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빛과 멜로디(조해진. 문학동네. 2024. 260쪽)

: 승준은 내리는 눈을 바라보며 권은을 떠올린다. 분쟁지역 전문 사진작가인 권은은 사진을 정식으로 배운 적은 없지만 그녀만의 독특하고 따뜻한 시각으로 유명한 작가이다. 승준은 예전에 인터뷰를 위해 만났던 권은과 늦게야 깨달았지만 오래전의 인연을 생각한다.


한 아이의 주저하며 내민 손길이 빛을 발견할 줄 아는 아이에게 그 빛을 잡을 수 있는 도구를 주고, 그 빛으로 또다른 빛을 밝히는 이야기. 내가 이래서 이 작가를 사랑한다. 아픈 이야기도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어서. 이렇게 작은 빛이라도 이 작가가 찾아서 크게 비춰주어서. 


단편 「빛의 호위」는 기억나지가 않았다. 하지만 이 작품만으로도 충분했듯 「빛의 호위」도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했으리라. 이 작가의 다음 작품이 기다려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2. 너의 겨울, 우리의 여름(세라 윈먼, 민은영 역. 문학동네. 2021. 240쪽)

: 좋아하는 작가의 작품이라서 아껴두었다가 새해가 되어 읽었다. 1996년, 자동차 공장에서 일하는 마흔 다섯 엘리스는 아내 애니가 죽은 후 혼자 살아가고 있다. 누구와도 어울리지 않으며 매일 똑같은 일상을 꾸려가지만 자전거 사고로 팔을 다친 후 옆집 청년의 호의를 받자 문득 어린 시절 절친 마이클이 떠오른다. 엄마가 떠나고 아버지마저 잃은 뒤 메이블의 집으로 오게 된 마이클. 상냥한 가게 주인 메이블은 마이클에게 친구를 만들어주기 위해 동갑인 엘리스를 부른다.


기존의 작품들과는 아주 조금 결이 다른 듯도 했지만, 내가 원하는 이 작가만의 섬세한 시각과 부드러운 시선은 충분했다. 엘리스와 마이클, 엘리스와 애니, 마이클과 엘리스. 엘리스가 보는 자신의 삶과 마이클이 바라보는 엘리스, 그리고 엘리스를 떠날 수 밖에 없었던 마이클. 


모든 사랑은 보편성과 특수성을 지닌다. 모든 사랑의 모습은 비슷하지만 또한 모든 사랑은 다르다. 엘리스의 마이클에 대한 사랑은 마이클의 엘리스에 대한 사랑과 다르다. 비록 같은 추억을 공유하지만. 엘리스는 마이클을 잃었고 애니도 잃었지만, 그 사랑은 아직도 남아 엘리스를 지탱해 준다. 그리고 지금의 나도.



3. 오늘도 세계 평화를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황유미. 언유주얼. 2019. 208쪽)

: 신박한 설정의 참신한 단편 6편. 표제작이 가장 재밌었다. 대부분이 판타지이긴 했지만 왠지 '요즘 애들'은 다 그렇게 살 거 같은, 밀레니얼 세대의 고군분투기. 물론 그렇다고 내가 사회 초년생일 때와 완전 다르지는 않지만. 표제작과 뒤의 두 편은 연작이어서 그것도 재밌었다. 이 작가의 이름을 기억해 두어야 겠다.



4. 그 여름으로 데려다줘(줄리안 맥클린, 한지희 역. 해피북스투유. 2024. 472쪽)

: 사지마비 장애인 아버지를 돌보는 피오나. 간병인이 있지만 경제적인 몫은 온전히 피오나의 것이다. 어느날 이른 아침, 피오나는 이탈리아의 한 변호사에게서 전화를 받는다. 피오나의 생부가 얼마전 사망했고, 유산 상속이 진행될 예정이니 토스카나로 오라는 것. 몇 년 전 엄마가 돌아가시면서 피오나에게 생부가 따로 있다는 것, 그리고 그가 이탈리아에 산다는 것을 말해 주었기에 생부의 존재는 알고 있었다. 엄마는 더불어, 키워준 아빠를 끝까지 돌보라는 유언도 남겼다. 피오나는 아버지에게는 출장을 간다고 거짓말을 하고 토스카나의 와이너리로 가는데, 그곳에서 이복 남매들과 마주치고 그들의 적대적인 태도에 당황한다. 특히 이복오빠는 피오나의 엄마가 자신의 아버지를 협박했을 거라는데...


가벼운 마음으로 집어들었는데, 여러가지 생각을 하게 했다. 불륜이 이렇게 미화되도 되는 걸까? 불륜으로 생긴 아이일지언정, '사랑'으로 잉태되면 그건 괜찮은 걸까? 자신이 사랑하는 아버지의 친자식이 아니라는 사실보다 한순간의 욕정에 의한 원나잇으로 잉태된 게 더 속상하단 말인가? 내가 결혼이라는 제도를 과하게 신성시하는 게 아니라, 어쨌든 약속과 신뢰를 져버리려면 최소한 도의적인 순서는 지켜야 하는 거 아닌가 싶다. 물론 이 책은 나름의 당위성을 지닌 로맨틱한 30년 전의 사랑 이야기와 훈훈한 엔딩으로 마무리되지만, 어쨌든 불륜은 불륜이다. 



5. 집앓이(제니퍼 크로프트, 이예원 역. 밤의책. 2022. 308쪽)

: 에이미와 조이는 세 살 터울 자매다. 둘은 많은 일들을 함께 한다. 어느날 조이가 발작을 일으키고, 병원에 한참 있다가 나온 조이를 위해 엄마는 둘을 홈스쿨링 하기로 한다. 에이미와 조이는 둘 다 러시아어 과외 선생 사샤를 좋아하고, 이에미는 사샤에 대한 마음을 원동력으로 러시아어를 열심히 공부하면서 뛰어난 능력을 보이게 된다. 이를 바탕으로 SAT를 치고 대학에 조기 입학하는 에이미. 이제 에이미와 조이는 무엇도 함께 하지 않는다.


간결한 문체로 삶을 이야기한다. 사진과 사진 설명 또한 많은 이야기를 해준다. 에이미가 집착하는 단어들. 사랑하지만 함께할 수는 없는, 머물 수 없는 집. 삶은 매 순간순간이 세계와의 소통이며 다른 언어의 번역이다. 누군가에겐 수월하지만 누군가는 그 의미와 적확한 단어를 찾아 끝없이 여행할 수 밖에 없다. 부디 에이미의 여행이 이제는 마무리되었기를.



6. 마트에 가면 마트에 가면(김종연. 자음과모음. 2023. 292쪽)

: 큰 지진 후 '나'는 가족들과 헤어져 마트에 마련된 임시 거주지로 왔다. 아파트에 살던 가족들은 그토록 무시했던 죽은 삼촌의 집으로 간다 했다. 나는 차라리 지겨운 가족들과 헤어져 이곳에 머무는 게 편하다. 마트의 이재민들은 나름의 질서를 지키며 살아가고 있다. 임대주택에 들어갈 희망을 가지고. 어느날 마트 구석에서 갓난아이가 발견되고, 젊은 여성인 재희가 아기를 돌보기로 한다. 


아포칼립스 소설까지는 아니지만 내가 워낙 재난 소설에 시큰둥했던 터라 큰 기대없이 읽었는데 순간순간 울컥했다. 재희와 성결, 덕규 아저씨의 느슨한 듯 단단한 유대 관계가 그러했고, 재희와 겨울이 이야기가 또 노부부의 이야기가 그러했다. 너무나 현실적인 결말은 아쉬웠지만, 좋은 독서였다.



7. 나뭇잎 사이의 별빛(글렌디 밴더라, 노진선 역. 밝은세상. 2024. 664쪽)

: 엘리스는 쌍둥이 아들들과 두 달 된 딸을 데리고 남편 사무실 근처에 갔다가 남편이 차 안에서 테니스 강사와 키스하는 걸 목격한다.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잘 가던 숲으로 간 엘리스는 쌍둥이 아들들의 부산스러움에 정신이 없어 딸이 앉아있던 카시트를 주차장에 두고 차를 출발시킨다. 바로 돌아갔지만 주차장엔 카시트가 없다. 이 일로 자신을 놓아버린 엘리스는 남편과 아이들을 떠난다.


엘리스의 치유기라고 생각했는데, 기대보다 긴 시간 동안의 이야기였다. 엘리스의 이야기와 레이븐의 이야기가 교차되는데 결국 만난 모든 이들의 진정한 치유가 이루어지기까지의 이야기. 엘리스의 전남편이 너무 맘에 안 들어서 결말의 이들의 화해조차도 못마땅했지만 그래도 희망은 세대를 넘어서며 계속된다. 그래야만 하니까. 어쩌면 동화같은, 현실에서는 없을 해피엔딩일지언정 아름다운 결말이 좋았다.



8. 붐뱁, 잉글리시, 트랩(김준녕. 네오픽션. 2024. 332쪽)

: 평생 영어를 공부했지만 제대로 된 문장 하나 말할 수 없는 화자. 부모님의 극에 달한 강요로 성인 영어 캠프에 들어간다. 그곳에서 서양인 외모를 가졌지만 영어는 한마디도 못해 오히려 차별받은 보타, LA에 버려졌지만 노숙자에 의해 길러져 영어를 전혀 모르는 한인 갱스터 준과 친해진다.


책 뒤의 해설에서도 얘기했듯 영어 교육에 목매는 한국 사회의 언어 사대주의를 비판하는 단순 블랙 코미디가 아니다. 어설픈 권위주의와 많은 사람들이 잊고 있는 분단 국가라는 현실과 이 와중에도 지 살길 찾겠다고 우습지도 않게 태도를 바꾸는 배신자. 이 모든 상황을 어떻게 정리해 가는 지 지켜보는 게 꽤 흥미진진하다. 이 소동극을 읽은 뒤 많은 것이 남았다고 말하긴 힘들지만 나쁘지 않은 독서였다. 



9. 록우드 심령회사 1 - 울부짖는 계단(조나단 스트라우드, 강아름 역. 달다. 2024. 416쪽)

: 50여년 전부터 영국에는 '난제'기 도래한다. 죽은 자들이 돌아오는 것. 이 유령들을 볼 수 있는 건 아이들 뿐이다. 어른들은 느끼기만 할 뿐. 그래서 런던에는 여러 대행사들이 있는데, 그중 록우드 심령회사는 성인 감독관 없이 십 대 소년 두 명 만이 속해있다. 고향 마을에서 조사관으로 일하다 동료들을 잃고 실의에 빠졌던 루시는 런던으로 올라와 록우드 심령회사에 합류한다. 대형 회사들에서 모두 퇴짜맞은 루시는 사실 청각 쪽으로 뛰어난 능력을 갖고 있고, 육감 또한 예사롭지 않다.


시작부터 루시가 너무 가여웠다. 하지만 이제 이야기의 시작이니까. 시각 능력이 뛰어나고 매력적인 미소를 가진 사장 록우드, 흔히 이런 시리즈물에 한 명쯤은 있는 연구에 미친 과학자 스타일의 조지, 그리고 앞으로가 기대되는 루시. 이들이 가장 유명하고도 가장 위험한 유령의 집 케리 홀의 울부짖는 계단의 유령을 퇴치하는데, 붉은 방의 묘사가 사실적이어서 숨 죽이고 읽었다. 원래 공포 영화는 잘 못 보지만 오컬트 소설은 좋아해서 앞으로의 이 시리즈가 기대된다.



10. 행간을 걷다(김솔. 현대문학. 2024. 220쪽)

: '나'는 뇌졸중으로 쓰러진 후 마비가 된 오른쪽의 자아를 '너'라 부른다. 40년이 넘도록 금고 제작자로 일한 나를 배려한 사장 덕분에 나는 운동을 위해 천변을 걸어서 출퇴근한다. 어린 아내는 내 전화에 잘 응답하지 않는다. 나는 어릴 때 마을에 살던 카롤린과 그 사건의 주동자였던 쉥거를 기억한다. 내가 갖고 있는 금고에는 나의 유서가 들어 있고, 어린 아내는 어떤 경우라도 그녀가 원하는 것을 갖지 못할 것이다.


읽기에 쉽지는 않았다. 천변의 개발에 관해 이야기하다 카롤린의 슬픔을 이야기하고 다시 쉥거 혹은 나 자신의 악을 이야기한다. 하지만 난 무슨 일이 있어도, 아무리 늦어도 그와 함께 걷고 싶었다. 이 이야기의 끝에서 어린 아내가 무엇을 어떤 방식으로 갖게 되는지, 화자는 어떻게 자신을 구원 혹은 파괴하는지를 확인하고 싶었다. 하지만 책장을 덮은 뒤엔, 그 무엇도 중요하지 않았다. 그냥 난 이 작가를 계속 읽을 것이다.



11. 록우드 심령회사 2 - 속삭이는 해골(조나단 스트라우드, 강아름 역. 달다. 2024. 476쪽)

: 런던 근교의 공동묘지. 난제의 시대에 잠재적인 위험을 제거하고자 당국에서는 묘지를 정비하기로 하는데, 한쪽 구석에서 그동안 미상으로 남았던 학자의 무덤이 발견된다. 그리고 그 안에서 수상한 거울이 나온다.


이제 루시는 록우드 심령회사에 완전히 적응한 것처럼 보인다. 이번 이야기에서는 학구열이 높은 조지의 성향이 이들을 위험으로 몰아간다. 물론 가장 위험했던 건 조지 자신. 유령의 의도가 잘 공감되지 않아서 이마를 찌뿌리고 읽었다. 하지만 이 시리즈에서 내게 중요한 건 루시의 마음. 조금씩 성장해가는 루시를 보는 게 즐거웠다. 거기에 더해서, 이 시리즈는 앞의 이야기를 몰라도 중간부터 읽어도 편하게 읽을 수 있게 서술되어 있는 것도 좋았다.



12. 록우드 심령회사 3 -  텅 빈 소년(조나단 스트라우드, 강아름 역. 달다. 2024. 420쪽)

: 런던 첼시 지역에 갑자기 대규모의 유령들이 출현한다. 대형 대행사들 뿐 아니라 록우드처럼 영세한 대행사들도 정신없이 일하고 있지만 출처를 찾아 봉인하는데 역부족이다. 이 와중에 시민들의 불안을 잠재우기 위해 대규모 행진이 기획되고, 가장 대형 대행사 대표들과 루시 일행이 탄 마차가 습격당한다.


대형 대행사 대표이자 난제의 극복 방법 - 철과 소금, 출처 봉인 - 을 처음 알아낸 마리사의 손녀 페넬로페 피츠의 수상함이 처음으로 수면 위로 떠오르고, 1권 말미부터 루시와만 소통 가능하던 해골의 활약이 본격적으로 전개된다. 거기에 더해 새로운 팀원이자 루시와는 다르게 외모도 주변 정리도 깔끔한 홀리 먼로의 합류로 록우드와 루시의 관계는 미묘하게 변한다. 게다가 결말의 그 텅 빈 소년은...이들에게 위기가 한 번은 닥칠 거라 생각했지만 이런 식일 줄은 몰랐다. 다음 이야기가 정말 기대된다.



13. 록우드 심령회사 4 - 어정거리는 그림자(조나단 스트라우드, 강아름 역. 달다. 2024. 480쪽)

: 이제 루시는 혼자 일한다. 작은 방을 얻어 구석에 장비를 쌓아놓고 프리랜서로 대형 대행사의 조사관들과 일하는데, 실력 없고 무지한 이들과 어찌어찌 유령을 몰아내고 나면 피로만 쌓일 뿐이다. 루시의 초라한 자취방에 어느날 록우드가 찾아와 자기네 회사의 의뢰에 루시를 고용하고 싶다고 한다. 페넬로페 피츠의 의뢰와 권유 - 루시와 함께 하라는 - 를 받았다고. 록우드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는 데서 루시는 실망하지만 사건의 흥미로움에 끌려 합류한다.


이제 대형 대행사들의 악행의 윤곽이 드러난다. 사실 처음부터 어느정도는 짐작 가능했지만. 다음 이야기에서 어떻게 마무리할 지 기대된다. 그리고, 이 시리즈 내내 난 루시가 안타까웠지만 이번 이야기에서 절정을 이뤘다. 5권에서 해소되지 않는다면 난 기억하는 한 록우드를 미워할 것 같다.



14. 록우드 심령회사 5 - 빈 무덤(조나단 스트라우드, 강아름 역. 달다. 2024. 472쪽)

: 록우드 심령회사에서는 대형 대행사들의 비밀을 파헤치기 위해 마리사 피츠의 무덤에 들어가기로 결정한다. 자신의 무덤에 관해 생전에 철저히 계획했던 이유가 무엇이었을지, 속삭이는 해골의 말처럼 정말 그녀가 죽지 않았을지 확인하기 위해. 


아무래도 난 좀 현실적이어서, 대형 대행사들의 비밀이 밝혀지고 난제가 해결되면 경제적으로 엄청 붕괴되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며 읽었는데, 난제라는 게 그렇게 한순간에 해소되지는 않는다. 그간의 여러 위기와 모험들 중 이번 이야기가 가장 위험하고 흥미진진했다. 아무래도 살아 있는 사람을 상대하는 게 더 그렇지. 그렇다고 그간의 모험들이 쉬웠다는 얘긴 절대 아니고. 어쨌든 해피엔딩이어서 맘에 들었다. 특히 루시와 록우드.



15. 위대한 그의 빛(심윤경. 문학동네. 2024. 268쪽)

: 40대인 화자 규아는 성수동 토박이지만 개발의 혜택을 받기는커녕 부모님이 개발 때문에 홧병으로 돌아가시기까지 했다. 서울대 경영학과를 졸업했고 뉴욕에서 예술학교를 다녔지만 결국은 성수동에 돌아와서 와인바를 하고 있다. 강 건너 보이는 아파트의 한 집에서는 유독 녹색의 불빛이 반짝인다. 동갑인 사촌 연지의 집 - 강남 올드 머니의 상징인 오래된 아파트 - 에 초대받아서 간 날, 규아는 그 녹색 불빛의 실체를 본다. 한편 전세계적으로 획기적인 발견을 한 바이오 업체의 대표 제이 강이 규아의 와인바에서 모임을 갖고 싶다는 연락이 온다.


역시 심윤경. 한 번도 날 실망시킨 적이 없다. 난 그의 책을 읽으면 늘 내가 원했던 이야기를 찾은 기분이다. 이 이야기 또한 우리에게 익숙한 개츠비의 변주이지만, 이 작가만의 필력과 날카로운 시선이 더해져 21세기 대한민국에서만 할 수 있는 유니크한 이야기가 된다. 자본주의의 천박함을, 사회저변에 당연한듯 깔려 있는 은근한 여성 혐오의 시선을, 인간의 약함과 가벼움을 이렇게 은은하게 그러면서도 맛깔나게 서술하는 작가가 또 있을까. 별 다섯 개로는 모자란다.



16. 사라진 서점(이비 우즈, 이영아 역. 인플루엔셜. 2024. 492쪽)

: 폭력 남편에게서 도망쳐 더블린에 도착한 마서. 갈곳 없는 그녀는 붉은 벽돌 저택의 보든 부인을 위해 입주 가정부로 일하게 된다. 첫날 자신의 지하방 바깥에서 서성거리는 수상한 남자 헨리와 마주친 마서. 희귀본 연구자인 헨리는 이 자리에 있던 서점을 찾는다고 한다.


1921년 폭력적인 강제 결혼을 피해 도망쳐 자신의 삶을 일궜던 오펄린의 이야기와 현재의 마서 이야기가 교차된다. 거기에 에밀리 브론테의 숨겨진 두 번째 소설 원고 이야기가 더해지는데, 사실 숨겨진 원고 이야기는 없어도 될 것 같다. 헨리 캐릭터가 너무 별로여서 마서에게 공감하지 못하고 읽었다. 폭력에서 도망쳐 나온 것도, 자신을 찾은 것도 기특하지만 행복을 남자 품에서 찾는 건 좀... 그래도 보든 부인의 해결 방법은 맘에 쏙 들었다. 기대만큼 신비로운 이야기가 아니어서 좀 아쉬웟다.



17. 어떤 비밀(최진영. 난다. 2024. 384쪽)

: 24절기에 맞춰 쓴 서간체 에세이. 에세이도 편지글도 그닥 좋아하지 않지만 이 책은 모든 페이지의 귀퉁이를 접고 싶을 만큼 좋았다. 내가 왜 이 저자를 계속 읽을 수 밖에 없는지, 이 작가의 소설 속 아픔들에도 불구하고 왜 그의 책을 놓을 수 없는지 알 수 있었다. 작가를 더 사랑하게 되었다.



18. 완벽한 케이크의 맛(김혜진. 마음산책. 2023. 188쪽)

: 짧은 소설집. 하고 싶은 말들을 꿀꺽 삼키며 하루하루를 견뎌내는 사람들의 이야기. 소통은 요원하지만 피상적일지언정 관계가 나빠지지 않는 것에 만족하며 하루하루를 보내는 게 맞는 걸까. 주위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상황들과 이야기들이지만 그 안에서 날카롭게 빛나는 작가만의 시선이 눈을 뗼 수 없게 한다. 전작에 비해 조금은 순해졌나 싶었지만 그것도 아니어서, 그래서 좋았다.



19. 아래층에 부커상 수상자가 산다(케이트 가비노, 이은선 역. 윌북. 2024. 280쪽)

: 출판계에서 일하는 사회 초년생들 이야기. 그래픽 노블인 줄 모르고 제목만 보고 덥석 집어왔는데 살짝 당황했다. 내가 그래픽 노블을 피하는 이유가 이 책에도 있었기 때문. 주인공들이 다 유색인종 여성인데 이목구비가 다 똑같아. 헤어 스타일과 패션으로 구분할 수 밖에 없었는데 이러느니 그냥 텍스트만으로 된 거 읽는 게 낫다고. 암튼 대학 동창인 세 명의 유색인종 여성들이 출판계에서 사회 생활을 시작하며 겪는 여러 에피소드들과 우연히 알게 된 과거 부커상 수상자이자 현재는 잊혀진 작가인 베로니카 보의 작품 재출간을 위해 애쓰는 이야기이다. 


등장인물들의 심리 묘사가 섬세하고 에피소드들도 다 재밌지만 왠지 이야기가 뚝뚝 끊기는 느낌이었는데 이게 그래픽 노블이어서인지 아님 이 작품만의 단점인지는 모르겠다. 그래도 뉴욕 출판계의 분위기를 살필 수도 있었고, 이야기 자체도 좋아서 재밌게 읽었다.



20. 천지신명은 여자의 말을 듣지 않지(김이삭. 래빗홀. 2024. 304쪽)

: 호러 소설집. 사실 그렇게 무섭지는 않다. 첫번째 작품 「성주단지」가 정말 맘에 들어서 편안한 기분으로 읽어 나갔고 모든 작품들이 다 흡족했다. 겉보기에는 이런 사회에서 여성이 자신을 지키기 위해 초자연적인 존재의 힘을 빌려야만 하는 게 현실인 듯 하지만 얼핏 가벼워 보이는 이야기들 한 겹을 들춰보면 이것 또한 여성의 선택에 의한 것이며, 그 이면에는 여성들의 연대가 있다. 작품들 다 좋았지만 역시 「성주단지」가 가장 좋았다.



21. 숨겨진 건 죽음(앤서니 호로위츠, 이은선 역. 열린책들. 2024. 392쪽)

: 자신의 작품을 드라마로 찍는 현장을 지원하느라 정신없는 화자. 갑자기 전에 한번 호흡을 맞춘 적 있는 전직 형사 호손이 찾아와 자신에게 사건 의뢰가 들어왔다며 이번에도 함께 다니면서 사건을 살펴보고 사건 해결하는 걸 작품으로 쓰라 한다. 호손과의 관계를 이어나가는 건 내키지 않지만 사건이 흥미로워서 다시 뛰어든 화자. 이번 사건은 뛰어난 이혼 전문 변호사 프라이스가 와인병에 맞아서 사망한 살인 사건. 벽에는 초록색 페인트로 182라는 숫자가 적혀 있다. 경찰은 얼마전 이혼 소송에서 패한 유명 작가 안노 아키라를 용의자로 지목하는데, 그녀가 며칠 전 식당에서 피해자를 와인병으로 때리겠다고 위협한 것. 하지만 피해자의 주변에는 용의자가 될 만 한 여러 인물들이 있다.


호손이야 전작에서부터 비호감이어서 각오하고 읽기 시작했지만 이 작품에선 호감인 인물이 한 명도 없다. 심지어는 잠깐 등장하는 단역들까지도. 게다가 화자의 호구짓은 더 심해졌다. 역시나 전작처럼 인물보다 사건이 궁금해서 계속 읽었는데 이 시리즈의 다음 작품은 읽어야 할 지 심히 고민된다. 근데 작가가 떡밥을 던져놨어. 역시 잘 쓰는 작가야. 그치만 여기 나오는 인간들 다 싫어! 어떡하지?



22. 기술자들(김려령. 창비. 2024. 256쪽)

: 너무나 흔하게 볼 수 있겠지만 하나하나 그들만의 사정이 눈에 밟히는 사람들의 이야기. 솔직히 말하면 첫번째 작품인 표제작 외에는 다 속터지는 이야기들이어서 읽기 힘들었다. 그만큼 핍진성이 강하다는 말이기는 한데, 난 이 책 직전에도 속터지는 인간이 화자인 거 읽었단 말이다. 그래도, 이게 인생이고 현실이겠지. 어쨌든 그러한 이유로 가장 좋았던 건 표제작. 



23. 가난한 처녀들(뮤리얼 스파크, 김재욱 역. 앨피. 2024. 308쪽)

: 1945년 런던. 여성 전용인 '5월의 테크 클럽'에 거주하는 여러 여성들의 이야기이다. 타고난 매력으로 뭇 남성들의 눈길을 사로잡던 설리나. 발음 발성 개인교습을 하던 조안나. 출판사에서 일하며 니콜라스를 클럽에 처음 데려온 제인. 


표면적으로는 무정부주의를 내세웠지만 자가당착적인 인물인 니콜라스의 죽음을 계기로 5월의 테크 클럽에서의 지난 시간을 회샹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단순히 전쟁 직후 독신 여성들의 생활상이나 당시의 사회 분위기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섬세함과 작가만의 비판적인 시선이 보인다. 모두가 가난했던 시절,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을 살 만한 것으로 만들려는 젊은 여성들의 발랄함과 그 와중에도 놓치지 않았던 생의 의미들. 



24. 살인 재능(피터 스완슨, 신솔잎 역. 푸른숲. 2024. 344쪽)

: 마사와 앨런은 데이팅 앱에서 만났다. 앨런이 청혼했을 때 마사는 그러지 않아야 할 이유를 찾지 못해서 그와 결혼했다. 이제는 거의 사라진 외판원이라는 직업을 가진 앨런은 교육 학회가 열리는 곳마다 가서 물건을 파는데, 어느날 마사는 남편이 출장에서 돌아와 집 현관문을 열기 직전에 표정을 억지로 가다듬는 걸 2층 창문에서 목격하고 만다. 억지로 미소를 끌어올리기 직전 남편의 표정은 이제껏 본 적 없는 무서운 얼굴. 마사는 이상한 직감으로 그동안 남편이 다녔던 출장지에서의 미해결 범죄 사건들을 검색해 본다.


릴리 킨트너와 헨리 킴볼 시리즈이다. 이번 이야기에선 릴리가 주인공. 헨리도 잠깐 등장한다. 릴리는 대학때 절친이었던 마사의 부탁을 받고 그녀의 남편을 조사하기 시작한다. 이야기는 뜻밖의 방향으로 전개된다. 1부 마지막에서 너무 놀라서 잠시 책을 덮고 숨을 골랐다. 아니 이게 뭐야. 이런 건 정말 바라지 않았다고. 그래도 결말은 정말 맘에 들었다. 내가 이 작가를 집어들기 전에 망설이는 이유는 전작들에서 상당히 높은 비율로 열린 결말을 보여줬기 때문인데, 여기서는 아니었다. 그래서 이제껏 읽었던 이 작가의 작품들 중 가장 맘에 들었다. 



25. 여름을 열어보니 이야기가 웅크리고 있었지(김화진,이희주,박솔뫼,정기현. 스위밍꿀. 2024. 256쪽)

: 여름을 소재 혹은 배경으로 하는 앤솔러지. 사실 소재만 공통적이고 주제는 각각이어서 앤솔러지 느낌은 나지 않았다. 여름이라는 걸 전면에 내세웠다고 보기도 힘들고. 하지만 좋아하는 작가들이어서 편안한 마음으로 읽었다. 뒤에 작가들의 에세이가 실려 있는데, 이 에세이까지 읽어야 비로소 완성되는 느낌.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이희주였지만 마치 여름밤처럼 끈적해서 가장 좋았다고 말하기는 힘들다. 



26. 푸른 들판을 걷다(클레어 키건, 허진 역. 다산책방. 2024. 252쪽)

: 그냥 핫하다는 것만 알고 아무 정보 없이 도서관에 있길래 얼른 대출해 온 책. 단편집인 것도 몰랐다. 첫번째 작품이 너무 마음아프고 또 한심해서 기대 내려놓고 읽었는데 표제작은 좋았다. 작가의 섬세함과 건조하지만 따뜻한 문체는 좋았지만 이야기들은 기시감이 좀 있었다. 여성의 관점이 반영된 윌리엄 트레버 & 덜 세련된 앨리스 먼로 느낌. 



27. 서브플롯(황모과. 은행나무. 2023. 240쪽)

: 여행에서 돌아온 나현. 얹혀 사는 언니네 집에서 들어오자 마주친 부쩍 성숙해진 조카에게 약간의 서운함을 느낀다. 조카가 예전부터 좋아했던 '냥고' 시리즈를 전혀 모르자 언니가 다 버렸다고 생각한 나현은 언니한테 따지지만 냥고는 원래부터 없었단다. 여행 후 돌아온 세상은 여행 전과는 다른 세상인 것.


역시 잘 쓰는 작가다. 모든 사건이 촘촘히 계획되어 작가의 의도에 따라 배열된다. 가볍게 읽다보면 자신도 모르게 깊이 말려들어 푹 빠지게 하는 이야기.  하지만 날 울린 건 나현의 소박한 소원. 먹고 살기 힘들어도, 알바를 전전하며 기약할 수 없는 꿈을 꿔도, 요양 병원비에 허덕여도 몸 누일 작은 집과 가족이 있기를 바라는, 나현이 꿈꾸는 '평범한 삶'. 그리고 그걸 꿈꿀 수 있게 해준 이야기와 작가들. 이런 해피엔딩이 좋다. 현실적인 문제를 짚어주는 것도 잊지 않아서 더욱 좋고. 



28. 창문을 통과하는 빛과 같이(서이제. 자음과모음. 2024. 132쪽)

: 세 편의 단편과 한 편의 에세이. 소설은 연작으로 읽힌다. 한때의 젊음을 돌이켜보면, 마냥 담담할 수만은 없다. 누군가를 사랑했던, 내가 아니었던, 이해하고자 했지만 오해만 쌓였던 날들. 잔잔하게 얘기하지만 어쩌면 무엇보다 짙은 상처였을 수도 혹은 그 언제보다 찬란했던 빛이었을 수도. 


이 작가의 장편이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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