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케이크와 맥주(서머싯 몸, 황소연 역. 민음사. 2021. 328쪽)

: 화자는 얼마 전 사망한 문단의 영향력있는 작가 에드워드 드리필드의 미망인에게서 그의 전기를 쓰는데 도움을 달라는 요청을 받는다. 어릴 때 그와 그의 첫번째 부인과 어울렸던 일이 있었기 때문. 화자는 어린 시절 마을의 성직자였던 숙부의 집에서 자라며 마을에서 그리 환영받지 못했던 드리필드와 우연히 만나 자전거 타기를 배웠던 일을 시작으로 그와의 인연을 이야기한다. 


표면적으로는 전혀 조롱으로 보이지 않는다. 물론 술집 종업원 출신이었다는 그의 첫번째 부인 로지에 관한 여러 소문(추문)들 혹은 그런 소문을 부르는 그녀의 태도에 관해 언급하기는 하지만 화자 자신은 그녀의 매력에 처음부터 매료되었으며 그녀의 성정과 상황을 누구보다 이해하는 듯 보인다. 사실 드리필드라는 인물에 대해 당시 문단에서 왜 그렇게 예민하게 반응했는지 조금은 알 것도 같지만 대체적으로는 공감이 가질 않았다. 이 정도면 뭐, 그냥 웃고 넘길 수 있는 수준 아닌가? 드리필드가 그렇게까지 조롱당하는 느낌은 아닌데. 사실 정말 부끄러워야 할 사람들은 블랙스터블 사람들 아닌가? 그야말로 위선의 표본이잖은가. 특히 화자의 숙모의 태도는 실소가 나올 지경. 


아마 저자는 이 소설을 읽고 당대의 문학계가 어떻게 반응할 지 이미 알고 이 소설을 썼을 것이다. 로지와 드리필드에 대한 자신의 진짜 평가보다는 소설에 그려진 피상적인 모습만으로 자기 얘기일까봐 전전긍긍하는 인사들의 모양새가 진짜로 우스웠을 듯. 



2. 아르테미스(앤디 위어, 남명성 역. RHK. 2021. 420쪽)

: 달의 도시 아르테미스에서 짐꾼으로 일하는 재즈. 돈을 모으기 위해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물건을 배달한다, 심지어 불법적인 것도. 종종 거래했던 엄청난 부자 트론이 또다시 어떤 물건 배달을 제안하고, 이를 수락한 재즈는 약속일자를 지키지만 트론은 물론 그의 경호원까지 살해당한 것을 발견한다. 본능적으로 몸을 피한 재즈는 이 물건은 물론 트론이 추진하고 있던 일이 아르테미스 전체의 권력 관계에 얽혀 있음을 알게 된다.


수학천재라는 설정은 그닥 매력적이지 않다. 오히려 재즈의 아버지가 보여주는 부성애와 주변 인물들이 더 매력적이다. 하지만 전반적으로 줄거리가 좀 산만하고, 주인공 및 등장인물들의 행태는 더욱 산만하다. 사실 영화 <<마션>>도 되게 재미없었어서 책은 좀 재밌을까 싶어서 읽은 건데, 앞으로 이 작가는 안녕이다. 



3. 지옥의 설계자(경민선. 북다. 2024. 264쪽)

: 사후에 의식을 업로드해서 다시 삶을 이어가는 게 일반화된 미래 세계. 연쇄살인범 완영순 또한 자신의 사후세계를 미리 결제해 두었다고 한다. 그의 뇌를 통해 그의 의식을 사후세계로 업로드하기 전날, 이송 중 그의 뇌가 도난당하고 젊은 IT 사업가 철승은 완영순의 의식이 자신이 만든 지옥에서 고통당하고 있음을 공개한다. 대중들은 철승의 조치를 열렬히 환영하고, 철승은 강력범죄자들을 대상으로 지옥 서버를 확대한다. 한편 대체현실상에서의 자잘한 의뢰를 해결해 주고 돈을 버는 지석은 어느날 철승의 지옥에 무고한 자신의 엄마가 갇혀 있다는 수경의 의뢰를 받는다.


사실 전에는 사적단죄가 어쩔 수 없는 면도 있다고 생각했다. 누군가에게는 그 방법 밖에 없을 거라고. 특히 이런 거지같은 대한민국의 형법 체계 아래서는 더더욱. 하지만 그 사적단죄를 누군가가 대신하겠다고 한다면? 그 자격을 과연 누가 부여할 수 있으며 그 정당성을 누가 보장할 수 있겠는가? 철승이 처음부터 맘에 안 들었던 이유이다. 뭐, 지석도 딱히 맘에 드는 캐릭터는 아니었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읽는 내내 소설의 설정과 주인공의 고군분투가 너무 피곤했다. 법의 경직성과 대중들의 부화뇌동도. 저자가 뭘 얘기하고 싶은지는 알겠지만, 그리고 저자의 아이디어와 이를 풀어나가는 솜씨가 나쁘지는 않지만 이 작가를 또 읽고 싶지는 않다. 



4. 흰 옷을 입은 여인(크리스티앙 보뱅, 이창실 역. 1984Books. 2023. 160쪽)

: 시적인 문체로 쓴 에밀리 디킨슨 전기. 하지만 있었던 일들을 시간순으로 나열하거나 상세히 설명하지는 않는다 아마도 저자의 상상력이 상당히 가미되었을, 에밀리의 마음 상황에 더 신경쓴, 어쩌면 소설이라고 해도 좋을 그런 이야기이다. 


이전에 에밀리 디킨슨의 편지들을 읽지 않았더라면 조금은 헤맸을지도 모르겠다. 그만큼 이 책은 다른 전기들에 비해 불친절하다, 그래도 행간에서 시인에 대한 저자의 애정이 배어난다. 저자가 에밀리의 마음을 짐작하는 게 굳이 근거를 찾지 않아도 정당하다 느껴질만큼. 문장이 아름다워 시인의 짧고 고요했던 삶이 더욱 빛나는 느낌이다.



5. 재뉴어리의 푸른 문(앨릭스 E. 해로우, 노진선 역. 밝은세상. 2024. 548쪽)

: 재뉴어리의 아빠는 전세계를 돌아다니는 고고학자다. 엄마는 재뉴어리가 아기일 때 사고를 당했다고 한다. 재뉴어리는 뉴잉글랜드 고고학협회장인 로크씨이 저택에서 그의 보호 아래 커나가고, 아빠는 로크씨를 위해 특이한 물건들과 보물들을 수집하여 가끔씩 돌아온다. 일곱 살 어느날, 재뉴어리는 로크씨와 여행을 갔다 혼자서 호텔을 빠져나와 무작정 걷는데, 황량한 들판에서 다 쓰러져가는 낡은 목재로 된 푸른 문을 발견한다. 다른 세상을 상상하며 문지방을 건넜지만 아무 변화도 없다. 하지만 늘 갖고 다니는 가죽 수첩에 '옛날에 용감하고 만뇽을 부리는 소녀가 문을 발견했다. 그것을 마법의 문이라서 대문자로 시작한다. 소녀는 그 문을 열었다'(21쪽)는 글을 쓴 후 다시 문지방을 넘자 공기가 바뀐다. 해수와 돌로 만들어진 세상.


판타지 성장 소설이지만, 재뉴어리가 책 속에서도 말했듯 이건 사랑 얘기이다. 모든 이야기는 결국 사랑 이야기. 해피엔딩이긴 하지만 그걸 얻기 위해 재뉴어리가 너무 큰 고난과 아픔을 겪었기에 읽는 나도 진이 빠졌다. 하지만 단 한순간도 해피엔딩을 의심하지는 않았다.


무엇보다 The Written이 좋았다. 글의 힘을 믿고 글의 힘이 온전히 실현되는 곳. 글 속에서는 무엇도 가능하고 무엇도 괜찮아지는 곳. 그 곳에 갈 수만 있다면, 난 세상의 모든 문을 열어보고 싶다. 



6. 공룡의 이동 경로(김화진. 스위밍꿀. 2023. 228쪽)

: 네 친구의 이야기. 연작이다. 각각 읽어도 무방하긴 하다. 차례로 넷의 시작이자 주희의 이야기, 그리고 솔아, 지원, 현우, 마지막으로 피망이의 이야기다. 자신의 마음을 얘기해주는 차분한 말들. 첫번째 작품은 다른 앤솔러지에서 이미 읽었는데 그때 이 네 명의 이야기가 더 이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근데 아무 정보도 없이 작가의 이름만으로 선택한 이 책의 작품들이 다 그 이야기의 연작들이어서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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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갈수록 자신의 마음을 잘 들여다보는 게 중요하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하지만 내 마음만 살필 수는 없지. 소중히 하고픈 상대의 마음을 거리를 지키면서 살피는 건 중요한만큼 힘들다. 이 네 명이 그렇게 조심스러운 사람들이어서, 그럴 줄 아는 사람들이어서 좋았다. 심지어는 피망이까지도. 그렇게 드러내지 않으면서 다정하고 따뜻해서 위로받았다. 



7. 거의 황홀한 순간(강지영. 나무옆의자. 2025. 288쪽)

: 사귀던 남친과 헤어지고 서울에서 다니던 대학까지 휴학하고 내려온 하임. 엄마는 애매한 비중의 역할을 맡아하는 배우고 아빠는 엄마를 애지중지 수행하는 매니저 역할을 하느라 바쁜 와중에 하임은 연향역 매점을 얼떨결에 떠맡게 된다. 이런 하임의 눈에 들어온 한 남자. 연향역 역무원인 지완은 훤칠한 키에 뽀얀 얼굴로 매일 매점에서 화이트 하임을 사간다. 한편 지완의 엄마가 운영하는 식당에 반신불수인 남편 희태와 고등학생 딸을 데리고 무영이 내려온다. 식당일을 도우면서 식당에 딸린 집에 살기로 한 무영의 팔에서 상처를 발견한 지완은 직감적으로 가정폭력을 알아차린다.


(스포)


하임의 말랑하고 귀여운 가족사, 애정사와는 정반대의 지점에 있는 무영의 이야기가 교차된다. 무영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정말 힘들었다. 사실 첫부분에 지완이 좋은 사람이어서 기꺼운 맘으로 읽기 시작했는데, 무영을 대하는 태도에 짜게 식었다. 난 만인에게 다정한 남자 싫다. 그렇다고 지완이 무영을 외면했어야 했다는 뜻은 절대 아니다. 애매하게 구는 게 싫었는데 198쪽의 그 장면에서 결정적으로 완전히 싫어졌다. 그럴 거면 처음부터 하임에겐 가지 말았어야지. 게다가 모든 이야기를 듣고 난 후의 하임 태도도 공감할 수 없다. 특히 무영의 마지막 때문에. 죽은 연인은 영원히 가슴 속에 자리잡는 법이다. 그걸 받아들이는 하임은 나보다 성숙했나보다.


작가의 말에 전적으로 공감했다. 내가 그동안 폭력에 시달리는, 익숙해져 무기력해진 여성들의 이야기를 읽기 힘들어했던 이유이기도 하고. 



8. 그녀와 그(조르주 상드, 조재룡 역. 휴머니스트. 2022. 348쪽)

: 저자의 자전적 사랑 이야기. 시인 알프레드 드 뮈세와의 연애담을 기초로 했다는데, 남자가 너무 비호감이어서 읽는 내내 진도가 더뎠다. 아무리 연하라도 이렇게 철이 없을 수가 있나. 그럴 가치가 없는 사랑에 헌신하는 여자는 어느 시대에나 있어왔다.


처음엔 사변적인 대화가 지루해서 이 다음에 <<세기아의 고백>>을 읽어야 하나 고민했는데 갈수록 이 전형적인 철딱서니 연하남의 행태가 자꾸만 내 과거의 어떤 인간의 모습과 오버랩되면서 이 연애가 어떤 종말을 맞이할 것인지 궁금해졌다. 그리고 결말은 뜻밖에 합리적이었지. 테레즈의 주체적인 캐릭터만 남은 이야기였다. 



9. 세기아의 고백(알프레드 드 뮈세, 김미성 역. 문학동네. 2016. 404쪽)

: 저자와 조르주 상드와의 사랑을 바탕으로 한 이야기. 귀족 청년 옥타브는 파리에서 연인과 친구에게 배신을 당하고 시골로 내려간다. 거기서 아름답고 헌신적인 여성 브리지트를 만나 사랑에 빠지는데, 과부인 그녀와의 사랑은 그녀의 명예에 치명적인 오점을 입히게 된다. 


답없는 한심한 옥타브의 이야기. 여성을 창녀 아니면 성녀로 극단적으로 이분화해서 받아들이는, 의심증과 허세 가득한 돌아이의 자기 찬양 회고록이다. 글솜씨가 없는 건 아닌데 전반적으로 '불쌍하고 순진한 나'를 바라보는 연민 가득한 시선 때문에 머리가 아플 지경이었다. 



10. 마마 블랑카의 회고록(테레사 데 라 파라, 엄지영 역. 휴머니스트. 2023. 244쪽)

: 화자는 열두 살. 골목 끝 낡고 조용한 집 대문을 살짝 밀고 들어갔다가 이름처럼 하얀 머리카락을 지닌 마마 블랑카와 마주친다. 넉넉한 마음씨로 화자를 불러들인 마마 블랑카는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화자와 친구가 되고, 화자에게 자신의 삶을 쓴 원고를 남긴다. 피에드라 아술 농장에서 여섯 자매들과 함께한 어린 시절. 영어를 가르친다는 명목으로 자매들을 전반적으로 통제하려 들던 잉글랜드 계 가정교사 에벌린과 하녀 알라그라타와의 생활. 그리고 늘 멀고도 가까웠던, 동경의 대상이었던 어머니. 


당시 베네수엘라의 농장 생활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사탕수수 작업이 이루어지던 날 그 달콤한 물로 했던 목욕, 클럽이자 극장이었던 사탕수수 제분소... 물론 늘 천국같지만은 않았다. 늘 아들을 원했고 딸들에겐 관심도 없던 아버지와 딸들의 외모에 집착해서 블랑카의 생머리를 마뜩찮게 여겼던 엄마. 그리고 딸들의 교육을 위해서라는 명분아래 대도시로 이사해버림으로써 끝나버린 농장에서의 삶. 어쩌면 마냥 해맑은 시골 소녀의 회상일 수도 있겠지만 그 이면에는 당시 베네수엘라의 자영 농업이 무너지고 산업화라는 명분아래 대기업에 편입되는 슬픈 현실을 반영하고 있다. 


문장이 아름답고 캐릭터들이 생생해서 즐겁게 읽었다. 결말은 아쉬웠지만, 그건 인생에서 어찌할 수 없는 부분이기도 하지. 그래도 돌아볼 수 있는 추억이 있음으로 인생을 버텨나갈 수 있는 거니까, 그걸로 됐다. 



11. 4월의 유혹(엘리자베스 폰 아르님, 이리나 역. 휴머니스트. 2023. 348쪽)

: 모든 걸 일로만 연결지어 생각하는 변호사 남편을 둔 로티. 시내에 나와 혼자 차를 마시다가 우연히 신문에서 이탈리아의 고성을 4월 한 달 동안 대여해 준다는 광고를 보게 된다. 강하게 끌리지만 비용이 부담스러운 그녀는 같은 광고를 본 로즈에게 말을 걸어 함께 그 성을 빌리기로 하고, 경제적인 부담을 덜기 위해 두 명을 더 모집하기로 한다. 이들이 낸 광고에 응한 사람은 문단의 영향력 있는 작가였던 아버지 밑에서 자라 여러 문호들과 어릴 때부터 어울렸던 추억만으로 여생을 보내고 있는 늙은 피셔 부인과 뛰어난 미모와 높은 신분 덕에 어딜가나 주목의 대상이 되어 피곤한 레이디 캐럴라인. 이들은 이탈리아의 산 살바토레에서 4월을 보낸다.


뒷표지에 이 소설이 엄청나게 유쾌하고 아름다울 거라 해서 기대가 높았는데, 그만큼 실망스러운 부분이 있었다. 기대 없이 읽었다면 나도 유쾌함까지는 아니더라도 편안하게 받아들였을지도. 묘사되는 이탈리아의 풍광은 아름다웠다. 묘사만으로도 내가 마치 4뤌의 신선한 바람을 맞으며 꽃향기 속에서 바다를 내려다 보고 있는 것처럼 느껴질만큼. 하지만 캐릭터들이 상당히 입체적으로 얄미웠다. 특히 피셔 부인. 물론 이 소설이 진행되면서 해맑은 로티에게 감읍되어 변하긴 하지만, 난 로티의 그 대책없는 해맑음도 딱했기에... 결말은 모두의 해피엔딩이지만, 난 로즈와 남편의 이야기가 너무 찜찜했다. 남편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그냥 우연에 의해 얼렁뚱땅... 전반적으로 괜찮았지만 광고 문구처럼 여러 번 읽고 싶지는 않다. 



12. 일러스트레이티드 맨(레이 브래드버리, 장성주 역. 황금가지. 2010. 368쪽)

: 화자는 우연히 시골길에서 마주친 남자와 노숙을 하게 된다. 불빛에 비친 그의 몸은 문신으로 뒤덮여 있다. 화자는 뭔가 찝찝한 남자의 말에 잠을 못 이루고 있다가 남자의 몸에 새겨진 문신이 혼자 움직이는 걸 발견한다. 그리고 그 문신들에 녹아 있는 18편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배경만 미래일 뿐, 당대의 사회 문제를 고스란히 반영하는 단편들이다. 인종 차별, 교리주의적 종교 행태 등. 이 모든 이야기들은 각기 합리적인 결말을 맺지만, 인간과 지구 입장에서는 새드 엔딩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난 대환영이지. 가장 흥미로웠던 이야기는 <화성의 미친 마법사들>. 가장 공감됐던 건 <세상의 마지막 밤>. 가장 재밌었던 건 <여우와 숲>.



13. 소설 11, 책 18(다그 솔스타, 김승욱 역. 문학동네. 2019. 228쪽)

: 비에른 한센은 이제 쉰이 되었다. 이십 여 년 전 사랑에 빠져 아내와 아들을 버리고 함께 떠나온 투리의 집에서도 나와버린 그는 투리와 함께하던 연극 동호회에서도 실패를 맛보고 나온 상태다. 한때 수도의 잘 나가던 공무원이었던 그는 투리와 함께하기 위해 이 작은 도시로 와서 시의 재무관으로 일하고 있지만 일 또한 그를 권태에서 구해주지 못한다. 이런 그에게 어릴 때 버렸던 아들이 이 도시의 대학에 다니게 되었다며 집을 구하기 전까지 같이 살아도 되겠냐는 연락을 해온다. 


초반부터 주인공에게 공감은커녕 일말의 동정심도 들지 않았다. 연인과 함께하기 위해 무책임하게 가족을 버렸으면서 이제 연인이 나이들어 신체적인 매력을 잃었다는 이유로 그녀를 떠나면서 이런저런 이유를 들며 자기합리화를 하다니, 진짜 찌질하다. 일과 취미 생활마저 그를 구할 수 없다는 건 중년의 나이에 접어든 누구에게나 공감할 수 있는 요소겠으나 그걸 타파하기 위해 한 짓이 너무 어이없었다. 이 인간이 이런 방법을 쓸 수 있었던 건 북유럽 복지제도의 부작용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여러 면에서 씁쓸했던, 작가의 필력에도 불구하고 남들에게 권하기 힘든 책이었다. 



14. 그리고 투명한 내 마음(베로니크 오발데, 김남주 역. 뮤진트리. 2011. 279쪽)

: 사랑하는 아내 이리나가 탄 차가 강에서 발견된다. 하지만 아내의 사인은 익사가 아니고, 아내가 탄 차도 처음 보는 차다. 랜슬롯은 자기가 알던 아내가 과연 누구인지 혼란스럽고 아내의 죽음도 이해가 가질 않는다. 그와 아내 이리나는 3년 전 길에서 우연히 만났고, 랜슬롯은 당시 함께 살고 있던 첫번째 아내에게서 단숨에 떠나와 이리나와 함께 살기 시작한다. 그때 이리나는 어떠했나. 그리고 이제와서 찾아온, 죽었다던 이리나의 아버지는 과연 누구인가.


미스터리의 외피를 쓰고 있지만 이건 결국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 그 허망함을 이야기한다. 물론 우리가 타인을 완전히 알 수는 없다. 그녀/그가 보여주는 일면만을 보고 내가 느끼는/믿는 부분만을 받아들이면서 평생 이해하려 노력하다가 끝나는 게 인간 사이의 관계 아닌가. 소설의 결말은 좀 허전할 수 있지만, 그저 이게 삶이겠다. 



15. 카산드라의 여자들(그웬 E. 커비, 송섬별 역. 위즈덤하우스. 2025. 312쪽)

: 21편의 단편들. 미래의 이야기도 있고 카산드라가 살았던 과거의 이야기도 있지만 공통점은 모두 여성의 이야기라는 것. 조금 웃기고 많이 빡치기도 하지만 대체로 통쾌하다. 카산드라 이래로 여자들은 그 발언의 진지함과 중요성을 무시당해 왔다. 그러나 적어도 이 책 안에서는 그런 열받음은 덜하다. 어찌됐든 여성의 목소리는 크게 퍼져나가니까. 가장 맘에 들었던 건 <일상다반사>. 나 진짜 이런 일상 원한다. 



16. N분의 1은 비밀로(금성준. &(앤드). 2021. 216쪽)

: 영치창고 담당자인 교도관 기봉규는 재소자 김대식 노인이 입소할 때 맡긴 트렁크에서 어마어마한 양의 현금을 발견한다. 김대식 노인은 교도소 안에서 죽었고 듣자하니 일가친척은 단 한 명도 없다고 한다. 가방 안의 현금은 모두 9억원. 박봉으로 간신히 생활을 꾸려나가는 기봉규는 동료 허태구와 함께 이 돈을 꿀꺽 하기로 한다. 그리고 이 사실을 아내에게만 털어놓는데, 그걸 처남과 처남의 여자친구가 듣고 만다.


크게 기대를 하고 읽은 건 아니었지만 기대보다 훨씬 별로였다. 설마 싶게 등장인물들이 다 멍청하고 캐릭터가 겹친다. 어떻게 모든 인물들의 색이 다 비슷하지? 심지어는 조폭 두목마저도 그 멍청함은 주인공과 별반 다르지 않다. 게다가 줄거리는 설마 이렇게 흘러가진 않겠지 하고 책 초반에 생각했던 딱 그대로 흘러간다. 결말까지. 그래도 출판사 작가상 수상작이라기에 괜찮을 줄 알았는데 진짜 별로였다. 



17. 힐하우스의 유령(셜리 잭슨, 김시현 역. 엘릭시르. 2014. 392쪽)

: 오랫동안 간병하던 엄마가 돌아가시고 언니네 집 유아방에 얹혀 사는 엘리너. 초자연 현상이 일어나는 힐하우스에 묵으면서 자신의 실험을 도와줄 사람을 찾던 몬터규 박사는 엘리너가 어릴 때 겪었던 일에 주목하여 엘리너에게 참여를 요청하는 편지를 보내고, 엘리너는 언니에게는 말도 안 하고 힐즈데일로 와버린다. 이 실험에는 엘리너 외에도 동거인과 크게 다투고 홧김에 떠나온 시어도라와 현재 힐하우스의 주인의 조카이자 언젠가는 이 저택을 상속받게 될 루크 샌더스도 참여한다. 힐하우스에서의 첫날, 우려와 달리 모두 깊은 잠을 잘 자고 일어난다. 하지만 둘째 날 밤, 있지도 않은 개 짖는 소리에 몬터규 박사와 루크가 주변을 살피러 나간 사이 엘리너와 시어도라는 무시무시한 기운에 잠에서 깨고, 시어도라는 자신의 옷이 모두 찢기고 피가 묻어 있고, 벽에는 온통 피칠갑이 되어 있는 걸 발견한다.


(약스포)

저택에 점점 사로잡히는 엘리너의 심리를 잘 묘사했다. 어쩌면 엘리너는 처음부터 저택에서 나갈 마음이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니, 엘리너는 돌아갈 마음이 없었다. 집 혹은 가족, 그곳이 어디든, 부르는 이가 누구든 엘리너가 돌아가야할 곳은 없으므로. 힐즈데일의 작은 집을 보며 했던 엘리너의 상상의 삶과 엘리너의 머릿속에서 계속해서 울리던 '연인과의 만남으로 끝나는 여행'의 노래는 결국 새드엔딩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 난 이게 차라리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엘리너 스스로의 선택이었으므로. 이제는 저택과 엘리너 모두 만족했을 것이다. 



18. 중력의 노래를 들어라(남세오. 아작. 2021. 420쪽)

: 단편집. 프롤로그가 감성적으로 내 스타일이어서 꽤 기대하고 읽었는데 첫번쨰 작품부터 병맛이어서 힘들었다. 병*같지만 멋있어, 가 아니라 그냥 병*같았다. 작가의 필력이 그랬다는 게 아니라 작품 속 캐릭터들이. 두번째 작품은 다른 의미로 힘들었고. 각 작품에서 작가의 의도는 명확했고 대체로 작가의 우려에 동의하긴 하지만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게 너무나 노골적이라는 점이 오히려 독서의 진도를 느리게 했다. 아마 이 작가의 다음 작품은 선뜻 집어들기 힘들 거 같다. 



19. 나는 당신의 심장으로 살고 싶습니다(어슐러 도일 엮음, 안기순 역, 김지혁 (감수). 라이프맵. 2009. 175쪽)

: 역사적으로 유명한 사람들의 연애 편지 모음. 예전에 미드 <섹스 앤 더 시티>에서 캐리가 읽고 있던 그 책이다. 알려졌다시피, 실제로 이 책이 없어서 어슐러 도일이 엮었다고 함. 목차에서 헨리 8세와 바이런이 포함된 걸 보고 짜게 식었는데 그냥 읽었다. 시작이 헨리 8세여서 더욱 냉소적이 되었는데 문득 이 책의 효용성이 사랑은 필히 변한다는 걸 보여주려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시니컬하게 계속 읽었다. 역시 사랑의 말은 휘발성이 강하지. 사랑만큼 빨리 변하는 건 없다. 


그래도 베토벤의 그 유명한 편지를 읽을 수 있어서 그것만으로도 이 책을 읽은 시간이 아깝지 않았다. 그리고 읽다보니 아내에게 평생의 사랑을 바친 인물들도 더러 있어서 괜찮았다. 하지만 나다니엘 호손처럼 꿈 속에서 자신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고 징징댄다든지 벤자민 디즈데일리처럼 자신의 사랑을 상대방의 경제력을 깎아내리는 걸로 증명하는 건 비호감이었다. 


첨언하자면, 조르주 상드를 조지 샌드라고 번역하고, 기독교는 크라이스트교라고 번역했으면서 카톨릭 대신 가톨릭이라는 단어를 쓰는 등 편집이 무성의한 느낌을 받았다. 



20. 동경(김화진. 문학동네. 2024. 224쪽)

: 인형 리페인팅 수업에서 만난 세 사람. 민아는 리페인팅을 가르치던 강사였는데 곧 사업체를 차린다. 아름과 해든은 수강생이었고 둘이 먼저 친해졌다. 아름은 민아가 회사를 만들고 함께 일하자고 하자 바로 합류하지만 해든은 원래 전공이었던 사진을 계속하고 싶어한다. 아름은 민아와 함께 일한지 2년이 지나자 번아웃이 오고, 해든이 제안한 사진이 궁금해진다.


1부는 세 명의 성격과 각자의 사정을 이야기해 주는데, 현실에 있음직하면서도 또 그들만의 특별함이 있다. 우유부단한 아름과 속얘기를 잘 못 꺼내고 자꾸만 생각과는 다른 말과 행동을 하는 해든, 야무지게 자신의 자리를 찾아가지만 정작 속으로 곪아들어가는 자신을 돌보는데는 서툰 민아. 닮았지만 다른 이 셋의 삶과 생활이 한편으로는 안쓰럽고 또 한편으로는 대견하다. 소설 안에 들어가서 가만히 그들 곁에 앉아 얘기를 들어주고 어깨를 쓰다듬어 주고 싶다. 



21. 강변의 조문객(메리 셸리, 정지현 역. 민음사. 2024. 256쪽)

: 9편의 단편집. 환상적이고 몽환적인 이야기들이다. 한번쯤은 들어봤음직한 전설에 바탕을 둔 이야기도 있다. 이야기들의 결말이 대부분 동화적이고 상당수 우연에 의지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거야 당대에는 사회가 지금보다 좁았으려니 하고 이해하고 읽었다. 가장 맘에 들었던 건 표제작. 



22. 흐르는 강물처럼(셸리 리드, 김보람 역. 다산책방. 2024. 448쪽)

: 1948년 콜로라도 아이올라, 열일곱 살 토리는 마을에 나갔다가 외지인이 분명한 윌과 마주친다. 첫눈에 서로에게 끌린 두 사람. 하지만 만취한 토리의 동생 세스를 부축하다 발목이 삔 토리를 윌이 안고 집으로 오자 토리의 아버지는 경계를 하고, 세스와 이모부는 인종차별적인 욕을 내뱉는다. 다음날 윌을 찾아 여관에 간 토리는 아메리카 원주민인 윌이 쫓겨났음을 알게 되고 그를 찾아 헤매다가 문득 마을에서 미치광이 취급을 받고 있는 노파 루비앨리스의 집에서 그와 재회한다. 집안 사람들이 복숭아 수확으로 바쁜 틈을 타서 윌과 밀회를 즐기지만, 얼마후 윌은 시신으로 발견된다.


그냥 사랑 이야기인 줄 알고 집어들었다. 이렇게 힘들 줄은 정말 몰랐다. 집을 떠나면서 토리는 자신의 이름을 집안 사람들의 애칭이 아닌, 윌이 여왕같다 말했던 빅토리아로 제대로 사용하기로 한다. 윌을 만나면서 새로운 사람이 된 빅토리아가 기특하고 대견했지만 간혹 예전의 '착한' 딸이자 누나, 조카의 모습이 보일 때마다 마음이 아프고 답답했다. 그래도 빅토리아는 점점 성장한다. 특히 자신이 사랑하는 복숭아 나무에 관한 판단과 루비앨리스에 대한 마음은 신산한 그녀의 삶에서 드물게 좋았던 순간이기도 했다. 슬프기도 했지만... 하지만 인생이란, 결핍과 이별을 통해 앞으로 나아가게도 하는 것. 누구보다 강해진 그녀의 모습에서 많은 위로를 받았다. 작가의 다음 작품에서 또다른 모습의 빅토리아를 다시 만나고 싶다. 



23. 부적격자의 차트(연여름. 현대문학. 2024. 176쪽)

: 물을 통해 전염되는 치명적 바이러스로 멸망해 버린 세상. 살아 남은 사람들은 우연히 개입한 인공지능 '모세'의 제안에 따라 오염되지 않은 곳에 돔을 둘러 '중재도시'를 세우고 일정 연령이 되면 '소거' 즉 안락사를 해 다음 세대에게 자리를 물려주는 시스템을 도입한다. 다음 세대는 전 세대의 업무와 이름을 물려받으며 생애 한도까지 '실무자'로서 살게 되고 효율적인 생존을 위해 실무자들은 아침마다 균형제를 먹고 귀에는 늘 모세와의 소통을 위한 장치를 끼우고 있다. 실무자 세인은 소거 대상자들의 마지막 차트를 기록하는 업무를 맡고 있다. 얼마전 대규모의 오류로 인해 많은 실무자들이 생애 한도가 남았음에도 스스로 소거를 해 한동안은 업무가 비어 다른 병동의 오류 환자들을 맡게 된다. 그곳에서, 이 중재도시에서는 거의 없는 '꿈을 꾸는' 증상을 보고한 레드를 만난다.


치명적 바이러스, 돔으로 둘러싸인 도시, 감정을 제한하는 약물... 기시감이 강하게 드는 세계관이다. 하지만 이 책의 핵심은 '소거'에 있다. 그저 인류 전체를 위해, 다음 세대 양성을 위해 존재하다 일정 연령이 되면 사라져 주는, 사는 동안 감정을 느낄 일도, 자신만의 즐거움을 누릴 일도 없이 현상을 유지하기 위한 작업만을 해야 하고 조금의 감정 노출이나 꿈을 꾸는 일이 생기면 '오류' 취급을 받는 생존이, 오류가 쌓이면 생애 한도가 되지 않았음에도 소거되는 삶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이들의 생존이 정말 생존일까? 인간답지 않은, 당장 안드로이드로 대체되어도 아무런 티가 나지도 않을 실무자를 과연 인간이라고 할 수 있을까? 


한때는 <<멋진 신세계>>나 영화 <이퀄리브리엄>의, 그리고 지금 이 작품의 약물을 간절히 원하기도 했었다. 호르몬에 휘둘려 널을 뛰는 마음을 겪어본 사람은 공감해 줄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건 전적으로 자신의 선택에 의해야 한다. 오래전의 합의에 의해서라는, 인류의 생존을 위해서라는 명분 아래 통제되는 삶이 전체주의 하의 삶과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선택하고 꿈꾸고 느낄 수 있는 것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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