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울랄라 가족(김상하. 창해. 2020. 352쪽)
: 오래된 연립 낙원빌라에 사는 가족. 흥신소를 운영하는 아버지는 경마에 빠져 집에 돈 한푼이라도 보이면 다 경마에 쓸어넣고, 큰아들은 택시 기사를 하며 손님들이 놓고 내린 핸드폰을 중고로 팔아 돈을 번다. 빵집을 차리는 게 꿈인 딸은 빵집 알바를 하며 유부남과 연애 중이고, 사춘기인 막내는 동네 친구한테 괴롭힘을 당하고 있다. 사고로 요양 병원에 누워 있는 엄마의 존엄사에 동의해 주면 목돈으로 보상금을 주겠다는 보험사의 제안을 받고 집으로 돌아오던 가족은 우연히 거액의 현금이 든 가방을 발견하게 된다.
이 작가는 단어의 뜻을 자기 맘대로 바꿔서 쓰고 있다. 애니미즘, 공안요원, 네크로필리아, 펜던트... 단순히 어휘력이나 문장력의 문제만도 아니다. 내용이며 캐릭터며 다 너무나 올드하다. 차라리 BTS를 언급하지 않았다면 90년대 이야기인가 보다, 하며 수긍하고 읽었을 지도 모르겠다. 정말이지, 출근할 때 다른 책을 한 권만 더 들고 나왔어도 안 읽었을 거다. 진짜 진심으로, 이 책 때문에 책 읽을 시간 하루를 날려 버린 게 너무너무 아깝다.
2. 네온 레인(제임스 리 버크, 박진세 역. 네버모어. 2018. 352쪽)
: 뉴올리언스의 데이브 로비쇼 경위. 사형을 앞둔 죄수를 찾아갔다가 그의 목숨을 노리는 조직이 있다는 얘기를 듣는다. 몇 주 전, 집 근처에서 흑인 여성의 시체를 발견한 일과 관련이 있는 것 같다. 데이브는 파트너와 함께 탐문을 하고, 곧 이게 단순한 일이나 작은 조직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된다.
가벼운 맘으로 집어들었는데 생각보다 묵직했다. 그러니까 이건 한 건의 살인이 문제가 아닌, 남미와의 무기 거래에 관한 저자의 날카로운 시선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물론 그 와중에도 사망한 피해자를 위한 정의구현은 이루어진다. 사실 하드보일드를 좋아하진 않지만 그간 읽었던 어떤 형사들보다도 데이브가 맘에 들었다. 비록 건들거리고 다니며 여기저기서 꽤 많이 얻어터지긴 했지만. 어쩌면 내가 데이브를 좋아하는 게 해리 보슈를 떠올리게 해서인지도 모르겠다. 둘의 공통점은 베트남전 참전과 피해자를 위하는 마음 뿐, 성격은 완전 다르지만. 이 시리즈를 계속 읽고 싶은데, 불가능할 거 같다.
3. 수상한 한의원(배명은. 텍스티. 2024. 394쪽)
: 서울 대형 한방병원의 한의사 승범. 부원장으로 승진하기 위해 원장에게 뇌물까지 건네지만 정작 승진은 집안 좋고 실력은 없는 다른 인간이 한다. 열받은 승범은 홧김에 자신만의 의원을 차리기로 하고 검색 끝에 한의원이 하나도 없는 우화시로 내려온다. 하지만 까칠한 성격의 승범은 이사 첫날부터 동네 사람들과 소소하게 충돌하고, 아무리 애를 써도 길 건너편 수정 한약방에는 바글거리는 손님이 승범의 한의원에는 한 명도 오지 않는다. 한약방의 비밀을 캐기 위해 한밤중에 몰래 들어간 승범은 귀신과 마주친다.
적당히 가볍게 읽고 환기하고 싶었는데 딱 알맞았다. 나름의 복선과 에피소드들도 좋았고, 무엇보다 요즘 범람하는 힐링 소설들보다 짜임과 문장력이 탄탄해서 좋았다. 이 작가가 자신만의 색을 잘 찾아서 꾸준히 써줬으면 좋겠다.
4. 워터십 다운(리처드 애덤스, 햇살과나무꾼 역. 사계절. 2019. 760쪽)
: 몸집이 작고 늘 주눅이 들어있는 듯한 파이버. 파이버는 어느날 자신이 살고 있는 토끼 마을에 멸망이 다가오고 있는 환영을 보고 형제 헤이즐에게 말한다. 헤이즐은 파이버와 함께 족장에게 찾아가 말하지만 족장은 무시하고, 헤이즐은 마을을 떠나기로 한다. 헤이즐의 굳건한 믿음과 당당한 태도에 몇몇 다른 토끼들이 함께 마을을 떠나기로 한다. 몸집이 큰 전사 빅윅, 이야기꾼 댄더라이언, 파이버처럼 연약한 팝킨, 스마트한 블랙베리, 믿음직한 홀리 그리고 실버, 호크빗, 스피드웰, 에이콘, 벅손 등이다. 이들은 조심스럽게 새로운 길로 나아가며 마을을 만들만한 곳을 향해 간다.
토끼를 의인화한 게 아니라 토끼 자체의 이야기이다. 토끼어도 종종 나오고 - 물론 이건 상상이지만 - 토끼들만의 습성도 잘 소개되어 있다. 각 토끼들이 자신의 캐릭터를 뚜렷이 유지하면서도 복합적인 변화와 성장을 겪고, 자신의 장점을 잘 살려서 공동체를 위하는 건 꽤 감동적이었다. 토끼를 의인화하지는 않았지만 단순히 살던 곳을 떠나 새로운 곳을 향해 이동하는 여정 중의 짐작 가능한 위험들 뿐 아니라 당장의 편함을 위해 무리 전체의 위협을 외면하는 토끼들과의 조우라든지, 인간에게 사육당하는 토끼들을 구출한다든지 혹은 전체주의적 사회를 형성한 토끼들의 침략 등 현실적이면서도 공감할 수 있는 에피소드들이 진취적으로 펼쳐져서 재미있게 읽었다. 중간중간 삽입되는 댄더라이언의 엘 어라이라 이야기와 마냥 동화같지만은 않은 엔딩도 좋았다.
다만 저자가 딸들에게 들려주던 이야기라는데 왜 모험과 리더쉽, 전략 수립과 전통 계승은 다 수컷의 몫인지 모르겠다. 처음엔 블랙베리나 홀리가 암컷인 줄 알았는데 나중에 종족번식을 위해 암컷을 구해와야 한다는 걸 보고 의아했다. 이 책에서 암컷에게는 종족보존을 위한 역할만 주어진다. 처음 출간된 시대 배경(1972년)을 감안하더라도, 이 책을 청소년들에게 읽힐 땐 독서지도가 필요할 것 같다.
5. 쓰게 될 것(최진영. 안온북스. 2024. 344쪽)
: 단편집. 저자의 섬세한 시각과 굳건한 주제 의식이 선명하다. 모든 작품들에서 공감할 수 있는 등장인물이 있어서 좋았다. 아니, 모든 등장인물들에게서 나와 비슷한 점을 찾을 수 있어서 뭉클해 하며 읽었다. 가장 공감갔던 작품은 「홈 스위트 홈」.
6. 백만 번의 세계가 끝날 무렵(캐트리오나 실비, 공보경 역. 문학수첩. 2024. 424쪽)
: 영국에서 온 소라 리슈코바는 외국인 학생 환영회에 갔다가 중간에 나와버린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 쉬기를 기대하며 멈춰버린 시계탑 앞으로 간 소라는 잔디밭에 누워 있던 산티와 마주치고, 함께 다 무너져가는 시계탑에 오른다. 운명에 관해 대화를 한 소라와 산티는 전호번호를 교환하지만 연락은 하지 않았고, 몇 주 후 소라는 산티가 시계탑에서 떨어져 죽었다는 걸 알게 된다. 그곳에 두고 온 목도리를 산티가 가지러 갔을 거라는 생각을 하는 소라. 다음 생에서 소라와 산티는 과학 선생님과 우주비행사가 되고 싶은 학생으로 만난다.
(약스포)
그들은 늘 다시 만난다. 때로는 입양한 딸과 아버지로, 때로는 의사와 환자로. 또 어떤 삶에서는 의붓 남매거나 형사 파트너이기도 하다. 그들의 삶에 늘 있는 시계탑과 별과 새. 그리고 창문으로 보이는 생경한 풍경 혹은 자신의 모습. 산티는 운명을 믿는다. 그견 결정론이 아닌, 신이 우리의 삶을 통해 뭔가를 이룰 계획이라는 걸(28쪽) 의미한다. 하지만 소라는 모든 삶에서 신을 믿지 않는다.
결국은 소라가 옳았는지도 모른다. 3부를 읽으면서 그렇게 생각했다. 1,2부와는 분위기가 전혀 다른, 어쩌면 반전이라 할 수 있는 3부는 조금 슬펐다. 1,2부의 그들의 수많은 생과 이별에도 불구하고 그렇게까지 아프지는 않았는데. 어쩌면 3부의 설명은 없었어도 좋았을 지도 모르겠다, 적어도 내게는. 그럼에도 독특하고 아름다운 소설이었다.
7. 오르톨랑의 유령(이우연. 문예연구사, 2024. 208쪽)
: 외로움에 관해 이야기하는 단편들. 문장력이 좋은 작가이지만 주제의식을 깊이있게 표현하는 건 좀더 연습이 필요할 것 같다. 이 작가의 장편을 읽어보고 싶다.
8. 성스러운 술집이 문 닫을 때(로런스 블록, 박진세 역. 피니스아프리카에. 2024. 344쪽)
: 매슈 스커더 시리즈의 시작. 경찰을 그만두고 아내와 이혼한 뒤 호텔방에서 살며 주위 사람들이 부탁하는 일들을 해결해 주고 챙겨주는 돈으로 생활하는 매슈, 저녁이면 늘 바를 전전하며 술을 계속 마시지만 자신이 알콜 중독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매슈가 아일랜드인 형제들의 술집에 앉아 있던 어느 밤, 강도가 침입해서 술집을 털어간다. 그리고 종종 마주치는 전화 세일즈맨의 아내가 죽고 세일즈맨은 자신의 혐의를 벗는 걸 도와달라고 한다.
전혀 연관없어 보이는 사건들이 이렇게 절묘하게 연결되어 있다니. 원래도 추리를 못하지만 이 사건들은 더더욱 깜깜했다. 게다가 다른 술집의 장부 도난 사건과 매슈의 개인사까지 겹친다. 늘 그렇듯 재밌게 읽었다. 비록 알콜 중독에 설렁설렁 일하는 것 같지만 인간적이고 생각이 많은 매슈가 난 좋다. 제발 이 작가의 전작이 다 번역출간됐음 좋겠다.
9. 안녕한 내일(정은우. 자음과모음. 2024. 160쪽)
: 낯선 땅에서 이방인으로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 더군다나 감염병으로 인해 사회는 폐쇄되어 동양인들에 대한 편견과 차별은 심해지고, 이동마저 제한된 낯선 곳에서 자신의 자리를 확보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삶. 유학생 신분인 동성 커플, 물리치료사로 일하는 한수, 팬데믹으로 실기 수업이 중단되어 수입이 없어진 수아. 부당함을, 미묘한 차별을 느끼지만 어찌할 수 없는, 비슷한 입장의 사람들을 동정은 하지만 그들과 묶이고 싶지는 않은, 누구에게도 이해받기 힘든 삶. 안쓰럽기도 하고 함께 화내고 싶기도 하지만, 결국 모든 삶은 투쟁이지 않을까.
10. 너의 여름을 빌려 줘(리지 덴트, 백지선 역. 마시멜로. 2024. 540쪽)
: 서른한 살 버디. 스코틀랜드의 한 호텔에 일하러 와 있다. 그냥 작고 허름한 시골 호텔인 줄 알았는데, 와보니 꽤 본격적으로 영업을 하고 있는 규모가 있는 곳이다. 버디가 이곳에서 해야할 일은 와인 소믈리에. 하지만 사실 그건 절친인 헤더의 직업이다. 특정한 직업 없이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며 살아온 버디는 뛰어난 와인 소믈리에인 헤더 대신 파티에 종종 참석하곤 했는데 이번에도 파티에서 그녀를 헤더로 오해한 호텔 매니저 때문에 일이 이렇게 된 것. 헤더가 이력서를 넣었다가 차마 취소하기 힘들다고 해서 대신 취소해 주기로 했지만 깜빡한 데다가 마침 여름 내내 머물 곳도 필요했가 때문이다. 하지만 와인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모르는 버디는 어떻게 해야 하나.
솔직히 읽으면서 삐딱한 기분이 들었다. 아무리 절친이라고 해도, 남이 애써 이룬 것을 이렇게 한입에 꿀꺽 한다고? 신분 도용은 불법이잖아. 이런 문제를 이렇게 로맨틱하게, 가볍게 풀어도 되는 건가? 게다가 초반에는 노력 조차 안 하는 것처럼 보인다. 소믈리에 지망생인 동료에게 다 미루고. 그래서 결말 부분에 버디가 심리 상담을 받기로 했을 때 그나마 한시름 놓았다. 그리고 중간에 집어던지기에는 제임스가 너무 멋있었어. 그리고 주변 동료들의 캐릭터가 다채로우면서도 따뜻했고. 결말의 작은 반전도 괜찮았다. 재밌게 읽었다.
11. 밤은 눈을 감지 않는다(메리 쿠비카, 신솔잎 역. 해피북스투유. 2024. 456쪽)
: 여러 번의 유산 끝에 아내 릴리의 뱃속에는 새 생명이 자리잡고 있다. 크리스티안은 이 행복을 무슨 일이 있어도 지킬 것이다. 그런데 릴리가 이상하다. 잘 켜지 않던 보안 시스템을 켜야 한다고 하거나 어두운 창밖을 내다보며 긴장한다. 결국 릴리는 낮에 집 뒤의 숲을 산책하다 동료 교사 니나의 남편 제이크를 우연히 마주쳤는데 그가 성추행을 하려 해서 그를 밀쳤고, 아무래도 그가 죽은 것 같다고 이야기한다. 한편 니나는 병든 엄마에게 향하는 자신의 관심 때문에 의사인 남편 제이크가 화를 내자 그와 싸우고, 다음날 저녁 제이크는 연락도 없이 집에 들어오지 않는다. 실종 신고를 했지만 별 소용이 없어 이리저리 알아보던 중 제이크가 오후에 병원을 걸어나간 후 돌아오지 않았다는 얘길 듣는다.
사건의 진실 자체보다는 등장인물들의 심리에 초점을 맞춘 작품이다. 화자는 크리스티안과 니나. 이 둘의 시각을 통해 두 부부의 삶과 애정, 그리고 각자 지켜야 할 것들을 대하는 태도를 보여준다. 사실 니나가 잘 이해되지 않았다. 통제광인 남편을 그렇게까지 사랑한다고? 어쨌든 재밌게 읽었다. 사실 릴리의 비밀은 어느정도 짐작했지만 범인은 전혀 짐작하지 못했다. 그래도 난 피해자가 전혀 불쌍하지 않아. 오히려 범인이 불쌍하지. 비록 동기는 삐뚤어졌지만. 진짜 자리를 찾아가는 게 진짜 해피엔딩이라는 역자 말(454쪽)에 동의한다.
12. 영원한 천국(정유정. 은행나무. 2024. 524쪽)
: 가상 세계 구현 프로그래머 해상은 자신을 초대한 경주의 집으로 간다. 분명 동생이 아버지를 잊지 못한다고 했는데, 막상 마주한 경주의 스토리는 다르다. 경주의 입에서 그의 이름이 나왔을 때 해상은 그의 이야기를 끝까지 듣기로 한다. 한편 경주가 처음 그를 알게 된 건 삼애원이라는 노숙자 보호시설에서였다. 실력있는 물리치료사였던 경주는 다니던 병원에서 안좋은 사건에 휘말리며 그만둔 뒤 삼애원에 보안요원으로 취업하고, 자신과 같은 날 입사한 박제이와 한 방을 쓰게 된다. 박제이는 수상한 밤마실을 나가곤 한다.
이렇게 절절한 사랑 이야기를 기대한 건 아니었는데. 제목에도 불구하고 첫 챕터가 가상 세계에서의 이야기라는 걸 나중에야 깨달았고, 삼애원에서 경주의 눈으로 바라보는 박제이와 해상의 눈에 담긴 박제이가 사뭇 달라서 - 다른 게 당연하지만 - 초반에는 숨겨진 뭔가가 있을 거라고, 이 작가가 이렇게 평이한 캐릭터를 잡지는 않았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저자가 얘기했듯 이건 '착한 정유정'이 쓴 책이다. 저자의 전작들 중 『내 심장을 쏴라』, 『진이, 지니』 그리고 내가 가장 좋아하는 『내 인생의 스프링캠프』를 쓴 정유정이 쓴 작품.
'욕망 3부작'이라는 타이틀 때문에 『완전한 행복』과 비슷한 결의 이야기를 기대했다면 이 작품이 실망스러웠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난 그냥 마음을 열고 읽었다. 그리고 저자의 말에서 얘기한 '야생성'이 아닌 사랑을 더 많이 느꼈다. 어쩌면 인간의 가장 큰 욕망은 사랑 아닐까? 사랑받고 싶고 사랑하고 싶은. 사랑하는 이가 나 없이도 행복할 수 있도록 내 손으로 모든 걸 해주고 싶은 마음. 내가 너무 순진한가?
PS. 난 롤라에는 안 갈 거다. 아무리 생각해도 거기에선 책을 읽을 수 없을 거 같아. 내가 기억하는 내용만 겨우 되살릴 수 있을 뿐.
13. 마테오 팔코네(프로스페르 메리메,윤정임 역. 더클래식. 2017. 240쪽)
: 5편의 단편집. 각 단편이 모두 특색있고 재밌었다. 표제작의 결말은 맘에 안 들었지만, 왠지 읽으면서 예측이 되었고 그래서 많이 놀라거나 하진 않았다. 그럼에도 모든 작품을 읽을 때마다 기분좋은 긴장감을 느낄 수 있었다. 이런 게 이야기꾼의 능력이지, 싶었다. 가장 좋았던 건 「푸른 방」.
14. 빌레트 1.2.(샬럿 브론테, 안진이 역. 현대문화센터. 2010. 392쪽, 384쪽)
: 조실부모한 루시 스노. 어린 시절 대모 배크먼 부인의 집에 잠시 머물며 비슷한 또래인 배크먼 부인의 아들 그레이엄과 배크먼 부인에게 잠시 맡겨진 어린 소녀와 알게 된다. 성인이 된 루시는 갈 곳이 없게 되어 가상의 도시 빌레트로 향하고, 그곳에서 우연히 기숙학교의 보모로 취업한 루시는 곧 선생으로 일하게 된다.
폴 선생이 너무 별로여서 진도가 더뎠다. 특히 2권. 어쩌면 그간 읽은 내공으로 어떻게 전개될 지가 보여서 더 그랬을 듯. 어쨌든 결말은 안타까웠지만, 늘 자신의 상황을 객관적으로 받아들이는 루시여서 조금은 안심이 되었다. 사실 루시가 늘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때로는 잔인하리만큼 자신에게 솔직한 게 안타깝기도 했지만, 그래서 더 맘에 들기도 했다.
15. 살인자의 쇼핑몰 2(강지영. 자음과모음. 2023. 204쪽)
: 전작에서 삼촌의 쇼핑몰을 떠맡게 된 지안. 새벽 4시, 친구 다나가 지안의 자취방에서 죽었다. 인슐린 쇼크로. 자연주의 신봉자라는 다나의 이상한 엄마는 장례식장에서 지안에게 욕을 퍼부으며 죽인다고 했고, 지안은 삼촌의 집으로 갔다가 삼촌이 죽지 않고 살아 있다는 걸 알게 된다. 이후 수스앱에 지안 살해 요청이 떴고, 지안은 사방에서 덤벼드는 킬러들을 피해야 한다.
분량에 비해 이야기가 너무 크다. 분량을 좀 늘려주시지 그러셨어요, 작가님. 이런 재밌는 이야기는 길게 읽고 싶다구요. 마지막 장면은 맘에 안 들었지만. 게다가 반전도 좀 슬펐다. 지안이 다나의 죽음을 그렇게 견뎌낸 게. 하지만 이게 지안이지, 정진만 조카.
여담이지만, 작가도 말했듯 정진만에게서 배우의 얼굴을 지워내기가 쉽지 않았다. 1편의 그 삼촌은 그 배우의 얼굴과 몸이 아니었다구. 2편도 마찬가지.
16. 값비싼 독(메리 웨브, 정소영 역. 휴머니스트. 2024. 440쪽)
: 영국 슈롭셔 주의 작은 마을 '샤른'. 마을 이름과 같은 성을 가진 오랜 집안의 남매 기디언과 프루. 여동생 프루는 소위 말하는 '언청이'다. 주위 사람들의 곱지 않은 시선을 견디고는 있지만 결혼이나 사랑은 먼 일 같다. 어느날 아버지가 갑자기 죽어버리고, 가장이 된 오빠 기디언은 농장을 제대로 일궈 부자가 되어 마을 중심의 큰 저택을 사고 이웃집의 좋아하는 잰시스와 결혼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프루에게 도와달라고 한다. 이후 남매는 모든 즐거움을 포기하며 돈을 벌고 수확량을 늘리는 것만을 위해 소처럼 일을 한다. 한편 프루는 이웃집 잰시스의 아버지이자 마술사로 통하는 비가일디에게서 글을 배운다.
읽을수록 기디언이 답답하고 잰시스가 불쌍해서 안타까웠다. 기디언이 조금만 더 착한 사람이었다면 좋았을 걸. 읽으면서 많은 생각이 들었지만 가장 큰 의문은 선한 목적을 가지고 행하는 모든 일이 과연 선한 걸까 하는 것. 사실 기디언의 목적은 선하다고 할 수도 없었지만. 그래서 기디언이 점점 자기 목표에 매몰될 때 많이 안타까웠다. 이 소설의 빌런은 비가일디지만, 비가일디는 타고난 악인이라면 기디언은 점점 악해진 케이스여서 더욱 그랬다. 어쩌면 악마가 정말 깃들었을 지도 모르지.
그래도 프루가 행복해 져서 다행이었다. 기디언이 '개처럼' 프루를 부려먹었지만 엄마는 프루에게 상냥하고 프루를 이해해 주는 모습을 보여줘서 위로가 됐고, 케스터의 존재도 다행이었다. 마지막 장면은 역자가 말한 대로 백마 탄 왕자님 같아서 썩 맘에 들진 않았지만 이건 쌍방구원서사. 프루가 먼저 케스터를 구했다. 그것도 맘에 들었고, 책 표지마저 맘에 들었다. 프루가 품고 있는 자연에의 애정도 표현하고 있어서 더더욱.
17. 아이의 슬픔과 기쁨(이주란, 이종산, 박서련, 서연아. 서해문집. 2022. 172쪽)
: 네 명의 소설가가 각각 감정을 하나씩 택해 아이의 이야기를 풀었다. 순서대로 슬픔, 기쁨, 사랑, 고독이다. 각 작품이 그 감정을 잘 보여주었다. 사실 내가 기대했던 이야기는 박서련 작가의 「엄마만큼 좋아해」 같은 거. 그래서 이 작품이 이 앤솔러지에서는 가장 좋았다. 다른 작품들도 다 좋기는 했지만.
18. 이토록 완벽한 실종(줄리안 맥클린, 한지희 역. 해피북스투유. 2023. 528쪽)
: 개인을 위한 전세기 파일럿 딘과 부유한 집안 출신인 올리비아.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한 지 벌써 4년이고, 올리비아는 이제 아이를 갖고 싶다. 둘만의 달콤한 밤을 약속한 저녁, 슈퍼스타 기타리스트의 이동을 위해 딘이 호출된다. 콕 집어 딘을 원하는 그를 위해 딘은 비행을 떠나고, 도착지에 머물지 않고 바로 돌아오겠다는 딘을 믿고 기다렸지만 딘의 비행기는 실종된다.
(스포)
부제는 '이토록 무책임한 인간' 정도 되겠다. 완벽한 결혼 생활이란 환상에 불과하다는 거, 그것도 아내든 남편이든 어느 한쪽만의. 어쨌든 올리비아가 자신만의 행복을 찾고 진실을 모두 알게 되어서 다행이었다. 소설 전반부는 올리비아 뿐 아니라 과거의 멜라니의 시점도 보여주며 이야기를 영리하게 끌어간다. 다만 후반부의 올리비아의 두번째 결혼 생활 이야기는 미스터리 면에서는 사족이었다고 보여진다. 그 부분도 재밌게 읽기는 했지만. 하지만 로맨스 면에서라면 충분히 풍족하게 이야기되어서 좋았다. 잘 쓴 소설이다.
19. 너와 막걸리를 마신다면(설재인. 밝은세상. 2021. 324쪽)
: 나(엄주영)은 엄마와 함께 동네 뒷산에 올랐다가 내려와 식당에서 막걸리와 청국장을 먹는다. 엄마를 앉혀두고 잠깐 화장실에 다녀왔는데 엄마 앞자리에 모르는 남자가 앉아 있다. 그냥 옆테이블에 앉아서 엄마와 그 남자의 대화를 듣고 있자니 그 남자는 엄마의 아들이다.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는데 금세 아빠가 나타나고, 세 사람은 자연스럽게 식사를 하고 대화를 하는데, 엄마와 아빠는 내가 알던 그 사람들이 맞지만 옆자리의 나를 전혀 알아보지 못하는 눈치다.
막걸리를 마시다가 평행세계로 건너와 버린 이야기. 그 세계에서 다른 설정들은 다 같지만 부모님의 외동딸인 나만 외아들로 대치됐다. 심지어 이름도 같다. 그리고 성질머리는 더러울 뿐 아니라 가정폭력을 일삼는 아버지와 닮기까지 했다. 다행히 화자는 어찌어찌 대처를 해서 살아는 남을 수 있지만 그냥 원래 세상으로 가버릴 방법만 찾아서 휙 가버리기에는 이 세계의 엄마가 너무나 눈에 밟힌다. 평행 세계 이야기는 종종 있었지만 이런 시각은 꽤 신선했다. 작가 특유의 유머와 발랄함도 좋았고. 다만 이야기의 마무리가 살짝 아쉬웠다. 평행세계를 왔다갔다하는 동안의 시간 흐름도 살짝 헷갈리고. 그래도 해피엔딩은 좋았다. 현실이 얼마나 더럽고 암울한 지 알기에, 소설이나마 사이다 결말을 읽고 싶을 때 좋을 이야기였다.
20. 둘도 없는 사이(시몬 드 보부아르, 백수린. 알에이치코리아(RHK). 2024. 244쪽)
: 저자의 어린 시절 친구인 '자자'와의 추억이 바탕이 된 자전적 소설. 비록 제사에는 '실비가 내가 아니듯 앙드레도 네가 아니'라고는 쓰여 있지만. 실비는 카톨릭 학교의 지루한 생활을 견디던 중 새로운 학생 앙드레가 전학을 온다. 앙드레는 어릴 때 아팠기에 그동안 가정 수업을 받고 있었다. 실비는 예의 없는 듯 하지만 밉지 않은, 당당하고 자유로워 보이는 앙드레의 행동들에 반한다. 하지만 앙드레와의 시간이 쌓일수록, 앙드레의 집안에서 그녀를 얼마나 압박하는지가 보이고, 앙드레는 자신의 기질과 가족애 사이에서 힘들어한다.
길지 않은 이야기였지만 나도 금세 실비의 눈으로 앙드레를 바라보게 되었다. 그녀의 삶이 얼마나 힘든지 알 수 있지만 그녀의 가족에 대한 사랑 또한 알기에 지켜볼 수 밖에 없는 안타까움. 앙드레를 죽음으로 몰아 넣은 사회와 관습과 제도와 인간들, 특히 마냥 비겁하기만 했던 남자친구에 대한 원망. 그래서 마지막 장면에서 실비가 앙드레의 무덤에 빨간 장미 세 송이를 놓아주어 그나마 내게 위로가 되었다. 실비는 앙드레가 '순백색에 의해 질식했기 때문'(182쪽)에 죽었음을 이해했으므로. 나의 울음도 이때 비로소 터졌다.
21. 입속 지느러미(조예은. 한겨레출판. 2024. 164쪽)
: 선형은 작곡 동아리에서 독특한 음색과 분위기를 지닌 경주를 만나 그의 목소리에 반해 그와 함께 밴드를 결성한다. 오직 그를 위한 노래를 만들고 싶은 마음에 작곡 학원을 다니지만 어떤 사건 때문에 모두 그만두고 공무원 시험 준비를 해서 합격한다. 그런데 갑자기 외삼촌이 죽었고, 청계천의 낡은 상가 건물을 선형에게 남겼다는 소식이 들린다. 외삼촌과의 마지막 기억은 선형의 밴드 공연에 왔던 것. 선형은 건물을 팔기 위해 청소를 하다 지하실 깊은 곳에서 그 존재를 발견한다.
이 짧은 이야기 속에 많은 것이 들어 있다. 특히 사랑과 배신. 어떤 존재를 사랑한다는 건, 얼만큼의 희생이 필요한 걸까. 나를 얼마나 지워야 그에게 합당한 사랑을 줄 수 있을까. 그가 빛나게 하기 위해 난 얼마나 어둠을 삼킬 수 있나. 분명한 건 적어도 민영 삼촌보다는 선형이 훨씬 현명했다는 거. 선형은 의도하지 않았지만 경주와의 마지막 만남 또한 흡족했다.
22. 명탐정은 영원하다(에드거 앨런 포 외, 엘러리 퀸 엮, 김석희 역. 섬앤섬. 2021. 404쪽)
: 엘러리 퀸이 엮은 당대 최고의 소설 속 명탐정 11명의 이야기. 에드거 앨런 포와 아서 코난 도일, 애거사 크리스티는 이미 읽었지만 다른 탐정들과는 초면이어서 다 즐겁게 읽었다. 아, 엠마 오르치의 구석자리 노인도 구면이긴 한데 사실 이런 안락의자 탐정은 딱히 좋아하진 않아서. 하지만 이번 이야기는 재밌었다. 사실 다른 탐정/작가들이 너무 초면이라 내 일천한 독서 경험을 반성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가장 흥미로웠던 건 어니스트 브라마의 시각 장애인 탐정 맥스 캐러도스. 잭 푸트렐의 밴 두젠 교수의 독방 탈출 이야기도 재밌었다.
23. 어린 심장 훈련(이서아. 문학과지성사. 2024. 420쪽)
: 어린 여자아이들이 이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한 고군분투. 때로는 성장을 거부하거나 도망치기도 하지만, 난 무조건 이들 편이었다. 그렇게 몰아붙인 건 이 사회의 여성들을 향한 폭력과 차별, 혐오잖아. 심지어는 자신이 차별의 대상이면서 조금이라도 자신보다 약해 보이는 존재를 만나면 혐오의 기회를 놓치지 않는 인간들. 이 책의 소녀/여성들은 모두 할 수 있는 한 최대한의 적극적인 방법으로 맞선다. 그게 너무나 기특했고, 결국에는 그들을, 우리를 성장으로 이끈다는 걸 믿어의심치 않았다. 처음 읽은 작가인데, 이런 작가를 발견해서 기뻤다.
24. 이것이 완전범죄다(A. E. W. 메이슨 외, 엘러리 퀸 엮, 김석희 역. 섬앤섬. 2021. 356쪽)
: 역시 엘러리 퀸이 엮은 완전범죄 이야기 11편. 난 예전부터 완전범죄는 불가능하다고, 투명인간이 되거나 *** **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이 책에서 바로 그 방법이 나온다. 그래서 정말 맘에 들었다. 사실 가장 현실적이면서도 맘에 드는 방법은 애거사 크리스티. 빌런 퇴치는 늘 즐겁지. 역시나 내 짧은 독서 경험을 반성하는 계기가 되었다. 다만 이 작품들이 완역이 아니라 편역이라는 점이 아쉽고, 후속이 없을 거 같아 더 안타깝다.
25. 부산 느와르 미스터리(박대겸. 오러. 2024. 480쪽)
: 인지도가 나쁘지 않은 작가 대겸. 하지만 마감이 코앞인데 글은 막혔다. 모니터 앞에서 깜빡 잠이 들었는데 꿈 속에서 이야기의 신을 만난다. 자신을 만나는 건 로또 두 번 당첨될 확률이니 소원을 들어주겠다는 말에 대겸은 소설 이야기를 하고, 깨어 보니 모니터에 글이 가득하다. 파일 이름은 '부산 느와르'. 전직 경찰이었던 형 미치를 둔 켄이 함께 놀러다니던 제이슨을 대신해 마약 소지 혐의로 감방에 다녀온 후의 이야기이다.
소설 속 소설 '부산 느와르'와 소설 속 현실 '미스터리' 챕터가 반복되는 동안에는 재밌게 읽었다. 하지만 대겸이 '부산 느와르' 속으로 들어간 이후부터는 지루했다. 설정은 참신했으나 그 참신함은 설정에 그쳤고, 작가의 뒷심은 부족했다. 뒷부분은 그저 어떻게 결말이 나는지 보려고 읽었다. 그간 읽은 게 아깝기도 했고. 아마 이 작가를 다시 읽지는 않을 거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