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나이트 워치 상, 하(세르게이 루키야넨코,이수연 역. 황금가지. 2005. 353쪽, 365쪽)
: 모스크바에는 '다른 존재'들만이 들어갈 수 있는 '어스름의 세계'가 있다. 뱀파이어와 마법사, 변신자 등 다른 존재들은 각자 지향성에 따라 빛의 존재와 어둠의 존재로 구분된다. 사람과 세계를 위해서만 자신의 능력을 사용하는 빛의 존재들은 어둠의 존재를 감시하기 위해 '나이트 워치'를 가동하고, 반대로 이기적인 목적으로만 능력을 쓰는 어둠의 존재들은 '데이 워치'를 운영하며 두 세력은 힘의 균형을 이루고 살고 있다. 나이트 워치 안톤은 순찰을 하던 중 뱀파이어에게 위협을 받는 한 소년을 구하는데, 그 소년에게 엄청난 잠재력이 있다는 걸 발견한다.
선과 악의 균형이라는 황금률 세계관이 맘에 든다. 물론 이를 위해 세계 대전이라는 엄청난 대가를 치렀기는 하지만. 백마법사가 누군가를 구하면 흑마법사는 누군가를 해할 권리를 가진다. 빛과 어둠의 세계가 서로를 감시하는 것도 합리적이고. 모든 건 선택의 문제다. 능력을 어느 방향으로 사용하느냐의 문제. 큰 능력을 가졌다고 해서 반드시 대승적으로 사용해야만 하는 것도 아니다. 선이 항상 옳은 것만도 아니듯.
그리고 안톤이 실수를 할지언정, 영웅심리를 갖고 있을지언정 좋은 사람이라는 것도 맘에 들었다. 어스름의 세계에 들어가며 아파트 건물을 이끼를 태우는 사람이라는 게. 작은 것을 눈여겨볼 줄 아는 사람이라는 게. 여러가지로 재밌게 읽었다. 결말은 살짝 힘빠지긴 했지만. 후속작도 언젠간 읽어볼 생각이다. 도서관에서 발견하면.
2. 오로라 상회의 집사들(이경란. 은행나무. 2022. 256쪽)
: 계약직에서 백수가 된 민용은 냥줍한 고양이를 키우다 고시원에서 쫓겨난다. 알고 지내던 공시생 연후와 당구장에서 놀다가 옆 당구대 아저씨들과 함께 당구를 치게 되고, 그들에게서 정보를 얻어 재개발이 확정된 서초의 오래된 오로라 아파트에 이주 전까지 저렴한 월세로 살기로 한다. 이 얘기를 당구장 알바생 저커가 듣고 합류한다. 이들이 각자의 사정을 이해하고 결국 가족 아닌 가족이 되는 이야기.
평범한 실업자와 평범한 공시생과 평범한 고학자와 평범한 은퇴자의 평범한 고난과 평범한 희망 이야기였는데, 좋았다. 어디선가 한번씩은 들어봄직한 사정들이었고 누구에게나 일어나거나 곁에 한명씩은 있는 사람들 이야기였지만 등장인물들이 다 따뜻한 사람들이어서, 빌런이 한 명도 안 나와서 편안하게 읽었다. 내용이 뻔한데도 반발심이 안 들고 무난히 받아들이게 하는 것도 작가의 능력인 듯.
3. 시프트(조예은. 마카롱. 2017. 364쪽)
: 지방 소도시 바닷가 창고에서 시신이 발견된다. 피 웅덩이에 잠겨 있던 시신에는 상처가 가득한데, 곁의 피는 피해자의 피가 아닌 것으로 드러난다. 형사 이창은 이 이상한 사건이 자신이 돌보는 유일한 혈육인 아픈 조카를 치유할 방법과 연관되어 있음을 본능적으로 느낀다.
고통을 옮기는 특별한 능력이라니, 대전제가 너무 끔찍하면서도 매력적이었다. 사랑하는 이의 고통을 없애버리고 싶고 내 고통을 치유하고 싶은 건 인간의 본성이지만 그걸 타인에게 전가한다는 건, 거기다가 그 대상이 약자라는 건 정말이지 너무나 바라지만 너무나 오용될 가능성이 큰 매혹적인 능력이지 않은가. 다만 작가의 초기 작품이어서인지 소재의 매력을 힘있게 뒷받침해주지 못하는 전개가 조금 아쉬웠다. 그래도 여전히 내게 기대감을 주는 작가.
4. 7번째 여름이 낳은 기적(나타엘 트라프, 이정은 역. 북플라자. 2022. 352쪽)
: 2018년, 고등학생 레오는 학교 제일의 인기 학생이자 구여친인 발랑틴과 다시 잘해 보고 싶은 마음에 6일 후 축제 파트너 신청을 하려 마음 먹는다. 작은 마을인 이곳에는 아이들이 모이곤 하는 호수가 있는데, 30년 전 그 호수에서 학교 제일 미녀였던 제시카의 시신이 발견되었고 마을 곳곳에서는 30주기 추모 준비가 한창이다. 레오는 월요일 아침 침대에서 눈을 뜨지만 낯선 천장을 보게 되고, 자신의 몸 또한 자신의 것이 아님을 깨닫는다. 날짜도 1988년. 30년 전 제시카가 죽기 6일 전이다.
레오의 하루는 두 번 반복된다. 1988년, 2018년. 하루하루를 보내면서 그리고 매일 다른 몸에서 눈뜨면서 레오는 사건의 진실에 천천히 다가간다. 레오의 고군분투가 인상적이고 조금씩 드러나는 진실이 흥미롭긴 했지만 1988년에서 레오가 하는 행동이 2018년에 크게 영향을 미치는 것 같아 보이진 않는다. 하지만 레오가 시도하는 소소한 변화는 결국 해피엔딩을 이끌어낸다. 외피는 스릴러지만 진짜 이야기는 30년의 시간차에도 불구하고 비슷하게 흘러가는 10대들의 삶과 고민, 그리고 어떤 경우에도 진심은 빛을 발한다는 것. 재밌었고, 결말도 꽤 흐뭇했다.
5. 별빛 창창(설재인. 밝은세상. 2024. 336쪽)
: 나 곽용호의 태몽은 용과 호랑이다. 태몽 덕분에 거한 이름을 갖고 살고 있지만 스물아홉 용호는 그냥 취업 준비생이라는 간판을 단 채 유명 드라마 작가인 엄마 덕에 고급 주상복합 아파트에서 살며 놀고 먹는 중. 그러던 어느 날, 엄마가 홀연히 사라졌다. 에이전시의 담당 피디는 계약된 작품이 있으니 무조건 대본은 나와야 한다며 용호에게 써보라 하고, 용호는 얼떨결에 고등학교 때 사귀었던 구남친 함장현을 불러 대본을 쓰기 시작한다.
처음엔 길잃은 청춘이 방향을 잡아가는 이야기이거나, 모녀간의 아름다운 화해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그것도 맞긴 한데, 작가는 이제껏 해왔듯 여성의 이야기를 놓지 않는다. 돌봄 노동이 오롯이 여성의 몫이 되고 그걸 당연히 여기는 사회 분위기, 그리고 그런 여성들을 이용해 먹는 사람들. 이야기가 약간 어긋난 게 아닌가, 하나에만 집중하는 개 낫지 않나 싶기도 했지만 광혜암 얘기가 아니었다면 너무 뻔했겠지.
사실은 읽는 내내 화가 났다. 낳은 딸에겐 물질적 지원만 한 게 다면서, 방치했으면서, 정서적 돌봄은 외면했으면서 남들은 그렇게 잘 케어하면 용서받을 수 있는 거야? 예전에 읽었던 『사월의 마녀』처럼, 내 딸 하나 버리고 다른 자식 세 명 알뜰하게 거두면 면죄부를 받는 건가? 용호가 광혜암에서 공양하는 장면에서도 그 생각을 했다. 용호가 전성에게 죽을 제대로 못 먹이는 건 누군가를 돌본 적 없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돌봄받은 적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고.
그래도 결말이 정말정말 맘에 들어서, 너무나 아름다워서 마음이 풀렸다. 내가 이래서 이 작가를 좋아하지. 결말 부분의 그 만남이 아니었다면 이 책이 완전히 수긍이 되지 않았을 지도 모르겠다.
6. 렉시콘(맥스 배리, 최용준 역. 열린책들. 2020. 592쪽)
: 윌은 자신을 둘러싸고 이상한 말들을 하는 중에 서서히 의식이 돌아왔다. 두 명의 남자가 자신을 수술하려고 하고 있다. 그들은 윌이 치외자라고 한다. 평범한 목수인 윌은 공항 화장실에서 갑자기 남자들의 습격을 받아 납치됐고, 윌을 기다리던 여자친구는 죽었다. 공항에서 그들을 습격한 다른 사람들을 피해 도망치던 윌은 '시인'과 마주친다.
SF 소설이긴 한데, 고딕 소설같은 요소가 많다. 특정한 기질과 능력을 가진 청소년들을 모아 가르치는 비밀스러운 아카데미, 에서부터 뭔가 그렇지 않은가? 게다가 이들은 고대의 마녀, 마법사들처럼 자신만의 '날단어'를 활용하는 '시인'을 양성한다. 언어의 힘에 대한 상상력을 펼치는 이야기들은 많았고 상대방을 조종하는 힘에 대한 동경도 꾸준히 있어왔지만 이 책의 독창성은 '날단어'에 있다. 그리고 생생한 캐릭터들. 특히 버지니아 울프가 되어가는 에밀리와 엘리엇의 관계가 흥미로웠고, 윌과의 상관성이 이 이야기를 이끌었다. 여러 면에서 흥미진진했던 소설.
7. 깊은숨(김혜나. 한겨레출판. 2022. 312쪽)
: 폭력에 대한 침묵을 이야기한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생각해보니 관계에 대한 이야기들이다. 둘 다 이기도 하다.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폭력을 묵과하기도 하니까. 하지만 작가가 더 집중한 건 왜 사람과 사람은 그냥 사람으로 서로를 대할 수 없는지,다. 내가 상대를 바라보듯 같은 방향과 깊이로 상대가 나를 보아주기란 불가능에 가깝지만 대충 비슷하기라도 혹은 비슷하지 않지만 명확하기라도 하다면 세상의 상처를 훨씬 죽어들텐데. 그런 면에서 가장 좋았던 건 「오지 않은 미래」.
8. 클라우드 쿠쿠 랜드(앤서니 도어, 최세희 역. 민음사. 2023. 824쪽)
: 고대 그리스의 작가 디오게네스가 쓴 「클라우드 쿠쿠 랜드」라는 책이 있다. 사람으로, 당나귀로, 물고기로 살다 까마귀가 되어 유토피아에 들어간 아이톤의 이야기가 담긴 이 양피지 책은 20세기에 전쟁을 겪은 노인 지노에게는 사랑의 시작이고 2020년 미국 아이다호의 한 도서관에서 아이들이 올릴 연극의 대본이기도 하고 15세기 콘스탄티노플의 폐쇄된 수도원에서 한 용감한 소녀 안나에게 발견되는 생계 수단이기도 하며, 22세기 인류의 새로운 보금자리를 향해 항해하는 우주선 속 전염병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소녀 콘스턴스의 눈에 들어오는 현실의 지표이기도 하다.
모두의 이야기를 관통하는 건 디오게네스의 책이고, 아이톤이 꿈꾸는 유토피아이지만 각자의 이야기는 그 자체로 아름다웠다. 각자의 오딧세이아. 인생은 결국 귀환이다. 누구든 고향을 기억하고 있다면.
9. 치치새가 사는 숲(장진영. 민음사. 2023. 184쪽)
: 똑똑한 언니는 집안 형편 때문에 경기도의 공장 기숙사에서 살며 경리일을 한다. '나'의 학교 생활은 감옥 같고, 부모는 서로에게만 관심을 가질 뿐 나는 그냥 방치된다. 언니에게 계절옷을 전해주러 다녀오던 길, 본사에서 내려왔다는 언니네 회사의 '차장님'의 체어맨이 버스 정류장 앞에 서고, 나는 그 차에 올라탄다.
읽는 내내 화가 났다. 뭐 이런 인간이 다 있지? 그리고 또 뭐 이런 부모가 다 있어? 결국 구원은 자신의 손으로만 가능한 걸까? 소녀의 가려움증이 현재 진행형이라는 건 아직도 가야할 길이 남았다는 거겠지. 그래도 다행히 스스로에게 치치림이라는 이름을 부여한 소녀는, 방향을 잘 잡은 거 같다. 그래서 이 책을 읽은 나도 괜찮을 수 있었다.
10. 레퓨테이션 1.2(세라 본,신솔잎 역. 미디어창비. 2023. 292쪽, 304쪽)
: 포츠머스 지역 하원의원 엠마 웹스터. 사춘기 딸을 키우는 싱글맘이자 소위 '리벤지 포르노'의 피해자 익명성 보호법을 발의하고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여 주목받기 시작하는 젊은 여성 정치인이다. 이런 그녀가 런던에 머물 때 동료 의원들과 함께 사는 집에서 남성의 시체와 마주하고 있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1권은 읽기에 많이 힘들었다. 계속 화가 났다. 영국도, 아니 전세계가 다 목소리를 내는 여성에게 적대적인 걸 굳이 책 속에서까지 확인하고 싶지 않았다. 내 머릿속에 꽃밭만 키우겠다는 게 아니라, 난 매일 실생활에서 겪고, 뉴스 기사로 목격하고, 동료와 친구 들에게서 드는단 말이다. 그런데 이 책은 여성 공인 특히 여성의 최소한의 권리와 안전을 요구하는 여성이 매일같이 자신과 사랑하는 사람들의 안전을 위협받는 모습을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이걸 읽는 게 쉽지는 않아서 난 자주 책을 내려놓고 숨을 골라야 했다.
다행히 2권은 법정물이었다. 그리고 여성들의 연대. 특히 전남편이 현부인 캐럴라인과 엠마를 위해 자신의 경험을 발언한 보수당(엠마는 노동당) 여성 정치인 게일, 늘 변함없는 지지를 보여준 동료 여성 정치인 등. 마지막 장면의 여성 기자도 인상 깊었지만 엠마에게서 빚을 받기는 할 거니까. 게일 파슨스 의원이 223쪽에서 말한 '제대로 된 정당 방위'에 크게 동의한다. 이게 바로 이 소설의 주제이자 사회적 약자들이 바라는 바다.
11. 스위처블 러브 스토리(김수연. 엘리. 2023. 244쪽)
: 여러 사랑 이야기. 다양한 형태의 다양한 상황에서의 사랑들이다. 평범한 듯 하지만 알록달록한 이야기들. 기시감 있는 스토리에 저자만의 색을 입혔다. 기대없이 집어들었는데 6편이 다 재밌었다. 가장 좋았던 건 「어느 꿈의 겨울, 아로루아에게 생긴 일」.
12. 빨간 집(리브 앤더슨 ,최유솔 역. 그늘. 2024. 548쪽)
: 늘 새엄마 이브의 '게임'에 휘말렸던 코니. 쌍둥이 동생 리사는 온실 속 식물처럼 집에서 곱게 생활하지만 코니는 각지의 대도시에서 생존 게임을 벌여야 했다. 어느날 이브가 죽었다는 리사의 연락에 코니는 집으로 향하고, 이브가 리사에게 모든 것을 남겼으며 코니에게는 멀리 떨어진 황량한 뉴멕시코의 '빨간 집' 한 채만을 남겼다는 걸 알게 된다. 여러 제약조건 때문에 그 집에 머물 수 밖에 없게 된 코니는 집을 수리하는데, 그 동네에는 오래전부터 소녀들이 실종되고 사막에서 시체로 발견된다.
뒷표지의 '핏빌 에로틱 하드고어 스릴러'라는 문구는 틀렸다. 스릴러만 맞다. 여기서 에로틱을 느낀다면 그건 변태. 처음엔 왜 입양을 해놓고 그렇게 학대를 하는지, 왜 자매간에 차별을 하는지 열받아서 스토리를 냉철하게 따라가지 못하고 조바심을 냈는데 읽으면서 이브의 의도와 코니의 정체(?)를 짐작하다보니 꽤 유니크한 스릴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결말은 내 짐작과는 달랐다. 빌런의 존재는 짐작한 대로 였지만 나머지 인물들의 선택이 놀라웠다. 게다가 작지만 반전도 있고. 결말이 아주 속시원하지는 않았지만 코니가 자유로워서 그거면 됐다 싶다.
13. 파견자들(김초엽. 퍼블리온. 2023. 432쪽)
: 지상에는 인간에게 광증을 불러 일으키는 아포로 가득하고, 지하 세계에서는 지상에 파견자들을 보내 탐사한다. 특이한 입양아였던 태린은 자신을 입양시킨 뛰어난 파견자였던 이제프처럼 파견자가 되어 그녀와 함께 탐험을 하는 게 꿈이다. 하지만 아카데미에서 시험 준비를 하던 중 의문의 목소리가 방해하고, 태린은 어릴 때 끊어버린 뉴로브릭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광증 저항성이 누구보다 높은 자신에게 오류는 없다며.
사실 큰 줄기는 짐작 가능할 수도 있다. 인간에게 해를 미치는 대상이 사실은 그들만의 평화로운 생태계를 이루고 공존을 원하고 있었다는 이야기. 모든 건 개복치처럼 민감한 인간들의 과잉 대응이거나, 가진 건 요만큼이라도 뺏기지 않겠다는 욕심많은 인간들의 심술일 것이다. 이게 하루이틀 일은 아니지. 책 속에서나마 해피엔딩이어서 다행이라고 해야할까? 현실에서라면 그만큼도 못할테니.
14. 식탁 위의 봄날(오 헨리, 송은주 역. 휴머니스트. 2023. 288쪽)
: 오 헨리 단편선. 책 소개에는 '크리스마스 시즌이 되면 떠오르는 작가'라고 했는데 난 표제작 때문인지 음식에 관한 단편들이라고 생각하며 읽었다. 유명한 대표작들이 포함되어 있어서 새삼스럽게 반가워하며 읽었지만 가장 좋았던 건 「아르카디아의 단기 투숙객들」. 대부분의 작품들이 우연에 의한 해피엔딩인데 그것도 내 취향에 맞지만 이 작품에서는 자신들의 선택에 의한 해피엔딩이어서 더 좋았다.
15. 원도(최진영. 한겨레출판. 2024. 248쪽)
: 붉은 피를 토하며 싸구려 여관을 전전하는 원도. 한때 아내와 딸과 함께 큰 평수의 아파트에서 현금을 뿌리며 살던 원도는 지금 가진 게 아무것도 없다. 어릴 때부터 끊임없이 이어져왔던 질문. 나는 왜 죽지 않는가? 원도는 자신을 이곳으로 데려온 과거를, 과거의 행위들과 상황들을 회상한다.
작가가 온 몸에 힘을 주고 쓴 소설. 무거웠다. 내가 만약 기분이 즐거운 상테였다면 적절히 눌리며 읽었을텐데, 이 책을 읽을 당시의 난 이미 다른 일로 압박을 받고 있는 상태여서 이 책은 두 손으로도 들 수 없을 만큼 무거웠다. 간신히 책장을 넘겨 마지막 페이지에 다다랐다.
살아 있는 한 살 수 밖에 없다. 죽음을 내 손으로 불러올 용기가 없으니. 다만 있는지 없는지도 모를 신에게 기도할 뿐. 견뎌야 할 날들이 많이 남아 있지 않기를.
16. 제로 K(돈 드릴로,황가한 역. 은행나무. 2019. 288쪽)
: 제프는 아버지의 연락을 받고 동유럽의 한 곳으로 향한다. 알 수 없는 장소로 복잡한 인도를 받아 간 그곳은 인간냉동프로젝트를 시행하는 곳. 제프의 아버지 로스는 이 프로젝트에 거액을 투자했고, 재혼 아내 아티스가 불치병에 걸리자 그녀를 냉동하는데 동행을 한 것. 아티스가 제프와 만나기를 바라 제프를 그곳에 불러들인 로스는 돌연 자신도 아티스와 함께 냉동되겠다고 한다.
1부는 신비로웠지만 사변적이었고 약간은 지루했다. 단순히 과학 프로젝트가 아니라 마치 신흥 사이비 종교를 보는 듯한 분위기는 기시감이 있었고 쌍둥이 형제들의 연설은 너무 길었다. 그래서 후반부가 더 재밌었는지도 모른다. 제프의 생활과 여자친구 그리고 여자친구의 입양 아들, 마지막에 마음을 바꾼 로스와의 대화 등.
(약스포)
죽음의 시기와 방식을 선택할 수 있다는 건 매력적이다. 하지만 로스와 아티스는 죽음이 아닌 삶을 선택한다고 믿었을 것이다. 저자는 그들의 죽음과 마지막 장면의 ...의 죽음을 병렬로 매치해 두 선택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 둘은 다르지 않다. 그 어느 것도 현명치 않음을, 신념을 내세우고는 있지만 인정받을 수 없음을 행간에서 역설한다. 저자의 메세지에는 크게 공감하지만, 이 저자를 다시 읽을 지는 모르겠다.
17. 집 보는 남자(조경아. 안전가옥. 2023. 356쪽)
: 테오는 엄청나게 예민하다. 모든 감각이 너무 발달하여 세상이 버거운 테오는 학교를 자퇴한 후 쭉 집에서만 지내고 있다. 차고에 본인만의 공간을 마련하여 부동산 어플 상담 일을 하고 있는 테오의 생활은 어느날 독립했던 동생 고희가 집으로 복귀하면서 침범당하게 된다. 테오는 고희를 다시 내보내기 위해 직접 집을 보러 다니다가 연석동 연쇄 살인 사건의 용의자로 몰린다.
가벼운 마음으로 집어들었는데 꽤 괜찮았다. 빌런도 내용도 너무 뻔하긴 했지만 테오라는 캐릭터가 워낙 매력적이어서 TV 드라마로 만들어져도 좋겠다 싶을 정도였다. 배우는 것도 좋아하고 자신의 장단점을 잘 알고 인정하며 예민하지만 따뜻한 사람. 책 시리즈는 안 나와도 될 거 같은데 드라마로는 보고 싶다.
18. 아이스(애나 캐번,박소현 역. 민음사. 2023. 400쪽)
: '나는 길을 잃었다'(첫문장). 화자는 외국에서 첩보활동을 하고 귀국해서 과거의 여인을 찾아간다. 그녀는 다른 사람과 결혼해서 시골에 살고 있고, 날은 저물고 눈보라가 휘몰아쳐 찾아가는 길은 쉽지 않다. 북쪽에서 거대 얼음이 밀려내려오고 새로운 빙하시대가 시작될 조짐이 보이고 있는 가운데, 화자는 여성이 무사하다는 걸 확인하고자 한다.
중첩적인 의미의 아이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가 틀어질 때마다 화자의 눈앞에 나타나는 빙하. 특히 초반부 여자와 남편의 사이가 어긋날 때마다 여자에게 나타나는 얼음숲은 꽤 인상적이었다. 환상과 현실이 구분되지 않는 하루하루. 또다른 얼음은 방사능 수치가 올라감에 따라 위협적으로 다가오는 빙하기이다(60-61쪽).
여자는 여러 나라를 떠돌고, 마치 에우리디케를 찾아 저승으로 내려가는 오르페우스처럼 화자는 여자를 찾아 빙하가 내려오는 방향을 역행하지만 정작 여자는 원치 않는다. 그래서 결말이 좀 의아했다. 갑작스러운 작은 해피엔딩이 커다란 비극에 맞서는 결말.
19. 목소리 섬(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기획, 김세미 역. 바다출판사. 2010. 172쪽)
: 보르헤스가 선택한 스티븐슨의 환상 단편들. 가볍게 읽었지만 그속에 담긴 인간 본성에 관한 성찰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거기에 약간의 풍자까지 양념처럼 얹혀 있어 재미를 더했다. 가장 맘에 들었던 건 「마크하임」. 역시 인간 내면에 공존하는 선악의 대립에 대한 고찰이 돋보였다.
20. 매구를 죽이려고(조선희. 네오픽션. 2023. 468쪽)
: 고등학생 이하는 아버지를 따라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쓰던 다 쓰러져가는 시골집으로 내려온다. 생활력도 의욕도 없는 아버지는 집 옆 대나무숲을 지날 때 매구가 불러도 세 번 전까지는 돌아보지 말라는 헛소리나 할 뿐 생활에 적극적으로 대처할 생각도 안 하고, 할 수 없이 마을의 유일한 슈퍼에 다녀오는 길, 이하는 대숲을 지나다 자신의 이름을 소리쳐 부르는 걸 듣게 된다. 한편 이 시골마을에는 천 년 묵은 여우 매구의 전설이 호수를 중심으로 내려오는데, 호수에 사람이 빠졌을 때 아무도 구하지 않으려 하면 매구가 구해준다고. 그런데 이 호수에는 12년 전에 빠져 죽은 소녀가 있다.
(약스포)
매구는 있다. 있어야만 한다. 12년 만에 다시 시작된 죽음들과 무성한 소문들, 의심들. 매구보다 사람이 더 무서울지도 모르지. 사람의 욕심이 아니었다면 매구가 그렇게 태연할 수 있었을까. 이 작가의 책은 예상보다 무서워서 조금 긴장하며 읽기 시작했는데 생각보다 안 무서웠고 재밌었다. 다만 매구의 존재는 조금 안타까웠다. 그렇게 할 수 밖에 없고 그렇게 되어야 하지만...
21. 퀴어(윌리암 버로우즈, 조동섭 역. 펭귄클래식코리아. 2009. 163쪽)
: 리는 멕시코시티에서 머물고 있다. 하릴없이 술이나 마시고 있다가 바에서 앨러턴과 마주친다. 리는 앨러턴에게 다가가지만 앨러턴은 리를 그다지 탐탁해 하지 않는 것 같다.
가엾을 정도로 앨러턴에게 구애하는 리의 모습들을 보여준다. 이 책속 에피소드만 놓고 보면 리가 완전히 동성애자인지 혹은 동성애를 지향하지만 양성애자인 건지 그것도 아니면 그냥 앨러턴만 탐하는 건지 조금 헷갈리기는 한다. 다만 앨러턴에 대한 애절한 갈망만큼은 진심일 것이다.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를 통해 저자의 자전적 이야기라는 걸 드러내는데 집필 계기가 된 사건을 이 소설을 이해하기 위한 맥락 안에 들여놓고 본다면 앨러턴에 대한 열망은 과거를 잊기 위한 혹은 현재의 자신을 지우기 위한 도피가 아니었을까?
22. 메모리 레인(파트릭 모디아노, 김현희 역. 이숲에올빼미. 2021. 96쪽)
: '나'는 소모임에 대해 궁금해진다. 옆 사무실에서 일하는 뷀린과 함께 그의 모임에 참석한 화자는 그들과 한동안 어울린다.
따뜻했지만 허무했던. 쓸쓸함이야 모디아노 소설의 기본 감성이라지만 왜 이렇게 허전할까 몰랐는데 역자해설을 읽고 알게 됐다. "잠시 서로 위로가 되기도 하지만 결국은 혼자 남아 지나간 시간을 그리워하며 살아가는 것이 인생"(93쪽)이라는 문장 덕분에. 본문의 아래 문장과 맥락이 닿아 있는 얘기였다.
사람들이 떠나버린 해변에 우리가 모두 남아 있었던 그 오후는 우리 삶과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몇몇 존재가 우연히 서로 만나 소그룹을 이룬다. 그랬다가 모두 뿔뿔이 흩어진다..... (62쪽).
23. 캠프파이어(설재인. 알마. 2023. 276쪽)
: 고등학교 교사로 일하다 그만두고 전업 소설가가 된 화자는 옛 제자인 호은과 오랜만에 마주한다. 함께 맥주를 마시다 화장실에 가려는데, 밖의 모든 사람들이 납작한 종이인형이 되어 버린 걸 발견한다. 두 발로 걷는 사슴들이 들어와 화자와 호은을 어딘가로 데려가고, 숙식이 제공되는 그 공간에서 머물던 화자는 호은이 근처의 갈대밭에 매일같이 나가 있는 걸 목격한다. 그 갈대밭에서는 종이인형이 된 사람 중 한 명의 목소리가 들린다.
(약스포)
호은은 단 한 명을 위해 글을 쓴다. 표면적으로 그 단 한 명은 화자의 옛 동료이자 호은의 교사였던 기간제 송민정이지만, 어느 순간부터 호은의 글은 그녀 자신을 위한 것이 된다. '신분'이 다르다는 이유로 고통을 외면당하고 사람으로서의 기본적인 필요도 무시당했던 둘은 그리고 많은 비정규직들과 사회적 약자들은 닮아 있기에. 그래서 호은은 사랑을 만들어 주고 싶었나보다. 그런 호은의 바람이 특별한 존재를 만들어 냈고, 그리고 마침내 무해한 존재가 되어 사랑을 하게 된 두 사람. 이 이야기는 그래서 해피엔딩이다. 비록 그들은 사라졌을지언정.
24. 겨울방학(최진영. 민음사. 2019. 304쪽)
: 표제작에서 고모는 아홉 살 조카를 향해 "네가 내게 배운 것이 가난만은 아니라면 좋을텐데"라고 혼잣말한다. 난 이 소설집 전체를 통틀어서 그 말이 가장 짠했다. 내 상황에 대한 인식, 조카에 대한 애정, 그리고 사회의 시선 등이 모두 담긴 말이었기에. 이 책에는 이렇게 '가난한' 사람들이 등장한다. 그런데 그들은 가엾지 않다. 비단 그들의 상황이, 그들의 행동이, 그들의 생각이 나와 같기 때문에 이렇게 말하는 게 아니라, 그들은 가난해도 타인을 위해 의자를 만들고(「의자」), 조카의 손을 잡고 저녁마다 산책을 하거나 함께 피아노를 배우며(표제작), 어린 시절 친구의 집을 향해 걷는다(「돌담」). 모든 작품에서 좋은 사람이 꼭 한명 이상씩 등장하는, 좋은 책이었다.
25. 진주(존 스타인벡, 권혁 역. 돋을새김. 2005. 172쪽)
: 멕시코 만 근처의 작은 마을, 원주민 부부 키노와 주애너에겐 갓난 아들이 있다. 어느날 천장에서 내려온 지네가 아들을 쏘고, 키노 부부는 마을의 백인 의사에게 달려가지만 의사는 지불 능력이 없어보이는 이들을 진료하기를 거부한다. 키노는 간절한 마음으로 진주 조개를 캐러 잠수하는데, 그의 손에 완벽한 모양과 이제껏 볼 수 없던 크기의 진주가 들어온다.
(스포)
인간이 지닌 욕심의 민낯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의사 뿐 아니라 신부, 마을 사람들, 진주 매입업자, 심지어 거지들까지 어떻게든 그의 행운에서 자신의 몫을 받아내려 한다. 그게 정당한지는 고민조차 하지 않고. 따라서 비극적 결말은 필연이다. 예상하고 읽었음에도 안타까움은 어쩔 수 없었다. 키노의 말대로 그 진주가 아들을 교육시키고 키노와 주애너에게 새옷을 주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때때로 아니 자주 운명은 인간에게 감당할 수 없을 만큼 가혹하다.
26. 좋아 보여서 다행(이주란. 마음산책. 2024. 196쪽)
: 작가 특유의 순한 인물들이 자신의 오래된 상처를 가만히 들여다 보는 이야기들. 짧지만 다들 지나간 일들을 조용히 돌아볼 수 있어서, 울고 있지만 괜찮냐는 물음에 괜찮다고 대답할 수 있어서 정말 다행인 이야기들. 그래서 약간의 아릿함은 있지만 따뜻하게 읽어내려갈 수 있는 이야기들. 내가 이 작가를 알게 되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27. 모조품(커스틴 첸,유혜인 역. 아르테. 2023. 284쪽)
: 세무 변호사였다가 육아 때문에 퇴사한 에이바. 우연히 20년 전 대학 룸메이트였던 위니를 만난다. 위니는 에이바에게 슬쩍 도움을 주며 점점 다가오며 자신의 '사업'을 슬쩍 보여준다. 바로 명품을 사서 이른바 'S급' 가품으로 반품하는 사기. 독박 육아와 남편의 이기심에 지친 에이바는 위니의 사업에 동참하기로 하는데...
1부는 에이바가 형사에게 진술하는 형식이어서, 에이바의 주장에 넋놓고 훌렸다. 2부에서 진실이 어느 정도 드러나는데, 1부에서 홀린 독자는 2부에서도 눈을 가늘게 뜨고 어떻게든 에이바의 편을 들고 싶어진다. 이런 영리한 서술 덕에 내용의 단순함은 가려진다. 사실 재밌게 읽은 부분은 명품/가품 시장의 모습이나 에이바와 위니의 사기 행각의 진행보다는 미국 내 은근한 인종 차별 현황. 중국계인 에이바와 위니가 백화점에서 차를 마실 때 옆 테이블의 노부인이 하는 노골적인 인종 차별 발언은 어이없었지만 약간은 뻔했는데, 에이바가 가품을 반품하러 가면서 본능적으로 같은 아시아계 직원이 아닌 백인쪽으로 가는 거라든지 에이바의 대학 동창들의 위니에 대한 평가 등의 모습에서 주류 인종들이 소수 인종들에 대해 가진 차별적 시선을 감추면서도 자신들의 우월성을 드러내는 것 등이 흥미로웠다. 부담없이 재밌게 읽은 소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