 추리소설이 그렇듯이 이 책 역시 논란의 여지가 없는 건 아니지만, 개인적으론 만족스러웠습니다. 그의 다른 대표작인 '흑사장 살인사건' 같은 작품과 비교해 봤을 때 크게 무리가 있다고 보이진 않았고, 상당히 맹점을 찌른 아이디어라고 생각되더군요. 오히려 딕슨 카의 기이한 색채가 더욱 강화됐다는 느낌이었습니다.

그런데 저도 기데온 펠 박사를 헨리 메리베일 경보다 조금 더 좋아하긴 하지만, 우리나라엔 왜 기데온 펠 박사 시리즈가 더 많이 나오는 걸까요? 기데온 펠 박사가 나오는 작품 중에 걸작이 더 많아서? 아니면 역시 딕슨 카의 대표 탐정은 펠 박사이기 때문일까요? 심지어 아동용 책 중에 '장님 이발사의 면도날(The Blind Barber/1934)'이란 작품에도 펠 박사가 나왔던 기억이 납니다. 이에 비해 헨리 경은 '흑사장 살인사건(The Plague Court Murders/1934)'과 단편인 '기적을 푸는 사나이(All in a Maze/1956)' 외엔 본 기억이 나질 않네요. 그러나 제가 진짜 좋아하는 딕슨 카의 탐정은 앙리 방콜랭(Henri Bencolin)과 그의 조수 제프 말(Jeff Marle)입니다. 아직까진 '밤에 걷다(It Walks by Night/1930)'와 '해골성(Castle Skull/1931)' 밖에 소개되지 않았지만 다른 방콜랭 작품들도 꼭 전부 다 소개되었으면 하는 개인적인 바람입니다.

딕슨 카의 작품을 보다 보면 그의 개인적인 독서 취향을 알 수 있는 다른 작가의 작품들이 중간중간 언급되어서 아주 흥미로운데요. 이번에도 에드거 앨런 포가 또다시 언급되었고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도 다시 나왔던 것 같습니다. 늘 관심이 갔던 '유돌포 성의 비밀'도 보이니 이 책도 진짜 읽고 싶어지네요. 거기에다 반 다인의 책에 등장했던 그 범죄학 서적도 나오니까 왠지 반갑더군요.

이 책의 또 다른 의의는 반가운 고려원의 부활입니다. 고려원 하면 미스터리 팬들에겐 '양들의 침묵'과 '독수리는 내리다', '마지막 형사', '마크스의 산', '석양에 빛나는 감' 등등 주옥같은 미스터리 책들을 많이 내놓았던 출판사로 유명합니다. 1990년대에 한차례 불었었던 추리소설 붐을 주도했던 고려원 미스터리 책들을 잊지 못하고 있는 독자 입장에선 딕슨 카의 책으로 다시 돌아온 고려원 북스에 더욱 기대가 됩니다. 아무쪼록 예전 고려원의 명성에 뒤지지 않는 알차고 좋은 책들을 예전만큼 꼼꼼하고 치밀하게 만들어 주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이 글을 읽는 당신이 진정한 미스터리 팬이라면 이 작품은 절대 놓치지 마시라고 말씀드리고 싶네요. 딕슨 카의 책 한 권 읽어보기 위해 또다시 20여 년을 하염없이 기다리지 않기 위해서라도 이 책만은 반드시 성공했으면 좋겠습니다. 이런 책이 발표된 지 70년이 지나서야 소개될 수밖에 없는 우리의 현실이 서글프기도 하지만, 역으로 생각하면 아직도 우리에겐 꼭 읽어야 할 황금기의 보물 같은 작품들이 얼마든지 많이 남아 있다는 뜻도 되기에 어떤 점에선 행복하기도 합니다. 미스터리의 세계는 정말 깊고도 끝이 없는 거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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