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러리스트의 파라솔
후지와라 이오리 지음, 민현주 옮김 / 블루홀식스(블루홀6)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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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반 읽다보면 대부분 어라라-하지 않을까. 그도 그럴 것이 주인공이 여느 미스터리 작품 속 인물들과는 영 다른 양상을 보이기 때문이다. 일단 그는 알코올중독자. 일정량의 술이 들어가지 않으면 손이 떨린다. 자신이 마실 술을 흘리면서 따를 정도로. 바텐더로 일하는 그의 일과는 일어나자마자 햇볕이 드는 곳에 가서 하루의 첫 잔을 드는 것으로, 그 날도 다른 날과 다르지 않았다. 10월의 어느 토요일, 근처 공원에서 여유롭게 술을 즐기는 그가 맞닥뜨린 것은 폭탄사고. 그 전에 잠시 대화를 나누었던 여자아이가 걱정된 나머지 자신의 안위는 생각하지 않았던 그가 놓친 것은 바로 자신의 지문이 묻은 위스키 병과 컵을 남겨두고 왔다는 것. 

 

이쯤되면 또 어라라-싶다. 이 사람 뭐지. 대체 정체가 뭐길래 자신의 지문이 묻은 위스키 병과 컵을 걱정하는 거지. 아니, 사실 걱정이랄 것도 없다. 그저 -아, 그걸 남겨두고 왔구나. 경찰이 보존하고 있는 내 지문과 일치한다는 것을 알게 되기까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구나-를 담담히 술회할 뿐. 누군가로부터 공격을 당하고, 폭력배의 보스같은 남자의 방문을 받고, 예전 동거했던 여인의 딸이 찾아와 그녀가 공원에서의 폭발사고로 사망했다는 소식을 전해듣는 등 남자의 삶에 폭풍이 휘몰아치기 시작한다. 대체 당신은 누구??!!-를 입 밖으로 크게 꺼내기에 다다를 무렵 밝혀지는 이 남자, 시마무라 게이스케라는 이름으로 살아온 기쿠치 도시히코의 과거. 그가 22년 동안 도피 생활을 해 온 이유, 그리고 현재 폭발사고에 휘말릴수밖에 없었던 이유들이 마침내 베일을 벗고 진실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명탐정도 아니요, 형사나 경찰도 아니요, 막말로 살인청부업자도 아닌 기쿠치가 살고 있는 시대는 1971년, 그리고 22년이 지난 1993년이다. 따라서 트렌디한 미스터리물에 등장하는 DNA 라는 단어는 물론, 그 흔한 휴대전화도 자취를 찾을 수 없다. 그가 가지고 있는 것은 그저 도쿄대생이었던만큼 명석한 두뇌와, 복싱으로 단련된 몸과, 22년동안 산전수전 다 겪은 탓에 얻은 빠른 상황파악이랄까. 아무리 그래도 그 어떤 난관도 척척 넘어버리는 장면들에 -이게 가능한가- 싶다가도 금새 -뭐 어때-라는 심정이 되어버린다. 책을 읽는동안 어느새 그의 매력에 빠져버리고 만 탓이다. 

 

알코올중독자에게 물은 필요 없지만 잔 속에서 흔들리는 얼음을 바라보았다. 물이 조명에 반사되어 반짝반짝 빛나고 있다. 동체시력, 반사신경, 펀치의 무게. 지금에 와서는 잃어버린 게절의 저편에 있는 단어들일 뿐이다. 

p190

 

내가 제일 푹 빠진 부분은 기쿠치의 바를 찾아왔던 폭력단의 보스인 아사이와 기쿠치가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었다. 남자 대 남자, 혹은 사람 대 사람으로서의 대화가 빛을 발했던 장면. 서로 무언가를 숨기고 있으면서도 결국에는 상대에게 미소를 지으면서 목숨까지 걸게 만드는 의리의 향기가 짙게 배어나온다. 그리고 그런 아사이와 대화를 나누는 장면에서 어떤 향수같은 것이 느껴지는 것이다. 순식간에 지나가버린 22년의 세월. 그는 과연 과거의 선택을 후회하는가. 아니다. 그는 그런 남자가 아니다. 그는 현재의 자신을 마음에 들어한다. 지나간 그의 시간에 대해 향수와 아쉬움을 느끼는 것은 어쩌면 독자의 몫일 뿐. 

 

사건의 진실, 그리고 테리리스트와 파라솔의 관계는 작품 클라이맥스에 등장한다. 손가락이 근질거리지만 너무나 중요한 단서가 되므로!! 분위기도, 인물의 서사도 무척 좋았던 작품. 어째서 사상 최초로 41회 에도가와 란포상(1995)과 제114회 나오키상(1996)을 더블 수상할 수 있었는지 이해가 된다. 1948년생이시라 어쩌면, 하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2007년 식도암으로 세상을 떠나셨다니 안타깝기 그지없다.

 

** 출판사 <블루홀식스>로부터 도서를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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