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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도
가와바타 야스나리 지음, 정난진 옮김 / 눈과마음(스쿨타운) / 200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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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옛 수도인 1000년 고도(古都) 교토(京都)의 사계절을 배경으로
어린 시절 헤어진 일란성 쌍둥이 자매의 기구한 사연을 가와바타 특유의
차분한 문체로 아름답게 수놓은 작품이다.

폴 오스터의 '뉴욕 삼부작', 에드거 앨런 포의 '윌리엄 윌슨',
마크 트웨인의 '불가사의한 이방인', 이상의 시 '거울' 같은
여타 작품들처럼 나와 똑같은 또 다른 나를 찾아 나서는
'도플갱어적 소재'를 서정적인 교토의 풍물들과 매끄럽게
조화시킨 한 편의 우아한 실내악 같은 작품이다.

나는 또 다른 나의 환영일까? 또 다른 나는 나를 비추는 거울일 뿐일까?
나의 자아가 수십 수백 개로 분열된다 한들 나의 본질은 오직 하나일 뿐
이기에 우리 모두는 영원히 외로울 수밖에 없다는 서글픈 진실로 인해
이마에 떨어지는 눈송이가 더욱 차갑게만 느껴지는 작품이다.

읽으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해주는 작품이며, 쌍둥이 자매의 가슴 뭉클한
사연을 통해 각자의 입장에서 자기 자신을 돌아보게 해주는 소중한 경험을
선사해 주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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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플 플랜 모중석 스릴러 클럽 19
스콧 스미스 지음, 조동섭 옮김 / 비채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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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하지는 않지만 이야기 전개를 짐작할 수 있는 언급이 포함되어 있으니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우선 책을 받아보고 생각보다 두툼한 두께에 놀랐습니다. 이 책의 기본 아이디어를 대충 알고 나서, 나올 수 있는 스토리가 그리 많지 않을 거라고 예단했던 저의 경솔함을 보기 좋게 배신하는 묵직함이었거든요. 대체 이 작가가 무슨 능력으로 단순한 아이디어를 갖고서 저런 어마어마한 분량을 만들어냈는지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더군요. 첫인상부터 '심플 플랜'은 결코 만만치 않을 것임을 예고하고 있었던 겁니다.

흔히 서스펜스라고 하면 소설 속 인물이 어떤 곤경에 처하게 되면서 긴박하고 숨막히는 위기들에 빠지는 아슬아슬한 느낌을 줌으로써 독자를 사로잡게 마련입니다. 영화 쪽에선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이 이런 장르를 재치 있게 잘 다룬 것으로 유명하죠. 미스터리 작가 중에는 역시 윌리엄 아이리시가 대표적입니다. 주인공들은 자신도 모르게 어떤 사건에 말려들게 되면서 그 사건에서 어떻게든 빠져나오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경우가 많습니다. 서스펜스를 극대화하기 위해 이런 장르에선 대개 평범한 사람들이 주인공인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이 책, '심플 플랜'은 단순한 서스펜스라고 부르기 힘든 그 무언가가 소설 중심 속에 또아리를 틀고 앉아있습니다. 이 작품은 서스펜스이기 이전에 범죄소설로 볼 수 있기 때문일 겁니다. 카트린느 아를레의 '지푸라기 여자'나 패트리셔 하이스미스의 '미스터 리플리 시리즈'처럼 범죄를 저지르는 범법자가 주인공이기 때문에 과연 그 범죄가 발각될 것인지 두근두근하게 만드는 것이 묘미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범죄소설이지만 주인공들은 완전범죄를 저지르는 데 능숙한 타고난 재주꾼들이 아니라 윌리엄 아이리시 작품의 주인공들처럼 매우 평범한 사람들입니다. 미국의 외딴 시골에 사는 전형적인 시골 사람들이기 때문이죠. 그들 앞에 어느 날 예기치 않은 행운(?)이 찾아듭니다. 엄청난 거액이 아무도 모르는 눈먼돈이라는 형태로 그들 눈앞에 호박이 넝쿨째 굴러오듯 굴러 떨어졌으니 누구라도 눈이 뒤집어지는 게 인지상정일 테죠. 이제 그들은 그들만이 아는 비밀을 공유한 '공범자'가 됩니다. 과연 그들은 그 비밀을 안전하게 지켜나갈 수 있을까요?

저는 책을 읽으면서 나름대로 스토리를 예상해 봤습니다만, 이야기는 저의 예상과는 사뭇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더군요. 저는 할리우드 영화에서처럼 외부에서 이들을 추적하는 손길이 미칠 거라고 생각했지만, 오히려 내부의 균열이 이들을 붕괴시키는 방향으로 전개됐습니다. '정글북'에서 모글리가 자신의 친구인 흑 표범 바기라와 마주치게 되는 어떤 사건 현장이 연상되는 전개였죠. 이 소설의 기본 아이디어가 옛날 이야기에서 많이 언급되는 그런 소스이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또한 같은 1990년대 작품이어서 그런지 이 시대를 대표하는 또 다른 범죄소설들인 '비밀의 계절'이나 '도끼'를 연상시키는 면도 없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이 소설들 역시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어쩔 수 없이 범죄를 저질러야 하는 사람들을 다루는 작품들이라서 주인공의 심리묘사 등에서 유사함이 느껴졌거든요. 특히 현재 시점에서 과거를 회상하는 듯한 주인공의 1인칭 서술 시점은 '비밀의 계절'의 그것과 닮아 있어 저의 마음을 더욱 우울하게 만들었습니다.

이 작품은 분명 서스펜스 장르에 해당하기 때문에 읽는 내내 독자들을 조마조마하게 만드는 '불안감'을 느끼게 만드는 데 성공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 작품을 읽는 내내 불안감보다 더 큰 감정의 찌꺼기 속에 빠져드는 느낌이었는데요. 그것은 바로 거머리처럼 들러붙은 채 떨어질 줄 모르는 '불편함'이었습니다.

그것은 소설 속 인물이 전혀 별개의 인물로 느껴지지 않을 만큼 너무나도 우리와 닮아 있다는 사실에서 기인하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소설을 읽고 있는 우리 자신도 소설 속 인물들과 똑같은 상황에 처하게 된다면 얼마든지 똑같은 짓을 저지를 수 있다는 그 피할 수 없는 진실 앞에 경악하게 되기 때문일 겁니다.

그만큼 이 작가는 소설 속 인물을 형상화하는데 있어서 비상한 재주를 발휘하고 있습니다. 두꺼운 분량에도 불구하고 책장은 빨리 넘어가는 편이지만, 그 한 장 한 장이 천근만근의 무게로 느껴질 만큼 저의 어깨를 짓누르는 느낌이 들었던 건 순전히 작가의 이런 비범한 글 솜씨 때문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이야기는 중반까지 불안한 가운데 어느 정도 평온하게 전개되지만 어느 한 순간 폭발하듯 모든 것이 바뀌는 시점이 있습니다. 그야말로 예상을 뛰어넘는 급박한 사건전개라고 할 수 있겠죠. 그 전까지 약간 작가의 솜씨를 반신반의하고 있던 저의 의심을 한순간에 날려 버리는 일종의 합격점이었던 셈이죠.

그러나 작품의 결말은 저의 예상과는 빗나가서 살짝 저를 당황하게 만들었습니다. 저는 그것과는 다른 해결 방법을 생각하고 있었거든요. 어쩌면 이런 결말은 하나의 유행처럼 일정한 패턴을 이루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비록 결말은 제 생각과는 달랐지만 그러한 결말을 이끌어낼 수밖에 없었던 작가의 고심이 얼마나 대단했을지 충분히 짐작이 가고도 남았습니다. 그리고 그런 결말 속에 놓여야 하는 주인공들이 왠지 측은하게 여겨지는 마음은 어쩔 수가 없더군요.

처음에 이 책의 엄청난 두께에 놀랐던 저는, 작품의 질이 예상보다 훨씬 높다는 사실에 더욱 놀랐으며, 이 작품이 작가의 데뷔작이라는 사실에 더더욱 놀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비슷한 시기에 '비밀의 계절'이라는 데뷔작을 들고 우리 앞에 혜성 같이 나타났던 도나 타트와 쌍벽을 이루는 이런 작가를 지금까지 모르고 있던 저의 무지를 부끄럽게 만드는 순간이기도 했습니다.

이런 만만치 않은 분량의 책을 분책으로 내놓지 않고 단권으로 내놓는 결단을 보여준 '비채'의 담대한 자세에 찬사를 보내지 않을 수 없으며, 스콧 스미스라는 훌륭한 작가를 뒤늦게나마 다시 만날 수 있도록 해준 출판사의 혜안에 또한 감사 드리고 싶습니다. 비채에서 이미 나온 그의 두 번째 작품인 '폐허'도 꼭 읽어보고 싶어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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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부러진 경첩
존 딕슨 카 지음, 이정임 옮김, 장경현 감수 / 고려원북스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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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추리소설 팬의 한 사람으로서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딕슨 카의 대표작을 따끈따끈한 신간으로 이렇게 읽을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는다는 말부터 해야겠습니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추리소설 중에 가장 기본적인 셜록 홈즈 책조차도 완역본은 헌책방이 아니면 구할 수 없던 때가 있었습니다. 추리소설 팬들을 모두 헌책방으로 내몰았던 암울한 시기가 바로 엊그제 같은데 이제는 대체 어떤 책을 골라야 될지 난감할 정도로 하루가 멀다하고 추리소설 신간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으니 격세지감이 절로 실감난다고 하겠습니다.

이런 추리소설 출간 홍수 속에서도 유독 구하기 힘든 작가가 있었으니 바로 이 책 '구부러진 경첩'을 쓴 '존 딕슨 카'였습니다. 물론 다시 부활한 동서 미스터리 북스라든지 몇몇 출판사의 책들을 통해 예전에 소개됐던 카의 작품들이 일부 재간되긴 했지만, 코난 도일이나 모리스 르블랑, G.K.체스터튼, 애거서 크리스티, 엘러리 퀸 등처럼 전집화 또는 미번역된 작품이 새로 소개되는 재평가 대열에는 여전히 끼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의 작품들이 추리소설에 미친 영향이나 그의 대표작들이 지닌 역사적 가치 등을 봤을 때 딕슨 카는 이들 작가들에 결코 뒤지지 않는 거장인데도 우리나라에선 그동안 이상할 정도로 홀대를 받아왔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최근에 코난 도일 아들과 합작해서 셜록 홈즈를 충실하게 재현한 '셜록 홈즈 미공개 사건집'이 번역되더니 마침내 그의 전성기 대표작인 '구부러진 경첩'마저 선을 보이고 말았습니다. 오매불망 기다려왔던 딕슨 카의 작품이다 보니 기대가 많이 됐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셜록 홈즈 미공개 사건집'이 깔끔한 셜록 홈즈물이라면, 이 작품은 골수 딕슨 카물입니다. 그의 불가능 범죄 취향과 오컬트적 기호가 십분 발휘된 작품인 것입니다.

사실 딕슨 카는 웬만한 추리소설 독자라면 누구나 그 이름을 알 정도로 유명한 주류작가지만 다른 관점에서 보면 비주류 작가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왜 그런고 하니 정통파인 코난 도일이나 애거서 크리스티, 엘러리 퀸 같은 작가들에 비해선 이른바 B급 정서를 많이 내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B급 정서란 그가 데뷔작 때부터 줄곧 집착해 온 특유의 어두운 분위기들, 마녀라든지 몽마라든지, 길로틴, 흡혈귀 전설, 밀랍인형, 강신술 등등 동원할 수 있는 온갖 초자연적 현상과 사악한 흑마술 등에 대한 그의 지나칠 정도의 관심에서 우러나온 독특한 작품 경향을 두고 하는 얘깁니다.

이런 그의 남다른 취향은 이런 걸 좋아하는 독자들에겐 그의 작품에 더욱 열광하게 만들었지만, 다른 한편으론 그의 작품을 꺼리게 만든 원인이 됐던 것도 사실입니다. 그동안 일종의 컬트 작가로 불려왔던 것도 다 이런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선 예전에 이런 딕슨 카를 온전히 받아들이기엔 아직 소화불량에 걸릴 여지가 다분했던 모양인지 다른 정통파 작가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관심이 적었던 거 같습니다. 하지만 최근 들어 우리나라 독자들도 기이하고 괴기스런 작품들에 거부감이 적어지면서 오히려 이런 작품들을 일부러 찾아서 읽으려는 단계까지 도달했기에 카의 작품은 이런 독자들의 요구에 부응할 수 있는 최적의 작품이 되었다고 하겠습니다. 딕슨 카의 작품이 우리나라에서 각광받을 수 있는 절호의 시기를 드디어 맞이한 셈이죠.

위에서 설명한 딕슨 카의 암흑 취향은 이 작품 '구부러진 경첩'에서도 유감 없이 발휘되고 있습니다. 책 도입부에선 영국 추리소설에서 가끔 볼 수 있는 누가 진정한 유산 상속자인가를 다투는 치밀한 법정 공방을 보는 듯한 대결이 흥미진진하게 펼쳐지지만, 결국 뒤에 가서 본색을 드러내더군요. 처음엔 멋모르고 느긋하게 관전하고 있다가 갑자기 기분 좋게 당한 기분이었습니다. 움베르토 에코가 지은 '푸코의 진자'에서 볼 수 있는 '서양 문화 뒤에 감춰진 어두운 그늘'에 대해 개인적으로 깊은 관심을 가진 저에겐 '이런 분야까지 관심을 뻗칠 줄이야...' 하고 감탄했을 정도로 아주 유쾌한 시간이었습니다. 미처 몰랐던 사실들을 알게 되어 많은 공부가 됐다고나 할까요? 저처럼 이런 분야에 관심이 많으신 분이라면 분명 마음에 드실 겁니다.

한편 딕슨 카의 또 다른 기호이자 특기인 '불가능 범죄'에 대한 도전도 이 작품에서 역시 제대로 다뤄지고 있습니다. 딕슨 카 하면 흔히 '밀실파 작가'로 불리기도 하는데요. 아무도 빠져나올 수 없는 철통같은 밀실에서 시체만 남겨둔 채 홀연히 사라진 범인의 수수께끼를 기막히게 풀어내는 귀신 뺨치는 솜씨에 절로 경탄하게 되기 때문이겠죠. 이번엔 오픈 된 정원에서 사건이 벌어지기 때문에 '이런! 밀실이 아니구나' 하고 내심 실망했지만, 그게 아니었습니다. 일종의 '변형된 밀실'로서 역시 변함 없는 불가능 범죄였습니다. 불가능 범죄에 대한 딕슨 카의 정열은 정말 끝이 없는 것 같습니다.

트릭에 있어선 불가능 범죄를 다루는 대부분의 본격 추리소설이 그렇듯이 이 책 역시 논란의 여지가 없는 건 아니지만, 개인적으론 만족스러웠습니다. 그의 다른 대표작인 '흑사장 살인사건' 같은 작품과 비교해 봤을 때 크게 무리가 있다고 보이진 않았고, 상당히 맹점을 찌른 아이디어라고 생각되더군요. 오히려 딕슨 카의 기이한 색채가 더욱 강화됐다는 느낌이었습니다.

그런데 저도 기데온 펠 박사를 헨리 메리베일 경보다 조금 더 좋아하긴 하지만, 우리나라엔 왜 기데온 펠 박사 시리즈가 더 많이 나오는 걸까요? 기데온 펠 박사가 나오는 작품 중에 걸작이 더 많아서? 아니면 역시 딕슨 카의 대표 탐정은 펠 박사이기 때문일까요? 심지어 아동용 책 중에 '장님 이발사의 면도날(The Blind Barber/1934)'이란 작품에도 펠 박사가 나왔던 기억이 납니다. 이에 비해 헨리 경은 '흑사장 살인사건(The Plague Court Murders/1934)'과 단편인 '기적을 푸는 사나이(All in a Maze/1956)' 외엔 본 기억이 나질 않네요. 그러나 제가 진짜 좋아하는 딕슨 카의 탐정은 앙리 방콜랭(Henri Bencolin)과 그의 조수 제프 말(Jeff Marle)입니다. 아직까진 '밤에 걷다(It Walks by Night/1930)'와 '해골성(Castle Skull/1931)' 밖에 소개되지 않았지만 다른 방콜랭 작품들도 꼭 전부 다 소개되었으면 하는 개인적인 바람입니다.

딕슨 카의 작품을 보다 보면 그의 개인적인 독서 취향을 알 수 있는 다른 작가의 작품들이 중간중간 언급되어서 아주 흥미로운데요. 이번에도 에드거 앨런 포가 또다시 언급되었고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도 다시 나왔던 것 같습니다. 늘 관심이 갔던 '유돌포 성의 비밀'도 보이니 이 책도 진짜 읽고 싶어지네요. 거기에다 반 다인의 책에 등장했던 그 범죄학 서적도 나오니까 왠지 반갑더군요.

이 책의 또 다른 의의는 반가운 고려원의 부활입니다. 고려원 하면 미스터리 팬들에겐 '양들의 침묵'과 '독수리는 내리다', '마지막 형사', '마크스의 산', '석양에 빛나는 감' 등등 주옥같은 미스터리 책들을 많이 내놓았던 출판사로 유명합니다. 1990년대에 한차례 불었었던 추리소설 붐을 주도했던 고려원 미스터리 책들을 잊지 못하고 있는 독자 입장에선 딕슨 카의 책으로 다시 돌아온 고려원 북스에 더욱 기대가 됩니다. 아무쪼록 예전 고려원의 명성에 뒤지지 않는 알차고 좋은 책들을 예전만큼 꼼꼼하고 치밀하게 만들어 주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이 글을 읽는 당신이 진정한 미스터리 팬이라면 이 작품은 절대 놓치지 마시라고 말씀드리고 싶네요. 딕슨 카의 책 한 권 읽어보기 위해 또다시 20여 년을 하염없이 기다리지 않기 위해서라도 이 책만은 반드시 성공했으면 좋겠습니다. 이런 책이 발표된 지 70년이 지나서야 소개될 수밖에 없는 우리의 현실이 서글프기도 하지만, 역으로 생각하면 아직도 우리에겐 꼭 읽어야 할 황금기의 보물 같은 작품들이 얼마든지 많이 남아 있다는 뜻도 되기에 어떤 점에선 행복하기도 합니다. 미스터리의 세계는 정말 깊고도 끝이 없는 거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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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밤은 되살아난다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9
하라 료 지음, 권일영 옮김 / 비채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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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 관심을 갖게 된 건 역시 '내가 죽인 소녀' 때문일 것이다. 예전에 읽어 봤던 이 소설은 나오키 상을 수상한 하라 료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시 나에겐 일본추리소설 뿐만 아니라 일본소설 자체가 낯설 때였기 때문에 이 소설은 일종의 놀라움의 대상으로 다가왔었다. 일본이라는 사회 자체에 한참 호기심이 왕성할 때여서 그랬는지 모르지만, 일본에서 이처럼 서구와 비교해도 전혀 손색없는 하드보일드 추리소설이 나왔다는 사실이, 아니 일본이 이런 하드보일드한 이야기를 대입해 놓아도 전혀 어색함이 없는 고도사회라는 사실에 꽤나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난다.

그만큼 주인공 '사와자키'라는 사립탐정이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일본사회의 생생한 범죄들과 잘 어울렸던 것이다. 그의 활약은 '이니셜 M이라는 사나이' 와 '소년을 본 남자' 라는 두 단편에서 더 확인할 수 있었지만, 워낙 작품 자체가 과작인데다 국내에는 더 이상 그의 작품이 소개되지 않아서 그렇게 잊혀져버리는 듯 했다.

그렇게 십 수년이 지난 어느 날, 그의 데뷔 장편이 번역된다는 믿기 어려운 소식이 들려왔다. 원서 출간과 거의 동시에 번역됐던 '내가 죽인 소녀'에 비하면 20년 정도의 시차가 벌어진 시점이었다. 기쁘기도 했지만 약간 우려 섞인 불안감을 느낄 수밖에 없는 세월의 격차였다. 그러나 개인적으론 오래된 옛친구를 다시 만나는 듯한 반가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마침내 나온 하라 료의 첫 장편소설 첫 페이지를 펼쳐 보았다. 나는 책을 볼 때 첫인상을 중시하는 편인데 이 책의 첫 장면은 '내가 죽인 소녀'보다 어쩐지 나은 것 같았다. 탐정사무소로 의뢰인 또는 어떤 사람이 찾아오는 도입부는 셜록 홈즈 때부터 이어져 온 전통적 방식이긴 하지만, 그만큼 친근감을 주는 방법이기도 하다. 과연 이 사람에겐 어떤 사연이 담겨 있을까 호기심을 갖게 하는 좋은 구성이다.

결국 사와자키 탐정은 실종된 누군가를 찾아 나서게 된다. 누군가를 찾기 위해선 사람들을 만나러 다녀야 한다. 사람을 만나서 정보를 얻어야 하고 정보를 얻는 과정에서 또 다른 사건에 휘말리기도 한다. 읽으면서 탐정이야말로 가장 외로운 직업이 아닐까 생각되었다. 어느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하고 어떤 상황이 닥칠지도 모른 채 자신의 판단에만 의지한 채 사건에 온전히 매달려야 하는 일이기 때문일 것이다.

특히 이 데뷔작에는 주인공 사와자키 탐정에게 그의 없어진 파트너 와타나베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다. 두 번째 장편인 '내가 죽인 소녀'에선 잘 느껴지지 않았던 파트너의 부재가 이 작품에선 짙게 투영되고 있는 것이다. 어떤 사건 때문에 몸을 감출 수밖에 없었던 와타나베는 이제 사와자키 곁에 없지만 사와자키는 여전히 '와타나베 탐정 사무소'를 홀로 지키고 있다. 둘이 함께 하던 사무실을 혼자서 꾸려나가야 하는 고독한 현실은 밤늦게 지친 몸을 이끌고 돌아온 사와자키가 텅 빈 사무실 문을 열고 어두운 사무실 안으로 들어왔을 때 더욱 절실하게 다가온다. 한 줄기 독한 담배연기를 가볍게 날려보지만 그의 얼굴엔 어쩐지 짙은 외로움이 깃들어 있을 것만 같다.

이런 외로움을 '전화응답서비스 회사'의 친한 여직원과 농담하듯 정겹게 안부를 교환하면서 해소하는 장면이라든지, 상당히 당돌하고 거침없는 말투에 비하면 의외로 따뜻한 마음 씀씀이에서 드러나듯, 사와자키는 사람을 끄는 은근한 매력을 지닌 인물이다. 한번 의뢰 받은 사건을 위해서라면 끝까지 사건을 추적하는 성실한 모습은 더욱 그의 매력에 빠져들게 만든다. 위에서 언급한 한 단편에선 사건 당사자가 직접 의뢰한 적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피해자와 죽기 전에 나눈 전화 통화 하나만으로 끝까지 진상을 추적하는 작품마저 있을 정도다.

사와자키의 기사도적인 무용담은 자연스럽게 레이먼드 챈들러의 영향을 의식하도록 만들지만, 사와자키는 필립 말로의 단순한 일본식 적용 이상의 매력을 선사해 준다. 물론 필립 말로가 없었다면 사와자키가 나올 수 없었을지도 모르지만, 사와자키는 사와자키만의 매력으로 충분히 독자들에게 어필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분명히 어디서 많이 본 듯하지만 그러면서도 단순한 아류라고 하기엔 너무도 세련되고 탄탄하게 구축된 작품 안에서 사와자키는 나름의 생명력을 지닌 채 생생하게 살아있다.

하드보일드 추리소설은 탐정의 일인칭 시점으로 전개되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이 작품도 그런 점에서 예외가 없다. 그러다 보니 독자는 자연스럽게 사와자키의 시점에서, 사와자키의 시선으로 사건이나 인물을 바라보게 된다. 이러다 보면 독자는 자기도 모르게 사와자키의 눈을 통해 일본사회를 들여다보게 되는 듯한 착각에 빠지게 된다. 언뜻 보면 미국 작품을 일본식으로 비튼 것 같지만, 실상은 일본의 얘기인 것이다. 미국 작품에선 느낄 수 없는 일본 특유의 사회상이 적나라하게 다가오기 때문에 하라 료의 작품은 그 나름의 가치가 존재하는 것이다.

어쩌면 모든 인간사회에 공통되는 사건들을 다룬다는 점에서 이것은 일본만의 얘기가 아닐 수도 있다. 우리는 탐정의 눈을 통해 사건을 들여다보면서 일본이 아닌 우리 자신의 얘기를 바라보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 책에 나오는 사건들은 이제 우리 사회에서도 얼마든지 벌어질 수 있는 사건들이기 때문이다. 탐정의 눈을 통해 인간사회의 여러 모순들과 얽히고 설킨 난맥상을 접함으로써 우리는 우리 자신을 되돌아보게 된다.

그런 점에서 탐정이 누군가를 찾아 나서는 경우가 많은 건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볼 수 있다. 실종된 누군가를 찾아다니든,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누군가를 만나러 다니든, 탐정은 언제나 누군가를 만나러 떠돌아 다녀야 한다. 그들의 말이 거짓이 아닌지 판단하고 그들의 내면까지 추적해야 하는 탐정의 수사과정은 어떤 점에선 인간존재의 탐구일는지도 모른다. 탐정은 사람들의 내면을 탐구함으로써 자기 자신의 내면을 성찰하고 있는 셈이다. 우리가 사건의 진상이 드러나는 결말을 통해 얻는 카타르시스는 다름 아닌 우리 자신과 대면하는 과정인지도 모른다. 다른 사람의 숨겨진 내면을 들여다봄으로써 우리는 우리 자신을 다시 거울에 비춰보는 것이다.

추리소설의 매력은 정교한 트릭으로 구축된 완전범죄가 끝내 산산조각 나는 순간의 그 강렬한 쾌감에도 있지만, 어쩌면 진정한 매력은 그 숨겨진 가장 내밀한 비밀이 드러났을 때 느껴지는 충격적인 느낌에 있는 게 아닐까? 누구에게나 감춰져 있는 가장 내밀하고 사악한 속내, 그 암흑의 심연이 폭로됐을 때 느껴지는 당혹감 내지 인간적인 연민 같은 것 때문에 나는 자꾸만 추리소설을 보게 되는 건지도 모르겠다. 누군가를 해치면서까지 절실히 감추고 싶었던 그 깊고 깊은 비밀을 통해 나 자신을 되돌아볼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하라 료의 '그리고 밤은 되살아난다'는 내가 생각하는 이런 추리소설의 진정한 매력이 잘 살아 있는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겉으로 보기엔 번듯하고 아무 것도 부러울 게 없어 보이는 잘난 사람들에게도 평범한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감추고 싶은 저마다의 비밀이 존재한다는 그 냉혹한 현실을 통해 나는 다시금 인간을 생각해 본다. 그리고 오늘도 그 인간들을 찾아 길을 떠나고 있을 사와자키의 외로운 뒷모습을 떠올려 본다. 어두운 밤거리를 쓸쓸히 걸어가고 있을 그의 뒷모습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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