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모 저택 사건 미야베 월드 (현대물)
미야베 미유키 지음, 이기웅 옮김 / 북스피어 / 2023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역사란 무엇인가, 미미 여사가 대답합니다]

 

타임슬립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어느 시대로 갈 지 생각해보신 적 있나요? 저는 아주 어렸을 때 고대 이집트 문명에 빠져서, 할 수만 있다면 3천년 정도 과거의 이집트에 가보고 싶다고 생각했었어요. 아동용 소설에 등장한 파라오가 정말 너무 멋있게 그려져 있었거든요. 소설 속 주인공은 비록 자신의 힘으로 타임슬립을 한 것은 아니었지만, 타임슬립을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제가 정말 부러워했던 기억이 남아 있습니다. 타임슬립이 어떻게 이루어지는 것인지에 대해 여러 책과 매체를 통해 다양한 이론을 접했지만 뼈속까지 문과생인 제가 이해할 수 있는 범위가 아니었어요. 저는 그저 타임슬립을 할 수 있다면 어디로 할 것인가, 누구를 만나고 싶은가를 생각하면서 그런 망상을 즐기는 수준입니다.

 

미야베 미유키의 [가모 저택 사건]은 우연히 과거로 타임슬립한 주인공이 그 시간 속에서 벌어진 사건을 추리하는 내용이예요. 주인공 오카다 다케시는 대학 입시에 실패한 후 예비교 (우리나라의 재수학원같은 이미지입니다)에 입학하기 위해 시험을 치르러 도쿄로 상경했습니다. 때는 1994년(헤이세이 6년). 착잡한 마음으로 구 가모저택이자 현 히라카와초이치반 호텔에 투숙한 다카시는 주변 공기마저 일그러뜨릴 정도로 어두워보이는 남자를 목격한 후 자꾸만 그가 신경쓰입니다. 게다가 분명히 비상난간에서 그 남자가 떨어지는 모습을 두 눈으로 확인했는데, 어디서도 그의 시체를 발견할 수가 없는 기묘한 상황에 놓입니다. 귀신에 홀린 듯한 기분으로 시험에나 신경쓰자는 마음으로 잠들기 전 켜둔 TV에서 방송된 2·26사건.

 

쇼와 11년(1935년) 2월 26일 새벽, 일본 군대 내에서 쿠데타가 발생합니다. 당시 육군 내의 황도파와 통제파가 심각한 세력 다툼을 벌이고 있었는데, 황도파의 젊은 청년 장교들이 결기하여 당시의 내각총리대신, 내대신, 시종장, 대장대신 등의 중신을 습격하고 암살해요. 이것이 바로 2·26사건입니다. 일본은 이 사건이 일어난 후 군부가 강력한 권력을 가지게 되었고 군부의 국정에 대한 발언권이 증가했으며, 이것은 곧 군부 독주에 의한 전쟁의 시대로 돌입하게 되는 전환점이 됩니다.

 

바로 이 사건을 TV 프로그램을 통해 알게 된 다카시는 곧바로 잠이 들고, 호텔에 불이 났다는 사실을 인지하며 잠에서 깨어납니다. 죽음을 앞둔 그를 구하러 온 것은 다름아닌 정체불명의 기묘한 남자. 히라타라는 이름의 이 남자가 다카시를 구해 데리고 간 곳은 2·26사건이 일어나려는 쇼와 11년의 도쿄, 자신이 현대에서 머물렀던 히라카와초이치반 호텔의 전신인 '가모 저택'이었습니다. 호텔 화재 사건으로 입은 상처와 타임슬립 후유증으로 고생하는 다카시는, 처음에는 히라타의 말을 믿지 않지만 자신을 둘러싼 환경을 하나하나 인지하면서 자신이 정말로 육군 대장 가모 노리유키의 집, 가모 저택에 와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고 가모 대장의 죽음에 얽힌 비밀 한 가운데에 서게 됩니다.

 

어려운 작품이 아닌데 개인적으로 내용 정리가 쉬운 작품은 아니었어요. 아마도 익숙하지 않은 군대 용어들이 등장하기 때문인 듯 한데, 어느 지점만 넘어서면 두꺼운 책의 페이지가 슉슉 넘어갈 정도로 매우 흥미로운 작품입니다. 우리가 타임슬립을 생각할 때 빠지지 않는 논란이 '과거의 사실을 바꾸면 미래도 바뀔 수 있나'에 관계된 것이잖아요. 미미 여사는 이것에 대해 '역사는 바꿀 수 없고, 이미 정설로 굳어진 역사적 사실에 이의를 제기해 그런 사실이 존재하지 않았다고 부정하거나 기존 통설에 수정을 가하는 역사 수정주의 위험하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삼송 김사장님은 추측하고 있습니다.

 

저는 2·26사건이 등장할 때부터 내심 불안했어요. 쇼와 11년, 1935년이면 일본이 제국주의를 발판 삼아 전쟁에 한창이던 시절, 우리 민족을 핍박하던 시절이기 때문이죠. 비록 아무리 좋아하는 미미 여사라 할지라도 만약 일본의 군부가 전쟁의 시대로 돌입하게 된 것과 그 후 미친 영향들에 대해 정당화하려고 한다면, 나는 앞으로 이 작가의 책을 아무 거리낌없이 읽을 수 있을까 하고 우려했어요. 다행히도 그런 내용은 등장하지 않고, 정말로 삼송 김 사장님의 말씀대로라면 어쩌면 미미 여사는 일본이 과거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하려는 것에 불편함을 표현하고 있다고 봐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시간 여행자인 히라타의 고뇌는, 지금까지 타임슬립을 즐거움으로만 생각했던 제가 한 번도 고려하지 못했던 지점이었어요. 어떤 사건이 벌어질 지 이미 알고 있는 그로서는 큰 사고를 막아보려 애쓰지만 대신 그에 준하는 사고가 반드시 일어난다는 것에 좌절감과 함께 자신의 존재에 대해 의문을 갖는 인물입니다. 이에 그는 역사를 방관하거나 '가짜 신'으로 살기보다 자신이 돌아간 역사 속에서 한 인간으로 살고 죽기를 희망해요. 그의 고뇌가 굉장히 절절하게 표현되어 있어 가슴이 뭉클해집니다.

 

다카시가 쇼와 11년의 시대는 자신이 있을 곳이 아니다, 나는 여기 사람이 아니다라고 부인하며 어떻게든 현대로 돌아가려고 하다가, 자신에게 친절하게 대해 준 하녀 후키가 사망하는 미래를 보고 그녀를 구하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 또한 감동적입니다. 한 인간의 결심을 바꾸는 것이 결국에는 타인을 향한 애정과 연민이라는 점이, 전쟁을 배경으로 했기 때문인지 한층 강렬하게 다가와요.

 

감동받은 포인트가 꽤 많은데 너무 많이 이야기했다가 오히려 책을 읽기 전인 독자들에게 누를 끼칠까 두렵습니다. 꽤 두꺼운 분량이지만 전혀 지루하지 않았고, 결말 부분 또한 개인적으로 무척 마음에 들었어요. 그 아련함이란!! 역사 속에서 개인은 매우 작은 존재일 수밖에 없겠지만,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더욱, 우리가 오늘을 열심히 살아가야 하는 이유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에도시대물 뿐만 아니라 역시 현대물도 재미있게 쓰시는 미미여사님! 부디 오래오래 건강하시기를요 (며칠 전 하라 료 작가님의 별세 소식을 들었더니 마음이 허합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