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옷을 입은 여인
크리스티앙 보뱅 지음, 이창실 옮김 / 1984Books / 2023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감성적인 작가가 전기물을 쓴다는 것

크리스티앙 보뱅은 저에게 [작은 파티 드레스]를 통해 깊은 감동을 안겨 준 작가입니다. 사람마다 취향은 다르겠지만 이 책을 읽는데 가슴이 먹먹해지고 울컥하면서 눈물이 나더라고요??!! 왜 그런 것인지는 지금 다시 읽어도 여전히 모를 일입니다. 그런데 그런 그가 전기물을 썼다니, 처음에는 고개를 갸우뚱했어요. 전기물이라고 하면 한 인간을 소개하고 그려나가는, 다소 딱딱한 문체를 떠올렸거든요. 그런 문체와 보뱅이 어울리기는 할까 싶었는데 보뱅은 역시 자신만의 색으로 '에밀리 디킨슨'이라는 여성을 그려냈습니다. 더할 나위 없는 자신만의 문체로요. 그렇게 보뱅을 통해 만난 '에밀리 디킨슨'은 신비로우면서도 속을 알 수 없는 묘한 여성으로 다가옵니다. 

 

책을 읽기 전 알게 된 '에밀리 디킨슨'은

 

저는 '에밀리 디킨슨'이라는 이름만 들어봤지 그의 작품은 한 편도 읽어본 적이 없어요. 보뱅의 글을 읽기 전에 그에 대해 알게 된 계기는 <옮긴이의 말>에 적힌 문장 덕분입니다. '세상의 소음과 영예를 병적으로 회피하며 글쓰기 안에 은둔했던 여인, 무수한 상(喪)을 겪으며 죽음에 사로잡혀 있으면서도 비밀스러운 영감에 차 있었던 여인, 자신의 집 울타리를 삶의 경계로 삶아, 정원을 가꾸고 가족의 빵을 굽고 심신이 쇠약해 가는 어머니를 돌보고 수많은 편지를 쓰면서 하루하루의 삶 자체가 시가 되게 했던 여인'. 그 중에서도 제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발표할 생각도 없는 글들을 오로지 자신만을 위해 썼고, 그것들을 통해 보이지 않는 존재인 '영원'을 우리에게 가리켜 보인 여인'이라는 부분이었습니다. 작가들은 글을 쓰면 응당 발표하고 싶어지는 게 아니었나요? 타인에게 인정받고 싶은 것이 아니었던가요? 어떻게 발표할 생각도 없이 글을 쓸 수 있었는 지 그녀의 생각이 너무나 궁금했습니다. 

 

보뱅이 그려낸 '에밀리 디킨슨'

 

사실 보뱅이 그린 '에밀리 디킨슨'은 마치 안개 속에 서 있는 듯 여전히 모호하게 느껴집니다. 그도 그럴 것이 시간 순서대로 구성되어 있는 것도 아닐 뿐더러, 보뱅의 글을 읽어본 독자라면 다들 아시겠지만 이 전기물에서조차 작가의 표현은 서정적이고 한 편의 시처럼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살짝 가닥을 잡은 것은 엄격한 아버지와 심약한 어머니 밑에서 성장했다는 것, 너무나 영민하여 보통의 아이들과는 달랐다는 것, 그럼에도 언제나 가족을 보살피고 걱정했다는 것, 이모와 조카들과의 서신을 통해 마음을 달랬다는 것, 그녀에게는 죽음이 너무나 일상적인 것이라 소멸조차 두려워하지 않았다는 것. 

 

주변 사람들이 저마다 야심을 드러내며 무언가가 되고 싶어 할 때 

그녀는 그 무엇도 되지 않고 이름 없이 죽겠다는

당당한 꿈을 꾼다.

겸손이 그녀의 오만이며

소멸이 그녀의 승리이다.

p33

 

이름없이 죽겠다는 당당한 꿈. 누구나 무언가를 향해 달려가는 세상 속에서 그런 생각을 먹은 당찬 여인의 모습이 더 크게 다가오는 듯 해요. 세상과 단절된 채 자신만의 세계를 창조해낸 천재적인 작가. 보뱅은 그녀의 은둔의 이유에조차 찬사를 보내는 것 같은 느낌입니다. 보뱅의 문장 하나하나가 마치 꿈 속을 거니는 듯한 몽롱함을 선사하면서 에밀리 디킨슨을 만날 수 있는 과거로 여행을 떠나는 듯한 기분을 맛보게 해줍니다.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이가 훨씬 전에 사라진 이에 대해 쓴다는 것

 

이 시적 전기물을 쓸 당시 보뱅의 상태는 어떠했을까요? 그는 자신이 곧 이 세상에서 소멸되리란 것을 알고 있었을까요? 이제 더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이의 목소리로 한참 전에 소멸된 인간의 이야기를 듣는다는 것은 굉장히 신비하고 애달픈 기분이 들게 합니다. 어쩐지 보뱅의 사후, 그를 그리워하는 누군가가 이런 식으로  자신을 애도해주면 좋겠다는 마음이 들어있는 것 같다는 생각은 저만의 착각일까요?  

 

에밀리 디킨슨에게 바치는 애정과 경의로 가득찬 [흰옷을 입은 여인]. 에밀리 디킨슨에 대해 더 자세히 알고 보뱅의 글을 읽었다면 훨씬 빠져들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지만, 보뱅의 마음을 알게 된 지금 그녀에 대해 좀 더 알고 싶어진 기분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