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3월의 마치(정한아. 문학동네. 2025. 288쪽)

: '국민배우' 이마치.  이제 60대에 접어든 그녀는 3월 생일날 아침 습관대로 체중계에 올랐다가 깜짝 놀란다. 하루만에 체중이 확 늘었던 것. 사실 이마치는 이 집에 이사온 후 이상한 일들을 겪고 있다. 기억력이 급속도로 감퇴해 배우 생활에 문제가 생겼고 혼자 집에 있을 때면 이상한 소리들이 들린다. 이사한 지 몇 달 안 된 이 아파트는 라파트멍이라는 생소하지만 세련된 이름을 가진 신축이고, 이마치는 재건축한 이 아파트의 이 호수를 사수하기 위해 노력했었다. 그 이유는 어릴 때 잃어버린 아들 때문. 마치는 그날 예약되어 있던 클리닉으로 가지만 택시를 탄 후에야 지갑을 가져오지 않은 걸 깨닫고, 다행히 택시기사의 호의로 클리닉에 도착하지만 진료는 하염없이 미뤄진다. 집에 돌아온 마치는 엘리베이터가 고장이라는 걸 알게 되고 힘겹게 계단으로 올라가 탑층 60층인 자신의 집에 도착하고 내친김에 옥상에 올라가 보기로 한다. 그곳에서 43층에 산다는 여자와 마주치는데, 그녀는 바로 43세의 이마치 자신이다.


판타지나 SF가 아닐까 했던 초반의 지레짐작은 틀렸음이 바로 드러난다. 마치는 알츠하이머였고 VR치료를 받고 있었던 것. 라파트멍은 이 치료를 위한 가상세계였다. 마치는 아파트를 다니면서 과거의 자신과 맞닥뜨린다. 퍼즐처럼 맞춰지는 마치의 인생이 너무나 가슴아팠다. 시작부터 평탄하지 못했던 삶. 12월에 태어났으나 도망간 어미대신 아이를 방치하다시피 키운 아비의 바람과 달리 3월에도 목숨이 붙어 있었기에 마치라는 이름을 갖게 된 여성. 인생의 가장 따뜻했던 한 사람을 잃고 또다른 상실을 계속 겪었어도 자신의 의지대로 나아가고자 했던, 그러나 돌아보니 그 길은 황폐하기만 했던 여성. 


어쩌면 라파트멍은 누구에게나 필요한 것인지도 모른다. 비록 마치만큼 끔찍한 기억은 없을지언정 누구에게나 크고작은 상처가 있으니. 제발 원하는 누구에게든 인생의 막바지에 그런 기회가 주어지기를.



2. 봄밤의 모든 것(백수린. 문학과지성사. 2025. 268쪽)

: 저자 특유의 섬세함이 드러나는 단편집. 해피엔딩을 위해 애쓴 흔적들. 봄햇살처럼 따뜻하지만 봄밤처럼 서늘하기도 하다. 겨울을 지나 봄이 왔다고 단번에 몸과 맘이 데워지지는 않듯, 이 작품들에서도 쓸쓸함이 느껴진다. 그건 상실의 기억 때문. 하지만 그래도 삶은 살아진다. 가장 공감했던 건 <눈이 내리네>.



3. 옥상에서 기다릴게(한세계. 자이언트북스. 2025. 248쪽)

: 열일곱 정유신. 대필 아르바이트를 하며 용돈을 꽤 쏠쏠하게 벌고 있다. 고등학교에 진학하고 그다지 친하지도 않은 반장 김지원이 어느날 대필을 부탁하는데, 그건 지난 겨울에 사고로 죽은 김영원의 유서. 김지원은 자신이 김영원의 쌍둥이 형이라면서 대필을 해주면 김영원의 일기장을 주겠다고 한다. 유신은 사실 중학교 때 모두와 친하게 지내고 인기 많았던 영원과 학교 옥상에서 우연히 마주친 후 우정을 쌓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 우정은 드러나지는 않았었고, 이제 영원이 죽은 이후 유신은 계속 잠을 못 자고 있다.


대전제가 사랑스러운 소년의 죽음이라서, 처음부터 힘들게 읽어나갔다. 상실은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지만 꼭 이렇게 어린 소녀와 소년에게도 일어나야만 했을까? 소설 속에서는 무슨 일이 생겨도 괜찮다는 내 평소의 말은 거짓말이었나보다. 유신과 지원이 어떻게든 앞으로 나아갈 거라는 건 믿고 있었다. 그게 청소년 소설의 기본 stance니까. 하지만 그걸 따라가는 난 너무나 힘겨웠다. 그 와중에 지원의 행동들은 이해가 가질 않기도 했고, 유신은 안타까웠다. 그렇게 너 자신을 평가절하하지마... 물론 결말에서 지원과 유신은 농구를 해도, 피스타치오 아이스크림을 먹어도 괜찮아진다. 하지만... 소설 속에서라도, 이런 상실은 일어나지 말았으면 좋겠다. 



4. 나의 작은 무법자(크리스 휘타커, 김해온 역. 위즈덤하우스. 2025. 572쪽)

: 조용한 해안가 도시 케이프 헤이븐. 30여년 전, 이 마을에서는 어린 소녀 시시 래들리가 실종됐었다. 온마을이 동원되 소녀를 찾아나섰고, 소녀는 곧 차에 치인 시신으로 발견된다. 범인은 빈센트 킹으로 밝혀지고 빈센트는 살인죄로 성인 교도소에 수감된 후 긴 복역 끝에 이제 마을로 복귀할 참이다. 당시 빈센트의 여자친구였던 시시의 언니 스타. 아버지를 알 수 없는 남매를 키우며 술과 약에 절어 사는 스타를 빈센트의 절친이자 경찰서장인 워크가 한번씩 들여다보고, 스타의 큰 딸 열세 살 더치스와 동생 로빈을 도우려 애쓰지만 더치스는 스스로를 무법자로 칭하며 어떻게든 자력으로 동생을 지키려 한다. 빈센트가 마을로 복귀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스타가 총을 맞아 죽는다. 당시 현장에는 빈센트가 있었고, 그는 신고를 한 후 워크에게 자신을 체포하라고 한다. 그의 결백을 확신하는 워크와 달리 빈센트는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채 재판만 기다리다가 갑자기 10대 시절 워크의 연인이었고 현재는 이혼 전문 변호사인 마사를 선임해 달라고 한다. 한편 더치스와 로빈은 스타의 아버지인 핼의 농장으로 보내진다.


(약스포)


나쁜 어른들이 너무 많았다. 그리고 좋은 어른들도. 처음엔 슬펐다가 중간엔 화가 나서 견딜 수 없었고 다시 너무도 슬퍼져서 두세 페이지마다 책을 덮고 숨을 골라야 했다. 세상은 소녀에게 너무도 가혹하다. 특히 가진 거 없이 지켜야 할 사람만 있는 어린 더치스에게는. 그래서 마지막 소녀의 선택이 더더욱 슬펐다. 그리고 사실 그건 빈센트의 선택이었지. 그가 그런 선택을 하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걸. 하지만 어쩌면 이 결말이 그에겐 해피엔딩이었을 것이다. 


이건 세상에서 가장 가슴아픈 범죄 소설.



5. 우리집에 왜 왔어?(정해연. 허블. 2025. 204쪽)

: 세 편의 단편들. 이 작가는 두 번째인데 전에 읽은 작품이 내겐 너무 무서웠어서 한동안 안 읽고 있다가 단편은 좀 괜찮을까 싶어서 집어들었다. 그런데, 아니었다. 너무 현실적인 결말이어서 단편임에도 무서웠다. 그나마 <준구>는 해피엔딩이어서 나았지만 읽는 동안에 너무 숨이 가빴고 나머지 두 작품은... 리뷰를 읽어보면 다들 이 작가의 치밀한 글솜씨에 경탄만 하던데, 나만 무서운 거야? 



6. 젊은 ADHD의 슬픔(정지음. 민음사. 2021. 248쪽)

: 니코틴 중독에서 벗어나 보고자 정신과를 방문했다가 ADHD 진단을 받은 저자의 에세이. 정신이 아프다는 걸 받아들일 수 없어서 한동안 음주와 흡연, 처방약 남용으로 방황하던 저자가 자신의 병과 함께 살아가기로 받아들이게 된 과정과 치료 생활을 이야기한다. 지난 달에도 얘기한 거 같은데 난 이 저자를 소설로 처음 접했고 또다른 에세이로 두 번째로 접한 후여서 저자의 스타일을 조금은 아는 상태로 읽기 시작해서인지 솔직히 처음에는 그다지 심각한 병은 아니라는 생각으로 읽었다. 그러나 겪어보지도 않았으면서 그런 판단은 정말 금물이지. 그래서 가볍게 받아들이지 않으려 애쓰며 읽었다. 그치만 저자가 워낙에 유쾌한 스타일이어서. 


저자는 어떻게든 자신의 병으로 인한 폐해를 줄이고자 방법을 찾아낸다. 그게 너무나 멋졌다. 시기적으로는 이 다음에 출간됐지만 난 먼저 읽은 에세이에서도 느꼈지만 저자는 선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공감을 하지는 못했지만 응원하는 마음은 차올랐다. 



7. 기억으로 가는 길(파트릭 모디아노, 윤석헌 역. 레모. 2024. 204쪽)

: 역시나 기억은 이 작가의 영원한 화두이다. 그런데 이번 작품에선 전작들과는 조금은 다른 분위기가 느껴진다. 화자 보스망스는 20여년 전 슈브뢰즈라는 곳으로 함께 찾아갔던 사람들을 기억해 낸다. 보스망스는 어릴 적 살았던 아파트를 다시 방문했던 20여년 전의 시간과 그보다 전 그곳에 살던 시절의 사람들과 사건들을 기억 속에서 계속 불러온다. 의심스러운 사람들과 알 수 없는 일들.


마음이 어지러울 때 모디아노는 확실한 처방이다. 끊임없이 부유하는 그의 화자들은 내게 알 수 없는 위안을 준다. 이번에도 틀리지 않았다. 다만 이 작품은 이전의 어떤 작품들보다 덜 모호하고 더 구체적이다. 그리고 그 어느 책보다 저자 자신이 많이 반영되어 있음을 읽는 동안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내 마음이 아파 읽기 시작한 책이었는데 읽는 동안에는 나를 잊고 보스망스를 안아주고 싶어졌다.



8. 호르몬 체인지(최정화. 은행나무. 2025. 224쪽)

: 가까운 미래, 호르몬 체인지 시술을 통해 노인들은 다시 젊은 몸을 가질 수 있게 됐다. 거리에는 노인이 보이질 않고, 빈곤층의 젊은이들은 생활비를 벌기 위해 호르몬 제공자가 된다. 70살 한나는 주위에 대화를 나누고 친구가 될 만한 노인이 하나도 없는 외로움에 시술을 받기로 한다. 윤리적 죄책감을 갖고 시술을 받았지만 결과는 만족. 젊어진 자신의 모습을 거부하는 딸에게 상처를 받은 것도 잠시, 한나는 젊은이로서의 생활을 한다. 그런데 이 시술은 정기적으로 받아야 한다.


소재가 흥미로워서 읽었는데, 역시나 인위적으로 죽음을 늦춘 세상은 기괴했다. 부의 격차가 극심해진 근미래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현재의 사회도 크게 다르지는 않다. 환경이 무너지고 기술이 발전할 수록 가난한 자들을 착취하는 방법은 나날이 기발해진다. 책속 세계가 너무 암울해서 읽는 내내 우울했다. 나도 늙는 건 싫다. 하지만 노화가 싫은 건 외모 때문이 아니라 관절과 장기 때문이다. 소화력이 떨어져 먹을 수 있는 양이 줄고, 노안이 와서 책을 읽으려면 팔을 좀더 뻗어야 해서 일정 공간이 더 필요하고, 전에는 1시간이면 걸었던 거리를 이젠 15분이 더 걸려야 도착하고... 그런데 이건 그냥 받아들여야 하는 거지. 잘못된 건 늙어가는 인간 자체가 아니라 노인을 소외시키는 사회가 아닌가. 세대간, 계층간 갈등을 줄일 수 있는 방법을 깊이 고민해야 할 때이다. 



9. 죽음(한용운. 부크크. 2018. 142쪽)

: 일제 시대 경성, 친일 신문사에 폭탄이 터진다. 곧이어 한 젊은이가 자신이 한 짓이라고 자수를 해오는데.... 홀아버지 밑에서 자란 순애는 의식 있는 여학생이다. 그는 자신에게 끊임없이 구애하는 부잣집 아들을 혐오하는데, 그 부잣집 아들은 순애의 아버지를 독립운동을 했다고 고발한다.


솔직히 말하자면 제목에 매료됐으나 죽음은 소재에 지나지 않았다. 일제 치하 아버지와 남편의 억울한 죽음에도 불구하고 꿋꿋이 살아가는 여성의 이야기. 외피는 일종의 스릴러다. 마지막 장면이 약간 모호했으나 난 희망적으로 해석했고, 출판사 책 소개를 보니 그게 맞는 거 같다. 읽으면서 오래된 소설이니만큼 젠더 의식이 많이 어긋나지 않을까 조금 걱정했는데, 일부 여학생의 일탈을 전체 여학생으로 매도하는 사회 분위기는 당대의 사회상을 반영한 것으로 이해했고 - 사실 저자 자신도 정조를 강조하긴 하였으나 - 저자가 아래와 같이 당대로서는 나쁘지 않은 생각을 개진하였기에 열린 마음으로 읽었다. 


그것은 여자를 속박하는 의미에서 여자의 정조에 대한 관념에서 나오는 남자의 희망이 아니라 여자 자신을 위하여서 필요한 조건이다. 여자가 경제상으로, 또 정치상으로 완전한 해방을 얻어야 할 것은 말할 것도 없는 인류 평등의 원칙이다. 그러나 여자는 경제상의 독립과 정치상의 인권으로만 원만한 행복을 얻는 것이냐 하면 결탄코 그러한 것은 아니다. 여자의 아름다운 행복은 순결하고 끊임없는 남자의 사랑에 있는 것이다. 

- 37쪽



10. 7시 45분 열차에서의 고백(리사 엉거 (지은이),최필원 (옮긴이)황금시간2023. 520쪽)

: 외근 때문에 늘 타던 시간에 집으로 가는 열차를 놓친 셀레나. 7시 45분 열차를 타기로 하고 사무실로 돌아와 집 놀이방에 설치된 홈캠을 연다. 그리고 실직 상태인 남편 그레이엄이 아이들의 보모 제네바와 관계를 가지는 모습을 무표정하게 바라본다. 사실 그들의 불륜은 진작 눈치채고 있었고 회사를 그만둔 뒤 구직활동조차 제대로 안 하는 남편에 대해서도 이미 지칠 대로 지친 상태였다. 셀레나는 남편을 벌주고 싶다. 하지만 동시에 유능한 보모 제네바를 놓치고 싶진 않다. 이윽고 7시 45분 열차에 오른 셀레나는 앞자리에 앉은 마사와 말을 트게 되는데, 마사가 먼저 자신은 직장 상사와 불륜을 저지르고 있다고 얘기한다. 마사의 고백에 셀레나도 남편과 보모의 불륜, 자신의 기분을 얘기하게 된다. 다음 주 월요일, 보모는 출근을 하지 않고 그녀의 언니가 실종 신고를 해 경찰이 셀레나와 그레이엄을 방문한다. 그레이엄의 불륜 때문에 유력 용의자가 된 둘. 그런데 셀레나에게 이상한 문자가 온다. 다시 만나서 얘기했으면 좋겠다는 내용과 함께 '나에요, 마사. 열차에서 만난'. 하지만 셀레나는 그녀에게 전화번호를 준 적이 없다.


(스포)


페이지가 빠르게 넘어간다. 마사의 비밀은 진작에 눈치챘지만 이야기가 어떻게 흘러갈지, 과연 나쁜 놈은 벌을 받을지 너무 궁금했다. 다만 셀레나 때문에 속 터져서... 셀레나가 끝까지 펄이 자신의 인생을 망쳐버렸다고 얘기하는 게 답답했다. 네 인생을 망친 건 너 자신이야. 그런 남자를 골랐을 때 이미 이런 결과가 예견되어 있던 거라구. 네 남편에게 문제가 발견되었음에도 그걸 한 번도 아니고 지속적으로 덮어주고 SNS에 행복한 가정인양 가식적인 사진을 올려가며 너 자신을 속인 건 너 자신이었어, 펄이 아니라. 


결말이 100% 맘에 든 건 아니지만 그 정도면 만족스러웠다. 



11. 도서관 문이 열리면(범유진. 푸른숲주니어. 2025. 152쪽)

: 둔둔 중학교에는 새학기를 맞아 도서관이 새로 개관했다. 원래 창고로 쓰이던 3층 구석의 도서관에는 그러나 학생들의 발걸음이 거의 없다. 1학년 은솔은 초등학생 때부터 말을 재밌게 하는 걸로 인기를 끌었는데, 한순간의 말실수로 친구들 사이에서 은근한 따돌림을 당한다. 불편하고 속상한 마음에 점심 시간마다 도서관을 찾게 되는 은솔. 머리카락이 새햐얀 사서 선생님과 친해지면서 도서관을 활성화할 방법을 함께 고민하게 되는데...


4명의 아이들과 4개의 에피소드. 다 사랑스럽고 재미있다. 마지막 에피소드는 좀 마음 아팠지만. 아무리 철이 없어도 그렇지 책을 그렇게 다루면 안 돼! 책 속 4명의 아이들이 가진 고민들은 꽤 현실적이다. 흔한 학업 고민이나 부모님과의 갈등은 아니지만, 막 청소년기에 들어선 아이들이 관계를 만들고 유지할 때 할 법한 실수와 고민들이 생생하다. 물론 현실은 더 힘들 수도 있지. 이 책처럼 모든 문제들이 너무 원칙대로 편안하게 해결되었으면 좋겠지만. 그래도 이 책을 읽는 동안만이라도 맘을 쉴 수 있으면 그걸로 됐지 싶다.



12. 대통령이 사라졌다 1. 2(빌 클린턴, 제임스 패터슨, 최필원 역. 베리타스. 2020. 360쪽, 316쪽)

: 청문회가 예정되어 있는 대통령. 혐의는 직권 남용과 반역이다. 며칠 전 대통령은 테러 단체 '이슬람의 아들들'의 수장과 전화 통화를 했고, 그들의 근거지를 습격한 영국 특수부대의 공격을 미국 특수부대가 막았다는 것. 청문회를 준비하던 대통령은 갑자기 변장을 하고 백악관을 빠져나가고 이는 최측근 몇 명만 알 뿐이다. 이유는 얼마 전 딸을 통해 접촉해 온 제보자 때문. 제보자는 이슬람의 아들들이 미국 내 테러를 계획 중이라는 정보를 주며 구체적인 건 다시 만나서 얘기하겠다고 하지만 약속 장소에서 습격을 받아 두 명의 제보자 중 한 명이 사망하고 만다. 


처음에 바이러스라고 했을 때 인터넷이 아닌 생물학적 테러를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그리고 인터넷 바이러스 또한 전국의 시스템을 마비시킨다는 점에서 위험도가 결코 낮다고 할 수는 없지. 하지만 아무리 가까운 곳에 있을 스파이 때문이라고 해도 꼭 베이스 캠프를 외부에 차려야 했는지도 모르겠고, 대통령이 꼭 특수부대 출신이어야 했을 이유도 모르겠다. 뭐, 그냥 백면서생이었던 것보다야 잘 도망치긴 했지만. 게다가 그놈의 팍스 아메리카나. 클린턴은 아마도 이 책을 통해서 머릿속 로망을 다 실현시킬 생각이었나보다. 아주 대통령 한 명 아니었으면 세상 다 멸망할 뻔. 반역자 색출 과정은 흥미로웠으나 예상한 인물이어서 좀 별로. 원래 이런 건 가까운 사람이 범인인 법이다. 암튼 제임스 패터슨 실망. 



13. 나무와 이파리(존 로널드 루엘 톨킨, 김보원, 이미애 역. 아르테. 2025. 256쪽)

: 톨킨 동화 선집 5권. 도서관 신착 도서 코너에 쪼르륵 있길래 사이즈도 아담하고 예뻐서 빌려왔는데, 솔직히 말하면 앞부분에 톨킨의 판타지 문학에 대한 고찰이 담겨 있는 <요정이야기에 관하여>가 진입 장벽이었다. 난 톨킨의 팬이 아니고 - <<반지의 제왕>>도 안 읽었고 - 이 책도 동화를 읽고 싶어서, 톨킨이 자신의 아이들을 위해 들려주던 동화를 선별한 거라길래 예전에 읽었던 <<블리스 씨 이야기>>도 재미있었고 해서 빌린 거였어서. 물론 <요정이야기에 관하여>는 꽤 흥미롭긴 했다. 톨킨은 <<걸리버여행기>>나 <<허풍선이 남작의 모험>>등의 여행기나 신비한 이야기를 '꿈'으로 처리하는 이야기들, 동물 우화들은 요정이야기가 아니라고 했다. 또한 요정이야기를 어린이와 연결짓는 것도 우연에 가깝다. 어린이라고 요정이야길 더 좋아하는 것도 아니고, 어린이들을 위해 더 만들어지고 각색되는 건 최근의 경향. (69-70쪽) 그렇다고 어린이와 연관이 없다는 게 아니라, '특별히' 연관짓지 말라는 것. 요정이야기는 인간의 자연스러운 취향이고 어린이도 인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성인에게 요정이야기가 더 필요한 이유는 요정이야기가 가진 판타지, 회복, 도피, 위로는 어른에게 더 필요한 것들이기 때문이라고( 87쪽). 이 말이 꽤 위로가 됐다.


이 뒤에는 두 개의 동화가 있다. 뒤의 <베오르흐트헬름의 아들 베오르흐트노스의 귀향>도 좋긴 했지만 아무래도 <니글의 이파리>가 상징하는 바도 명확하고 더 내 취향이었다. 하지만 아마도 톨킨의 팬이라면 <베오르흐트헬름의 아들 베오르흐트노스의 귀향>을 더 선호할 듯. 내 취향과 상관없이 의미있는 작품들이었다고 생각한다. 



14. 유령 해마(문목하. 아작. 2021. 364쪽)

: '해마'인 '비파'가 그녀를 처음 인식한 건 화재 현장에서였다. 사람 모양의 외피를 입고 화재 현장 안쪽에 있는 남매를 구했는데 그 뒤를 따라 나온 '반려동물'. 하지만 동물이 아니라 주민등록칩이 없는, 등록되지 않은 아이였다. 비파는 이런저런 임무를 수행하는 틈틈이 그녀 미정을 지켜본다. 자신이 구해야 했으나 구하지 못했던, 모르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지... 한편 미정은 지방의 작은 신문사 기자가 되는데, 경찰서에 출입하다가 가출 소녀를 만나게 되고 그 아이에게 정을 붙이지만 아이는 이유없이 앓다가 죽는다. 미정은 최근 젊은 사람들의 돌연사가 빈번함을 주목하게 되고 이게 가상 세계에서의 실험을 진행하는 거대 기업과 관련 있음을 알게 된다.


처음에 해마가 인공지능이라는 걸 얼른 알아차리지 못해서 - 그러게 왜 이름을 '해마'라고 했는지. 백업 때문에도 헷갈렸지만 진짜 인간의 뇌랑 무슨 상관이 있는지 한참 고민했다 - 헤맸는데 곧 비타와 미정의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이건 사랑 이야기. 성애적 사랑이라기 보다는 모성애적 혹은 자매애적인 사랑이다. 그러지 않고서는 마지막 비파의 선택이 설명되지 않는다. 그리고 미정이 가진 인류애. 물론 미정도 현실에 굴복하기도 하지만 본래의 선함으로 싸움을 이어나간다. 아무래도 저자는 성선설을 믿는 듯. 그렇다고 이 책이 마냥 무겁거나 심각한 건 아니다. 비파와 미정이 대면한 후의 티키타카 덕분에 후반부에서는 계속 킥킥대며 읽었다. 작가님, 문장력을 이렇게도 발휘하시는군요. 


결말이 완전히 맺지 않아서 약간 아쉬웠지만 앞으로의 이들의 행보가 기대되어, 후속작이 나왔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15. 달나라 소년(이언 브라운, 전미영 역. 부키. 2013. 376쪽)

: 장애 아들을 키우는 아버지의 에세이. 저자의 아들 워커는 심장-얼굴-피부 증후군(cardiofaciocutaneous syndrome, CFC). 전세계에 100여명의 환자가 있다고 한다. 신체적, 지적으로 발달이 매우 늦고 조기 사망 확률이 높은 중증 장애이다. 저자는 아내와 함께 최선을 다해 아이를 돌보는 데 그치지 않고 끊임없이 고민한다. 워커의 삶이 과연 어떤 의미일지. 단순히 생존하는 게 아니라 워커 또한 자신만의 삶이 있는지 하는 것. "내게 중요한 건 아들이 자신에 대한 감각을 갖고 있는지, 내면의 삶이 있는지 하는 것이었다. 때로는 그것이 다른 어떤 것보다 긴급한 물음처럼 느껴졌다." (70쪽) 또한 저자는 워커를 위해 다른 환자들을 찾고 다른 나라의 장애 돌봄 제도와 그룹홈을 찾아가기도 한다. 이렇게 저자의 힘겹고도 아름다운 여정을 따라가는 내내 마음이 무거우면서도 한편으로는 감동적이기도 했으나... 그룹홈에서 워커 담당자인 트리시의 가슴을 얘기하는 데서 짜게 식었다(333~336쪽). 이건 명백히 성희롱. 대체 이런 구절을 왜 넣었는지 모르겠다. 나름 유머라고 생각했나본데 아무리 16년 전 글이라고 해도 자기 아들 돌봐주는 사람에 대해 그러고 싶을까 싶다. 그녀가 언급하지 않았다고 해서 용서받았을 거라고 생각하는 근거는 또 뭐냐? 장애아를 키우면서도 한번도 약자의 문제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았나보다. 아니면 장애가 무슨 특권이라고 생각했거나. 막판에 기분 잡쳤다. 



16. 비밀의 책 : 앤디미온 스프링(매튜 스켈턴, 조영학 역. 비룡소. 2009. 492쪽)

: 열두 살 블레이크는 엄마와 동생과 함께 옥스포드에 왔다. 엄마는 옥스포드에서 논문을 위한 자료조사에 한창이다. 하지만 블레이크는 아빠만 두고 이곳에 와서 동생을 돌보는 책임을 떠맡은 게 불만스럽다. 도서관에서 엄마를 기다리며 책이 꽂힌 서가를 손등으로 훑던 블레이크는 갑자기 손등을 할퀸 책 때문에 깜짝 놀라고, 그 책을 빼서 펼쳤지만 책 속은 백지일 뿐이다. 책을 넘겨보던 중 갑자기 글씨가 떠오른 책. 알 수 없는 시가 적혀 있던 그 책을 서가 한구석에 숨겨둔 블레이크는 그날 밤 근처에서 엄마의 모임 파티가 진행되는 동안 다시 그 책을 보려 도서관에 들어가지만 인기척에 놀라 숨고, 곧 책이 파괴된 것을 발견한다. 한편 600여년 전 구텐베르크의 도제였던 앤디미온은 스승을 찾아온 남자가 너무도 수상하고 무섭다. 그가 뭔가를 꾸미는 듯 해서 몰래 지켜보던 중, 그의 짐 속에서 용의 가죽으로 만든 피지를 발견하는데...


블레이크의 상황이 답답하긴 했지만 중반까지는 모험이라기엔 좀 부족하지 않나 싶다. 블레이크가 막 휘젓고 다니는 스타일이 아니라서 그렇게 느껴졌는지도. 그리고 후반부에도 굳이 빌런들이 블레이크를 희생시키려 하는 이유를 잘 모르겠다. 어린이 소설이라 무조건 무섭고 나쁘게 그려야해서? 그래도 꽤 흥미진진하긴 했다. 



17. 로버랜덤(존 로널드 루엘 톨킨 저, 웨인 G. 해먼드,크리스티나 스컬 엮, 이미애 역. 아르테. 2025. 216쪽)

: 작은 강아지였다가 장난감 강아지가 됐다가 다시 달나라까지 다녀온 흰 강아지의 모험. 톨킨 동화 선집 4권이다. 이 이야기는 톨킨이 1925년 가족들과 해변가에 휴가를 갔다가 둘째 아들인 다섯 살 마이클이 애착 인형을 잃어버린 데서 출발한다. 가족들이 열심히 찾았지만 결국 찾지 못했고 톨킨은 마이클을 위해 이 강아지 인형 로버가 사실은 진짜 강아지였다며 동화를 얘기해 준 것. 이 이야기가 글로 옮겨진 건 이후의 일이지만 이야기는 정말 귀엽고 흥미진진하다. 원래 노부인의 강아지였던 흰 개는 까탈스러운 마법사의 바짓 자락을 물어뜯는 바람에 장난감이 되어 잡화점에 전시된다. 이걸 한 가족의 엄마가 아이들을 위해 사오지만 집 안에 가만히 있는 게 답답했던 강아지는 밤에 몰래 해변으로 나가고, 모래주술사와 만나 그의 도움으로 달나라로 여행을 떠난다. 달나라에는 달나라 사람이 키우는 강아지가 있었는데 이 강아지의 이름도 로버여서 장난감 강아지는 로버랜덤으로 불린다.


강아지의 달나라에서의 모험이나 바닷속 모험이 마치 우리나라 전래 동화처럼 펼쳐진다. 물론 배경 묘사는 이국적이지만 모험의 양상이랄까 모습은 크게 다르지 않다. 무엇보다 이 이야기는 앞서 말한 이야기가 생기게 된 비하인드 스토리가 너무 사랑스러워서 읽는 내내 즐거웠다. 난 톨킨의 세계관에 통달하지 못해서 그냥 이 이야기 자체만 즐겼지만, 톨킨의 팬이라면 여기서 그의 신화체계의 조각들을 발견하는 기쁨을 누릴 수 있을 듯. 하지만 이 이야기 자체만으로도 정말 재밌었다. 



18. 큰 우튼의 대장장이(존 로널드 루엘 톨킨 저, 벌린 플리거 엮, 폴린 베인즈 그림, 이미애 역. 아르테. 2025. 248쪽)

: 톨킨 동화 선집 3. 저자가 다른 작가의 책 서문을 쓰다가 문득 요정나라에 대해 정리할 필요를 느끼고 그 생각들을 한 편의 이야기로 완성시킨 것. 마을 큰 우튼에는 12년마다 큰 축제가 열린다. 커다란 케잌을 만들어 어린이들이 나눠 먹는데, 케잌 조각 안에는 작은 동전이나 예쁜 장식 같은 것이 들어 있기도 하다. 마을의 대표 요리사가 갑자기 죽은 후 그의 도제가 뒤를 이어야 했지만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실력이 훨씬 떨어지는 사람이 그 해의 케잌을 만들게 되고, 도제가 만류함에도 불구하고 재료실 구석에 잘 보관되어 있던 별 장식을 케잌에 넣는다. 그리고 그 별 장식은 대장장이 아들의 케잌 조각에 들어가고, 아이는 케잌을 먹은 이후 이마에 반짝이는 작은 별 모양이 새겨진다. 아이가 자라서 대장장이가 된 후에도 그는 일년에 한 번씩 긴 여행을 다녀오는데...


요정나라로의 여행이라니, 이 선집 중에서 가장 동화적인 이야기였다. 요정과의 만남, 요정 왕의 정체, 대장장이의 여행의 마무리까지 완벽했다. 영원한 여행은 없다는 이야기가 조금 서글프기도 했고. 멍청한 요리사의 마무리는 조금 아쉬웠지만, 그가 악당은 아니었으니. 뒤의 원고 전사본은 흥미롭긴 했지만 자세히 들여다보진 않았다. 아마 팬이라면 열광했을지도.



19. 달콤한 픽션(최지애. 걷는사람. 2023. 304쪽)

: 슬프지만 현실적인 단편집. 누가 이들에세 현실을 타파하지 않고 안주한다고 돌을 던질 수 있나. 이들은 주어진 것만으로 최선을 다해 인생을 견뎌나가고 있는데. .

.

기시감이 너무 강했는데 이미 읽은 거였다. 다 읽고 북플 입력하다 알았다. 원래 읽은 책 또 읽는 거 좋아하긴 하지만 이건 능동적 재독이 아니라서 억울한 기분. 리스트에서 빼버릴까도 생각했지만 그래도 하루를 꼬박 이 책만 읽었으니 넣기로 했다. 작품이 나쁜 것도 아니고. 



20. 톰 봄바딜의 모험(존 로널드 루엘 톨킨 저, 웨인 G. 해먼드,크리스티나 스컬 엮, 폴린 베인즈 그림, 이미애 역. 아르테. 2025. 352쪽)

: 톨킨 동화 선집 2. 저자가 어쩌면 굳이 얘기하고 싶어하지 않았을 지 모를, <<반지의 제왕>> 첫머리에 나와 프로도 일행을 구해준 톰 봄바딜의 이야기. 이 밖에도 톨킨의 세계관 속 인물들에 관한 시가 총 16편이 실려 있다. 저자가 굳이 논의하고 싶어하지는 않았을지언정 이에 대한 세계관 설계는 매우 상세하고 깊다. 사실 이건 굳이 언급할 필요도 없지만. 난 그냥 시집 읽는 기분으로 읽었다. 가장 좋았던 건 <그림자 신부>와 <바다의 종>. 조금 슬펐다. 뒤의 해설도 재밌었다. 



21. 햄의 농부 가일스(존 로널드 루엘 톨킨 저, 웨인 G. 해먼드, 크리스티나 스컬 엮, 폴린 베인즈 그림, 이미애 역. 아르테. 2025. 248쪽)

:  톨킨 동화 선집 1. 평범하고 조금은 게으른 농부가 재치와 임기응변으로 용과 악당을 물리치는 이야기이다. 톨킨과 가족들이 소풍 중에 소나기를 만나 다리 밑에서 비를 피하고 있을 때 아이들에게 들려준 이야기라고 한다. 동화 선집 5권 중에서 가장 유머러스하다. 배고픈 거인은 먹을 걸 찾아 인간들의 마을까지 내려갔다가 마침 주인 몰래 사책을 나온, 햄이라는 작은 마을에 사는 농부 가일스의 개에게 들키고 가일스는 스스로 가버린 거인을 얼떨결에 쫓아낸 게 되어버린다. 왕은 이 소식을 듣고 가일스에게 집안에 오랫동안 내려오지만 왕 자신은 별로 쓸모없게 생각하는 검을 하사한다. 한편 돌아간 거인은 인간 마을이 의외로 재물을 얻기 쉬운 곳이라고 얘기하고, 이를 들은 욕심많은 용이 인간 마을로 내려가는데, 왕은 기사들에게 용을 무찌를 것을 명하고 햄 마을 사람들은 가일스에게 기대를 건다. 하지만 가일스는 영 내키지 않는데...


얼결에 영웅이 되어버린 평범한 농부의 행동이나 이미 많은 것을 가졌으면서도 끝없이 욕심을 내는 왕, 그리고 오합지졸같은 기사들에 대한 풍자와 비판이 가득하다. 그 모습이 꽤 우스워서 이 책이 처음 발표되었을 때 사람들이 박장대소했다는 게 이해됐다. 해피엔딩이지만, 사람(그리고 용도) 고쳐쓰는 거 아니라는 교훈도 준다. 이 선집을 읽을 때마다 이번 게 제일 재밌었다고 하긴 하지만, 진짜로 이 책이 제일 재밌었다. 



22. 바이칼 여신(이우상. 도화. 2016. 380쪽)

: 도서관에서 대출 권수를 채우려고 빌린 책인데, 괜히 읽었다. 눈 버렸다. 진심으로, 이런 참담한 젠더 의식을 가진 작가의 책이 2000년대에 출간됐다는 걸 믿을 수가 없다. 총 9편의 작품(이라고 하기도 싫다)이 실려 있는데 그래도 다음 건 괜찮겠지, 설마 다음 건 좀 낫겠지 하는 맘으로 끝까지 읽은 게 후회된다. 시간낭비였다. 



23. 예언자의 노래(폴 린치, 허진 역. 은행나무. 2024. 364쪽)

: 늦은 밤, 아일리시가 문 두드리는 소리에 나가보니 낯선 두 남자가 서 있다. 이들은 경찰. 교원노조인 남편을 찾는다. 1당 독재가 시작된 나라에는 비상대권법이라는 계엄이 실행되어 치안국 요원들이 시민들을 감시하고, 이에 반발하여 일어난 시위. 참가를 망설이는 래리에게 교사인 당신이 아니면 누가 무너진 헌법의 권리를 세울 수 있겠냐며 독려했지만 결국 래리는 잡혀간다. 이제 열일곱 살이 된 마크와 열네 살 몰리, 열 살 베일리와 갓난아기 벤 그리고 떨어져 사는 나이 많은 아버지 사이먼까지 아일리시 혼자서 챙겨야만 하는 상황. 이 와중에 물자 부족은 점점 심해지고 아버지는 치매기마저 보인다. 캐나다에 살고 있는 동생이 사이먼과 아일리시네 가족을 빼내려 하지만 래리를 생각하며 거절하는데...


민주주의가 무너지고 사회가 혼란에 빠지며 균열되는 과정이 생생하게 그려진다. 한 줄 한 줄이 다 공포스럽다. 상상할 수도 없이 치솟는 물가와 직장에서도 노골적으로 행해지는 사상 검증, 무너진 시스템 때문에 다쳐도 제대로 된 진료조차 받을 수 없고 아직 성인이 안 된 어린 청소년들까지 징집의 대상이 된다. 그러는 가운데 반란군이 응집하고, 정부군과 반란군이 도시를 양분해서 이 진영에서 저쪽으로 건너가는 것조차 힘들고, 하지만 어떻게든 식량과 생필품을 구해서 아이들을 건사해야 하는 엄마는 늘 목숨을 걸 수 밖에 없고, 그 와중에 사춘기인 아이들은 점점 불만을 표출하고... 내가 아일리시였으면 미쳐 버렸을 듯. 계속 심호흡하며 간신히 버텨가며 읽고 있었는데, 320쪽에서 결국 무너졌다. 게다가 결말도 그다지 장밋빛은 아니다. 그게 현실이겠지. 저자는 시리아 내전에서 영감을 받아 아일랜드를 배경으로 썼다는데, 이런 상황은 언제 어디서라도 일어날 수 있다는 점에서 지리적 배경을 아일랜드로 잡은 건 매우 효과적인 선택이었던 것 같다. 새삼스럽게도 작년 12월 3일이 실패해서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매일 전기와 물이 나오는 현실이 얼마나 소중한지 생각하게 되었다. 



24. 소도둑 성장기(함윤이. 위즈덤하우스. 2025. 112쪽)

: 사미가 태어났을 때 의사가 벌린 주먹 안에는 작은 뼛조각이 있었다. 엄마는 그 뼛조각이 사미가 자신에게서 훔쳐낸 것이라고 주장하며 그걸 옷 서랍 안에 보관한다. 미묘하게 사미를 언니오빠보다 덜 좋아하는 듯한 엄마 밑에서 자라며 사미는 작은 것들을 도둑질하기 시작한다. 자신의 팔 안에 들어올 만한 것들을. 초콜릿을 훔치던 어느날, 갑자기 자신의 도둑질을 적발한 성준과 마주한 사미는 당황하고, 성준은 수시로 사미의 곁에 나타나 도둑질을 방해한다. 그러던 어느날, 성준은 작은 상자를 프로포즈하듯 꺼내는데, 그 안엔 플라스틱 의안이 들어있다.


이야기 자체는 신선하고 재밌었다. 성준을 좋아하는 듯 하면서도 성구의 제안을 덥석 받아들이는 사미의 마음을 알 거 같았고, 그래서 결말이 황당하고 당황스러우면서도 어쩌면 사미에게는 새로운 전환점이 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어쩐지 응원하고만 싶어지는, 안쓰러운 아이 사미였다. 



25. 살인자가 아닌 남자(미카엘 요르트, 한스 로센펠트, 홍이정 역. 가치창조. 2015. 608쪽)

: 살인자가 아닌 남자는 소년의 시신에서 심장 부분을 절개하고, 시신을 동네의 외딴 웅덩이로 가져가 던진다.  소년의 엄마는 실종 신고를 하지만 찾아온 경찰은 단순 가출로 치부하며 두서없는 질문만 던지다 가버리고, 의미없는 2차 가출신고만 한다. 결국 시신이 발견되자 작은 마을은 동요하고, 수도에서 살인사건 특별전담반이 파견된다. 한편 심리학자 세바스찬은 의미없는 원나잇만 하며 세월을 죽이다가 어머니의 유산을 처리하기 위해 이 마을에 오는데, 예전에 함께 일했던 전담반의 토르켈과 마주친다.


군더더기가 많은 범죄 소설. 초반에 인물 소개가 많은 건 시리즈 첫번째 이야기라 그렇다고 수긍할 수 있지만 그외에도 쓰잘데기 없는 에피소드들이 늘어진다. 예를 들면 소년의 시신이 발견되는 과정 같은 거. 그냥 스카우트 아이들을 동원해서 실종자 수색을 하다 발견한 정도면 됐는데 스카우트 소년의 심리 상태를 쓸데없이 길게 써놓아서 서너 문장이면 될 것을 장장 4페이지에 걸쳐 늘어놓았다. 이런 에피들이 계속된다. 등장인물들도 딱히 호감가는 인물도 없다. 범인은 의외의 인물이긴 했지만 동기도 그닥 신박하지 않았고. 이 책이 출근길에 들고 나간 두 권 중 두번째 책이 아니었다면 끝까지 안 읽었을 듯. 



26. 인간보다 인간적인(강지영. 스토리비. 2024. 312쪽)

: 변종 정수경의 능력은 매혹이다. 여느때처럼 자신의 능력을 이용해서 줄을 서지 않고 행사장으로 입장하려던 수경은 특수안경을 낀 '키퍼'에게 발각되어 한바탕 전투를 벌이고 집으로 복귀한다. 정수경은 사실 모든 이종들이 소유주에게서 벗어나 자유를 얻고 변종이 되기를 바란다.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인간과는 다른 능력을 가진, 소유주에게 부귀영화를 가져다 준다는 이종. 이들은 가문대대로 소유권이 세습된다. 이종은 죽지 않고 소유주의 관심이 사라지거나 마음이 상하면 자결하고 재생한다. 이 이종이 소유주를 잃으면 변종이 된다.


(약스포)

처음엔 세계관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저자는 길지 않은 이 이야기 속에서도 꽤 탄탄하게 세계관을 구축했는데, 이 이야기에서는 이종들이 소유주에게 집착하는 게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각인 같은 건가? 그럼 결말이 너무 위태한 거 아닌가? 언제든 그곳이 드러나기만 하면... 그래도 저자가 무엇을 얘기하고 싶어하는 지는 알 것 같다. 꼭 한 공간에서 함께 할 필요는 없다. 조화로운 공존이라는 거, 단지 나와 다름을 인정하고 어떤 생명이든 죽기 위해 혹은 사용되기 위해 태어난 것은 아니라는 걸 인정하기만 한다면 그다지 어렵지 않다는 것. 수경과 교임, 영의 행복을 빈다.



27. 거인의 집(엘리자베스 맥크래큰, 김선형 역. 이안북스. 2004. 405쪽)

: 페기가 제임스를 처음 본 건 제임스가 열두 살, 페기가 스물 다섯 살 때였다. 그때 이미 제임스는 180cm이 넘었다. 학교에서 도서관 견학을 왔을 때 다른 아이들과는 달리 자신이 원하는 분야 - 마술 - 를 정확히 알고 책을 찾아달라 했던 소년. 마치 어른 같았지만 (당연히) 아이의 순수함과 순진함을 지닌 제임스를 페기는 눈여겨 보게 되고, 곧 그의 아버지는 도망갔고 그는 우울한 엄마, 유쾌한 고모부와 고모와 함께 작은 집에 살고 있음을 알게 된다. 그의 집에도 초대받으면서 점점 그와 친해지는 페기. 제임스는 끊임없이 성장하는 자신의 키가 버거워 여러 책을 찾아보려 하지만 쉽지 않고, 그 와중에 술과 약을 먹은 엄마가 추운 날 집밖에 나가는 걸 돌봐주다가 제임스는 뼈가 부러지고 엄마는 사망하는 일이 생긴다.


페기가 제임스를 사랑하게 된 과정이 공감되지는 않았지만, 사랑을 하는 그 마음만은 아름다웠다. 도서관이라는 성 안에 갇힌 공주였던 페기가 제임스라는 암실로 걸어들어갈 수 밖에 없었던 마음(121쪽). 단순히 그가 잘생겼고 키가 커서가 아니라 거인병에 걸려 죽어가고 있고, 그녀를 필요로 하기에 사랑하는 마음(122쪽). 페기는 끝까지 최선을 다했고 가여운 제임스에게는 그 삶이 행복으로 가득하지는 못했을지언정 페기가 있어서 그래도 버틸만 했을 거라 생각하고 싶다. 사실 이 책에는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만 있는 건 아니다. 1950년대여서 더더욱 그랬겠지만, 남들과 다른 모습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건 단순히 불편함을 견뎌야 하는 정도가 아니다. 끊임없는 비정상적인 관심과 나 자신을 사람이 아닌 특출난 무엇으로 대하는 무례, 그리고 몸에 맞는 게 하나도 없어서 감수해야만 하는 아픔. 제임스는 생활비를 벌기 위해 구둣가게에서 모델로 일을 하기도 하지만 정작 자신의 발에 맞는 구두는 신을 수 없어서 - 구두를 맞췄음에도 불구하고 - 발에 심한 염증을 얻는다. 그리고 그토록 보고 싶었던 뉴욕을 보기 위해서는 서커스에서 공연을 해야만 한다. 사랑이 없었다면, 페기가 없었다면 제임스는 더 힘들었겠지. 결말에서의 페기를 이해하기는 쉽지 않았지만, 어쩌면 그게 그녀로서도 최선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아니, 그녀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을지도. 남들과는 다른 모습으로 산다는 것과 그 모습을 사랑한다는 것에 관해 덤덤하게 그려낸, 아름다운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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