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드킬
아밀 지음 / 비채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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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제작 <로드킬>을 읽으면서 가즈오 이시구로의 [나를 보내지 마]가 떠올랐다. '1급 보호대상 소수인종'으로 분류되어 보호받고, 교육받고, 생태계에 내보내기 전에 적응 훈련을 거쳐야 하는 인종. 그들의 이름은 '인간 여자'였다. 보호소의 소녀들은 [나를 보내지 마]의 학교에서 살아가는 소년 소녀들을 연상시켰으며, 그 곳에서 알 수 없는 미래를 위해 '준비'되고 있다는 점도 비슷하다고 느껴졌다. 다른 점을 꼽으라면 이들은 진짜 여자라는 것, 진화하면 월경과 임신과 출산을 거치지 않아도 된다는 것. 분명 더 나은 삶을 위해(누가 그리 정했을까) 관리되고 있는 생활일텐데, 그들은 탈출을 꿈꾼다. 세상에 나가면 죽을 수도 있었다. 로드킬 당한 동물들처럼. 그럼에도 길을 나선다. 그 길을 건너면, 어쩌면 죽지 않을 수도 있으니까.

 

어쩐지 신비롭고 몽환적인 분위기는 <라비>로 이어졌다. 주술사의 하나뿐인 손녀로 태어나, 이미 결정되어 있는 삶을 살게 된 라비. 예전 같았으면 명예로웠을 주술사의 삶은 그러나 이제 조롱과 멸시의 대상이 된다. 그런 라비를 '탐구'하기 위해 학자들이 왔다. 그리고 라비는 그들을 통해 달라질 수도 있는 자신의 삶의 한켠을 엿본다. 라비 또한 <로드킬>의 소녀들처럼 지금 삶에서 탈출하고 싶었고, 그래서 그렇게 했다. 하지만 라비의 인생은 <로드킬>처럼 환상적이지 못하다. 어쩌면 자신의 삶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여자들이 으레 맞이했을 그런 현실, 그런 비극. 

 

<로드킬>을 비롯해 총 여섯 편의 단편이 실린 [로드킬]에서는 <오세요, 알프스 대공원으로>를 제외하고 모두 여성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때로는 환상적으로, 때로는 오싹한 스릴러 스타일로, 그리고 비극적인 설화의 형식을 빌려 전해지는 여성들의 이야기에서는 하나같이 '행복'을 찾아보기 힘들다. 그녀들을 억누르는 것은 환경, 상황, 남편, 자신을 폭행하고 죽음의 위기로 몰았던 누군가, 그리고 전통에 사로잡힌 사람들이다. 여성들의 목표는 결과론적인 '행복'이 아니라 어떻게든 이 상황을 극복하는 것. 그들의 시도는 성공하기도 하고, 그러지 못하기도 하지만 성공과 실패를 떠나 몸부림 자체를 보는 것만으로도 서글퍼졌다.


무사가 한 모든 말과 행동은 아내를 곁에 두기 위해서일 뿐이다. 재산도 잃고 아들도 잃었는데 아내마저 잃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p 281

 

모든 것은 작품 속 여성들 외, 타인의 이기심 때문이다. 누구도 그녀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어떻게 하고 싶은지 물어보지 않는다. 심지어 여성들의 미래를 자신들이 결정하기까지 한다. 성공과 실패도, 기쁨과 슬픔도 타인이 결정해줄 필요 없다. 중요한 것은 결말이 아니므로. 해피엔딩이라면 좋겠지만, 타인에 의해 이루어지는 해피엔딩이란 아무 의미 없다는 것을 우리 모두 알고 있다. 우리가 그저 닫힌 문을 열고 나갈 수 있게 가만 놓아달라. 그것이 우리의 바람이다. 어느새 작품 속 여성들은 우리가 되고, 우리가 그녀들이 된다.

 

이 작품집이 품고 있는 씨앗이 흥미롭다. 라비가 꽃과 열매를 맺었듯이, 아밀이라는 작가가 어떤 과정을 밟아나가 자신만의 무언가를 터뜨릴지 궁금해졌다. 펜이라는 칼로 무엇을 베고, 펜이라는 도구로 어떤 문을 열어나갈지 다음 작품이 기대된다.

 

**출판사 <비채>로부터 도서를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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