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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죄자
레이미 지음, 박소정 옮김 / 블루홀식스(블루홀6) / 2021년 1월
평점 :
절판

1990년 네 건의 연쇄 살인 사건이 발생했다. 잔인하게 훼손된 채 발견된 여성들. 두청과 마졘, 뤄사오화를 비롯한 경찰은 범인을 잡기 위해 분투하지만 주도면밀한 범인은 단서 하나 남기지 않는다. 그러던 중 네 번째 희생자의 사체가 담긴 비닐봉투에서 지문이 발견되고, 경찰은 이를 근거로 쉬밍량이라는 도축업자를 체포했다. 결국 사형선고를 받고 형이 집행된 쉬밍량. 그러나 두청은 그가 진범이 아니라고 확신했고 이 일로 동료들과 사이가 틀어져 원수나 다름없는 사이가 되었으며 외진 곳으로 전출까지 당해야 했다. 그 후 23년이라는 시간이 흐른 지금까지도 그는 여전히 사건을 조사 중이다.
사범대 법학과에 재학 중인 웨이중. 사회 실천 수업의 봉사 시간을 채우기 위해 양로원에 갔다가 지쳰쿤을 만났다. 비록 다리가 불편하지만 다른 노인들과는 달리 정신도 명료하고 부유하며 날카로운 눈빛을 가진 지쳰쿤. 어떤 연유에서인지 웨이중에게 추소시효(이미 기소되어 재판을 받고 있는 피고인의 다른 범죄를 법원에 추가로 기소하는 일)에 대해 묻고, 이 일을 계기로 두 사람은 가까워진다. 음력 섣달 그믐에는 번밍녠을 맞이한 지쳰쿤에게 웨이중이 빨간 내복까지 선물했을 정도. 웨이중에게 완전히 마음을 연 지쳰쿤은 자신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털어놓고, 이동이 자유롭지 못한 자신을 대신해 어떤 일을 대신 알아봐줄 것을 부탁한다. 그리고 학교 친구인 웨샤오후이와 함께 지쳰쿤의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 고급 인민법원으로 향한 웨이중은 그 곳에서 두청을 만난다.
두청의 동료였던 뤄사오화. 이제는 퇴직해 아픈 아내를 간호하며 비교적 평화로운 일상을 보내고 있는 그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온다. 얼굴빛이 변해 급히 집을 나선 그가 향한 곳은 린궈둥이라는 한 남자가 정신병원에서 퇴원하는 현장. 이후 뤄사오화는 아침부터 밤까지 린궈둥의 행적을 관찰한다. 겉으로는 평범한 생활을 보내고 있는 듯한 린궈둥이지만 어쩐지 위태로워 보이는 두 사람. 대체 이 모든 인물들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 것일까.
초반부터 '왜?'라는 의문이 가시지 않을만큼 복잡한 인간관계와 사건들의 등장. 희생자 유가족들의 사연이야 말할 것도 없이 가슴 아팠지만, 그들과 마찬가지로 사건으로 인해 불행한 시간을 보내온 사람들의 모습을 지켜보자니 드는 생각은 오직 하나였다. 어떤 일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았을 때는 그 때 바로 잡아야 한다는 것. 은폐하려 하다보면 오히려 더 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헤집어놓고, 소중한 시간이 속절없이 흘러갈 뿐이라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 흔히 시간이 지나면 다 잊게 될 거라고 하지만, 어떤 상처들은 시간이 흘러도 옅어지거나 없어지지 않고 오히려 더 깊게 가슴을 후벼파는 경우도 있는 것이다.
살인사건을 둘러싸고 다양한 사람들의 시각으로 구성되어 보다 더 단단한 긴장감을 선사한 레이미의 [순죄자]. 그의 작품은 <심리죄> 시리즈로 두 권 정도 이미 만나봤지만 <심리죄> 시리즈에 비해 한층 더 도약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전개와 이야기 구성 방식 모두 전보다 세련되어진 느낌이다. 여기에 인물의 내면 묘사까지 더욱 섬세해져 말 그대로 책장이 휘리릭 넘어가 시간가는 줄 모르고 읽었다. 중국소설은 어쩐지 미묘하게 안 맞는 부분이 있어 잘 읽지 않았는데 레이미나 천호께이라면 대부분의 독자들도 무리없이 재미있게 읽어나갈 수 있을 듯. 아직도 여운이 가시지 않는 [순죄자]. 우리 모두 어떤 길을 선택해야 할 지 고심해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