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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거서 크리스티 읽기 - 역사가가 찾은 16가지 단서
설혜심 지음 / 휴머니스트 / 2021년 8월
평점 :
코로나 블루로 우울한 나날을 보내던 저자. 울적한 마음을 달래고자 어린 시절 탐독했던 애거서 크리스티의 전집을 다시 펼친다. 푸아로와 마플이 누빈 20세기 영국. 어른이 되어 읽은 애거서 크리스티 작품에 대해 존경심과 묘한 불편함을 느낀 저자는, 급기야 그녀의 작품 속 16가지 단서를 통해 애거서 크리스티가 살았던 시대를 조망한다. 소설과 시대가 어우러져 매력 넘치는 텍스트로 부활한 애거서 크리스티의 세계.
그런데 생각해보니 나는 애거서 크리스티의 작품을 읽은 적이 한번도 없다! 장르소설 마니아이고 여러 나라의 추리소설과 스릴러를 즐겨 읽는데도 고전 추리소설에는 무심했던 탓이다. 그 유명하다던 '엘러리 퀸'을 영접하고 매력에 빠진 것도 불과 1년 전. <오리엔트 특급 살인>이나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등의 작품 외에는 제목도 들어본 적이 없고, 다른 추리소설에서 '미스 마플에 대한 오마주'라는 홍보문구를 접한 기억이 나는데도 미스 마플이 애거서 크리스티가 창조해낸 캐릭터라는 사실조차도 몰랐다. 저런. 그래서인지 초반 이런저런 작품들이 등장하면서 머리속이 잠시 어질-했으나, 작품에 대해 간단한 설명도 되어 있고, 무엇보다 애거서 크리스티의 작품을 통해 들여다보는 영국의 모습들이 무척 흥미롭다.
작가가 키워드로 선보인 것은 총 16가지로 탐정, 집, 독약, 병역면제, 섹슈얼리티, 호텔, 교육, 신분도용, 배급제, 탈것, 영국성, 돈, 계급, 미신, 미시사, 제국이라는 단서를 통해 애거서 크리스티의 작품을 속속들이 파헤친다. 덕분에 애거서 크리스티의 인생에 대해서도 자세히 알게 되었는데, 애거서가 쓴 66권의 장편 소설 가운데 살인, 살인미수, 자살과 직접 연관되어 독약이 등장하는 작품은 무려 41권에 달한다. 소설에서 다루는 약학적 지식 또한 절대 얕지 않은데 이것은 제1,2차 세계대전기에 병원의 조제실에서 약제사로 일했던 경력에서 기인한다. <카리브해의 비밀>에서는 21가지의 약물이 등장한다는 설명에 대단하다는 생각도 들고, 자신의 경험에 자부심을 느끼며 글을 썼을 애거서의 모습이 떠올라 사랑스러운 감정이 솟아오르기도 했다.
짠한 기분이 들게 만드는 문장은 '배급제'에서 나타났다. 전쟁으로 인해 물자가 부족해지면서 모든 것을 배급받아 생활해야 하는 상황. 고기와 생선 대신 '부속고기'를 먹고, 버터 대신 값싼 마가린으로 대체하고, 오렌지는 비타민 섭취가 매우 중요한 어린이들에게만 판매되었다고 한다. 차를 마시는 문화인지라 설탕이 매우 중요했음에도 불구하고 일주일에 1인당 220그램씩 나눠주었다니, 기본 생활에 적잖은 궁핍함을 느꼈을 것이다. 이런 와중에 전쟁 중에도 아름다움을 포기할 수 없는 여성들과 창의적인 사람들은 병뚜껑이나 코르크, 노끈 같은 것들을 장신구의 재료로 사용했단다!
저자는 애거서 크리스티에 대해 비판적인 견해도 물론 가지고 있지만 -차별이나 편견이라고 부를 만한 요소들에 대해-기본적으로 애거서에게 깊은 애정을 가지고 있다. 애거서의 작품이 어째서 매력적인지, 이 작품의 특징은 무엇이고, 저 작품에서 드러난 애거서의 경험은 무엇인지 남김없이 보여준다. 작가를 향한 이런 덕질이라니, 생각조차 못한 그 깊은 경지에 찬사가 절로 나온다. 내가 만약 덕질을 하게 된다면 나는 어떤 작가를 고를 수 있을까. 굳이 꼽으라면 20년도 넘게 따라다니고 있는 하루키려나. 저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