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마음은 외로운 사냥꾼(카슨 매컬러스, 서숙 역. 시공사. 2014. 454쪽)

: 미국 남부의 소도시. 이 마을의 청각장애인 존 싱어는 역시 청각장애인인 친구 안토나풀로스와 함께 지내며 만족스러운 생활을 하고 있던 중, 안토나풀로스의 반복된 기행으로 그의 형이 안토나풀로스를 정신병원으로 보낸다. 그와 늘 모든 생활을 함께 하던 싱어는 친구와 함께 살던 방을 빼고 켈리 가족의 하숙집으로 거처를 옮긴다. 마을의 24시간 식당 '뉴욕카페'에서 끼니를 해결하며 쓸쓸히 지내는데, 언제인가부터 그의 방에 사람들이 드나들며 그에게 말을 건넨다. 켈리네 딸 믹, 급진적 사회주의자이며 목적을 가지고 이 마을에 온 블런트, 흑인 의사인 코플랜드, 그리고 뉴욕카페 주인 비프 브레넌. 이들은 각자의 문제가 있고, 서로는 대화하지도 마주치지도 않는다. 


전쟁 직전의 터질 듯한 이념 갈등이 이 작은 도시에서도 느껴진다. 뿌리깊은 인종 갈등은 물론이고, 과격한 진보주의자와 심드렁한 사람들, 극단적인 종말론자까지. 하지만 이 작품은 당대의 생활 모습보다는 사람들 한 명 한 명의 마음을 들여다 보게 되는 소설이다. 믹 켈리가 가장 안쓰러웠다. 머릿속에 늘 들리는 그 음악들. 그 음악들을 연주할 방법도, 악보에 옮길 방법도 찾지 못하고 심지어는 음악을 듣기 위해 남의 집 마당에 몰래 숨어들어야 하는 아이. 가장 안타까운 건 믹이었지만 다른 사람들의 외로움이 보이지 않은 건 아니었다. 세상이 맘대로 안 되는 블런트와 코플랜드. 인생이 쉽지 않은 브레넌. 하지만 가장 외로운 건 역시 싱어. 사람들이 끊임없이 그를 찾아온다고 해서 외롭지 않은 건 아니다. 모두가 끊임없이 자기 얘길 하면서도 아무도 그에게 답을 기대하지 않는다는 게, 그 또한 그들에게 답을 해줄 마음이 없다는 게 가장 가까이 있으면서도 가장 멀리 있는 관계 아닐까. 때문에 싱어의 마지막 선택이 이해가 되었다. 다만 내가 걱정되는 건 역시 믹. 앞으로 누가 이 소녀의 마음을 잡아줄 수 있을까. 



2. 저는 38세에 죽을 예정입니다만(샬럿 버터필드, 공민희 역. 라곰. 2025. 376쪽)

: 38세를 일주일 앞둔 넬. 19년 전 여행지에서 자신이 죽을 나이를 들은 넬은 처음엔 그냥 흘려 넘기려 했으나 친구가 예정된 날에 죽는 걸 보고 지난 시간 동안 이 날만을 위해 살아왔다. 하고 싶은 것을 모두 하고 가고 싶은 곳들을 모두 가고. 이제 영국으로 돌아온 넬은 주변 정리를 시작하는데, 가구를 중고로 팔던 중 침대를 사러 온 남자에게 자신의 얘기를 다 해버린다. 남자와 밤까지 보낸 넬은 통장이며 sns를 모두 정리하고, 그동안 해야 했던 말들을 가장 소중한 다섯 명에게 편지로 남긴 뒤 최고급 호텔로 들어가 마지막 날을 준비하지만 죽음은 그녀를 찾아오지 않는다.


제목에 낚였다. 물론 첫 몇 쪽 읽고 내가 기대한 내용이 아니라는 건 알았지만 뒷표지의 추천사를 믿었고 주인공이 꽤 사랑스러운 듯 해서 계속 읽었는데 갈수록 등장인물들이 다 별로. 바람 핀 여자랑 결혼해서 전부인과 살던 집 근처에 계속 살고 있는 아빠나 진실을 알려줬더니 넌 내내 날 부러워했고, 내 결혼 생활이 부러워서 재 뿌리는 거라고 말하는 언니도 별로였지만 가장 별로였던 건 주인공이랑 연결되는 그 남자. 그럴 거라는 건 처음부터 짐작하기는 했지만.


(스포)

자기와의 잠자리를 공개적으로 떠벌리는 남자를 받아들이는 심리는 영국이라서야, 아님 나만 고지식한 거야?



3. 세상에 똑같은 개는 없다(브라이언 헤어,버네사 우즈, 강병철 역. 디플롯. 2025. 344쪽)

: 인지과학을 바탕으로 강아지를 훈련시키는 방법론을 논하는 책. 저자들은 인지과학자로, 인간과 가장 가까운 삶을 살고 있는 강아지들 중 어떤 개체들이 치료 보조견에 적합한지를 찾아내기 위해 뇌가 발달하는 시기에 맞춰 듀크 대학교 내 강아지 유치원에 입학시켜 테스트와 교육을 진행했고 그 결과를 이 책에 담았다. 흔히들 가지는 견종별 편견 - 예를 들면, 보더콜리는 머리가 좋다 - 을 배제하기 위해 대상 강아지들은 모두 래브라도 리트리버나 골든 리트리버 교배종이었다. 저자들에 따르면 이런 견종적 편견은 틀린 것. 같은 견종 내에서도 인지적, 성향적 차이는 분명히 존재한다. (사실 인간으로 대체해 생각해 보면 당연하다.  인종에 따른 편견과 다를 바 없지 않나.) 이는 단순한 행동 하나에도 인지적인 능력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기도 하고 반대로 복잡한 행동처럼 보여도 인지가 작용하지 않고 그저 본능적으로 행하기도 하기 때문. 


저자들이 말하는 건 단순하다. 각 개체의 차이점과 개성을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 그리고 어떤 특정한 한두 가지의 지표로 개체를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것. 눈 색깔이 털 색에 영향을 미치지 않듯, 길을 잘 찾는다고 해서 인간의 몸짓을 해석하는 능력이 뛰어나다고 할 수 없다는 말이다. 이는 다중 지능 이론.


"우리가 강아지 유치원을 시작하기 전에 개 연구자들은 주로 기질에 초점을 맞추었다. 개가 얼마나 쉽게 놀라고, 새로운 사람이나 장소에 어떻게 반응하는지 검사했다는 뜻이다. 인지가 개성에 미치는 영향은 종종 터무니없이 과소평가되었다. (중략) 일반 지능은 한 가지 유형의 문제를 잘 해결한다면, 다른 모든 유형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도 뛰어날 것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기억력 게임을 아주 잘한다면 틀림없이 다른 게임도, 실지어 기억력이 필요하지 않은 게임도 잘할 것이라고 믿는다. (중략) 인지는 고려해야 할 변수이기는 하지만, 수많은 개에게서 확인되는 독특한 개성을 만다는 데는 큰 역할을 하지 않을 것이다.


그 대안으로 다중 지능 이론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아주 다양한 유형의 인지적 능력이 존재하며, 각각의 능력은 개체마다 조금씩 다르게 나타난다는 이론이다. (중략) 다양한 인지 능력은 저마다 능력치가 다를 수 있으며 그 조합에 따라 개체의 무한한 다양성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78 - 79쪽


"양육이 중요하지 않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양육 방식은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사교적인 접촉을 전혀 허용하지 않거나 방치, 학대한다면 그 영향은 강아지에게 매우 빠르고 심하게 나타난다. 사회화에는 어떤 문턱값threshold이 있는 것 같다. 강아지가 문제없이 잘 자라려면 새로운 개, 사람, 장소에 강아지를 일정 정도 노출시켜야 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문턱값을 넘어서는 노출은 대개 눈에 띄는 차이를 불러오지 않는 것 같다. 전반적으로 훌륭한 개가 되려면 친절하고 사랑이 넘치는 가족의 일원이 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190쪽


읽으면서 새로운 이론을 접한다기보다는 저자들의 권위를 빌려 기존의 내 생각을 다시 한번 확인하는 듯 했다. 그래도 강아지를 처음 길러보는 사람이라면 이 책이 분명 도움이 될 것이다. 특히 책 뒤의 부록이. 


모든 강아지는, 모든 생명은 각자의 개성과 능력을 지니고 있고 모두 소중하다.



4. 밀림의 연인들(김달리. 안전가옥. 2023. 196쪽)

: 유명 조각가의 딸 다미는 가진 게 하나도 없는 남자 석영의 진심을 믿고 결혼한다. 하지만 세월이 지난 지금, 석영은 메타버스 플랫폼 '밀림'에서 만난 여자 초코페와 가상의 아이까지 낳으며 푹 빠져 있다. 초코페가 자신을 구원했노라 말하는 석영의 말을 인공지능 가사도우미 로봇 키미를 통해 들은 다미는 그동안 들여다 보지도 않았던 밀림에 접속해 가상 불륜 커플을 추적한다.


다미가 자신을 갉아먹어가며 석영과의 관계를 헤쳐나가는 게 마음 아팠다. 왜 그냥 버리질 못하니. 그냥 편하게 버릴 수도 있잖아. 하지만 이게 사랑이라는 걸 알고 있다. 애증은 동전의 양면 같은 것. 다미의 애정이 옮아가는 게 흥미로웠다. 공감하진 못했지만. 어찌됐든 내가 바랐던 건 다미의 평화였으니. 그들의 평안이 오래 가기를. 



5. 바질 이야기(프랜시스 스콧 피츠제럴드, 이영아 역. 빛소굴. 2024. 270쪽)

: 연작 소설집. 중산층 집안의, 이제 막 사춘기에 접어들기 시작한 무렵부터 대학에 들어가서까지의 바질의 이야기들. 남들보다 뛰어나지도, 성숙하지도 못하고 그저 사랑에 빠지는 것만 잘하는 바질의 서툴고 안쓰러운, 하지만 호기롭고 씩씩한 성장기이다. 저자의 자전적인 모습들이 가장 많이 반영됐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위대한 개츠비>>도 생각이 나고, <<밤은 부드러워>>의 주인공도 떠올랐다. 그들에게 느꼈던 기특함과 안타까움이 다시 한번 느껴졌달까. 매 작품이 흥미로웠고 재밌었다. 



6. 질긴 매듭(배미주,정보라,길상효,구한나리,오정연. 사계절. 2025. 264쪽)

: '모계 전승'을 주제로 한 앤솔러지. 여성들의 연대를 얘기한 배미주. 대를 이어 딸이 책임져야 하는 돌봄노동과 출산에 관해 고발한 정보라. 길상효는 처음에는 살짝 지루했으나 마지막 장면에서 오래 전에 읽은 <<늑대와 함께 달리는 여성들>>(클라리사 에스테스)이라는 책이 떠올랐는데 뒤의 작가 인터뷰에서 작가가 야생성으로의 회귀를 언급해서 반가웠다. 이탈로 칼비노의 <<우주 만화>> 중 다이애나 여신 얘기의 장면이 떠오르기도 했고. 


구한나리는 너무 아팠다. 지효의 아픔만으로도 속상했는데 원인이 이야기된 순간 책을 잠시 덮어야 했다. 제발 세상 모든 여성들이 아프지 않고 살아갈 수 있었으면. 최소한 어린 여성들만이라도. 오정연도 쉽지는 않았지만 이야기의 힘과 목소리에 대한 믿음이 주는 희망이 보여서 위로가 되었다. New In Old. 오랜 일과 오랜 꿈. 



7. 구월의 보름(R. C. 셰리프 , 백지민 역. 다산책방. 2025. 456쪽)

: 런던 근교에 사는 스티븐스 가족은 매년 9월에 보름 동안 해안 도시 보그너로 휴가를 떠난다. 신혼여행으로 이 도시를 방문했던 이래 아이들을 데리고 매년 되풀이되는 휴가 여행. 같은 기차를 타고 같은 곳에서 환승하여 같은 곳 - 시뷰라는 이름의 게스트하우스 - 에 묵으며 시간을 보낸다. 매년 반복되는 일이지만 스티븐스 부인은 매년 긴장을 하고, 스티븐스 씨는 매년 휴가 전날의 할 일 목록을 만든다. 올해는 열여덟 메리와 열일곱 딕이 친구와 휴가를 보내겠다는 뜻을 넌지시 비췄었으나 다행히 이번에도 함께 가기로 했다. 


그 시절의 휴가 브이로그. 왜 재밌지?하면서 재밌게 읽었다. 스티븐스 가족의 보름 간의 일정에서 마지막에 스티븐스 씨가 회상하듯 다른 해와 다른 점은 두 가지 정도이다. 하지만 어쩌면 이런 평화롭고 평범한 휴가는 이번이 마지막인지도 모른다. 딕과 메리의 성장, 시뷰의 쇠락과 여주인의 건강 문제... 물론 스티븐스 가족이 이를 알아챈 기색은 보이지 않았고 - 설사 그랬다 하더라도 티는 전혀 내지 않았고 - 휴가 마지막날 내년을 기약하긴 했지만. 그러나 그래서 이번 휴가가 특별한 건 아니다. 그냥 보통 가족의 평범한 휴가, 그 안에서 계속 발견되는 소소한 행복과 가족 구성원들 각자의 작은 성장 - 메리의 연애, 딕의 직업적 성찰, 스티븐스 씨의 과거 회상. 잔잔하지만 출렁임을 멈추지 않으면서 앞으로 나아가는 보통 사람들의 이야기가 꽤 즐거웠다. 사실 처음 집어들 땐 그저 그 시절의 생활상을 좀 들여다 보는 정도만 기대했는데... 어쩌면 기대가 없어서 더 즐거웠는지도 모르겠다.


PS. 이 출판사의 번역, 교정은 늘 기대이하이다. 원래도 엉망인 문장을 각오하고 읽기 시작하긴 하지만, 이번엔 정말... 이렇게 번역기 돌린 어색한 문장은 진짜 오랜만. 



8. 고양이와 사막의 자매들(예소연. 허블. 2023. 224쪽)

: 3차 대전 후 세상은 멸망한다. 사막의 전쟁터에서 살아남은 잔류 용병들. '워커'라 불리는 이들은 나름 커뮤니티를 만들어 생존하는데, 여성 노인 워커인 창, 아샤, 말리는 머물던 워커 커뮤니티에서 나와 예전 용병 사수 정을 찾아 길을 떠난다. 우연히 만난 여행자에게서 정이 데리고 있던 고양이 치즈의 존재를 인지한 이들은 정이 가까이 있음을 확신하고 곧 치즈를 만난다. 


결말이 조금 슬펐다. 하지만 최선이기도 했다. 마지막 선택은 그들이기에, 사랑을 믿기에 할 수 있는 선택이었으니. 그래도 치즈는 계속 생존할테니 괜찮다. 어쩌면 그게 정말 답인지도 모르겠다. 모든 기억을 공유하고 함께하는 것. 그게 사랑의 또다른 이름인지도. 



9. 로즈웰 가는 길(코니 윌리스, 최세진 역. 아작. 2024. 480쪽)

: 프랜시는 대학 때 룸메이트였던 세리나의 결혼식 참석을 위해 앨버커키 공항에 도착한다. 세리나는 대학 때 프랜시를 구해줬고 지금도 절친이지만 그동안 수많은 이상한 남자들과 약혼과 파혼을 반복했다. 이번에 결혼하겠다는 남자도 외계인 덕후인데, 로즈웰의 외계인 박물관에서 결혼한다고 하는데 마침 오늘 로즈웰 외곽에서 미확인 비행물체가 발견됐다. 여러 우여곡절 끝에 간신히 세리나를 만나지만 세리나의 약혼자는 물론 세리나도 너무나 정신이 없고, 이상한 들러리 드레스에 적응할 새도 없이 세리나의 부탁으로 차에 물건을 가지러 간 프랜시는 회전초 모양의 외계인에 의해 차 째로 납치된다. 외계인의 강압적인 지시에 따라 운전을 하던 프랜시는 길가에서 히치하이킹을 하던 남자 웨이드를 태우는데...


그동안 읽었던 이 작가의 작품들 중 가장 역동적이고 재미있다. 그야말로 우당탕탕 외계인 대소동. 캐릭터들은 좀 전형적이지만 한 명 뺴곤 다 사랑스럽고, 좀 과하긴 하지만 해피엔딩이고. 과하다고 하는 건... 연애 면에서 그렇다는 거. 맞다, 이거 결국엔 사랑 얘기이고 연애 소설이다. 세리나가 프랜시에게 어떻게든 남자를 붙여주려 했을 때부터 짐작하긴 했지만 그 남자가 이 남자일 줄은 몰랐네. 게다가 정체가 그럴 줄도 몰랐고, 인디가 결론을 그렇게 낼 줄도 몰랐고. 사랑스럽긴 한데 과하다는 게 이런 말이다. 그래도 이 정도면 꽉 찬 해피엔딩. 진짜 신나게 읽었다. 



10. 조금 망한 사랑(김지연. 문학동네. 2024. 336쪽)

: 조금 망한 인생들. 살아날 희망이 아예 없는 건 아니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정말 뼈를 갈아내는 노력을 해야 현상유지라도 할 수 있는. 대부분 속터지는 캐릭터들이어서 가슴 치며 읽었다. 다들 포기하는 데 익숙하지만 그렇다고 또 완전히 놓아버리는 건 못해서 띄엄띄엄 확인도 하고 연락도 하고... 이게 현실이라는 건 아는데 그래서 더 답답하고, 그럼에도 희망은 잃지 않았으면 좋갰고, 정신승리라도 하면서 어떻게든 생이 이어졌으면 좋겠고... 그렇게 공감하며, 안도하며 읽었다. 가장 좋았던 건 <유자차를 마시고 나는 쓰네>.



11. 가족 살인(카라 헌터, 장선하 역. 청미래. 2025. 584쪽)

: 20년 전, 런던 사교계의 여왕 캐럴라인의 연하 남편 루크 라이더가 자택 정원에서 살해당한다. 최초 발견자는 캐럴라인의 딸. 당시 집안에는 캐럴라인의 막내 아들 가이가 있었고, 루크는 구타를 당하고 정원석에 부딪혀 사망한 것으로 보였다. 당시 10살이던 가이는 아무 것도 몰랐고 범인 또한 잡히지 않았다. 20년이 흐른 지금, 다큐멘터리 감독이 된 가이는 살인범을 찾고자 리얼 크라임 쇼 인퍼머스의 감독을 맡는다. 법정 심리학자, 뉴욕 경찰청 출신 탐정, 런던 경찰청 퇴직 형사, 현직 법의학자, 왕실 변호사 등으로 구성된 패널은 당시의 사건을 검토하고 직접 조사에 뛰어들며 사건의 진실을 밝히려 한다.


사실 범인은 처음에 짐작한 그 사람이어서 내겐 그다지 반전이 아니었다. 다만 실제 방송을 보는 듯한 서술 방식과 조사가 거듭될수록 밝혀지는 여러 진실들과 등장인물들의 관계성이 꽤 흥미로웠다. 사실 모든 범죄 소설이 그렇긴 하지만 범죄 자체의 사실과 인과관계는 요약해 놓으면 별 거 아닌 경우가 많아서 어떤 방식으로 진실을 드러내고 등장인물들이 그걸 어떻게 소화하고 처리하는지가 관건인데, 그런 면에서 이 책은 꽤나 영리했다. 



12. 단명소녀 투쟁기(현호정. 사계절.  2021. 152쪽)

: 고3 수정은 입시 전문 점쟁이를 찾아가 대학에 갈 수 있는지를 물었으나 돌아온 대답은 스무 살에 단명한다는 것. "싫다면요?"라는 대답을 하고 돌아나와 수정은 아래층 떡집에서 백설기 100조각을 챙겨 명을 연장할 수 있도록 길을 떠난다. 역 앞에서 술취한 아저씨의 공격을 받은 수정에게 날개 달린 개가 나타나 수정은 그 개의 등에 타고 날아가던 수정은 이안을 만난다. 자신과는 반대로 죽기 위해 길을 떠난 이안과 동행하기로 한 수정.


연명 설화를 재해석했다는데, 난 연명 설화를 몰랐고 처음엔 그저 심드렁하게 판타지인가보네, 하며 읽었다. 읽기에 따라 내용은 좀 중구난방일 수도 있고 산만할 수도 있다. 하지만 죽을 운명을 피해 떠나는 소녀의 기개만큼은 이 이야기를 끝까지 읽도록 이끌었다. 결말을 꼭 알고 싶었다. 그리고 수정을, 세상 모든 열아홉 소녀들을 응원하게 되었다. 단명하는 소녀는 없기를, 모두 무사히 어른이 되어 오래오래 살기를. 누군가 죽으라고 혹은 죽을 운명이라 해도 수정처럼 "싫다면요?"하고 정색하기를. 



13. 크레이브 1, 2(트레이시 울프, 유혜인 역. 북로드. 2024. 400쪽,360쪽)

: 영어덜트 판타지로맨스. 부모님을 한날한시에 잃고 유일한 가족인 삼촌과 사촌이 사는 알래스카로 가게 된 그레이스. 삼촌은 그곳에서 사립학교를 운영중이다. 어마어마한 추위를 뚫고 겨우 도착한 캐트미어 아카데미는 거대한 성 같은 곳. 아무리 전학생이라지만 도착한 순간부터 자신에게 쏠리는 적대적인 눈길이 부담스러운 그레이스는 마중나왔던 사촌 메이시가 잠시 자릴 비운 사이에 로비에 있던 신기한 모양의 체스판을 들여다 보고 있는데, 용 모양의 말을 잡으려는 순간 엄청나게 섹시하고 무시무시한 포스를 내뿜는 남학생이 말을 건다. 당장 나가서 사라지라는 그의 말. 그와 잠시 언쟁을 벌인 그레이스는 그가 이 학교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잭슨 베가라는 걸 알게 된다. 그리고 그날 밤 다른 학생들의 장난을 빙자한 괴롭힘에서 그레이스를 구해주는 잭슨. 그런데 다음날 잭슨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의 소년이 그레이스에게 다가온다. 다정한 분위기의 플린트.


솔직히, 시리즈물의 첫번째 이야기라는 걸 알았으면 안 읽었을 거다. 전반적인 분위기는 트와일라잇과 비슷하다. 섹시하고 위험한 뱀파이어와 따뜻한 태도를 보이지만 속을 알 수 없는 용, 그리고 마녀와 늑대인간. 세계관 구성이 나쁘지 않고 플롯도 나름 괜찮긴 하지만 등장인물들의 행동이 많이 유치하다. (어쩌면 그냥 내가 꼰대인지도.) 어떻게 보면 캐릭터 자체가 좀 전형적일 수도 있고. 정의를 실현했지만 부모와 일족에게서 비난을 받는 황태자와 그가 첫눈에 반한 반려, 그리고 그걸 약점삼아 이용하는 악당. 이 책의 끝부분도 2권을 염두에 두고 끝나긴 했는데, 2권이 번역출간되어도 안 읽을 거 같다. 아니, 어쩌면 이번처럼 도서관 대출 권수 채우겠다고 들고 와서는 꾸역꾸역 읽을 수도.


ps. 주인공들의 이름이 너무 올드하다고 생각했는데, <<블루 아워>>를 읽다가 "요정 같고 팔다리가 길고 사랑스러운 이미지를 떠올리게 하는 이름"(<<블루 아워>> 64쪽) 이라는 구절을 읽고 영어권에서 그레이스라는 이름이 가진 이미지가 이건가 싶기도 했다. 그치만 <<블루 아워>>에서도 그레이스는 나이 많은 할머니인데. 



14. 진공붕괴(해도연. 한겨레출판. 2025. 400쪽)

: SF 단편집. 작품들 초반에 이론 설명이 자세하게 나오는데, 이해 못해도 내용을 받아들이는데에는 무리가 없다. 나같은 문과 100% 머리로도 잘 읽을 수 있다는 얘기. 잘은 모르지만 이론들이 다 신박하기도 하고. 하지만 더 중요한 건 내용이지. 그 안에 있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 마음. 모든 작품이 다 해피엔딩은 아니었지만 결말이 다 맘에 들었다. 그런 면에서 가장 맘에 들었던 건 <콜러스 신드롬>이었지만 내용은 <마리 멜리에스>가 가장 좋았다. 



15. 팽이(최진영. 창비. 2025. 356쪽)

: 작가의 첫번째 단편집의 리마스터링 판. 초창기 작품들이니만큼 진중하고도 생생하다. 다만 화자들이 처한 상황들이 편하지는 않다. 삶이 항상 쉬울 수는 없지만, 그게 온전히 나 자신으로부터 비롯된 문제가 아니라 내 주위에서 강한 존재감을 내뿜는 누군가에 의한 거라면... 그래서 읽기가 쉽지 않았다, 이 시기의 내겐. 그러므로 가장 좋았던 건 <첫사랑>. 



16. 블루 아워(폴라 호킨스, 이은선 역. 문학동네. 2025. 408쪽)

: 테이트 모던에서 전시중인 예술가 바네사 채프먼의 작품에 인간의 뼈가 사용되었다는 의혹이 제기된다. 바네사는 이미 사망했고, 바네사의 작품을 모두 상속받은 페어번 재단에서는 이 문제가 커지기 전에 수습하고자 바네사 채프먼 전문가이자 재단 큐레이터인 베커가 바네사가 살던 에리스 섬으로 향한다. 그곳에는 바네사의 마지막을 함께했던 친구이자 간병인 그레이스가 살고 있다. 스스로 제대로 된 대접을 받지 못했다고 느낀 그레이스가 바네사의 작품을 모두 페어번 재단에 양도하지 않고 있는 문제도 해결할 겸, 베커는 그레이스에게 호감을 얻고자 조심스럽게 접근한다. 그리고 바네사와 그레이스의 이야기, 바네사와 (전)남편의 이야기를 조금씩 듣게 된다.


이 작가의 전작이 내 취향이 아니었어서 기대 없이 읽었는데 정말 재밌었다. 인간과 인간 사이의 애증을 이토록 생생하게 표현해 내다니. 누군가를 원하는 마음과 그의 웃음을 보고 싶지만 그가 나 없이는 행복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 나의 존재가치를 인정해 주길 바라는 마음, 외롭지만 그 외로움을 들키고 싶지 않은 마음... 모든 캐릭터가 스스로 살아 움직였고, 그래서 그들의 단점이 거리낌없이 드러났고, 그래서 난 힘들었다. 소설 속 그들은 당당했는데 소설 밖 나는 왜 부끄러운가.  바네사는 잘 이해되지 않았지만 바네사의 폭풍같은 감정기복을 지켜보는 그레이스의 마음은 십분 이해가 갔다. 하지만 결말은... 그레이스가 왜 그랬는지 이유는 알겠지만 굳이...? 어쨌든 읽는 내내 흥미로웠고 화가 났고 안쓰러웠다. 



17. 나름에게 가는 길(전삼혜. 위즈덤하우스. 2024. 72쪽)

: 시현은 드넓은 우주에서 쓸만한 우주 쓰레기 '데브리'를 모아 파는 데브리 피커. 데브리에는 가끔 우주의 사념들이 엉킨 '나름'이 붙는다. 시현이 우주로 나오게 된 건 오래전 죽은 동생 아영을 우주 장례 치른 후. 당시 최초였던 우주 장례는 업체에서 유골을 분실하는 바람에 유가족들에게 큰 상처를 줬고, 시현의 부모는 아직도 장례 업체에서 분실된 유골이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좌표를 보내올 때마다 시현에게 그곳에 가보기를 원한다. 어떤 이들은 이렇게 우주로 보내진 죽은 이들의 영혼이 나름으로 나타나기를 바라기도 한다.


상실을 극복하는 방법은 사람마다 다르다. 그중에는 이 책 속의 누군가처럼 유령이라도 만들어내고 싶어하는 사람도 적지 않겠지. 하지만 우린 모두 알고 있지 않나. 그렇게 만들어진 존재는 결코 내가 알고 사랑하던 그 존재와 같지 않다는 걸. 그렇지만 우린 또한 알고 있지. 그렇게라도 되살리고 싶은 마음을. 애도는 아무리 길어도, 깊어도 충분치 않다. 그렇기에 누구도 그 마음을 비난할 수 없는 것. 그저 지켜볼 수 밖에 없는 것. 



18. 여름 손님들(테스 게리첸, 박지민 역. 미래지향. 2025. 428쪽)

: 메이든 호숫가의 여름 별장. 코노버 가의 둘째 아들 에단은 이곳에 그다지 좋은 추억은 없지만 아버지 조지의 영결식에 참석하기 위해 아내 수잔과 아내가 첫번째 결혼에서 낳은 10대 딸 조이와 함께 이곳을 찾았다. 여전히 자신만만하고 매사에 거침없는 형 콜린과 완벽한 미모의 형수 브룩, 그리고 어릴 때부터 브룩의 과잉보호 아래 자라난 병약한 조카 키트와 어머니 엘리자베스가 이미 와 있다. 수영 선수인 조이는 오자마자 호수에서 수영을 즐기거 에단은 오랜만에 안 써지던 소설을 쓰기 시작한다. 잠시 뒤 조이가 이 지역의 농장 소녀와 친구가 되었다며 농장에 놀러가도 되냐고 하자 건성으로 허락한 에단. 그런데 그날밤 조이는 집에 오지 않고, 전화도 받지 않는다.


(스포)

마티니 클럽 2편. 전작과는 결이 다르다. 사실 전작같은 재미를 기대했는데. 은퇴한 스파이 5인방은 매기의 이웃인 루터가 유력한 용의자가 되자 사건에 개입하고 이번에는 경찰서장대행 조 티보듀도 점점 마음을 연다. 이들이 실력과 인맥을 동원해 사건과 관련된 조사를 진행하고 진실을 드러내는 과정은 여전히 흥미진진했지만, 결과적으로는 맥거핀에 불과했다. 드러난 진실은 그저 추악한 한 개인의 일탈에서 비롯된 비극. 진실이 드러났을 때 난 그 모든 원인을 제공한 그 인간과 그걸 그딴식으로 덮으려 했던 또다른 미친놈을 욕했다. 이건 살인자만 비난 받는 건 억울해. 물론 죽은 이가 가장 불쌍하지만 이 책에는 그외에도 냉전시대 국가의 맹목적인 군사력 경쟁에 희생된 또다른 개인들이 나온다. 이들이야말로 가엾지. 책에서는 이제라도 밝혀지지만, 과연 현실에서는... 주인공들의 전직을 생각해 볼 때 한번쯤은 짚고 넘어가야 할 소재였을지언정, 이번 이야기에서는 글쎄... 물론 마지막에 매기도 지적하긴 하지만. 3편은 1편같았으면 좋겠다. 



19. 단어가 내려온다(오정연. 허블. 2021. 264쪽)

: SF 단편집. 첫번째 작품 <마지막 로그>가 정말정말 좋아서 뒤의 작품들도 기대를 잔뜩 갖고 읽기 시작했는데, 결론적으로는 첫번째 작품이 가장 좋았다. 표제작은 '15세가 되면 자신만의 단어를 받는다'는 설정이 정말 흥미로웠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난 받고 싶은 하나의 단어를 못 고르겠다. 단어는 다 좋아, 다 옳아. 사실 다른 작품들도 다 좋긴 했다. 작품들에 기본적으로 깔려 있는 생명 존중 사상과 자기 자신으로 살아가는 것의 중요성, 가부장제에 대한 풍자와 비판에 크게 공감했고 그걸 이렇게 풀어낸 작가의 독창성에 감탄했다. 이 작가의 작품은 앤솔러지에서 처음 접했고 본격적으로 읽은 건 처음인데 작품들이 다 흡족해서 앞으로 읽을 이 작가의 다른 작품들이 기대된다. 



20. 완벽한 결혼(제네바 로즈, 박지선 역. 반타. 2025. 412쪽)

: 워싱턴 최고의 형사 전문 로펌의 파트너 변호사 세라 모건. 늘 그렇듯 정신없이 일하는 와중에 결혼 10주년을 맞이하지만, 소설가 남편 애덤의 바람대로 호숫가 별장에 갈 짬을 내지 못한다. 애덤은 늘 그렇듯 혼자 그곳에 가서, 현지의 카페에서 일하는 캘리와 외도를 한다. 세라가 퇴근을 한다는 문자에 자고 있는 캘리에게 쪽지를 써두고 서둘러 집으로 온 애덤. 그런데 다음날 캘리가 별장 애덤의 침대에서 피투성이로 살해된 채 발견됐고 용의자로서 애덤이 체포된다. 세라는 배신감에 치를 떨지만 애덤의 변호를 맡기로 한다.


계속 찡찡대는 개찌질이 여미새 애덤과 그 엄마 때문에 중간중간 짜증을 내며 읽었지만 합당한 결말에 만족스러웠다. 후기를 보니 범인을 예측했다는 리뷰들이 종종 보이던데 나는 전혀 짐작도 못했고 - 내가 짐작했던 유일한 진실은 보안관 스티븐스의 정체(?) 뿐 - 등장인물들이 가진 과거사마저도 내겐 흥미진진했다. 스핀오프가 나와도 괜찮겠어. 



21. 무드 오브 퓨쳐(윤이나,이윤정,한송희,김효인,오정연. 안전가옥. 2022. 324쪽)

: 미래의 사랑을 주제로 한 앤솔러지. 


(스포)

가벼운 마음으로 읽어 나갔고 작품들이 다 좋긴 했지만 읽으면서 꼭 이렇게 '해피엔딩' 이어야 하나 싶기는 했다. 첫번째인 윤이나와 마지막 오정연의 작품은 두 사람이 '이루어지는' 결말이 아니어서 오히려 맘에 들었다. 윤이나의 작품은 사랑과 관계에 있어서 맹목성과 오만이 얼마나 위험한지에 대해 생각하게 해서 좋았다. 사실 다섯 작품 중 가장 마음을 울렸던 건 오정연. 작가의 말에서 일부러 성별을 특정하지 않았다고 했는데 그래서 더 좋았다. 두 사람이 만나지 못했다고 해서 사랑이 완성되지 못하는 건 아니다. 



22. 헤이팅 게임(샐리 쏜, 비비안 한 역. 파피펍. 2021. 484쪽)

: 내 취향은 아니었지만 재밌게 읽은 혐관 로맨스. 루시는 어릴 때부터 책을 만드는 일을 하고 싶었다. 가민 출판사에 대표실 비서로 입사했지만 언젠가는 편집부에서 일하고 싶었는데, 불행히도 회사 사정이 어려워져 벡스터 출판사와 합병을 하게 됐고, 공동 대표 체제로 가면서 벡스터 대표의 비서인 조슈아와 한 사무실을 쓰게 됐다. 그런데 첫 만남부터 재수없게 굴던 조슈아는 일하는 내내 틱틱거리기 일쑤. 루시와 조슈아는 하루종일 서로를 디스하고 지적하기 바쁘다. 사실 루시는 여러 사람과 다 좋은 관계로 지내고 싶어하기에 이런 관계가 피곤하기만 하다. 그러던 어느날 퇴사 예정인 디자이너 대니와 데이트를 하기로 한 루시. 루시가 한 데이트 약속이 거짓말이라며 빈정대는 조슈아가 데이트 장소로 데려다 주겠다고 함께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는데, 갑자기 루시에게 키스를 한다.


초반에는 좀 열받아 하며 읽었다. 특히 엘리베이터 키스 장면. 명백한 성추행이잖아. 물론 난 이 책이 로맨스이고 결국 둘이 잘 될 거라는 걸 알고 있는 상태에서 읽기 시작했지만, 초반 조슈아의 싹퉁머리 없는 말본새와 엘리베이터 성추행에 진심으로 머리끝까지 화가 났다. 다행히 조슈아가 사과를 하긴 하지만. 근데 그 뒤로도 관계의 주도권이 루시가 아닌 조슈아에게 더 많이 가고 루시는 여러 가지로 굴욕적인 면면을 보여서 그것도 맘에 안 들었다. 맘에 들었던 건 결말 부분 뿐. 그래도 스킨쉽 장면이 흥미진진해서 전반적으로는 재밌게 읽었다. 짜증날 만 하면 스킨쉽 장면이 나와서 화를 가라앉혀 줬거든. 추천 받아서 읽었는데 다른 어떤 장르보다 로코는 취향에 맞는 걸 발견하기가 더 힘든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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