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네버 룩 어웨이(린우드 바클레이, 신상일 역. 해문출판사. 2012. 512쪽)
: 작은 도시 프로미스 폴즈의 작은 신문사의 기자 데이빗. 4살 아들과 에어컨 업체에서 일하는 아내 잰과 나무랄 데 없는 생활을 하고 있다. 최근 아내가 종종 우울해 하며 이상한 말들을 하고 화를 내거나 두통을 핑계로 피하거나 하지만. 그러던 아내가 놀이공원에 가자며 온라인 예매를 했다고 한다. 놀이공원에 도착한 뒤 아내는 아들과 데이빗을 먼저 들여보냈고 공원 안에서 만난 뒤 데이빗에게 아이스크림을 사오라고 했는데 다녀와 보니 아이가 없어졌다. 아내를 공원 안전요원에게 보낸 뒤 아들을 찾던 데이빗은 다행히 아들을 발견하지만, 이번엔 아내가 사라졌다.
처음에 아이 없어진 이야기가 나왔을 때 읽지 말까 했다. 놀이공원에서 아이를 잃어버리다니, 모든 부모의 악몽이잖은가. 난 부모였던 적은 없지만, 아동 범죄 이야기는 읽기 싫다. 하지만 이건 아내 실종 사건. 사실 진실은 짐작대로 흘러간다. 300쪽에서 진실이 밝혀지지만 나처럼 추리를 못하는 사람도 그 전에 충분히 알 수 있다. 다만 이야기의 맺음이 궁금했다. 특히 데이빗이 아내 살해 혐의를 어떻게 벗을지. 결말은 아주 조금 안타깝다. 어리석은 선택이 부른 필연적인 결과겠지. 늘 그렇듯 상처를 보듬는 건 남은 자의 몫이다.
2. 벌룬 업(이동현. 넥서스. 2023. 304쪽)
: 연작 소설집인 듯 하지만 장편소설로 읽어도 무방한 작품집. 하나의 마을에서 살며 하나의 회사를 다니고 하나의 취미 생활을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 책 정보에서 '사람의 몸에 쌓인 기름을 짜내는 회사'라는 설정은 사실 그리 중요하지 않다. 회사에는 고객의 몸에서 기름을 짜내는 작업조 뿐 아니라 경비조, 양배추 수확조 등 다양한 직업군과 다양한 사람들이 있고, 마을에는 펍과 식당이 있으며 사람들은 퇴근 후 모여서 술을 마시고 명절이면 모여서 공통의 취미 생활을 한다. 처음에는 하나의 도시국가 설정이고, 현대 사회의 축약판인가 싶었지만 한 사람 한 사람의 이야기들을 읽어 나가면서 이건 그냥 인생 이야기라는 걸 알았다. 매일 일을 하고 사랑을 하고 누군가와 만나고 또 헤어지고 그러다가 죽음에 이르는.
모든 인생은 비슷할 지 모른다. 하지만 각자의 몸에서 나온 기억 구슬의 색이 다르듯, 인생 하나하나는 빛나는 지점이 모두 다르다. 이 책에는 그 반짝임들이 모든 챕터에 있어서 좋았다. 가장 좋았던 건, 조금 슬펐지만 조니 이야기(「조니에게」). 「울찌의 전성시대」도 좋았다.
3. 페어리테일 1, 2(스티븐 킹, 이은선 역. 황금가지. 2023. 460쪽, 460쪽)
: 찰리의 엄마가 갑작스럽게 교통사고로 사망한 후, 찰리의 아버지는 알콜 중독에 빠진다. 그렇게 3년이 흐르고 공과금은커녕 살고 있던 집마저 은행에 넘어갈 지경이 되자 찰리는 간절한 마음으로 무엇이든 할테니 아버지가 술을 끊게만 해달라고 기도하고, 아버지 전직장 동료의 도움으로 아버지는 정신을 차리게 된다. 이제 고등학생이 된 찰리는 공부와 운동 모두를 열심히 하며 성실하게 살아가고 있는데, 어느날 마을의 가장 꼭대기 1번지에 사는 괴팍한 은둔형 외톨이 노인 보디치 씨의 개가 다급하게 짖어대는 걸 듣고 달려가 노인을 구한다. 개 레이더와 친해지고 또 보디치 씨와도 친분을 쌓게 된 찰리는 보디치 씨가 어마어마한 부자라는 걸 알게 되고...
찰리의 모험 이야기. 새로운 세계에 (우연히) 들어가게 되고 그곳에서 자신의 처음 신분과는 다른 역할을 맡게 되지만 세계와 그곳의 사람들, 그리고 자신을 구원하기 위해 능력을 넘어서는 일들을 하며 성장을 하는 영웅 서사를 충실히 따랐다. 익숙한 동화들을 오마주했지만 그대로 쓰기보단 참신하게 덧칠하여 작가만의 색을 입혔다. 한 번 더 생각하게 하고 한 번 더 미소짓게 하는. 재밌었다. 보장된 해피엔딩이 주는 안도감도 있었고.
다만 막판 베드신은 정말 생뚱맞았다. 소년의 모험은 꼭 성적 경험으로 완성되어야 하나? 지하감옥 전까지 전학간 학교 친구 제니 빼고 다른 모든 여성 캐릭터를 엄마 혹은 성적 대상으로 이분화하는 거 같아서 좀 그랬는데, 그래도 딥 말린에서는 여성을 동료로 보는 거 같아 괜찮았다. 그런데 막판에 꼭 그런 장면을 집어넣었어야 했나?
4. 달콤한 목요일(존 스타인벡, 박영원 역. 문학동네. 2008. 428쪽)
: 너무나 좋았던 『통조림공장 골목』의 후속작. 우리의 닥이 참전 후 캐너리 로로 돌아온다. 모든 게 변했다. 팰리스 플롭하우스의 화이티 넘버1은 다리를 다쳤고 게이는 죽었다. 베어 플래그의 주인은 포나로 바뀌었다. 리청은 식료품 가게를 조지프 앤 메리에게 팔고 떠나버렸다. 많은 사람들과 골목의 변화에 닥은 적응을 하지 못하고 우울해지고, 맥은 닥에게 여자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베어 플래그에 새 얼굴 수지가 등장한다.
또 맥이 일을 벌인다. 전편에서와 마찬가지로 애정만 앞서는 오지라퍼 맥. 사실 내용이야 독자가 짐작하는 대로, 그리고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만 이들(사랑에 빠지는 커플 뿐 아니라 등장인물 모두)만의 알콩달콩한 티키타카와 범상치 않은 사고방식으로 인한 예측불가능한 행동들이 정말 재밌고 사랑스럽다. 이 골목 사람들 이야기가 시리즈로 계속됐다면 좋았을텐데. 하지만 어쩌면 이 이야기가 여기서 끝나기에 더 사랑스러운 거겠지. 그래도 캐너리 로의 그 달콤했던 목요일은 나의 칙칙한 현실에도 한번쯤은 와주었으면 좋겠다.
5. 대단한 세상(피에르 르메트르, 임호경 역. 열린책들. 2024. 792쪽)
: 레바논 베이루트의 가장 큰 비누 공장을 운영하는 루이 펠티에. 3남 1녀를 두었는데, 1년에 한 번 회사 창립기념일에 온 가족을 데리고 공장까지 행진을 하는 것으로 자신의 업적을 자찬한다. 하지만 일머리가 없는 장남 장은 공장 운영에 참여시켰다가 공장을 망칠 뻔 해서 자기의 뜻에 따라 파리로 보내줬고, 차남 프랑수아는 파리의 고등사범학교에 다니겠다며 갔으나 예전부터 품고 있던 꿈인 기자가 되기로 한다. 삼남 에티엔은 용병이었던 연인이 베트남전에 참전한 뒤 연락이 끊기자 그를 찾아 하노이로 떠난다. 딸 엘렌은 누구보다 더 이 집안에 환멸을 느끼고 있고, 이 반항심은 엉뚱한 성적 일탈로 표현된다.
새로운 4부작의 시작이라는 걸 알게 되어서 기쁘다. 그리고 전작의 등장인물들도 반가웠다. 사실 가장 즐거웠던 건, 이 작품이 전작들보다 가독성이 월등히 높았다는 것. 아무래도 이전 작품들보다 등장인물들 간의 관계가 유기적이고도 단순해서였던 거 같다. 약간의 스릴러적인 요소도 한몫했고. 이 작가의 작중 인물들은 호감이나 공감보다는 연민과 동정을 불러일으키는데, 앞으로 전개될 이야기들의 주인공이 이들일지 혹은 새로운 인물일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기대된다.
6. 불안한 낙원(헨닝 만켈, 김재성 역. 뮤진트리. 2015. 464쪽)
: 스웨덴 시골 오지에서 자란 한나. 아버지도 일찍 돌아가시고 엄마를 도와 집안일을 하고는 있지만, 가난은 뼛속에 스민다. 엄마는 한나에게 집을 떠나 마을의 친척의 도움을 받아 가사도우미로 일을 하라고 하고, 한나는 엄마가 아는 유일하게 믿음직한 모피상인 포르스만의 썰매에 실려 도시로 가지만 친척의 행방은 찾을 수 없다. 포르스만은 한나를 자신의 집 하녀로 거두었다가 얼마 뒤 호주로 가는 배의 요리사로 주선해 준다.
한나의 삶은 계속 추웠다. 심지어는 배의 중간 기착지인 포르투갈령 아프리카인 로우렌소 마르케스에 몰래 내려 그곳에서 삶을 꾸려가는 동안에도. 어쩌면 첫 남편 룬드마르크와 결혼 전 몇 달 간 선상에서 데이트를 했던 동안 혹은 로우렌소 마르케소의 매음굴이 무난하게 운영되던 몇 달 간은 조금은 따뜻했을 지도. 하지만 그녀 자신도 얘기했듯 그녀의 삶은 꿈도 꾸지 못할 방향으로 흘러갔다. 그래서 결말이 좋으면서도 마음 아팠다. 내 안의 이성은 작가가 슬쩍 덮어놓은 대로 받아들일 수 없어했지만 내 감성은 작가의 거짓말을 믿고 싶어했기에.
뜨거운 아프리카의 나비는 왜인지 잘 상상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한 마리 혹은 두 마리는 꼭 있을 것 같다.
7. 0번 버스는 2번 지구로 향한다(김준녕. 고블. 2023. 268쪽)
: 상당히 풍자적인 SF 단편들. 표제작 외에는 다 재밌었다. 먼 미래에 관한 다채로운 상상이 돋보이지만 중요한 건 이 작품들 속 상황이 결코 먼 미래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 대물림되는 빚과 갚을 때까지는 죽을 수조차 없는 현실(「빛보다 빠른 빚」), 확보한 행성(땅)이 태양 폭발 후에도 남아 있을 지에 나 뿐 아니라 가문의 미래까지 걸려 있는 현실(「망자를 위한 땅은 없다」), 팔 수 있는 건 기억 밖에 없지만 의미있을수록 단가가 높기에 소중한 기억도 넘길 수 밖에 없는 현실(「경매」)... 많이 웃기고 많이 슬펐다. 가장 좋았던 건 가장 웃겼던 「블랙홀 뺑소니」.
8. 프랭키(요헨 구치,막심 레오, 전은경 역. 인플루엔셜. 2024. 268쪽)
: 고양이 프랭키는 오랫동안 비어있던 집의 마당에 자라난 풀이 맘에 들어 갔다가 불이 켜진 집 안에서 엄청나게 탐나는 두툼한 끈을 천장에 매달고 그 안으로 목을 집어넣으며 놀고 있는 인간을 보게 된다. 두툼한 끈이 맘에 들어 함께 놀려고 했지만 인간은 프랭키에게 뭔가를 던지고, 프랭키는 맞고 기절한다. 그렇게 자살을 방해받은 인간 남자 골드와 수고양이 프랭키는 동거를 시작한다.
뻔한 내용이다. 프랭키가 인간의 말을 할 줄 안다는 게 특별하긴 하지만 그거야 처음 있는 설정도 아니고. 하지만 가벼운 책을 읽고 싶어서 집어든 거라서 즐겁게 읽었다. 프랭키가 골드를 챙기게 되는 게 급하게 전개되는 경향이 있긴 하지만, 솔직히 이 책에서 대단한 문학성을 기대하진 않았기에 그냥 읽고 넘겼다. 그래도 즐거웠다.
9. 내 눈에는 악마가(루스 렌들, 전은지 역. 황금가지. 2005. 302쪽)
: 늦은 밤, 공동주택 지하실에 한 남자가 내려온다. 쌓여 있는 물건들을 지나 다음 공간으로 간 남자는 그곳에 놓여 있던 마네킹을 폭행하고 목을 조른다. 잠시 뒤 만족한 남자는 다시 조심스럽게 지하실을 빠져나간다.
몇 십 년 동안 한 집에서 세들어 살아온 아서 존슨. 자신과 이니셜이 같은 앤서니 존슨이 이사오면서 여러 상황이 꼬이기 시작한다. 늘 자신이 정한 규칙대로 살아가며 속으로는 주위의 인간들을 깔보는 아서는 자신의 고고한 성품에 어울리지 않게 앤서니의 편지를 모르고 뜯어본 뒤 그에게 사과 편지를 쓰고, 그의 반응을 면밀히 살핀다.
주인공의 심리 묘사가 탁월하다. 이건 정말이지, 직접 겪어보지 않고 이렇게 섬세하게 쓸 수 있을까 싶다. 아서의 마음 결을 하나하나 따라가다 보니 아서에게 연민과 공감이 생겨, 아서의 실수가 늘어나자 나까지 초조해지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래서 결말이 안타깝기까지 했다. 역시 잘 쓰는 작가이다.
10. 크리스마스 인터내셔널(김원우. 아작. 2022. 336쪽)
: 아이돌 활동 당시 과일 자몽의 영문 이름을 '자몽'이라고 답해 비웃음을 사고 그 여파로 슬럼프에서 헤어나오지 못해 아이돌을 그만둔 나영. 부모님의 카페에서 일하며 자몽에 대해 끝없이 공부하다 자몽에 관한 수많은 논문들을 써낸다. 어느 날 광화문에 거대한 우주선이 착륙하고, 문이 열리고 다섯 외계인이 차례로 나오는데 그들 모두는 동글동글한 몸을 가졌고 첫 번째 외계인은 색깔마저 옅은 주황색이다. 아무런 반응없이 광장에 서 있는 외계인들에게 대응하기 위해 TFT가 꾸려지고, 갑자기 나영도 부름을 받는다.
도입부에서 나영이 도서관에서 시간을 보내는 부분이 너무너무 맘에 들어서 읽기 시작했는데, 외계인을 통해 저자는 인간성을 얘기하고 싶었나보다. 따뜻함이, 우정과 사랑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뻔하고 평범하면서도 어려운 얘기를. 즐겁게 읽기는 했는데 교정(특히 맞춤법) 오류가 은근 거슬렸다. 이 출판사는 아이디어는 좋은데 왜 교정 오류가 점점 더 심해지는 지 모르겠다.
11. 르 몽스트르(아고타 크리스토프, 박철호 역. 제철소. 2023. 360쪽)
: 희곡집. 이 저자는 오랫동안 장바구니에 담아만 두었다. 내용이 왠지 (심적으로) 힘들 거 같아서 선뜻 손 내밀 수가 없었는데, 도서관에서 희곡집을 발견하고는 이 정도는 견딜(?) 수 있겠지 싶어서 대출했다. 대부분의 작품들이 표면적 이야기 아래에 함축적 의미가 깔려있는, 사회의 부조리를 고발하고 개인의 위선을 폭로하는 내용인데 뻔한 듯 하지만 특이하고 날카롭다. 사실 첫 작품인 「존과 조」가 꽤나 무난하고 평범해서 좀 심상하게 읽었으나 「엘리베이터 열쇠」가 정말 맘에 들어 그 뒤로는 기쁘고 열정적으로 읽었다. 가장 좋았던 작품 역시 이것. 「길」과 표제작도 좋았다. 「속죄」는 정말 영화 시나리오 같았다.
이제 슬슬 저자의 소설들도 읽어 봐야겠다.
12. 영혼의 사슬(프리담 그란디, 맹은지 역. 북캐슬. 2011. 492쪽)
: 조용한 시골 마을에서 어린 소녀가 실종된다. 지역 국회의원의 요청으로 어린이 실종 사건 전담 FBI 요원 레이아가 투입되고 소녀는 토막 시체로 발견된다. 한편 7세 소녀 나디아는 잠에서 깨지 않은 상태로 테라스 난간 위에 올라가려 해 부모에 의해 급하게 병원으로 옮겨지고, 아동 정신과 의사 피터는 아이를 면담하지만 병변은 없다. 다만 나디아는 나이답지 않은 뛰어난 그림 솜씨로 자신의 생생한 꿈을 그려내고, 입원하여 상태를 살피던 중 꿈 속에서 몸이 토막난 소녀와 만나는 그림을 피터에게 보여준다.
스릴러와 오컬트의 결합이랄까. 나디아가 인도 출신 입양아라는 설정에 서양인들의 오리엔탈리즘인가 싶었는데 저자도 인도 출신이다. 글솜씨가 좋아 늘어지거나 내용에 의문을 갖게 하지는 않았지만 주인공의 로맨스는 너무 생뚱맞았다. 이 작가의 책을 다시 읽을 거 같지는 않다.
13. 빛의 공화국(안드레스 바르바, 엄지영 역. 현대문학. 2021. 264쪽)
: 남미의 한 도시, 사회복지과장인 화자가 20년 전의 그 사건을 회상한다. 당시 화자는 이전 다른 도시에서의 업적을 인정받아 거대한 밀림과 강으로 둘러싸인 도시 산크리스토발의 사회복지과장으로 부임했다. 그런데 어느 날, 9세에서 13세 사이의 아이들이 도시에 나타나 구걸을 하거나 작은 도둑질을 한다. 자신들만의 언어로 얘기하는 이 32명의 아이들은 밤이면 어딘가로 사라지고, 낮에도 같이 다니는 소그룹의 인원을 바꿔가며 은근한 불안을 형성한다. 그러던 중, 아이들이 마트에서 끔찍한 일을 저지르는데...
아무 정보 없이 읽기 시작하다가 나 또한 자꾸만 불안해지는 마음을 진정시키려고 알라딘 리뷰를 찾아봤는데, 『파리대왕』을 언급한 리뷰가 많아서 당황했다. 나 그 작품 싫어해... 물론 이 책은『파리대왕』과는 다르다. 읽으면서 여러 복합적인 감정이 들었다. 아이들이 안됐지만 그들 나름의 질서와 체계를 존중해 주고 싶기도 했고, 그래도 기존 사회에 편입시켜야 하지 않을까 싶기도 했으며 한편으로는 내가 산크리스토발에 있었다면 나 또한 화자와 같은 감정을 느끼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이 작품의 결말은 안타까우면서도, 마지막 장면의 그 푸른 빛처럼 아련하다. 슬픈 결말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의 분위기와 작가의 문체 - 정확히는 화자의 어조 - 가 정말 좋았다.
14. 사라진 세계(톰 스웨터리치, 장호연 역. 허블. 2020. 568쪽)
: 레이건 정부의 적극적 투자 이후 시간여행이 가능해진 세계. NCIS 수사관 섀넌 모스는 신입 시절 먼 미래로 갔다가 귀환 타이밍을 놓쳐 한쪽 다리를 절단하고 만다. 현재, 일가족 살해 사건이 발생하고, 10대 딸과 참전용사인 아버지만 실종된 상황에서 아버지가 미래 세계로 보내질 예정이었던 전함의 선원이었다는 게 드러난다. 섀넌이 투입되고 섀넌은 이 사건이 단순히 참전용사의 PTSD가 문제가 아님을 알게 된다.
세계관이 꽤 탄탄하면서도 복잡하다. 평행(parallel) 우주라기보다는 종속(sub) 우주 같은 느낌이다. 시간여행으로 가게 된 미래는 여행자가 그곳에 있을 때만 존재한다(현재를 '굳건한 대지'로 부르는 이유). 여행자는 자신의 신분을 노출시키지 말아야 하며, 그곳에서 알게된 정보를 현재로 가져와 현재의 사건을 해결하는 데 사용한다. 사실 난 이게 좀, 별로라고 생각했다. 현재에서 치열하게 고민하고 열심히 발로 뛰어 사건을 해결하는 범죄 소설들을 읽다가 이렇게 미래에서 해결 방안을 가져오는 걸 보니 좀 날로 먹는 거 아닌가 싶고. 게다가 미래로 가서 지내는 동안 여행자의 시간은 그대로 흐르는데 다시 현재로 돌아올 때는 떠난 시간으로 돌아오므로 시간여행자는 미래에 머물렀던 만큼 늙어 있다. 이게 사실은 제일 맘에 안 들었다. 어우, 난 안 가.
재미있게 읽었지만 맘에 쏙 들진 않았다. 결말 부분도 그렇고. 물론 이 결말이 최선이라는 걸 알고 있다. 부록처럼 덧붙여진 챕터가 진짜 결말이었으면 좋겠지만 그건 의미없는 '만약에' 아닌가.
15. 마녀들(브랜다 로사노, 구유 역. 은행나무. 2024. 324쪽)
: 한 여성이 살해당한 채 발견된다. 피해자 팔로마는 트랜스젠더. 기자 조에는 취재를 위해 피해자의 사촌이자 유명한 치유자인 펠리시아나와 대화를 나눈다. 조에의 이야기와 펠리시아나의 이야기가 교차된다.
조에의 세계와 펠리시아나의 세계는 완전히 다르다. 도시에 살면서 정규 교육을 받고 자신을 믿어주는 부모 - 특히 아빠 - 밑에서 자란 조에와 산골에서 정확히 언제인지도 모를 날에 태어나 동생과 양을 치며 자라고 자신만의 '책'을 지니고 있음에도 여자는 치유자가 될 수 없다는 이야기를 할아버지에게서 들으며 자란 펠리시아나. 하지만 이들은 각자 자신만의 언어를 확보한다. 기자인 조에도, 언어의 치유자인 펠리시아나도. 거기에 더해 펠리시아나의 손길로 조에 또한 자신이 깊숙히 넣어둔 응어리를 풀 수 있게 된다.
그냥 이 둘의 이야기를 읽는 것만으로 좋았다. 조에의 삶과 펠리시아나의 삶을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조에가 자신의 꿈을 위해 엄마의도움을 받으며 사회적 제약을 부수며 나아가는 것도, 펠리시아나가 자신 안의 언어의 힘을 자연스레 발휘하게 되는 것도 나름대로 의미가 있었고. 언어는 특히 여성의 언어는 힘이 있다.
16. 알래스카 샌더스 사건 1, 2(조엘 디케르, 임미경 역. 밝은세상. 2023. 484쪽, 500쪽)
: 1999년 봄, 조깅을 하던 로렌은 호숫가에서 곰이 뭔가를 물어뜯고 있는 걸 발견한다. 사람인 걸 알아채고 근처 주유소로 뛰어가 경찰을 부르는데, 피해자는 주유소에서 일하던 알래스카 샌더스. 마운트플레전트에서 산 건 얼마 안 되지만 아름답고 친절한 그녀는 타살된 것으로 밝혀지고, 주머니에는 '나는 네가 한 짓을 알아'라는 타이핑된 쪽지까지 발견된다. 동거남 월터가 용의자로 지목되고 수사가 진행되는데 사건은 급작스럽게 마무리되고, 10여년 후 작가 마커스 골드먼은 우연찮게 이 사건을 접하게 된다.
이 작가의 책은 두번째인데 순서대로 읽을 걸 그랬다. 사실 『해리 쿼버트 사건의 진실』을 이미 읽었다고 착각했는데 내가 읽은 건 『스테파니 메이어 실종 사건』이었다. 이 책에서 화자는 계속 과거 작품들(『해리 쿼버트 사건의 진실』, 『볼티모어의 서』)을 언급하는데, 그도 그럴 것이 화자가 동일한데다가 이 작품에서도 해리 쿼버트가 꽤 비중있게 출연한다. 『해리 쿼버트 사건의 진실』에서 인연을 맺었다는 페리 게할로우드 형사도 물론 등장해서 더 큰 비중을 갖고 활약한다. 물론 앞의 두 작품을 안 읽었더라도 이 작품을 읽는데에 문제는 없었지만 기왕이면 순서대로 읽었다면 훨씬 재밌었을텐데.
범인은 예측 못했다. 난 그냥 뒤늦게 등장한 그 변태남인줄. 근데 책 다 읽고 알라딘 책 소개를 보니 꽤 스포일러일 수도 있겠다 싶다. 물론 책을 다 읽은 상태여서 보이는 거지만. 전작을 읽을 때도 이 작가가 등장인물들에게 갖는 애정이 보이는 듯 해서 좋았고 이번에 이 책을 집어든 것도 그 기억때문이었는데 역시나 작가는 사건의 진실을 파헤치는 데에만 치중한 게 아니라 인물들 하나하나에게 애정을 갖고 생명력을 부여했다. 이제 얼른 『해리 쿼버트 사건의 진실』을 읽어봐야겠다.
17. 잠이 고장난 사람들(가이 레시자이너, 김성훈 역. 시공사. 2023. 448쪽)
: 신경의학자인 저자가 수면 장애 환자들의 케이스를 예로 들며 여러가지 수면 장애를 설명한다. 흔한 불면증은 물론이고 수면위상지연증후군(비24시간 리듬장애), 몽유병(렘수면행동장애), 비렘사건수면, 기면증, 잠꼬대, 수면무호흡증, 입면환각(가위눌림) 등 수면 중 일어나는, 잠의 질을 떨어트리는 대부분의 질병들을 사례와 함께 원인, 치료 방법을 이야기한다.
난 불면증이 있다. 아기 때도 낮잠을 잘 안 잤고 잠투정도 심했다는데, 어릴 때부터 자기 힘들었던 기억이 있고 한때는 이틀에 하루만 겨우 잤던 시기도 있었다. 요즘도 흡족하게 잘 자진 못한다. 수면 시간도, 수면의 질도. 이 책은 제목을 보자마자 호기심이 생겼고, 못된 마음이겠지만 나보다 증상이 심한 사람들의 사례를 보고 싶은 마음도 없지 않았는데 사실 몇몇 사례는 좀 어거지같기도 했다(157-9쪽의 사례. 잠꼬대가 아니라 뮌하우젠 증후군이나 가스라이팅 사례 아닌가?). 그래도 모르던 질병들에 관한 지식은 흥미로웠다.
잠의 중요성을 난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불면의 밤이 지속되면 내 신체가 어떻게 망가지는지 40년이 넘게 겪고 있으니까. 이 책이 수면 장애가 있는 독자들에게 얼마나 도움이 될 지는 개인차가 클 거 같다. 나의 경우에는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의미 있는 독서였다고 할 수 있다.
18. 프리랜서에게 자비란 없다(강지영 외. 몽실북스. 2022. 352쪽)
: 느와르 앤솔러지. 첫번째 작품이자 표제작은 뻔하지만 재밌었다. 사실 내가 정말 기대한 건 강지영인데, 잘 짜인 작품이고 재미도 있었지만 결말이 너무... 슬펐다. 아마도 화자가 최보람이어서 그랬나보다. 근데 이런 비정한 결말이야말로 느와르의 특성이지. 결말 때문에 가장 맘에 든 작품이 「중고차 파는 여자」(윤자영)가 됐다. 멋진 주인공. 느와르라면 응당 이래야지. 정명섭의 작품은 다른 앤솔러지에서 본 거였고, 조영주의 「아직 독립 못한 형사」의 주인공은 다른 작품 『반전은 없다』에도 나왔던 나영 형사인데 캐릭터가 참 애매하다. 전작을 읽고 이 작가 그만 읽어야지 했는데 나영 때문에 좀더 읽어볼까 싶기도 하고. 암튼 다 재밌게 읽었다.
19. 미란다 복제하기(캐럴 마타스, 김다봄 역. 사계절. 2024. 464쪽)
: 부모님께 한 번도 반항은커녕 거짓말조차 해 본 적 없는 고등학생 미란다. 친구 엠마는 수시로 부모님을 속이고 놀러 나가는데 미란다는 늘 부모님과 상의하고 부모님 뜻에 따르면서 공부든 발레든 열심히, 잘 하는 모범생이다. 발레 발표회를 준비하던 중 갑자기 눈앞에 캄캄해지는 미란다. 급하게 부모님 소유 병원에서 검사를 받는데 온 몸에 악성 종양이 발견된다. 아버지 소유의 다른 연구소에서 다시 진찰을 받은 미란다는 유전치료를 통해 종양을 제거하고, 제거할 수 없는 장기는 이식하면 된다, 맞는 장기가 금세 발견됐다는 얘길 듣는다. 치료를 위해 연구소에 입원한 미란다는 자신과 모든 신체가 똑같은, 그러나 서너 살 어려 보이는 아이와 마주친다. 아이는 자신이 텐이고, 미란다를 위해 존재한다고 말한다.
뻔한 내용일거라 생각했는데 뜻밖에 흥미진진했다. 인간 복제에 관한 윤리적 논쟁점을 당의정에 싸서 보여주는 데에만 그치는 게 아니라 확실한 빌런을 내세워 미란다의 모험과 성장을 이끌어 내 청소년들의 흥미를 확실히 붙잡아 둘 수 있을 듯 하다. 난 특히 현실적인 자매 관계가 재밌었다.
20. 새 책 들어온 날(이수현. 포스티게. 2024. 122쪽)
: 사서의 도서관 이야기. 도서관의 업무 뿐 아니라 저자를 사서가 되게 한 일, 도서관에서의 에피소드 등이 담겨 있다. 짧지만 알찬 도서관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제목이 너무 설레어서 선택했지만 솔직히 내용에 큰 기대는 없었다. 도서관 진상이나 노숙인 이야기, 휴관일 이야기 등 도서관 애용자인 내겐 새로울 것 없는 이야기였지만 도서관과 친숙하지 않은 사람이라면 이 책을 읽고 도서관에 관심이 생기기에 충분할 거 같다.
21. 위시(니컬러스 스파크스,박설영 역. 모모. 2023. 488쪽)
: 2019년 겨울. 매기는 이제 생을 정리해야 한다. 꽤 성공한 사진작가인 매기는 뉴욕에서 동업자와 함께 갤러리도 갖고 있고, 유튜브에서도 꽤 알려졌다. 점점 약해지는 체력때문에라도 새 직원이 필요하던 중, 자신을 찾아온 반듯한 청년 마크를 만나 이야기를 하고 그를 신입 직원으로 뽑는다. 매기의 이른바 '암 동영상'을 봤음에도 예의를 지키고 매기를 배려하는 마크를 보며 누군가를 떠올리는 매기. 매기에게 조심스러운 마크와 점점 친해지고 매기는 23년 전 알았던 한 사람을 떠올린다. 1996년 열 여섯 살 매기는 사고로 임신을 하고 부모님과 언니와 살던 시애틀을 떠나 고모 린다가 살고 있는 오크라코크라는 외딴 섬으로 보내진다.
뻔한 내용인데 459쪽에서 울음이 터졌다. 처음부터 짐작했는데도. 오히려 내 짐작이 맞다면 작가가 너무 안일한 거 아닌가하는 생각까지 책 초반에는 했었다. 심지어는 브라이스의 운명도 내 짐작대로 흘러갔지만 막상 그 부분을 읽었을 때도 마음이 아파 책을 덮고 한참동안 숨을 골랐다. 작가의 필력이 이런 데서 드러나는 거겠지. 뻔한 이야기를 읽고도 눈물 흘리게 하는 힘.
(누군가와 사랑하고 있다면) 사랑을 참지 말자.
22. 당신도 아는 이야기(김강물. 안전가옥. 2023. 200쪽)
: 지방대학을 나와 서울에서 의대생 언니가 살던 원룸을 물려받아 살고 있는 동시. 이제 막 과외에서 잘리고 버스 정류장에 서 있는데, 어떤 할머니가 대뜸 초파리의 비밀을 아냐고 묻는다. 초파리가 잡히지 않는 이유는 공간을 접기 때문이라는 말에 동시는 얼른 도망치듯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는데, 방금전 동시를 해고한 주현 엄마에게서 연락이 온다. 주현이 사라졌다고, 애 꼬드겨서 다시 과외하려는 거 아니냐고. 동시는 주현을 찾기 시작하고 그 과정에서 '천기누설방지 TF팀장' 정심한과 동행하게 된다.
제목 때문에 뭔가 익숙한 이야기를 기대했지만 아니었다. 신선했다. 각종 천기들도 그렇고 온양온천을 비롯해 아산의 여러 역사적 명소를 거론한 것도 그렇고, 저자의 시선이 신박하면서도 가볍지 않아서 좋았다. 다만 서술은 조금 산만했다.
23. 소녀는 따로 자란다(안담. 위즈덤하우스. 2023. 68쪽)
: 정말정말 좋은 책이다. 초등학교 고학년이라는, 사춘기에 막 진입한 소녀들의 심리를 탁월하게 드러낸다. 하지만 결코 대놓고 펼쳐보이며 전시하지는 않는다. 압축적으로, 은근하지만 누구도 모를 수는 없게.
화자는 다른 여자아이들처럼 무리로 몰려 다니지 않지만 많은 아이들이 몰래 찾아와 고민을 털어놓는다. "나는 뒷문으로만 내어놓는 비밀이 고여드는 우물이다(8쪽)". 다른 아이들처럼 리본과 분홍색을 추구하고 싶기도 하지만 아이들이 자신을 찾아오는 건 이 가죽재킷 때문이란 것도 알고 있다.
조금만 달라도 아이들 사이에서 특이 취급을 받는 초등 시절의 심리를 이렇게 잘 묘사할 수 있을까. 작가의 말에서, 정말 쓰고 싶었다고 했는데 독자 입장에서는 정말 써줘서 고마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