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묘약
루이스 어드리크 지음, 정연희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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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사람들의 마음에 공감이 가고, 모든 인물들이 설득력있으며, 모든 삶이 각자의 페이소스를 드러낸다. 아름답고 씁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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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살인 플롯 짜는 노파(엘리 그리피스, 신승미 역. 나무옆의자. 2022. 480쪽)

: 바닷가가 내려다보이는 입주 요양원 시뷰 코트. 아흔 살 페기 스미스는 오늘도 취미 생활인 쌍안경으로 밖을 내다보다 의심스러운 두 명의 남자가 해안가에 서 있는 것을 본다. 몇 시간 뒤, 요양원에서 일하는 나탈카는 페기 스미스가 의자에 앉은 채 숨져 있는 것을 발견한다. 워낙 고령에다가 사인도 심장마비이니 아무도 그녀의 죽음에 의문을 갖지 않지만 나탈카는 오전만 해도 산책을 다녀오고 계단을 이용하며 수영을 즐기던 페기가 갑자기 죽은 게 이상하다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페기의 테이블 위에 놓인, '살인 컨설턴트 M.스미스'라는 명함과 수많은 추리소설의 그녀에 대한 헌사들.


처음에는 페기가 탐정일 거라 기대하고 시작했는데 덜컥 죽어버려서 놀랐다. 게다가 다른 살인도 생각보다 빨리 일어난다. 사건의 진실은 조금은 시시하지만 다양한 캐릭터들이 모두 사랑스럽다. 수도사가 되려다 파계하고 부모의 도움으로 커피숍을 차린 베네딕트. BBC에서 근무하다 은퇴한, 페기의 유일한 친구였던 게이 에드윈. 우크라이나 출신의 명석한 나탈카. 그리고 작가의 전작에도 등장했던 인도 출신 부모와 함께 사는 형사 하빈더. 다양한 배경과 지식과 성격을 지닌 인물들의 합이 좋다. 심지어는 범인까지도 딱히 밉지가 않다. 작가의 전작에 비해 덜 무겁고 좋았다. 하빈더는 반가웠고. 



2. 함머클라비어(야스미나 레자, 김남주 역. 뮤진트리. 2016. 200쪽)

: 저자의 자전적인 - 것으로 추정되는 - 짧은 소설 44편. 아름답다.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함머클라비어'를 딸에게 들려주려고 죽음을 목전에 둔 쇠약해진 몸으로 연습하는 아버지. 딸의 어릴 적 책을 잃어버린 줄 알고 찾아 헤매다 결국 찾아낸 저자에게 딸이 "엄마는 나도 그만큼 사랑해?"라고 묻자 '내가 사랑하는 것은 그 책이 아니라 바로' 딸이라고 말해주는 저자. 이 책의 이야기들 속에는 순간들이 들어 있다. 반짝이거나 빛을 잃거나, 모든 순간들은 사랑하거나 사랑이 사라지거나 사랑이 다시 발견되는 시간이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아름답다. 



3. 셰익스피어 전집7 : 사극 로맨스 1(윌리엄 셰익스피어, 최종철 역. 민음사. 2014. 556쪽)

: 『헨리 4세 1부』, 『헨리 4세 2부』, 『겨울 이야기』, 『태풍』이 실려 있다. 이 중『태풍』은 '사극'이라고 할 수 있을까 싶기는 하다. 앞의 두 편을 읽고 싶어서 선택하긴 했으니 뭐. 이 역자를 좋아하진 않는다(그 유명한 『한여름 밤의 꿈』의 '박혁거세 무덤'의 그 역자다). 그래서 큰 기대 없이 집어들었다. 그냥 셰익스피어를 읽는데에 의의를 두자. 여전히 고루하고 사용된 단어가 썩 맘에 들진 않았으나 기대가 낮아서 실망도 없었다. 다만 귀족들의 대화, 특히 공적이고 진지한 대화는 운문으로, 그리고 평민의 대화나 귀족들의 대화라도 가볍고 질이 떨어지는 대화는 산문으로 표현한 게 흥미로웠다. 운문은 아름답고 산문은 해학적이었다.



4. 고스트 스토리 상.하(피터 스트라우브, 조영학 역. 황금가지. 2004. 378쪽, 458쪽)

: 한 남자가 어린 소녀를 납치했다. 남자는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져 있다. 간신히 정신을 붙들고 있으면서 소녀를 끊임없이 감시하는 남자. 소녀는 누구이며 대체 이 남자는 왜 납치를 한 걸까? 작은 시골 마을 밀번에는 4명의 노신사들 모임 차우더 클럽이 있다. 마을의 원로이며 좋은 집안 출신인 이들은 지난 해에 친구 하나를 잃었다. 그리고 평범한 일상들이 이어지다가 어느 순간 마을에서는 이상한 일들이 일어난다. 가축들의 납득 안 되는 죽음, 오래 전 마을에 왔었던 여자의 조카라는 사람의 방문, 그리고 차우더 클럽 회원의 또다른 죽음. 


상당히 으스스하다. 작은 마을의 고요한 듯한 일상이 미세하게 균열이 가면서 조금씩 뒤틀리는 모습이 섬세하게 서술된다. 이상하긴 하지만 이상하다고 인정하고 싶지 않은, 뭔가가 일어나고 있는 거 같지만 외면하고만 싶은. 결말에 이르면, 프롤로그의 그 일이 정말 완벽한 공포임을 이해하게 된다. 은근하면서도 강력한, 모든 곳으로부터 오기에 도망칠 수 없는 공포.



5. 로지의 움직이는 찻집(레베카 레이즌, 이은선 역. 황금시간. 2021.432쪽)

: 미슐랭 식당에서 수셰프로 일하는 로지. 다른 레스토랑에서 일하는 남편이 갑자기 이별을 고하기 전까지 로지는 인생의 모든 일들을 철저히 계획대로 살아내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로지에게 질렸다는 남편이 다른 여자에게 가버리고, 주위 동료들도 이미 알고 있으면서 자신을 속였다는 걸 알게 된 로지는 환멸을 느끼고 술김에 결제한 캠핑카를 끌고 나서기로 한다. 늘 차를 자신만의 방법대로 블렌딩해서 마시곤 했던 로지는 수익을 위해 찻집을 운영하기로 하고 첫 정박지로 떠난다.


뻔한 로맨틱 코미디이지만 재밌게 읽었다. 로지가 사랑에 빠지는 그 인간은 좀 별로였지만, 그냥 내 타입이 아닌 것 뿐이니 누군가는 설레면서 읽을 지도 모르겠다. 난 사실 로지가 블렌딩하는 차가 궁금했어. 나야 워낙 입맛이 저렴해서 얼그레이 정도만 되도 행복하지만. 편안하게 읽었다.



6. 기꺼이 죽이다(존 버든, 이진 역. 비채. 2017. 548쪽)

: 데이브 거니 시리즈 3권. 2권은 안 읽었고 1권은 꽤 오래전이어서 크게 기억에 남는 게 없다. 범행의 진상은 대충 기억나지만, 데이브 거니에 대해 별다른 기억이 없는데 시리즈의 3권이라니. 시리즈인 줄도 몰랐어. 하지만 이 작품에서의 거니는 꽤 매력적이다. 2권에서 부상을 당해 회복중인 데이브 거니. 친분이 있던 기자 코니가 전화를 걸어와 자신의 딸 킴이 제작하고 있는 다큐를 한 번만 도와달라고 한다. 10년 전 자본주의와 부르조아 비판을 내세우며 BMW 차를 탄 사람들을 사살한 이른바 '착한 양치기 사건'의 유족들에 관한 이 다큐는 상업 방송사에 팔려 제작에 들어가는데, 데이브는 의도치 않게 킴의 작업에 점점 깊게 관여하게 된다.


킴이 처음부터 너무 비호감이어서 초반에는 좀 짜증났다. 화낼 일도 아닌데, 우리 정서로는 데이브한테 고마워해야 할 일인데 화내고 있는 게 납득이 되지 않는 장면들이 꽤 나왔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사건의 흐름이 흥미로웠다. 데이브의 형사로서의 직감과 수사력도 매력적이었고. 다만 중간중간 범죄심리학 얘기는 좀 지루했다. 이 작가의 전작이 희미하게 남아 있는 이유가 이른 뜬구름 잡는 대사들 때문이었나 싶기도 하고. 그래도 2권도 찾아서 읽어볼 생각이다.



7. 어둠의 속도(엘리자베스 문, 정소연 역. 푸른숲. 2021. 524쪽)

: 가까운 미래. 자폐아들은 임신 중에 이미 치료가 가능하다. 루 애런데일은 이 혜택이 주어지기 직전 세대이다. 마지막 자폐인 세대. 뛰어난 패턴 추출 능력으로 대기업의 'A부서'에서 일하고 있다. 이 부서는 전원 자폐인들로 구성되어 있는데 자폐인들을 위한 여러 복지 시설이 갖춰져 있다. 그런데 새로운 관리자 크렌쇼가 부임하면서 이 부서만의 복지를 비용 측면에서 불필요한 특혜라고 주장하고, 나아가 회사에서 개발하는 소위 '정상화 수술'을 부서원들에게 강요한다. 


사실 루의 장애는 심한 편이 아니다. 얼마든이 비자폐인들과 어울려 살아갈 수 있는 정도이다. 취미로 펜싱을 하고, 다른 사람을 만나 사랑에 빠지고, 쉽지는 않지만 소통도 가능하다. 정체성은 하나의 요소만을 갖지 않는다. 자폐는 루의 정체성의 일부분일 뿐, 전체가 아니다. 루는 좋은 아마추어 펜싱 선수이자 좋은 친구이고, 좋은 남자이며 성실한 직원이다. 루 자신도 이걸 알고 선택을 한다. 난 어떤 마음인지 잘은 모르겠지만 루의 이야기에서 마저리가 중요한 기준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와 비슷한 비중을 지녔다는 게 좋았다. 사랑을 위해 자신을 바꾼 게 아니라는 것. 사랑이 기준이었지만 그건 자신에 대한 사랑이었다는 것. 



8. <a href="https://blog.aladin.co.kr/yujin/14633353">진홍빛 하늘 아래(마크 설리번, 신승미 역. 나무의철학. 2020. 656쪽)</a>



9. 아르망스(스탕달, 임미경 역. 시공사. 2018. 376쪽)

: 스탕달의 첫 장편이다. 귀족 옥타브는 매우 시니컬한 청년이다. 없는 살림으로 가까스로 버티던 옥타브의 집안은 혁명 당시 빼앗겼던 재산을 돌려받을 수 있는 법안이 통과되자 사교계에서의 위상이 급부상하고, 옥타브는 갑자기 자신에게 쏠리는 관심이 경멸스럽다. 이 와중에 친척 누이이자 고아여서 다른 친척에게 의탁하고 있는 아르망스의 초연한 태도가 옥타브의 눈에 들어오고, 그녀가 자신을 오해할까봐 신경쓰이기 시작한다.


당시의 낭만적이고 체면 차리는 사랑이야기. 한편으로는 답답하기도 했고 또 한편으로는 안쓰럽기도 했다. 게다가 결말이... 해설에서 조금은 해소되긴 했지만 왠지 당대 사람들의 미숙함을 보는 듯 했다. 얼마든지 세련되게 해결할 수도 있었잖아. 내가 너무 리버럴한 거일 수도 있지만, 함께 있는 게 생각처럼 나쁘지 않았을 수도 있어... 문제는 위선이겠지. 그리고 자기 연민. 어쩌면 스탕달이기에 쓸 수 있었던 작품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10. 우리 슬픔의 거울(피에르 르메트르, 임호경 역. 열린책들. 2023. 628쪽)

: 세계 대전 3부작 중 마지막. 1940년 파리, 교사 루이즈가 어릴 때부터 아르바이트를 해 온 쥘 씨의 카페에는 늘 같은 자리에 앉는 노신사가 있다. 늘 점잖던 그가 어느 날 루이즈에게 절대 손을 안 대고 보기만 할 테니 자기 앞에서 옷을 벗어줄 수 있냐는 제안을 한다. 마지노선에서 근무하는 가브리엘은 같은 소대의 라울이 여러가지 부당한 방법으로 군의 비품을 빼돌리고 병사들에게서 돈을 버는 걸 지켜보는 게 힘들고 언짢다. 그런데 아무 일도 없던 전선에 갑자기 독일군의 폭격이 쏟아지고 이들은 걸어서 이동을 하게 된다. 


처음에는 전쟁에 맞닥뜨린 여러 사람들이 보여진다. 각자 주어진 상황에서 할 수 있는 한 버티는 사람들. 물론 그 와중에 이득을 보는 이도 있다. 라울처럼 뻔한 인간이 있는가 하면 데지레처럼 상상도 못할 방법으로 사기를 치는 뻔뻔한 인간도 있다. 반면에 가브리엘처럼 원칙을 지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페르낭처럼 현실에 흔들리는 사람도 있다. 이 모든 이들이 루이즈를 중심으로 하나의 이야기로 수렴된다. 『오르부아르』에서 두 청년이 세들어 살던 집의 어린 소녀였던 루이즈. 그녀가 감당해야 할 진실이 예상보다 무거워서 안타까웠다. 그녀가 피난길에 옮겼던 수레 만큼이나 아프고 깊었던 진실. 그래서 에필로그가 고마웠다. 그렇게 그들의 후일담을 볼 수 있어서. 작가에게 고마웠다.



11. 카프카 살인 사건(크리스티나 쿤, 박원영 역. 레드박스. 2009. 480쪽)

: 프랑크푸르트의 허름한 아파트에서 20대 여성의 시신이 발견된다. 붉은 원피스를 입고 있는 그녀의 사인은 철제 채찍으로 인한 과다 출혈. 춤 추는 동안 내리쳐지는 채찍에 맞아 숨진 것이다. 한편 프라하에서 고서점을 운영하는 필리프는 이메일로 카프카의 미발표 단편 원고를 받는다. 검토 후 진품임을 확신한 그는 마침 프라하에 와있던 카프카 연구 권위자인 밀란 허스 교수에게 접근한다.


카프카의 미발표 단편의 내용대로 살인이 일어난다는 설정은 흥미로웠지만 등장인물들이 다 비호감이어서 재미가 없었다. 사적인 감정으로 사건의 정보조차 공유 안 하는 헨리도 맘에 안 들었고 제멋대로 구는 바그너도 어이없었다. 미리암도 검사로서의 프로페셔널한 모습보다는 허둥대기만 하고. 분명 현대가 배경인데 형사들과 검사가 수사하는 방식은 몇 십년은 뒤쳐져 있는 듯. 사건의 진실도 사건의 잔인함에 비하면 딱히 안타깝지 않았다. 헨리와 미리암의 관계성도 생뚱맞고. 이 작가 다시 안 읽을 듯.



12. 성 안의 카산드라(도디 스미스, 이재경 역. 옥당. 2012. 504쪽)

: 어릴 때 정말정말 좋아했던 『101 달마시안』의 작가라고 해서 얼른 읽기 시작했다. 1930년대, 제임스 조이스보다 먼저 천재적인 작가이며 영국 문학사에 한 획을 그은 작가로 칭송받은 아버지 모트메인과 화가의 모델을 해주던 새엄마 토파즈, 스무 살 언니 로즈, 남동생 토머스 그리고 하녀의 아들이지만 어릴 때부터 함께 자란 스티븐과 시골의 낡디 낡은 고성에 사는 열 일곱 카산드라. 아버지는 이미 오래전부터 경제적 능력을 상실해서 집은 궁핍하기 짝이 없다. 다행히 오래전 임대한 이 성의 주인이 밀린 임대료를 독촉하지 않고 있지만 그외에 수입은 전무하고, 다른 가족들도 딱히 능력이 없다. 그런데 성의 주인이 바뀌게 되고, 우연한 기회에 성을 방문한 성의 주인이자 미국인 형제 사이먼과 닐은 성의 분위기와 자매의 모습에 친근함을 느끼고, 로즈는 이것이 자신이 결혼을 통해 집안을 구할 기회라고 생각한다.


동화를 읽고 싶었는데 아침드라마를 보게 되다니. 첫문장 "나는 지금 개수대에 앉아 이 글을 쓴다" 이후로 가난하지만 현실감과 상상력을 잃지 않은 소녀의 성장기를 기대했고 물론 사랑 이야기도 기대했다. 근데 예비 형부를 사랑하게 되다니! 나만 짜증나? 난 아무리 생각해도 사랑없는 결혼을 하는 게 (예비)형부를 사랑하는 것보다 나쁜 거 같지가 않다. 물론 카산드라가 사랑에 빠지는 순간이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지만, 그리고 제일 나쁜 건 그 놈이지만 아무리 사랑이 모든 걸 정당화해 준다고 해도 내 기준으로는 납득이 안 간다. 그래도 이 책이 영국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소설에 머물 수 있었던 건 작가가 뛰어난 필력으로 결말을 상당히 유려하게 틀어버렸기 때문이다. 솔직히 결말도 내 윤리 기준으로는 이상해. 하지만 모트베인이 나 대신 화를 내줬다. 정말 섬세하게 잘 쓴 소설이고 짜증을 내긴 했지만 그만큼 푹 빠져서 읽었다. 



13. 익명 작가(알렉산드라 앤드루스, 이영아 역. 인플루엔셜. 2023. 392쪽)

: 어릴 때부터 나름 총명했던 플로렌스. 뉴욕으로 와 대형출판사에 입사했지만 현실은 초라하기만 하다. 회사 파티에서 상사와 원나잇을 한 후 자신도 모르게 점점 상사의 가족을 스토킹하게 되고, 별 볼 일 없는 것 같던 동료마저 작가로 데뷔하자 초조해진 그녀는 상사의 가족을 미끼로 책을 내보려고 하지만 오히려 직장을 잃는다. 이런 그녀에게 미국 문학계 전체를 휩쓴 베스트셀러 『미시시피 폭스트롯』의 작가이자 모든 사항이 베일에 싸인 '모드 딕슨'의 보조 작가로 일하겠냐는 제의가 오고, 그녀는 화상 면접을 본 후 채용된다.


부제와 프롤로그가 스포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예상보다 빠르게 모로코로 날아갔고 사건도 빠르게 발생한다. 그래도 예상처럼 전개가 되어서 천천히 지켜보고 있었는데 280페이지부터 완전 재밌어진다. 다른 작품 같았으면 플로렌스와 헬렌 둘 중의 한 명을 응원하며 읽었겠지만 이 책은 그냥 지켜만 봤다. 둘 다 참 비슷비슷하다 싶고, 둘 중 누가 최후의 승자가 되어도 그 뒤가 참 큰일이다 싶다. 그래도 작가의 글솜씨는 인정. 심리 묘사가 탁월하다. 재밌게 읽었다.



14. 사뭇 강펀치(설재인. 안전가옥. 2021. 182쪽)

: 세 편의 단편들. 표제작은 어디선가 읽었는데 내용은 기억나는데 어느 앤솔러지인지는 기억이 나질 않는다. 처음 읽을 때도 마음 아프고 보여지는 희망이 너무 어렴풋해서 속상했는데 두번째, 세번째 작품은 더 힘들고 안타깝다. 여성들이 그냥 참고 넘어가지 않는 건 맘에 들었지만 방향이..... 물론 바보같이 용서해 주고 마는 것보다야 백만배 낫지만. 가장 맘에 들었던 건 세번째 작품 「앙금」. 근데 결말이 열려 있어서...



15. 별이 부서지기 전에(에밀리 킹, 윤춘송 역. 에이치. 2020. 392쪽)

: 에버모어 연대기 1권. 10년 전 어머니의 생일날, 아버지의 절친이자 모험가인 아버지와 함께 모헙을 다니곤 했던 마크햄이 부하들을 데리고 습격해 가족들을 몰살한다. 불타는 집에서 삼촌 홀덴에 의해 간신히 구출당한 에벌리. 시계공인 삼촌은 에벌리에게 시계태엽심장을 달아주고 키운다. 10년이 지난 오늘, 마크햄 총독의 부관인 재미슨 대위가 마크햄의 심부름으로 시계점을 방문하고, 에벌리는 마크햄이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탐험했던 미지의 섬 와이어트로 개척을 하러 떠난다는 걸 알게 된다. 


첫 장면에서부터 재미슨이 맘에 들어서, 일반적인 판타지와는 조금 다를 거라는 기대를 갖고 읽기 시작했다. 중간에 태비스(에벌리의 큰오빠) 때문에 상당히 열받았고 에벌리가 마크햄에게 끌려다니는 거 같아서 좀 짜증났지만 시리즈의 첫 권이니 밑밥을 까는 거라 생각하고 읽었다. 거짓말을 하거나 심장이 뛸만한 일이 생기면 alert이 울리는 시계태엽심장, 전형적이지 않고 씩씩한 거리의 여자들, 재미슨과의 썸... 두번째 권이 기대된다.



16. 카피캣 식당(범유진. 앤드. 2023. 264쪽)

: 새벽 6시 6분 6초. 종로의 한 골목에 갑자기 나타나는 식당이 있다. 이 식당에서 주는 웰컴 푸드를 먹고 나면 계약이 성립되는데, 자신이 맞바꾸고 싶은 인생의 주인이 어떤 음식을 소울 푸드로 생각하는지 그 사연까지 모두 알아와서 식당 주인이 그걸 만들어주고 먹으면 인생을 맞바꿀 수 있다. 


처음 두 챕터 - 초코파이, 달걀말이 - 가 너무 교훈적이어서 재밌다는 생각은 안 들었는데 세번째 레몬꿀차 챕터가 재밌어서 기분이 좋아졌다. 제일 재밌었던 건 네번째 짜파게티 챕터. 어떻게 마무리하려나 궁금했는데 다섯번째 감자밥 챕터는 꽤 적당했다. 


난 한번도 누군가의 인생을 훔치거나 나와 맞바꾸고 싶다고 생각한 적 없다. 내 인생이 완벽하다거나 안 그렇지만 그래도 맘에 든다거나 하는 건 아니다. 난 그냥 내 인생을 개선시키고 싶다, 큰 노력 없이. 어차피 어느 인생이든 괴로움은 있을 거고, 그게 정신적 육체적 건강 문제라면 얼마나 골아프겠어? 암튼, 남얘기라서 흥미진진하게 읽었다. 난 카피캣 식당이 나타나도 그냥 모른척 지나갈 거 같다.



17. 친애하는 미시즈 버드에게(AJ 피어스, 이경아 역. 문학동네. 2022. 432쪽)

: 1941년 런던, 늘 기자를 꿈꾸던 에미. 자신이 즐겨 읽던 신문사에서 구인공고가 뜬 걸 보고 지원해서 합격한다. 안정적인 법률회사 비서 일을 때려치우고 첫출근한 에미는 자신이 신문사가 아닌 여성잡지사의 타이피스트로 채용됐다는 걸 알고 실망하지만, 열심히 하다보면 기자 일로 옮겨갈 수 있을 거라 기대한다. 하지만 주요 업무인 '미시즈 버드의 고민상담소'의 고민 편지를 거르는 일은 납득이 가질 않는다. 미시즈 버드는 대부분의 여성이 갖고 있는 고민들 - 부부관계, 연애 상담, 육체적 관계 - 등은 물론 전시 후방에서 군인들을 기다리고 뒷바라지 하는 것에 대한 힘듦을 토로하는 것까지 몽땅 무시하라고 하는데...


에멀라인의 행동이 진짜 철없다. 어이없어서 화도 나지 않았다. 우리회사에서 이런 일이 생긴다면 얼마나 끔찍할지... 하지만 그래서 이런 소설을 읽는 거지. 해피엔딩이어서. 그리고 메세지가 좋으니까. 전시 최전방에서 싸우는 군인들이 물론 가장 힘들겠지만 후방에서의 지원도 결코 덜 중요한 건 아니다. 그리고 힘들 땐 힘들다고 말하고 위로받을 줄 알아야 한다. 그래야 버틸 수 있다. 대의를 위해서 개인의 삶과 생각, 꿈과 사랑이 무조건 희생당해야 하는 건 아니라는 말이다. 당대 여성들의 삶을 잘 보여주어서 좋았고, 섬세한 서술이 좋았다. 



18. 모래시계 속으로(에밀리 킹, 윤춘송 역. 에이치. 2020. 332쪽)

: 전권에서 에벌리가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별의 검을 갖고 사라진 마크햄. 그가 사라진 바닷속 세계로 향하는 에벌리. 그곳에는 난폭한 인어들의 왕국이 있고 인어들은 사람을 홀린다. 별의 검이 인어 왕국의 첫째 공주 소유로 넘어갔다는 걸 알게 된 에벌리는 마녀의 도움을 받아 공주와 몸을 바꿔서 인어 왕국으로 들어간다.


여전히 마크햄은 짜증나고, 더 짜증나는 건 사랑에 목맨 할로우. 얘는 뭐 이렇게 판단력이 없는지. 처음 등장할 땐 똑똑해 보였는데. 그래도 이번 이야기에선 접점이 적어서 좀 덜 짜증났다. 이 시리즈의 결말이 궁금하다.



19. 멈추지 않는 노래(에밀리 킹, 윤춘송 역. 에이치. 2020. 340쪽)

: 자신이 시간의 운반자임을 자각한 에벌리. 마크햄을 쫓아 거인 세계로 갔다가 엘프 세계로 넘어온 에벌리는 엘프 여왕으로부터 진실을 듣게 되고, 일곱 세계의 평화를 위해 마크햄이 벌일 전쟁에 대비한다. 


세계관도 탄탄하고 설화도 재밌고 스케일도 큰데 좀 지치는 기분이다. 빌런이 너무 빌런이어서 그런가? 나름의 이유라는 게 너무 어린애 같아서 어이가 없다. 그리고 엘프 여왕은 왜 그렇게 무력한 거야? 결말은, 시간을 다루는 판타지인만큼 최선일 거라 생각하긴 하지만 내가 좋아하는 결말은 아니었다. 너무 허무하잖아. 사랑만으로 모든 게 채워지는 건 아니라고.



20. 빛과 영원의 시계방(김희선. 허블. 2023. 316쪽)

: 시간과 존재에 관한 8편의 단편들. 기존 SF의 범위를 벗어나지 않으면서도 신선하다. 소재 상으로는 들어봄직했지만 이 작가만의 세련됨이 돋보였다. 그런데 읽으면 읽을수록 지금, 여기 이 세계가 소중하게 느껴졌다. 아무 데도 가지 않는 내 가족들과 지인들이, 바뀌지 않는 내 삶이 다행이라 여겨졌다. 그럼에도 가장 좋았던 건 「악몽」. 절대 겪고 싶지는 않지만 소설로서는 가장 맘에 들었다.



21. 떠나지 못하는 여자(이스마일 카다레, 백선희 역. 문학동네. 2021. 252쪽)

: 이름난 극작가 루디안은 사인회에서 아름다운 여성에게서 그녀의 친구에게 사인을 해달라는 부탁을 받는다. 미게니의 시 「B양에게」에서 따와 '린다 B에게.저자의 추억을 담아'라고 사인을 해준 그는 사인을 받으러 온 미제나와 연인이 되고, 얼마뒤 당위원회의 호출을 받는다. 미제나와의 관계 때문이라고 생각했던 그는 오히려 사인을 해준 린다의 죽음 때문이라는 걸 알게 된다.


당시 알바니아의 사회상을 잘 보여준다. 예술작품에 대한 검열 뿐 아니라 도청은 일상이고, 그 와중에도 당에서의 지위에 따른 계급차가 현저하게 보이는. 특히 거주지 지정 유배형이 있다는 건 새삼스러웠다. 5년씩 연장되는, 아니 정확히 말하면 5년이 지나면 종료되고 또다시 시작되는 형벌. 종료되고 시작되기까지의 잠깐의 희망. 이번에는 '서류'가 좋게 오기를 바라는 슬픈 기도. 그리고, 형벌은 죽음 이후에도 계속된다. "국가와 죽음으로부터 이중으로 속박되고 고통받"(238쪽)는 그녀. 그리고 유족들.


점진적으로 세심하게 드러나는 루디안의 슬픔에 매몰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완벽했던 마지막 장면에도. 11월 늦은 저녁같은 소설.



22. 더스티 블루(제니페르 D. 리샤르, 박명숙 역. 문학동네. 2016. 296쪽)

: 디스토피아 소설. 스무 살 생일, 쌍둥이 동생 라즐로와 친구들과 어울려 파티를 하던 라디슬라스는 동생이 먼저 빠져나간 뒤 혼자 귀가한다. 엘리베이터에서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으나 술 때문이라 생각한 그는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현관문을 열쇠로 열었지만 열리지 않는다. 소란을 피우고 문이 열린 뒤, 그곳에 사는 사람은 자신의 가족들이 아니고 이웃들도 처음 보는 사람들임을 알게 된 라디슬라스. 계단에서 밤을 새운 후 밖으로 나간 그는 자신이 알던 세상이 아님을 알게 된다. 경찰이 아닌 '사회전진부'가 있고 칙칙한 더스티블루 색의 제복을 입은 '요원'들이 모든 사람들을 감시하고 있는데...


세상이 완전히 바뀌는 이야기는 늘 흥미롭지만 꺼리게 된다. 내가 절대 바라지 않는 일이라서. 아무리 내가 바뀐 세상에서 큰 권력을 쥐고 있다 할지라도 말이다. 라디슬라스는 자신이 이 세계의 핵심인사 카엘 탈라스라는 걸 알게 되지만 이게 좋지만은 않다. 그도 아는 것이다, 절대 권력의 불안정함을. 결말을 어떻게 할 지 궁금했는데 평범했다. 설마 이건 아니겠지 했던 그 결말. 이 작가 다시 읽지는 않을 것 같다.



23. 비둘기 재앙(루이스 어드리크,정연희 역. 문학동네 2010. 504쪽)

: 비둘기 떼가 온 마을을 뒤덮었다. 비둘기들은 유리창을 깨고 곡식을 털었다. 그때 에블리나의 무슘(할아버지)는 10대 소년이었다. 사제이자 이복형과 함께 지내던 그는 비둘기를 쫓고자 행하던 성령 행진에서 아름다운 소녀 쥬네스를 만나 함께 도망친다. 그리고 호탕한 농장주를 만나 그녀의 집에서 함께 살다가, 인디언인 그에게 결혼 파티를 열어주었다는 이유로 백인들의 습격을 받자 다시 떠난다. 에블리나와 오빠 조지프는 무슘의 이야기를 들으며 자란다. 한편 에블리나의 이모 제랄딘은 판사 안톤 쿠츠와 연인 관계이고, 안톤 쿠츠는 예전에 연상의 여의사와 불륜 관계였다. 이 책에서는 에블리나와 안톤 쿠츠, 인디언 보호구역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 사는 만 월데, 인디언은 치료하지 않는 의사 로크렌이 번갈아 이야기를 들려주고, 이 여덟 개의 이야기가 결국엔 하나의 진실로 수렴된다.


이야기들은 그저 인디언의 삶을 말해주고 있는 듯 하다, 표면적으로는. 또 한편으로는 에블리나의 성장기이기도 하다. 코윈 피스를, 메리 애니타 수녀를, 노네트를 향한 사랑 이야기이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인디언 보호구역에 묶여 살면서 생존을 위해 백인과 결혼하고 백인의 문화를 받아들였지만 전통적인 신앙과 관습을 포기하지 않는 부족의 이야기이면서, 어린 여성을 착취하는 인간에 대한 복수극이고 오래전 미지의 땅을 개척하기 위해 떠났던 모험 이야기이며 부당한 차별과 오만한 사적 처형에 대한 정의 실현이야기이기도 하다. 옮긴이의 말처럼 이 책에는 등장인물들이 꽤 많고 그들의 관계도 꽤 복잡하다. 하지만 중요한 건 그들의 혈연, 지연이 아니라 이야기의 진실이다. 무슘이 하는 이야기들 중 어느 것도 허투루 넘길 것이 없다. 


그 누구도 점점 확장되는 이야기에서, 진실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우리 중 일부는 존재의 봄날에 이미 죄의식과 희생이 뒤섞여버려 밧줄을 풀어낼 길이 없다(391쪽)". 



24. 엉엉(김홍. 민음사. 2022. 232쪽)

: 어느날 새벽, 본체가 스르르 일어났다. 난 무언가가 내게서 빠져나가는 걸 느끼고 잠에서 깨어 짐을 싸는 본체를 바라봤다. 본체는 멀리 떠난다고 했고, 난 본체가 사용하는 내역의 고지서를 받으며, 알바를 하며 본체를 기다린다. 


처음에는 '본체'와 '나'의 관계성이 곧 드러나리라 기대하며 읽었지만 솔직히 말하면 소설이 끝나는 순간까지도 모르겠더라. 그냥 '나'의 감정과 행동에 집중하며 읽었다. 어느 순간 눈물을 멈출 수 없는 '나'. 그리고 '나'의 눈물이 비의 원인이라고 믿고 있는 정부. 엉뚱한 설정이지만 결국은 해피엔딩이다. 이야기에 집중시키는 능력은 있지만 재미는 없는 작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전작에 이어서. 



25. 사라 1.2.3.(에스더 힉스, 제리 힉스, 이미정 역. 이가서. 2003. 183쪽, 274쪽, 252쪽)

: 내성적이지만 소심하지는 않은 열 살 소녀 사라의 성장기. 배경은 작은 시골 마을이고 사라는 맞벌이하는 부모님과 장난꾸러기 남동생과 함께 살고 있다. 어느날 남동생이 정말 큰 올빼미를 봤다며 사라를 작은 오솔길로 이끌지만 올빼미는 발견하지 못한다. 얼마 뒤 호기심에 그 오솔길을 다시 간 사라는 얼음에 미끄러져 개울에 빠진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목소리에 천천히 일어난 사라는 올빼미 솔로몬을 만나게 되고, 그와 말이 통한다는 걸 알게 된다. 이 책은 사라가 올빼미 솔로몬의 가르침대로 행복한 삶을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배우는 이야기이다.


이 책을 읽으며 내가 왜 자기계발서와 우화 소설을 싫어하는지 확실하게 알게 됐다. 솔로몬은 마치 사이비 교주 같다. 물론 교훈이 없는 건 아니다. "정말로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무엇을 하고 싶으며 왜 그 일을 하고 싶은지에 대해 생각해 보라"(1권 60쪽)든지, "상황이 감정을 통제하지 않게 하라"(1권 149쪽) 같은 말은 분명 어린이건 성인이건 독자에게 도움이 되는 말이다. 하지만 "상황이 나쁘면 그 상황에 뛰어들어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지 말고 기분이 좋아지는 방향으로 신경써야 한다. 그러면 기분과 일치하는 상황이 찾아온다"(215쪽)든지 하는 말들은 묘하게 사이비적이다. 2권까지만 해도 약간의 성향만 보였는데 3권에서 "행복하면 흉터가 안 생긴다(136쪽)"에 이르러서는 정말 어이가 없었다. 무조건 행복해라, 그러면 다 네가 원하는 대로 흘러갈 것이다는 이야기는 아이들 머릿속에 꽃밭만 깔아주는 거다, 현실에서 멀리 보내버리는. 이 밖에도 참 소시오패스스러운 대사도 불쑥불쑥 나온다. 이 책이 2000년대 초반에 얼마나 인기가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라면 절대 어린이에게 읽히지 않을 것이다.



26. 이웃집 여자(예완데 오모토소, 엄일녀 역. 문학동네. 2020. 400쪽)

: 케이프타운 근방의 고급주택가 캐터린. 10호 호텐시아는 이 동네의 유일한 흑인이다. 백인 남편 피터는 죽어가고 있고, 12호 매리언과는 사이가 좋지 않다. 매리언이 주도하는 입주민 협의회에 호텐시아가 처음 참석하려 했을 때 매리언은 매우 찜찜한 태도를 보였던 것이다. 한편 젊은 시절 건축가였던 매리언은 처음으로 온전히 맡아 전력을 다해 설계한 집에 들어가 살고 싶은데, 그 집이 바로 옆집이자 호텐시아가 살고 있는 10호이다.


앙숙이던 두 노인이 결국에는 친구가 되는 이야기 맞다. 그런데 그냥 예상대로 따뜻하게 흘러가지만은 않는다. 여성이기에, 유색인종이기에 포기해야 했던 많은 것들에 관한 이야기이자 삶이 주는 불행을 나름의 방법으로 감싸안으며 혹은 외면하며 지나온 인생 이야기이기도 하고 아파르트헤이트 하에서 부당하게 빼앗긴 흑인의 권리와 그걸 외면했던, 자신이 차별주의자인 줄도 몰랐던 사람의 자기 반성이기도 하다. 그래서 좋았다. 길게 얘기하지 않으면서도 모든 걸 놓치지 않아서, 두 여성의 연대와 우정을 그리면서도 마냥 꽃밭이지 않아서. 아무리 자신의 과오를 깨달았다 한들 여든 넘은 노인네가 갑자기 변하지는 않는 법이니까. 앞으로 작가가 들려줄 많은 이야기들이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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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홍빛 하늘 아래
마크 설리번 지음, 신승미 옮김 / 나무의철학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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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1943년 밀라노. 피노는 열 여덟 살이다. 가죽 가방 사업을 하시는 부모님과 동생 미모와 함께 꽤 부유하고 편안하게 살고 있다. 어느 저녁 시내에서 눈에 확 띄는 아름다운 여성 안나와 마주치고, 그녀에게 거절당했지만 그녀의 모습은 눈앞에 아른거린다. 그리고 그날 밤 밀라노에 연합군의 폭격이 시작되고 부모님의 가게도 무너진다. 부모님에 의해 알프스 산맥 근처의 소년 캠프 카사 알피나로 보내진 피노는 레 신부에 의해 혹독한 산행 훈련을 받고, 곧 알프스를 넘어 스위스로 도망치려는 유대인들의 길잡이 노릇을 하게 된다.


네순 도르마. 아무도 잠들지 말라. 오페라 투란도트의 아리아다. 밀라노의 폭격을 피해 밤을 보내려 기차를 타고 근교 농장으로 가 벌판에서 밤을 지새며 피노의 아버지가 바이올린을 켜고 피노의 친구 카를레토의 아버지가 부른 곡. 멀리 밀라노의 하늘은 폭격으로 붉고 들판 여기저기에 피노네와 비슷한 가족들이 흩어져 있는 가운데, 세상에 둘밖에 없는 듯 아내만을 바라보는 카를레토의 아버지.(62-63)


전쟁 이야기는 되도록이면 피해 왔지만 이 책은 서문에서 피노의 생존을 얘기해 주어서 읽었다. 하지만 전쟁 이야기가 편히 흘러갈 리가. 읽는 내내 입술을 깨물며 버티거나 잠시 책을 덮고 한숨을 쉬며 맘을 달래야 했다. 그래도 초반에 위와 같은 아름다운 장면이 있어 버틸 수 있었다. 알프스 산의 눈사태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은 탈출자들과 우연히 주어진 기회를 놓치지 않은 피노와 조카의 신념을 적절하게 풀어내 준 외삼촌과 우연인 듯 운명인 듯 다시 만난 안나 덕분에.


전후 부역자 색출 부분은 언제 어느 책에서 읽어도 맘 아프다. 억울한 사람이 없을 수 없고 놓친 사람도 반드시 있으며 결국 힘없고 목소리 작은 사람들이 희생당하는 건 역사의 어느 순간에도 늘 일어나는 일이지만 아무리 잦은 일이라도 아프지 않을 수는 없다. 그리고 어쩌면 앞으로는 그런 일이 아주 없지는 않더라도 조금이라도 덜하지 않을까, 바로잡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이 조금은 우리를 지탱해 준다. 아픔을 기억하고 있는 한.


전쟁 이야기에서 해피엔딩은 없다는 걸, 이 책을 읽으며 깨달았다. 누가 살아남았건 누가 희생당했건 전쟁은 모두에게 상처이다. 핏빛 하늘 아래에선 아무리 아름다운 아리아도 아프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희망이 있고 기억해야 할 사람이 있다면 우리는 살아남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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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집 여자
예완데 오모토소 지음, 엄일녀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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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게 얘기하지 않으면서도 모든 걸 놓치지 않아서, 두 여성의 연대와 우정을 그리면서도 마냥 꽃밭이지 않아서 좋았다. 아무리 자신의 과오를 깨달았다 한들 여든 넘은 노인네가 갑자기 변하지는 않는 법이니까. 앞으로 작가가 들려줄 많은 이야기들이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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엉엉 오늘의 젊은 작가 39
김홍 지음 / 민음사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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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에 집중시키는 능력은 있지만 재미는 없는 작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전작에 이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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