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로열 로드에서 만나(이희영,심너울,전삼혜. 위즈덤하우스. 2023. 168쪽)

: 메타버스 앤솔러지. 이희영의 작품은 클리셰이긴 했지만 가장 주제를 명확하게 드러내는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심너울은 설정은 재미 있었지만 용두사미. 결말도 뻔했다. 전삼혜가 가장 좋았다. 몽글몽글 귀엽기도 하고, 앞으로 이어질 이야기가 궁금하기도 하고. 



2. 런던 비밀 강령회(사라 페너, 이미정 역. 하빌리스. 2024. 484쪽)

: 1873년 파리. 유명 영매 보델린의 제자로 있는 레나는 보델린으로부터 선천적인 재능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하지만 레나는 원래 과학과 이성만을 신봉하던 사람이었다. 그랬던 레나가 부모님이 계시는 런던을 떠나 이렇게 보델린과 함께 머물고 있는 이유는 하나뿐인 동생 에비가 살해당했기 때문. 보델린은 범죄 피해자의 강령회를 열어 피해자의 영혼이 자신에게 빙의하게 해서 범인을 찾아낸다. 에비는 예전부터 강령회에 관심이 많았고 보델린의 제자로 있기도 했다. 보델린은 런던에 있을 때 런던 강령술 협회장인 볼크먼과 친하게 지냈지만 협회가 강령회에서 사기를 친다는 오명에 휩싸이고 여러 비리에 연루된 듯하자 모든 강령회가 의심의 대상이 되었고, 신변의 안전이 염려되어 파리로 와 있었던 것. 그런데 협회장 볼크먼이 살해당했다는 소식이 전해지고, 협회의 부회장 몰리는 보델린에게 런던에 와서 볼크먼 강령회를 열어 범인을 밝혀달라고 부탁한다. 피해자가 죽은 곳에서 강령회를 열어야 하기 때문. 레나는 이번 기회에 에비의 강령회도 열 수 있지 않을까 하며 보델린과 동행한다.


(스포)

작가의 전작이 사실 성에 차진 않았어서 큰 기대없이 집어들었기에 꽤 흥미롭게 읽었다. 번역, 교정은 별로였지만. 19세기 '신사' 클럽의 비합리성과 독선, 위선 그리고 비리. 진짜 능력있는 여성은 외면당하고 매장당하는 현실에 퀴어 코드까지 더해져서 이야기를 풍부하게 할 소재는 충분했다. 다만 서술이 좀 산만했고 사건의 해결이 너무 유령 의존적이었달까. 이성적으로 차근차근 단서를 따라가던 레나가 마지막에서야 진실을 알아차리는 게 의아했다. 그 정도면 진작 에비의 의도를 알았어야 하지 않나? 아무리 동생과 생각이 다르고 동생이 믿는 걸 안 믿었더라도, 이건 좀 다른 얘기잖아. 물론 범인의 정체를 살짝 비튼 건 그나마 약간의 재미를 더하긴 했지만 그게 뭐 큰 의미가 있는 것도 아니고. 이건 사건 해결이라기 보다는 그냥 레나가 영혼을 믿게 되는 이야기, 정도로 정리할 수 있겠다. 그래도 앞에서 말했듯 별 기대없이 읽어서 나쁘진 않았다. 



3. 살인 리스트(재키 캐블러, 정미정 역. 그늘. 2024. 452쪽)

: 범죄 전문 기사를 쓰는 프리랜서 기자 메리 엘리스. 1월 말이 되어서야 지난 크리스마스 때 우편으로 온 선물들을 풀어보는데 선물 중에 있던 다이어리에 이상한 게 씌어 있다. 1월 1일 옥스퍼드, 리사 죽이기. 2월 1일 버밍엄, 제인 죽이기. 3월 1일 카디프, 데이비드 죽이기. 4월 1일 첼트넘, 메리 죽이기. 겁에 질린 메리는 경찰서에 찾아가고 경찰은 이미 죽은 리사 터너 살인 사건과 관련해 메리를 미심쩍게 보지만 결국 2월 1일에 부유한 독신 여성 제인 홀랜드가 사망하자 네 군데 경찰서는 비상 경계 태세에 들어간다. 문제는 이 이름들이 너무나 흔하다는 것. 4월의 타겟은 메리 엘리스가 거의 확실하지만 나머지는? 게다가 범인은 CCTV에 찍히지 않는 건 물론이고 법의학적 단서도 전혀 남기지 않았다.


별 내용 없는 거 같은데도 은근히 긴장하며 읽었던 게, 아무래도 '죽을 날'을 받아놓은 듯한 메리의 심정에 공감해서인 듯. 중간중간 메리의 과거사와 하우스메이트인 피터 및 피터의 애인 메간과의 에피소드들이 적절히 배치되어 지루하지 않게 4월 1일을 기다리게 한다. 범인이 가까이에 있을 거라는 건 중간에 메리가 한번 더 받은 협박 편지 때문에 짐작했지만 진짜 범인은 너무 의외였다. 난 다른 사람을 의심했는데. 범행 동기도 찌질했고. 게다가 작은 반전도 좀 슬펐다. 그건 아니잖아. 선한 사람의 희생은 소설 속에서도 슬프다. 범인이 희생시킨 **도 그렇고, 그들이 희생시킨 &&도 그렇고. 긴장감과 설정에 비해 범인의 정체와 범행 동기가 너무 약해서 이 작가를 계속 읽어야 할 지 잘 모르겠다.



4. 공(김유나. 위즈덤하우스. 2025. 120쪽)

: 숙취에 시달리며 깨어난 아침, 병석은 집 안에 시츄 한 마리가 있는 걸 발견한다. 어제 입었던 옷 주머니에서 펫샵 영수증을 발견한 병석은 파양을 위해 펫샵으로 가지만 주인의 어이없는 태도에 개를 다시 데려오게 된다. 하지만 곧 접대용 일본 골프 여행을 떠나야 하는데...


강아지에 관한 이야기인가 싶었는데 사내 정치에 시댈리는 직장인의 이야기. 이리 치이고 저리 굴려지는 공 같은 1N년차 부장급 영업직의 고뇌와 고충. 답은 없다. 그저 굴러가는 방향이 낭떠러지가 아니기만을 바랄 뿐.



5. 눈 맞추는 소설(김금희,장은진,김종광,서이제,임선우,황정은,천선란 (지은이),김선산,김형태,성보혜. 창비교육. 2025. 264쪽)

: 가벼운 마음으로 집어들었는데 생각보다 무거웠다. '개, 고양이, 새 그리고...... 의 이야기'라 했는데 '그리고.....'의 비중이 높은 편이다. 7편 중 절반 이상이 이미 다른 단편집에서 읽은 작품들이었지만 다시 읽으니 또 새로웠다. 그 중 황정은은 또다시 힘겹게 읽으며 감탄했다. 진짜 잘 쓴다. 임선우는 처음 읽는 거 같은데 - 아니, 다른 앤솔러지에서 봤을 텐데 기억이 나질 않는다 - 정말 좋았다. 결말을 계속 고쳐쓸 수 있다는 게 얼마나 좋은 일인지. 그래도 7편 중에서 가장 좋았던 건 김금희. 처음 이 책을 집어들 때의 기대를 가장 잘 충족시켜 줬다.



6. 언니, 내가 남자를 죽였어(오인칸 브레이스웨이트, 강승희 역. 천문장. 2019. 260쪽)

: 코데레는 동생의 전화를 받자마자 표백제와 고무장갑 등 청소도구를 한아름 챙겨서 동생이 말한 곳으로 간다. 욕실에 있는 시체. 동생 아율라는 그가 자신을 때리려 했다고 했다. 코데레는 일단 청소부터 시작한다. 사실 아율라가 이런 식으로 남자를 죽이고 코데레에게 전화한 게 처음은 아니다. 벌써 세 번째. 눈부신 미모의 아율라는 모든 남성들의 선망의 대상이고, 쉽게 연애를 시작하지만 끝은 늘 이런 식이었다. 코데레는 자신에게 화났냐는 아율라의 물음에 대꾸하는 대신 시체를 어디에 버려야 할 지 고민한다.


읽기 시작하면서부터 화가 났다. 아율라가 사람을 죽여서가 아니라, 언니 혼자 청소를 해서. 동생들이란 정말... 같이 청소해야지! 같이 고민하고, 같이 걱정해야지. 왜 사고는 동생이 치고 수습은 언니가 하냐? 아니, 이건 언니와 동생의 문제가 아니다. 사실 난 이 책을 읽기 직전까지만해도 뭔가 속 시원한 이야기일 줄 알았다. 여성에게 억압적이고 폭력적인 남자들을 사적으로 응징하는. 그런데 아니었다. 예쁜 여자가 친 사고를 못생긴 여자가 뒷처리하는 이야기는 짜증만 불러올 뿐이다. 그냥 가정폭력에 의해 망가진 여성을 다른 여성이, 자매가 돌봐주는 이야기였다면 이렇게까지 짜증스럽진 않았을 듯. 굳이 아율라는 숨넘어가게 아름답고 생각은 짧은 여자로, 코데레는 외모 컴플렉스를 가진 깐깐한 여자로 그려야 했나 싶다. 



7. 별 별 사이(김동식,김주영,전삼혜,홍지운. 우리학교. 2021. 148쪽)

: 청소년 SF 앤솔러지. 청소년기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들을 풀어냈는데, 네 편 다 좋았다. 다 재밌었고. 김동식은 좀 멀멀하긴 했지만. 가장 재미있었던 건 홍지운이지만 가장 마음에 닿았던 건 전삼혜.



8. 중독의 농도(김민령,장은선,송미경,전삼혜,김학찬,오문세,김봉래. 문학동네. 2015. 196쪽)

: 중독이라는 주제로 묶인 청소년 앤솔러지. 엮은이가 의도적으로 그런 것 같은데, 중독의 정도가 약한 작품부터 배치해서 편안하게 읽을 수 있었다. 핸드폰 중독과 시험 중독, (가상의)공기 중독 등이 이야기되지만 내 생각에 가장 심각한 건 역시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 중독들. 물론 모든 중독이 관계성에 영향을 미치지만 송미경의 작품에서나 장은선의 작품에서 보이는, 아직 미숙하기에 제대로 대처하기 힘든 관계성의 이야기가 마음에 오래 남았다. 부디 이 아이들이 괜찮아지기를. 



9. 서울에 수호신이 있을 때(이수현. 새파란상상. 2022. 448쪽)

: 어릴 때부터 인간이 아닌 존재들을 희미하게 보곤 했던 은지는 취준 중 밤늦게 동작대교 한복판에서 거대한 멧돼지와 마주친다. 당황하는 사이에 삼선 슬리퍼를 신고 자전거를 끌고 나타난 훤칠한 남자가 멧돼지를 현충원 쪽으로 몰아 제압하는 걸 목격한 뒤 얼결에 부암동의 상담소에 취직하게 된다. 상담소장이라는 현허는 성별도 나이도 짐작하기 힘든데다가 드나드는 손님도 많지 않고 가정집 같은 사무실도 체계가 없다. 하지만 곧 현허는 신령이고 멧돼지를 제압했던 비휴 또한 사람 이상의 존재임을 알게 된다. 현허의 심부름을 하며 조금씩 서울의 신성한 존재들을 알게 되는 은지.


작가가 서울에 애정을 가지고 자료 조사를 방대하게 했다는 게 드러나는, 재밌는 이야기. 몰랐던 설화도 많이 알게 됐고, 새삼 서울 구도심의 거리와 여러 유적지의 모습도 환기되어 좋았다. 거기에 더해 작가는 서울 중심의 사고 방식 또한 비판하는 균형감도 보여준다. 결말은 안타깝긴 했지만 최선이었다고는 생각한다. 그 이후의 이야기가 궁금해질 만큼 깊이 빠져 읽었던 이야기. 가능하다면 정말 후속작이 나왔으면 좋겠다. 



10. 일곱 번째는 내가 아니다(폴 클리브, 백지선 역. 서삼독. 2025. 448쪽)

: 조는 느긋하게 집으로 걸어들어가 냉장고를 열고 맥주를 마신다. 위층에서는 여성이 샤워를 하고 있다. 조는 위층으로 올라가 그녀가 문을 열고 나오자 늘 갖고 다니던 서류 가방 속 칼로 그녀를 살해한다. 사방에 조의 흔적이 있지만 걱정하지 않는다. 한 번도 체포된 적이 없는 조의 DNA 정보는 경찰에게 없기 때문이다. 언론에서 '크라이스트처치 카버'라고 명명한 연쇄살인범 조. 하지만 언론에 알려졌듯 조가 살해한 여성은 일곱 명이 아니다. 여섯 명 뿐. 조는 어눌한 말투와 느린 행동으로 동정을 사 경찰서에 청소부로 취직했고 가끔씩은 버스를 공짜로 타기도 한다. 낮 동안의 직업을 이용해 자신이 하지 않은 살인의 진짜 범인을 찾으려는 조.


경찰 수사의 헛점을 공략하고 자만했던 조. 나르시시즘에 취해 다른 사람에 대해 제대로 판단하지 못했던 조. 조의 시점이 강하게 서술되어 나 또한 샐리를 제대로 못 알아볼 뻔 했다. 하지만 이런 독자에게 균형감을 주기 위해 소설은 샐리의 시점 또한 공평하게 보여준다. 이게 이 소설의 가장 큰 장점인 듯. 사실 살인마의 시점으로 전개되는 소설을 읽다보면 그가 잡히지 않기를 바라게 되는 경우도 종종 있는데 이 책은 샐리라는 선하고 바른 인물의 관점 또한 보여줌으로써 독자로 하여금 객관적인 시선을 잃지 않게 해준다. 결말은 기대만큼 속시원하진 않았다. 여성 혐오의 대가를 제대로 치르기를 바랐는데. 다음에도 이 작가를 읽을지는 잘 모르겠다.



11. 평균율 연습(김유진. 문학동네. 2024. 208쪽)

: 프리랜서 편집자 수민은 유학생활 중 만난 수찬과 결혼 생활을 하다 수찬의 요구로 이혼하는 중이다. 우연히 피아노 조율 영상을 보게 된 수민은 불안한 직업적 상황을 개선시켜보고자 피아노 조율을 배우기 시작한다.


유려하게 오가는 과거와 현재. 아름다운 이별이란 없다. 하나의 관계가 끊어지기 위해서는 얼마나 지난한 과정이 필요한지. 내 일이 아님에도, 남의 관계라도 그 종말을 지켜보는 건 힘겨웠다. 난 사실 처음부터 수찬이 원망스러웠고 수민의 엄마 또한 그러했는데 정작 수민은 담담하기만 했다. 하지만 그 속은 쉽지 않았겠지. 마지막 장면에서 수민이 얘기했듯, 다 고칠 수 있을 것이다. 다 잘 될 것이다. 



12. 찰스 부코스키 타자기(박지영. 위즈덤하우스. 2025. 112쪽)

: '생애전환 시행령'. 생애 전환기가 되면 다음 생에서 어떤 모습으로 살아갈 지 선택할 수 있다. 모든 국민은 만 40세와 66세에 검진을 받고 사람으로 살 지 혹은 다른 생으로 살아갈 지 선택하고 전환할 수 있다. 승혜도 두 번째 생애 전환기가 다가오고, 승혜는 이런저런 고민 끝에 타자기가 되기로 선택한다. 승혜 타자기는 빈티지 샵에 놓이게 되는데, 부코스키의 문장을 누군가가 타이핑 한 후로 찰스 부코스키 타자기로 불린다. 


무생물의 삶이라니, 신선했다. 그러니까 의식이 있는 무생물의 삶. 근데 이제 고통도 있는. 그 지점이 좀 별로긴 했지. 무생물이 되면 고통도 없어야 하는 거 아닌가? 아니, 의식을 가진 대가인가? 하지만 생을 전환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을까. 아니, 아니다. 육체적 고통은 차치하고라도 그리움과 아픔을 갖고 가야 한다면 차라리 그냥 지리멸렬한 인간으로 남는 게 낫지 않을까. 이러나저러나 힘든 삶이다. 



13. 북 오브 도어즈(개러스 브라운, 심연희 역. 문학수첩. 2025. 592쪽)

: 뉴욕의 서점에서 일하는 캐시. 오늘도 나이 든 단골 손님 웨버 씨는 마감 시간까지 책을 읽고 있다. 캐시가 마감을 하고 돌아서니 웨버 씨가 더이상 숨을 쉬지 않고, 슬픔을 느끼며 수습을 하던 중 웨버 씨가 앉아 있던 자리에 수첩만 한 크기의 책이 놓여 있는 걸 발견한다. 속지에는 캐시에게 주는 선물이라는 메모와 함께. 책을 집에 가져 온 캐시는 이 책이 모든 문을 가고 싶은 곳에 있는 문으로 바꿔 주는 문의 책이라는 걸 알게 된다. 친구 이지와 함께 문의 책으로 곳곳을 다니던 중 비밀의 도서관 사서 드러먼드 폭스와 마주치는데, 드러먼드는 그 책이 캐시와 이지를 위험하게 만들 거라고 경고하고 역시나 책을 좇는 자의 공격을 받는다. 


문의 책을 비롯, 다른 모든 책들 - 기억의 책, 행운의 책, 환상의 책, 기쁨의 책, 절망의 책 등 - 이 다 신기했지만, 책을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이 모든 책들은 존재하지 않았으면 한다. 책은 그냥 그 자체로서, 그것이 담고 있는 진실로써, 이야기로써 독자에게 도움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결말에서 이 모든 책들이 파괴되기를 바라며 읽었다. 이야기 속에서나마 책이 파괴되기를 바라는 건 정말 내 생애 처음 있는 일이다. 결말은 해피엔딩이었지만 글쎄... 나만 불안해? 캐시를 비롯, 다들 너무 관대한 거 아냐? 어쨌든 즐겁게 읽었다. 제발 내가 걱정하는 점을 가지고 후속편이 돌아오는 일은 없었으면. 



14. 7맛 7작(박지혜,장아미,한켠,조동신,유사본,손장훈,김영주. 황금가지. 2017. 304쪽)

: 음식을 주제로 한 앤솔러지. 공모전 입상작들이라고 한다. 다 입상작들일텐데 필력의 편차가 좀 큰 편. 특히 캐릭터가 일관성이 없고 전형적인 작품들이 많았다. 그래도 재밌었던 건 손장훈 <군대 귀신과 라면 제삿밥>, 유사본 <하던 가락>. 손장훈은 마지막 여성이 등장하지 않았더라면 더 완성도가 높았을텐데.  유사본은 반대로 마지막 그 한 문장이 작품성을 더 높였다. 



15. 아름다운 여름(체사레 파베세, 이열 역. 녹색광선. 2025. 184쪽)

: 옷가게에서 일하는 열 여섯 지니아의 단조로운 삶은 화가들의 모델로 일하는 아멜리아와 친해지면서 변하게 된다. 대담한 아멜리아를 따라 로드리게스와 어울리게 된 지니아는 그들과 함께 화가 귀도의 작업실 겸 집에 방문하게 되고, 화가인 귀도를 위해 아멜리아가 모델을 서줬는지, 귀도와 아멜리아는 어떤 관계인지 신경이 쓰인다. 


옮긴이도 얘기했듯, 저자는 10대 소녀의 마음을 어떻게 그렇게 섬세하게 드러내는지. 모든 사랑은 여름처럼 뜨겁고 짧으며 강하게 빛나지만 한순간에 사그라든다. 이 여름이 지났고 겨울이 오고, 지니아는 좀더 어른이 되었다. 이제 다시 여름이 오겠지만 이번 여름은 지난 여름과는 다를 것이고, 지니아도 지난 여름의 그녀는 아닐 것이다. 그렇게 조금씩 성장하며 인생은 이어진다. 사랑은 그저 사랑으로서 아름다운 것. 



16. 명신학교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김동식,김선민,문화류씨,홍지운,정명섭. 요다. 2020. 252쪽)

: 학교를 배경으로 한 괴담 앤솔러지. 기대가 컸던 건지 다 용두사미였다. 다른 앤솔러지에선 재밌게 잘 쓴다 했던 작가들도 여기선 다들 하향평준화가 되어버린 건지. 학교에 이른바 '안전수칙'이라는 게 있고 그 중 하나라도 어기면 무서운 일을 당한다는 설정은 좋았는데 작가들이 다들 설정 구현에만 신경쓰고 이야기의 완성도는 외면한 듯. 



17. 한참을 헤매다가(정미진. 엣눈북스. 2025. 392쪽) 

: 재욱은 어릴 때 엄마가 자신을 죽이고 자살하려는 현장에서 살아남아 도시의 가장 큰 병원장인 양아버지 밑에서 자란다. 고등학교에 진학한 후 서울에서 전학 온 은수의 안내를 맡게 되는데, 여행작가인 엄마를 따라 세계 곳곳에서 살아온 은수의 씩씩함과 자유로움에 빠져든다. 여름방학을 맞아 함께 여행을 가기로 한 날, 둘이 같이 키우던 강아지 호수가 갑자기 아파 병원에 가느라 은수에게 미쳐 연락을 못했고, 그날 은수는 뺑소니 교통사고를 당해 식물인간이 된다. 그리고 15년 후 재욱은 뇌공학자가 되어 인간의 무의식으로 들어가는 기술을 개발한다. 은수의 무의식 속에 들어가 그녀를 깨우려는 재욱.


아이디어는 좋은데 문장력이 부족하고 디테일이 유치하다. 전체적인 줄거리는 궁금하지만 각 장면장면을 읽어나가는 건 괴로웠다. 게다가 캐릭터들의 생각이나 행동들도 설득력이 떨어지고 현실적이지 못했다. 다음 작품은 좀 나으려나?



18. 클락워크 도깨비(황모과. 고블. 2021. 109쪽)

: 조선 말 깊은 산속. 연화는 대장장이인 아버지와 둘이 살고 있다. 아버지는 대대로 무기를 만들던 장인 집안에서 나고 자랐지만 어떻게 이 깊은 산까지 흘러들어와 솥이나 만들어 양곡과 바꾸며 겨우겨우 살아가고 있는지 말이 없다. 연화는 혼자 놀러갔던 무덤가에서 마지막 도깨비 갑이와 만나 밤마다 씨름을 하며 함께 논다. 어느날 괴한들의 침입으로 갑자기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연화는 아버지가 만들어 주신 수레를 가지고 갑이와 함께 한양으로 내려온다. 자신의 수레에 아버지의 원진을 싣고 갑이의 불을 원동력으로 인력거를 끄는 연화.


굽힐 줄 모르는 연화 때문에 조마조마해 하며 읽었다. 연화의 불이, 불같은 성격이 연화를 불행으로 밀어넣을까봐. 당시는 그런 시대였으니 말이다. 그래서 작으나마 연화의 뜻으로 가득한 마을이 반가웠다. 이렇게 조용한 해피엔딩이라니. 하지만 해피엔딩만은 아니었다. 딸들을 향한 연화의 노래에 결국엔 눈물이 흐르고 말았으니. 그러나 연화는 딸들을 기다릴 것이고, 딸들은 가슴 속에 품은 불로 길을 밝혀 돌아올 것이다. 그 시절에도 지금도 안에 불을 품고 있는 여성의 길이 평탄하지는 않을지언정, 그 불을 절대 꺼트리지는 않을 것이다. 



19. 저녁의 비행(헬렌 맥도널드,주민아 역. 판미동. 2021. 488쪽)

: 전작 『메이블 이야기』에서 아버지를 잃은 슬픔을 참매를 길들이며 이겨냈던 저자의 신간이어서 동물들에 관한 저자의 깊은 시선이 담겨 있을 거라 기대하며 집어들었다. 역시 저자는 다양한 생물들에 관한 이야기를 생활과 엮어 풀어낸다. 저자가 어린 시절 잔디밭에 얼굴을 파묻고 관찰했던 벌레들, 집 주변 공터에 있던 수많은 새들, 또 어른이 되어 관찰할 수 있었던 수많은 동물들 -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꼭대기에서 볼 수 있었던 철새들과 특별히 관찰할 수 있었던 백조들, 야생돼지와 산토끼, 그리고 이 책의 제목이 된 칼새들의 이야기가 각 챕터마다 삶과 긴밀한 연관성을 가지고 펼쳐진다. 각각의 이야기는 아름다웠고 특히 해질 무렵 공기의 흐름 속에서 잠이 든 채 하늘을 유영하는 칼새의 이야기는 경이롭기까지 했다. 물론 마냥 아름다운 이야기만 하는 건 아니다. 난민, 장애인, 망명자 등 소외된 사람들의 이야기도 빼놓지 않는다. 삶에서 그들의 이야기를 외면할 수 없으니까. 


전반적으로 좋기는 했지만 문장 때문에 읽기가 너무 힘들었다. 번역과 교정이 엉망이었다. 원문의 문장도 단출하진 않았을 거 같긴 하지만 번역시 모든 단어를 1:1로 옮길 필요는 없지 않을까? 게다가 비문과 오타도 2~3페이지에 한번씩은 나온다. 가독성이 떨어져 상당히 오랜 시간 동안 읽어야 했다.



20. 전교생의 사랑(박민정. 문학동네. 2025. 316쪽)

: 단편집. 앞의 다섯 편은 어린 여성의 성을 상품화하는 엔터테인먼트 산업을 조명한다. 표제작의 '전교생'은 전학생의 일본식 표현. 난 우리나라 표현 그대로 전교생한테서 사랑받는 뭐 그런 소녀의 이야기인 줄 알고 읽기 시작했지만 그건 아니었다. '네 꿈을 위해' 혹은 '프로니까'라는 말로 교묘하게 조종당해 성을 팔 수 밖에 없는 상황에 밀어넣어지는 '연습생'들은, 그리고 아역 배우들은 그 시절을 보낸 지금 어떻게 살고 있을까? 그리고 그 시절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뒤의 4편은 연작인데, 역시 여성 아이돌 이야기. 다만 배경이 일본이고, 현재는 잊혀지거나 다른 길을 가는 멤버들의 이야기이다. 뒤의 작품들은 분위기가 조금 달라서, 일상 생활에서의 위선과 은근한 '급 나누기'에 따른 소외를 이야기한다. 어느 것하나 쉽게 지나쳐 가기 힘든 우리 사회의 불편한 현실들. 이 책을 읽을 때 내 기분 탓이었는지, 답이 없다는 생각이 계속 들었다. 작품들은 훌륭했으나 이 놈의 사회는 발전이 없다는 생각. 그러니 계속 지적해야겠지. 작가들은 쓰고 독자들은 읽으면서.



21. 불멸의 인절미(한유리 (지은이)위즈덤하우스2024. 112쪽)

: 회사를 그만두고 집필 노동자의 길을 택한 유리는 인절미라는 기니피그를 키우며 친구 여름과 신림동 반지하 3룸에서 살고 있다. 몇 년 전 인절미와 같이 키우던 티라미수를 잃고 급격히 건강이 악화된 인절미를 돌보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유리. 취직을 하면 인절미를 돌볼 시간을 낼 수 없고 시간을 확보하면 병원비를 댈 수 없는 현실. 유리는 인절미의 마지막이 얼마 남지 않은 걸 알고 있기에 의뢰받은 소설 속에서 인절미가 불멸의 삶을 살 수 있게 우주로 보내기로 한다. 


후회의 마음이야 잘 알지. 내가 주지 못할 것을 어떻게든 갖게 해주고픈 마음도. 현실은 잔인하지만 마음만은 깊고도 깊다는 걸 인절미는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을까. 먼 미래에 '그들'이 비웃듯 인간이 다른 생명체들을 비인간이라는 이유만으로 좁은 공간에서 이상한 먹이를 얻어먹으며 삶을 이어갈 수 밖에 없도록 만든 이 이상한 지배구조는 씁쓸하다.  하지만 좁은 방 안에서 인절미와 티라미수를 거두던 유리에게 누가 돌을 던질 수 있을까. 없는 살림에 미나리를 사고 기니피그 영양제를 주사기에 넣는 유리에게. 병원비와 약값을 벌기 위해 아르바이트 사이트를 뒤지는 유리에게. 이 지구의 모든 '반려'동물과 인간을 위해 기도한다. 



22. 매듭 정리(이경희. 위즈덤하우스. 2023. 68쪽)

:  화자는 싱글 대디이다. 딸 소연은 아기 때부터 뭐든 스스로 해냈다. 하지만 소연이 유독 서툴렀던 부분은 순서를 지키는 것. 마치 소연의 엄마가 그랬듯 시간에 맞추거나 차례대로 뭔가를 해내는 걸 어려워하던 소연은 그러나 가끔 알 수 없는 이야기를 했다. 출산 후 사망한 엄마와 함께한 추억을 이야기하거나 먼 우주로 여행갔던 이야기를 하거나. 


짧은 시간 동안 읽고 긴 시간을 생각했다. 그렇게 매듭을 묶어버릴 수 있는 마음을 나는 감히 따라가지 못한다. 시간이라는 건 없고 우리가 내린 작은 결정에 의해 생겨난 수많은 우주가 있을 뿐이라는 얘긴 어렴풋이 따라갈 수 있지만 그걸 이해했다고 해서 내가 지금 현재를 살아가고 있고 내게는 과거와 미래가 있다는 걸 부인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소연은 알고 있었지. 어떤 우주에서 자신을 먼 곳으로 데려가 줄 누군가를 위해 여기서 매듭을 묶어야 한다는 걸. 그나마 소연이 그 아름다움을 간직한 채 매듭을 묶을 수 있어서, '오늘도 행복했'다고 얘기해서 다행인 건가. 그래서 소연의 아빠는 소연이 매듭을 묶는 걸 이해하지 못한 채 받아들인 건가. 


난 알 수 없다. 그렇게 매듭을 묶는 마음도, 그걸 지켜보는 마음도. 



23. 3층의 탐정 폴리와 라이스(오세민. 스토리비. 2024. 492쪽)

: 명문가 출신의 장교 리니아 폴라리스. 자신의 배경을 부하들을 위해서 쓰던 그녀는 마지막 전투에서 7명의 부하들을 귀환시키지 못한다. 집으로 가자던 외침이 무색하게, 갑자기 나타난 상관 후시 루 대령에 의해 부하들이 모두 우주로 흩어진 것. 리니아 폴라리스는 살상 무기 거래로 부를 축적한 집안과 연을 끊고 3층 랄 시티로 내려와 폴리라는 이름으로 탐정 사무소를 차린다. 우주 쓰레기들이 지구로 쏟아진 두 차례의 '스카이폴' 이후 지구는 하늘 위의 6층과 지상의 3층으로 나뉘었다. 궤도 엘리베이터로 6층과 연결되어 있기는 하지만 3층민은 6층에 갈 수 없다. 6층은 상류층의 거주지이기 때문. 폴리가 이곳에서 복수를 다짐하며 탐정 일을 하는 동안 후시 루 대령은 폴라리스 집안의 충신답게 폴리를 감시하며 치안책임자로 3층에 머물고, 뛰어난 해커이자 2층 출신인 라이스를 폴리 곁에 붙여둔다.


마음 아픈 사랑 이야기를 연달아 두 편 읽고난 후에 가벼운 이야기를 읽고 싶어서 집어들었는데, 내 취향이 전혀 아니어서 읽는 게 고역이었다. 나름 세계관을 정교하게 설계하고 각 챕터를 유기적으로 엮기 위해 노력은 했으나 서술이 산만하고 문장이 유치했다. 뭔가 있을 거 같은 캐릭터들도 전형성을 탈피하지 못하고 흐지부지 역할을 잃었고. 더 재밌을 수 있었을텐데 안타깝다.



24. 삼척, 불멸(김희선. 위즈덤하우스. 2023. 64쪽)

: 병상에 오래 있던 아버지가 돌아가셨지만 화자는 딱히 슬프지는 않다. 운명하시는 순간 화자에게 침대 밑에 있는 열쇠를 가져가라 했지만 화자는 잊고 있다가 장례 며칠 후 아버지가 계시던 병원에 다시 갔고, 그곳에서 아버지와 담배 친구였다던 청소부에게서 그 열쇠를 받아온다. 사실 아버지는 돌아가시기 전부터 삼척이란 없다는 얘길 반복했다. 화자는 사진관을 운영했던 아버지의 작업실에서 삼척과 관련된 다큐 비디오를 발견한다. 확인을 위해 삼척으로 향하는 화자.


짧지만 긴 영화를 본 것 같은 기분. 난 이 책을 읽었음에도 삼척은 존재한다고 믿고 있지만, 사실 그건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삼척에 가려고 나선 순간, 삼척 가는 길에 꾼 꿈, 그리고 손에 쥔 열쇠. 어쩌면 그곳은 삼척이었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삼척은 머릿 속에만 존재할 수도 있고 집단 최면일 수도 있으며 그냥 삼척일 수도 있다. 이건 사실이나 지식이 아닌 기억의 이야기이므로. '형태도 없고 기원도 없는'(43쪽).



25. 나의 여자친구(서미애. 위즈덤하우스. 2023. 100쪽)

: 고시생 종호는 우연히 지하철에서 다시 만난 대학 동아리 친구 수빈과 사귀기 시작한다. 그런데 수빈은 자주 연락이 되지 않고 가끔 만날 때도 저녁 9시까지 귀가해야 한다며 서두른다. 한동안 연락이 되지 않다가 겨우 만나게 된 어느날 수빈은 양아버지가 자신을 학대한다며 도움을 요청한다. 종호는 수빈의 이야기를 듣다가 수빈의 양아버지를 살해할 계획을 세운다.


초반에 상당한 어설픔을 보였던 종호가 후반부에선 꽤 날카롭다. 평범한 고시생이 어떻게 살해 계획을 세우고 실현하는지 궁금해하던 시선은 종호의 움직임에 따라 사건의 진실에 다다르고, 드러난 진실은 흔하디흔한 돈 얘기였지만 그만큼 핍진성이 짙기도 했다. 재밌게 읽었다. 



26. 궤도(서맨사 하비, 송예슬 역. 서해문집. 2025. 240쪽)

: 국제 우주정거장. 지구를 90분 간격으로 16번 도는 우주비행사 여섯 명의 하루. 각자 국적과 성별은물론 과거도 다르고 그리운 사람도 다른, 같은 공간과 심지어는 소변(을 정화한 물)까지도 공유하지만 다른 마음과 생각을 품은 사람들의 이야기. 지구에서는 거대한 태풍이 발생하고 달에 착륙하기 위한 다른 우주비행사들이 출발한다. 


그저 하루 열 여섯 번의 일출과 일몰이 있는 이야기. 무중력 공간 속 우주비행사들처럼 둥둥 떠다니며 읽고 싶은 문장들. 문장이 하나같이 아름다워 오랜만에 필사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만 치에의 엄마의 어린 시절 이야기는, 마냥 편하지는 않았다. 편히 자란 백인 여성의 나이브함이 보였다고 하면, 심한 건가? 



27. 마르셀 아코디언 클럽(김목인. 위즈덤하우스. 2023. 80쪽)

: 평범한 회사원 G는 우연히 경매 사이트에서 아코디언을 발견하고 입찰한다. 마음을 졸였지만 단독 입찰로 낙찰을 받은 그는 프랑스 소도시의 판매자가 낙찰자가 먼 한국에 있다는 걸 알고 소극적으로 나오자 당황한다. 번역기를 돌리며 성심성의껏 악기를 배송받으려 노력하는 이유는 그 아코디언이 전설적인 뮤지션 마르셀 아졸라가 연주하던 카바뇰로 아코디언과 동일한 회사의 것이기 때문. 마르셀 아코디언 클럽에 취재를 온 기자는 이 이야기에 흥미를 가진다.


아코디언의 배송이 무사히 이뤄질 것인가가 줄거리의 중심을 잡고 있지만 주제는 흔하지 않은 악기를 대하는 소중한 마음들이다. 아코디언에 관한 이야기는 처음이라 재밌게 읽었다. 어떤 취미에나 마니아는 있기 마련이지만 이 이야기는 왠지 더 순수하게 읽혔다. 아마 돈 얘기가 없어서인 듯. 악기를 단순히 수집하고 수선해서 연주하는 데에 그치는 게 아니라 희귀한 악기를 통해 경제적인 이득을 얻으려는 사람들이 현실에는 널렸으니까. 이 이야기 속 사람들은 모두 어설프지만 아코디언 자체에 집중하고, 과하게 지식을 자랑하거나 맹렬하게 희귀한 제품을 수집하지도 않는다. 편안하고 차분하게 읽을 수 있었던 이야기. 



28. 나의 마지막은, 여름(안 베르, 이세진 역. 위즈덤하우스. 2019. 156쪽)

: 루게릭 병을 진단받고 59세에 벨기에에서 존엄사한 저자의 마지막 여름. 병을 처음 알게 된 날과 병의 경과에 따른 신체 변화에 대해 언급하지만 투병기는 아니다. 존엄사를 신청했다는 게 언급되기는 하지만 절차에 대한 안내서도 아니다. 저자의 청원으로 프랑스에 존엄사 합법화에 대한 논쟁이 일어났고 많은 사람들의 응원을 받았다지만 이에 대한 언급도 잠깐만 나온다. 저자는 그저 자신의 마지막 여름에 관해 이야기한다. 더는 혼자서 움직일 수 없게 되고, 오징어를 잔뜩 사서 얼려 두었다가 손자들이 오면 요리해 줄 수도 없고 내년에 이 정원에 또다시 필 라일락을 볼 수도 없지만 저자는 슬퍼하지 않는다. 죽음도 삶의 한 단계일 뿐. 내가 없어도 라일락은 아름답겠지만, 그게 다다. 모든 생은 아름답기에 내가 나로 죽을 수 있다면 그건 슬픈 일이 아니다. 


읽는 내내 마음이 아릿한 건 어찌할 수 없었지만, 저자를 위해 난 기뻤다. 저자의 마지막 여름이 다른 여름처럼 아름다워서. 저자가 비록 이 세상에는 없지만 그 후의 여름도 아름다워서. 내 삶이 끝나더라도 다른 이들의 삶은 계속되고, 또 어디선가는 죽음이 일어나겠지만 생을 충분히 사랑했다면, 최선을 다해 살았다면 죽음은 슬프지 않다. 그래서 난 지금은 평온할 저자를 위해 그리고 나 자신을 위해 계속 기뻐하기로 했다. 



29. 10초는 영원히(황모과. 위즈덤하우스. 2023. 92쪽)

: '나'는 쏟아지는 잠을 이기지 못해 늘 책상 위에 엎드려 잔다. 잠에 빠지는 바람에 알바하다 억울한 일을 당해도 변명도 못할 지경이다. 우리 반 아이들은 모두 개성이 강하다. 그래서 16시간을 자는 나를 아무도 건드리지 않는다. 어느날 류비라는 친구가 전학을 오는데, 류비는 10초 이상 움직이지 않는 사물/사람만 인식할 수 있다. 류비는 내 옆자리에 앉게 되고 난 류비를 위해 10초를 가만히 있어주고, 류비와 사랑에 빠진다.


(약스포)


피부에 부스럼이 잔뜩 난 아이, 한없이 느린 아이, 또 엄청나게 빠른 아이, 늘 TV만 보며 다른 사람의 말은 무시하는 아이, 온 몸에 털이 뒤덮힌 아이, 항상 마스크를 쓰고 기침을 하는 아이 그리고 눈에 보이지 않는 아이. 개성이 뚜렷한 아이들을 보며 난 이 책이 그저 SF라서 특이한 아이들이 나오고, 이 아이들이 곧 자신만의 특별한 능력을 보여주겠구나 했는데 아니었다. 이들은 사회에서 소외되고 구속된 아이들의 은유였다. 아이들이 한 명씩 사라지고 류비마저 끌려가려 할 때 어른들은 단지 작별 인사를 위한 10초의 시간도 허용하지 않는다. 이게 지금 우리 사회의 모습. 조금의 다름도 인정하지 않고 조금의 여유도 허락되지 않는. 그래서 이들의 마지막이 더 슬펐다. 작가의 말처럼, 희망을 기대해 볼 수 있는 걸까. 



30. 현대적이라고 말할 수 없는 죽음들(정지돈. 위즈덤하우스. 2023. 60쪽)

: 지미는 자신을 알아봐 준 약혼자와 그 가족이 강도들에 의해 살해당하자 그들을 쫓아가 죽여버린다. 이런 그녀를 이웃에서 목격하지만 경찰이 출동했을 때 모두가 그녀의 알리바이가 되어준다. D시는 이처럼 잔혹한 범죄와 사적 복수가 아무렇지 않게 행해지는 곳. 어느날 오래된 연못에서 수십 구의 유해가 발견되고, 오래전 실종된 어머니의 유해를 확인하러 오랜만에 고향에 내려온 작가 융은 이 이야기를 책으로 쓰기로 한다. 융은 검시관 K에게 도움을 청한다.


좀더 길게 읽고 싶었던 누아르. 한편으론 더 할 이야기가 없을 거 같기도 했다. 융이 쓴 글이나 융의 어머니의 억울함이 어떻게 풀릴지, 앞으로 이어질 K의 나날들은 조금이나마 달라질 지, ''네이버후드 워치'는 또 앞으로 어떻게 될 지... 하지만 뭐, 그게 짐작이 안 가는 것도 아니고. 어디선가 들어본 듯 한 사건들과 익숙하지 않은 인물들이 흥미로웠던 이야기. 



31. 그냥 두세요(권혜영. 위즈덤하우스. 2025. 104쪽)

: 동생 윤서가 뜬금없이 드라이브를 가자고 한다, 대구로. 왜 대구에 가냐는 물음에 '중앙병역판정검사소'에 가야 한다는 동생의 말. 여성호르몬을 정기적으로 주사맞으며 목젖 제거, 가슴 확대 등 차근차근 수술을 받고 있는 동생이 당연히 군 면제를 받을 줄 알았는데, 자기들은 판단이 힘드니 중앙 어쩌구에 가서 재검을 받으라는 신병 검사소의 말에 '나'는 한숨을 쉬며 동생과 동생 애인 수아까지 태우고 대구로 향한다. 사실 나는 남들보다 체지방이 많은 몸으로, 남들의 시선이 부담스럽지만 늘 화려하게 꾸미고 다니는 윤서는 아랑곳하지 않고 휴게소에서 음식을 잔뜩 시키는 것도 모자라 검사소 대기실에서 냄새 나는 오징어까지 꺼내든다. 


애증의 가족 관계. '쿨한' 부모이길 원하는 이기적인 부모와 역시나 내게는 짐이 되는 동생과의 갈등, 나 자신의 컴플렉스와 또 동생의 젠더 이슈. 내 몸이지만 내 맘대로 안 되고, 이 몸을 바꾸고 싶지만 어떻게 해야할 지 모르겠다. 그냥 두는 게 사실은 가장 맞는 길인데. 사실 몸이 어떻든 나는 나다. 윤서는 윤서고 수아는 수아고. 알면서도 그냥 놔두기 힘든 게 내 몸. 



32. 문자 살해 클럽(시기즈문트 크르지자놉스키, 서정. 난다. 2024 .232쪽)

: 화자는 지인의 집에 방문했다가 텅 빈 서가만 있는 방을 보게 된다. 집주인 제즈는 자신이 어느날 깨달은 '문자의 무용성'을 이야기하며 순수한 구상을 문자화하는 건 오염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자신과 뜻이 통하는 사람들과 매주 토요일마다 문자 살해 클럽을 열어 돌아가며 문자화되지 않은 구상을 얘기하고, 화자 또한 초청받는다.


사변적일거라 각오하고 읽기 시작했는데 각 주제별 이야기들이 마치 액자 소설처럼 재밌었다. 그럼에도 뒤로 갈수록 집중력이 떨어지나 싶었는데 문자 살해 클럽에도 작으나마 사건이 일어나 다시 집중할 수 있었다. 문자는 구상을 정제하고 구체화한다고 생각한다. 구상이 문자화되지 않고 그 자체로서만 존재한다면 그 구상은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 처음부터 이런 생각을 가지고 삐딱하게 읽어나갔기에 후반부에 라르가 '텍스트 없는 구상은 실이 없는 바늘과 같다'고 말했을 때 역시나, 싶었다. 꽤 오래전 작품인데도 신박했던 재밌는 책. 



33. 글자들의 수프(정상원. 사계절. 2024. 220쪽)

: 제목과 연결되는 로맹 가리 이야기를 도서관 서가 앞에 서서 읽은 후 맘에 들어서 대출했다. '셰프의 독서일기'라는 부제처럼 저자가 읽은 문학 작품들과 음식을 연결지어 쓴 에세이. 단정하고 차분한 글들이 길지 않게 이어져 부담없이 읽었다. 다만 사어가 되어가는 단어들에 천착하는 경향이 있어 문장에서 과하게 옛 단어들을 사용하였는데, 죽어가는 단어의 수명을 늘린다는 건 의미가 있으나 단어에 맞춰 만들어낸 문장은 전체 흐름상 편하게 읽히진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의 '글자들의 수프'는 궁금했다. 그 맛보다는 모양이. 



34. 세이프 시티(손보미. 창비. 2025. 248쪽)

: 유능한 경찰이었으나 한번의 실수로 휴직을 해야했던 '그녀'. 남편의 친구인 임윤성, 최진유 부부와 자주 어울린다. 임윤성은 인간의 기억 중 일부분만 삭제할 수 있는 '기억조작술'을 연구하는 회사의 핵심 인물이다. 임윤성은 기억조작술이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사람이나 범죄로 쾌감을 얻는 범죄자들을 치료하는 데 도움이 될 거라 주장하지만 그녀와 남편은 동의하지 않는다. 한편 개발이 불균형하게 이루어지는 도시에는 노후된 지역과 새로 개발된 지역의 격차가 심해지고, 도시의 구역을 나눠 '안전도'에 따라 여러 등급을 표시해 주는 세이프 시티 앱이 인기를 끄는 가운데 낙후 지역의 건물에 들어가 여성 화장실만 문을 부수는 범죄가 계속 발생한다. 


굽히지 않는 여주인공을 보면 난 정말 가슴이 조마조마하다. 조금만 타협하지, 아니 타협하는 척만이라도 좀 하지. 조금만 돌아가면 되잖아. 목적지에 가는 데 꼭 직진만 할 필요는 없어, 가끔은 좀 돌아가도 되. 그래서 마지막 장면의 그녀와의 마주침이 의미심장했다. 어쩌면 여주인공의 미래 같기도 하면서, 그게 꼭 슬픈 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건 그녀가 바라는 삶일 수도 있으니까. 가장 중요한 걸 얻기 위해 다른 걸 버리는 건 희생이 아니라 그저 선택일 지도 모른다. 



35. 원래 내 것이었던(앨리스 피니, 권도희 역. RHK. 2018. 420쪽)

: 라디오 진행자인 앰버는 크리스마스 다음날 병원에서 깨어난다. 아무 것도 기억나지 않는 가운데 간호사로 추정되는 두 명의 대화를 통해 자신이 큰 사고가 나서 이곳에 있음을 알게 된다. 그들에게 자신이 깨어났다는 걸 말하려 했지만 눈도 떠지지 않고 말도 나오지 않는다. 코마 상태였던 것. 드디어 남편이 오는데, 앰버는 남편이 오는 게 마냥 반갑지는 않다. 남편은 더이상 자신을 사랑하지 않기에. 곧 여동생 클레어도 오는데, 앰버는 클레어도 불편하다. 늘 자신과 비교되는 화려한 미모를 뽐내며 자신의 삶에 개입하려 하고, 남편과 이상하게 친밀하기 때문. 앰버는 의사소통이 전혀 되지 않는 상황에서 사고를 기억해 내려 애쓰지만 악몽만이 찾아온다.


어린 시절의 일기와 앰버의 현재가 교차된다. 의심스러운 남편과 사이가 좋지 않았던 상사, 그리고 그 남자의 등장 등 스릴러적인 요소도 쏠쏠하고 반전도 훌륭하다. 다만 앰버가 할 수 있는 게 없어서 그 부분이 좀 답답하다. 하지만 앰버의 꿈이 조금씩 변하는 걸 따라가면서 어릴 적 일기와 대조해 가면서 읽으면 사건의 전말이 서서히 보인다. 결말도 이 정도면 완벽. 오랜만에 꽤 맘에 드는 범죄 소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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