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태양을 바라보며(줄리언 반스, 신재실 역. 열린책들. 2005. 312쪽)

https://blog.aladin.co.kr/yujin/15193573


2. 어느 날의 나(이주란. 현대문학. 2022. 132쪽)

: 아마도 작가 자신의 특징이지 않을까 싶은 차분한 문체가 좋았다. 작은 빌라에서 함께 사는 두 여성의 이야기. 작은 방에서 따로 또 같이 월세를 나눠 내며 지내는 소소한 3개월간의 기록이다. 큰 사건도, 위기도 없이 각자의 하루를 보내고 산책을 하고 같이 아는 지인과 잠깐 여행도 가고... 그 차분함이 정말 좋았다. 물론 한 번씩 여기저기에서 태클도 들어오지만 무른 듯 단단하게 하루가, 한 주가, 한 달이 지난다.


사실 첫 문장에서부터 위로를 받았다. 모르는 사람들이 내게 괜찮다, 말해주네. 아는 사람들은 관심이라는 미명하에 날 작게, 자잘하게 상처를 주기도 하지만 모르는 사람들이 괜찮다 해주는 건 때로는 눈물이 날 만큼 고맙다. 기대가 없으니까. 의무가 없으니까. 차라리, 애정이 없으니까. 행간이 아주 깊은 좋은 소설이었다. 이 작가를 알게 되어서 기쁘다.



3. 순례 주택(유은실. 비룡소. 2021. 256쪽)

: 순례 주택은 세입자가 줄을 선다. 혹설에 따르면 5년은 기다려야 한다고. 이유는 물론 주변 시세보다 싸기 때문이지만 그게 다는 아니다. 순례씨가 철저히 관리하기 때문이다. 옥상을 함께 쓰고, 분리배출을 철저히 하고, 입주민들끼리 배려하고. 화자 오수림은 이 빌라의 주인이자 외할아버지의 여자친구인 순례 씨 손에 컸다. 수림의 원가족은 길 건너 고급 아파트단지에 살고 있지만 수림은 순례 주택에 있을 때만 맘이 편하다.


(약스포)

수림이 '1군들'이라고 부르는 원가족은 다 진상이다. 아버지 집을 빼앗아 살면서도 마치 집이 자기 신분인 양 구는 전업주부 엄마, 평생 여기저기 빌붙어 살면서 자신을 올려치기만 하는 만년 강사 아빠, 이 둘을 꼭 닮은 언니. 읽으면서 너무 답답했다. 순진한 순례씨와 입주민들 때문에. 이들은 마냥 착하게 빌런들을 기다린다. 그런데 내 경험상, 그리고 책 속에서도 빌런들은 절대 정신차리지 않는다. 그래도 청소년 소설이니 뭔가 동화처럼 권선징악이 일어나지 않을까 기대했었지만... 이건 그냥 수림이와 순례씨, 그리고 입주민들의 정신 승리 이야기일 뿐, 동화가 아니다. 순례씨가 너무 멋있어서, 마치 요정대모 같아서 잠시 착각했다. 분위기가 따뜻한 건 좋았지만, 그게 다였다.



4. 연수(장류진. 창비. 2023. 336쪽)

: 작가 특유의 완전히 현실에 있을 법한 이야기들. 솔직히 표제작 외에는 다 기시감이 있어서 좀 흥미를 잃었다. 표제작도 역시 아주 많이 현실적이기는 했으나 강사의 마지막 말이 좋아서 마음이 스르르 풀리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표제작이 가장 좋았다. 그리고 다음으로 좋았던 건 「미라와 라라」. 



5. 노엘의 다이어리(리처드 폴 에번스, 이현숙 역. 씨큐브. 2022. 296쪽)

: 성공한 작가 제이콥은 오랫동안 연을 끊고 지내던 엄마의 사망 소식을 듣는다. 엄마는 어릴적 형이 사고사한 후 제이콥을 방치하고 학대하다가 내쫓아버렸다. 아버지는 형이 죽고 얼마 뒤 떠나버렸고. 크리스마스 시즌, 엄마의 집에 도착해 보니 엄마는 모든 물건을 쌓아두고 살았었고, 제이콥은 며칠 머물며 정리하기로 한다. 그런데 갑자기 매우 친숙한 느낌의 젊은 여자 레이첼이 엄마를 찾아 온다.


처음엔 타임슬립물인 줄 알고 읽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건 아니었고, 그냥 사랑 이야기이다. 뻔하긴 했지만 재미있었다. 그런데 빌런들의 행태가 너무 반복적이긴 했다. 꽉 닫히지 않은 엔딩도 약간 부족한 느낌. 그래도 쉬면서 읽기 좋았고, 이 작가의 '노엘 4부작'도 출간되는 대로 읽을 생각이다.



6. 나는 그 정도로 나쁜 사람은 아니다(정세진. 고즈넉이엔티. 2022. 244쪽)

: 꽤 신박한 이야기들의 모음이랄까. 대체로 평범한 인간들이 위기에 몰리면 상상할 법한 정도의 나쁜 짓들. 차라리 더 나빠지지, 싶었던. 어디선가 있을 법하지만 이 이야기를 누구도 대놓고 하지는 않았다는 게 신기한, 그런 이야기들이다. 알라딘에서 광고하는 대로 '천재 이야기꾼의 탄생'까지는 아니지만 데뷔작이 이 정도라면 앞으로가 기대되기는 하다. 가장 좋았던 건 「나를 버릴지라도」. 



7. 우리가 만드는 세계(N.K.제미신. 박슬라 역. 황금가지. 2023. 452쪽)

: 1편이 있는 걸 모르고 도서관 신착도서코너에 있길래 읽었다. 도시의 화신들이 침입자에 맞서 싸우는 이야기. SF적인 부분들이 여러 신화와 뒤섞여 관념적이고 사변적인 부분들이 많다. 정서적으로도 낯설고. 한 명의 개인이 각 지역의 화신이 된다는 개념은 신박하지만 너무 영웅놀이를 위한 설정 같았고 실제로 뒷부분에서는 다중우주의 존망이 이들 손에 달려 있기도 해서 점점 흥미를 잃었다. 스마트하고 기발한 SF지만 나와는 안 맞는 듯. 1편을 읽었다면 달랐을까?



8. 심심포차 심심 사건(홍선주. 네오픽션. 2023. 212쪽)

: 프리랜서 프로그래머 '나' 찬휘는 오드아이다. 보육원에서 자랄 때부터 괴물 취급을 받아 위축된 삶을 살았고, 컴플렉스인 오드아이를 보완하기 위해 늘 끼던 렌즈 때문에 실명위기에 놓여 지금 프로젝트를 끝내면 자살을 할 생각이다. 늦은 밤 작업 후 귀가하던 중 우연히 발견한 심심포차에 들어간 화자는 집밥처럼 따뜻한 맞춤 메뉴와 다정한 주인에게 위로를 받는 느낌이라 폐업을 앞둔 그곳을 매일 방문하며 단골 손님들이 늘어놓는 사건 이야기들에 귀를 기울인다.


'심야식당'의 변주인가 하는 맘으로 가볍게 읽고 있다가 마지막 반전에 놀랐다. 전혀 생각도 못했는데. 작가의 글솜씨가 꽤 좋다. 말한 대로 심야식당의 변주라는 면에서 기대치를 낮추고 읽은 덕도 있겠지만. 아이디어도 좋다. 요즘 이렇게 반짝이는 아이디어를 가진 작가들이 계속 발견되어 너무너무 좋다.



9. 우아하게 나이들 줄 알았더니(제나 매카시, 김하연 역. 현암사. 2020. 344쪽)

: 어느덧 중년이 된 여성의 넋두리랄까. 원래 이런 에세이를 좋아하지는 않는데 문득 다른 중년들은 어떻게 사나 궁금해서 읽었다. 사실 전적으로 공감하기보다는 그냥 이 사람은 이렇게 사는구나, 하는 생각으로 읽었다. 물론 공감가는 부분도 있었다. 몸무게는 안 늘었는데 치수는 늘었다든지, 특정 단어나 내가 뭘 하려는지 늘 까먹는다든지. 하지만 내가 확인한 건, 이런 보편적인 신체의 노화와 그에 따른 증상들보다는 역시 삶은 비슷한 조건의 사람들끼리 비슷하게 흘러간다는 거. 아이가 있고 남편이 있는 중년의 삶은 당연히 독거인의 삶과 다르지. 간혹 미국식 유머 덕분에 웃기는 했다.



10. 아주 작은 죽음들(브루스 골드파브, 강동혁 역. RHK. 2022. 408쪽)

: 미국 법의학의 어머니라 할 수 있는 - 이 명칭은 내가 붙인 거다 - 프랜시스 글레스너 리의 전기. 우리가 미드 『CSI』를 즐겨 볼 수 있게 된 건 리의 덕이다. 리는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가정에서 교육을 받았고, 특유의 뛰어난 관찰력과 손재주, 추진력으로 하버드에 학과가 개설되고 법의학자를 양성하여 수사에 제대로 활용될 수 있게 기초를 놓았다. 그리고 스스로도 법의학을 독학하여 여성 최초로 경감이 되었다. 


리가 궁극적으로 추진한 건 피해자도 피의자도 억울한 사람이 없는 것. 당시에는 검시관과 코로너가 구분되어 있었다. 검시관은 사망 원인을 진단하지만 전문적인 지식 없이도 자리를 차지할 수 있는 임명직이었고, 그 지위를 이용해 뒷돈을 벌기도 했다. 리는 이런 불합리한 제도를 개선하는 데에도 힘썼다. 사비를 밑빠진 독에 물 붇듯 들이부어가면서, 또 경찰관과 법의학도의 교육을 위해 본인 스스로 범죄 현장 미니어처인 디오라마를 만들면서(제목은 이 디오라마를 가리키는 것이다). 비록 당대의 편견과 사회 분위기로 인해 본인이 원하는 만큼은 아니었더라도 리의 업적은 오늘날의 과학 수사의 토대가 되었다.


리의 삶 뿐 아니라 19세기 당시의 흥미로운 사회 분위기도 잘 스케치되어 있다. 특히 1893년 시카고 세계 박람회. 여성 건축 설계자 소피아 하이든이 우먼스 빌딩을 설계하고 받은 금액이 겨우 1000달러 - 남자 설계자들은 1만 달러 받음 - 라든지, 오늘날 머그샷의 원조격인 베르티용의 범인감식법 - 정면 뿐 아니라 나이가 들고 살이 찌고 수염을 길러도 거의 변하지 않는 옆얼굴이 중요하다고 함 - 을 시카고 경찰이 적극 활용했다든지. 재미있게, 안타까워하면서 읽었다.



11. 불타는 작품(윤고은. 은행나무. 2023. 363쪽)

: 안이지는 12년 전 올해의 작가상 후보에 오른 적 있는 전도 유망한 화가였지만 이제는 배달 어플의 라이더로 일하는 가난한 작가일 뿐이다. 일하던 중 자신이 미국의 '로버트 재단'의 창작프로그램 수혜자로 선정되었다는 소식을 받는다. 조건은 재단에서 작업을 해야 하고, 재단의 인근도시 Q에서 영감을 받아 작품을 해야 하며, 기간이 끝나면 반드시 하나의 작품을 불태워야 한다는 것. 이지는 재단이 있는 캘리포니아로 향하지만 거기는 계속된 가뭄으로 화재가 끊이질 않아 모든 것이 엉망이다. 


도입부가 정말 흥미로웠다. 로버트 재단의 시작이랄까. 읽으면서 자꾸만 로버트를 의인화하게 되고 - 물론 이게 작가의 의도였겠지만 - 그래서 더 예술과 현실의 거리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근래에는 예술이 삶 속에 많이 가까워졌다지만, 아직도 멀긴 하지. 그런거 생각 안 하고 그냥 이야기를 따라가며 읽어도 재미있기는 했다. 이 작가의 작품은 항상 참신하면서도 가볍지 않아서 늘 좋다.



12. 길 위의 신사들(마이클 셰이본, 이은정 역. 사피엔스21. 2010. 264쪽)

프랑크인이자 유대인 젤리크만과 아비시니아인 암람. 아란 왕국 변두리의 작은 여관에서 시비가 붙은 이들은 가느다란 랜싯과 커다란 도끼를 들고 결투를 벌인다. 하지만 사실 이건 내기 판돈을 갖기 위해 짜고 치는 것. 이들이 속임수를 쓴다는 걸 알아차린 투숙객 코끼리 조련사는 이들에게 새로운 일거리를 제안한다. 바로 하자르 왕국의 왕자를 어머니의 나라로 무사히 데려다 주는 것. 


예전에 하자르 사전을 읽을 때도 그랬지만, 하자르라는 나라는 왜 이렇게 내게 혼란스러운 기분을 느끼게 하는지 모르겠다. 따지고 보면 낯설다뿐 딱히 어려울 것도 없는데 말이다. 제목은 노상강도를 가리키는 은어이자 이 두 주인공을 말한다. 하지만 이들은 옳은 일을 한다. 모험 소설답게 전개가 흥미진진했다. 초반의 지리적 낯섦만 극복하면 재밌게 읽을 수 있다. 길지 않지만 당대의 분위기를 느끼기에는 충분하고, 주인공들의 이야기도 꽤 와닿는다. 즐겁게 읽었다.



13. 그렇게 할 수 밖에(최도담. 네오북스. 2022. 204쪽)

: 라경은 청부살인을 계획한다. 대상은 엄마의 동거남이었던 이기섭. 그는 엄마를 폭행하고 가스라이팅하여 결국 죽게 만들었다. 할머니의 손에 크면서 상처를 잊은 듯 살아가고 있었지만 우연히 마주친 그는 너무 잘 살고 있었고, 라경은 그를 제거하기로 한다. 그가 교통사고로 죽었다는 걸 확인했지만, 갑자기 킬러가 의뢰에 실패했다면서 돈을 돌려준다.


왜 실패했는지에 대해서는 일찌감치 짐작가능하다. 그리고 그래서 계속 아파하면서 후반부를 읽었다. 작가의 말에서 "이 소설은.. (중략) 사랑하고 이해하는 방식에 관한 이야기"라고 했는데 작가의 이런 말들이 방금 마친 소설을 더 좋아지게 했다. 세상을 살 만하게 만드는 건 악의 제거보다는 사랑의 증폭이다. 물론 악은 제거되어야만 하지만. 



14. 천국의 도둑(리처드 도이치, 안종설 역. 문학수첩. 2011. 620쪽)

: 대도 마이클 피에르 시리즈 1권. 대도라니, 재밌겠다 싶어서 읽기 시작했는데 아무래도 이 시리즈를 더 읽을 거 같진 않다. 마이클은 못 훔치는 물건이 없는 솜씨를 가진 대도지만 결혼 후 손을 씻고 자신만의 보안 가게를 운영하고 있다. 하지만 아내가 갑자기 난소암을 진단받고, 의료보험이 없어 엄청난 치료비를 감당하기 힘든 그는 수상쩍은 의뢰를 수락하기로 한다. 바로 바티칸의 보물을 훔쳐오는 것.


그냥 도둑질하는 얘기였으면 끝까지 흥미롭게 읽었을 텐데, 중간에 물건을 훔치는 데 성공한 이후로 갑자기 신비주의로 흐른다. 오컬트나 판타지 다 좋아하지만 이런 식의 신비주의는 재미가 없었다. 천국이 한 사람의 손에 달렸다니, 그게 그렇게 흘러간다고? 어쨌든 이런 책은 해피 엔딩이 보장되어 있어서 좋다.



15. 만조를 기다리며(조예은. 위즈덤하우스. 2023. 132쪽)

: 정해는 어릴적 할머니를 따라가 잠깐 머물던 섬 영산에서 만났던 친구 우영이 바다에 뛰어들어 자살했다는 소식을 듣는다. 영산을 지키는 산지기의 딸로 늘 영산에 묻힐 거라고 입버릇처럼 말하던 우영이 바다에 뛰어들 리가 없다고 생각한 정해는 영산으로 향한다.


짧지만 꽤 깊은 이야기이다. 어쩌면 뻔하게 흐를 수도 있는 여러 장치들 - 사이비 종교, 섬, 동굴 등 - 이 있지만 이 이야기의 핵심은 '관계'가 아닐까 싶다. 시간이 흐르고 상황과 사람이 바뀌어도 함께했던 시간과 추억으로 되살아나는 관계. 그게 정해를 영산으로 이끌었고 진실을 드러냈겠지. 그래서 정해도 마지막에 그런 선택을 한 거라고, 그렇게 이어지는 거라고.



16. ㅁㅇㅇㅅ(곽재식. 아작. 2021. 368쪽)

: SF 연작. 이미영 사장과 김양식 이사는 '은하행성서비스센터'를 운영한다. 처음 세웠던 '목적'은 언제부턴가 구석에 쳐박히고, 사무실 유지비용을 대기 위해 들어오는 의뢰는 뭐든지 다 맡는다. 그때마다 양식은 미영에게 항의하지만 결국에는 의뢰 수행에 따라나선다.


가벼운 마음으로 재밌게 읽었다. 그 '목적'이라는 게 마지막 작품쯤에서는 밝혀질 줄 알았는데 아니었고, 사실 그게 뭔지는 더이상 궁금하지도 않았다. 뭐, 적당히 거창하고 적당히 착한 거겠지. 근데 그러면 이 서비스센터는 목적을 이룬 거 아닌가? 



17. 은하행성 서비스센터, 정상 영업합니다(곽재식. 네오픽션. 2022. 212쪽)

: 앞서 읽은 책의 2권인 줄 알았는데, 주인공과 배경만 같다. 역시나 미영과 양식이 여러 의뢰를 받아 다양한 환경을 가진 행성들을 방문하는 내용인데, 읽으면서 청소년들이 읽으면 적당히 재미있으면서도 생각할 거리를 던져줘서 괜찮겠다 싶었는데 역시나 동서평설 연재분이란다. 재미는 있었는데 좀 교과서 느낌이었다.



18. 뉴서울파크 젤리장수 대학살(조예은. 안전가옥. 2019. 280쪽)

: 유지는 부모님을 졸라 뉴서울파크에 왔다. 늘 싸우기만 하는 부모님과 이곳에서만큼은 행복한 시간을 보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하지만 엄마 아빠는 이 곳에서도 서로에게 으르렁대기만 한다. 구석에서 젤리카트를 발견한 유지. 이 젤리를 함께 먹으면 절대 헤어지지 않을 거라며 무료로 나눠주는 젤리를 들고 온 유지는 이걸 부모님과 함께 먹어야겠다고 생각하지만 돌아온 자리에 부모님은 없다.


각자의 사연과 당위성을 가진 인간들이 각자의 욕망을 드러낸다. 조금이라도 죄책감을 갖는 건 어린아이 뿐. 어쩌면 어른이 된다는 건 티 안내고 합리화를 할 줄 알게 된다는 뜻일지도 모르겠다. 그런 면에서 이 이야기 속 대부분의 인물들은 다 어린이다. 관계 속에 놓여 있기를 바라는 어린이. 이미 빛을 잃은 관계를 놓아 버리지 못하는 어린이.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채 꿈만 꾸며 모든 게 잘 되기만을 바라는 어린이. 


삽화와 표지, 그리고 소재 때문에 계속 어디선가 인공 향료와 단내가 나는 것만 같았다. 읽는 동안에는 젤리에 정이 떨어졌지만, 사실 책 속에서도 젤리는 아무 잘못 없다. 젤리장수도.



19. 감정을 할인가에 판매합니다(임하곤 외. 네오픽션. 2022. 328쪽)

: SF 앤솔러지. 유이립 외엔 다 재밌었다. 유이립은 뭔가 기발한 걸 시도해보고 싶었던 거 같은데, 뒤로 갈수록 이야기가 그냥 평범해져 버렸다. 가장 좋았던 건 최희라 「영원」. 비어 있는 듯 차 있는 여백이 좋았다. 이야기를 빽빽하게 채우지 않았지만 모든 걸 이야기해 준 느낌. 임하곤 「나와 올퓌」도 좋았다. 뻔하고 평범한 이야기일 지 모르겠지만 아포칼립스에서도 남아 있는 다정함을 읽는 건 늘 눈물이 난다. 나머지 작품들도 기발한 아이디어들이 좋았다.



20. 독재자(정세랑, 정보라 외. 뿔. 2010. 288쪽)

: 정보라와 정세랑 때문에 읽었지만 사실 이 두 작가 작품은 이미 읽은 것. 권력에 대한 SF 앤솔러지다. 역시 정보라와 정세랑이 가장 좋았지만 처음 읽은 작가 중에서는 김창규 「파수」가 가장 좋았다. 차분하면서도 몽환적인 분위기 속에서도 메시지를 뚜렷하게 전달하는 게 좋았다. 



21. 금서를 빌려드립니다(데이브 코니스, 한원희 역. 우리교육. 2022. 368쪽)

: 책을 정말 사랑하는 클라라. 해마다 학년이 바뀌기 전날에는 밤새도록 좋아하는 구절에 형광펜으로 줄을 그으며 책 한 권을 읽는 '형광펜 올나이트'를 할 정도다. 이른 아침 등교해서 습관처럼 교내 도서관에 갔다가 담당 선생님의 이메일을 엿보게 되고, 학교에서 자신이 좋아하는 작가를 비롯해 10권의 금서를 지정한 것을 알게 된다. 어이 없는 기분에 클라라는 학교 도서관에서 치워진 책들을 자신의 사물함에 넣어두고 학우들에게 몰래 대출해 주기 시작한다.


청소년 소설 답게 옳은 일을 하려는 주인공의 좌충우돌과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될 줄 알았지만 그게 다가 아니었다. 클라라는 자신의 행동이 옳은 일을 하기 위해서가 아닌 교장 선생님에 대한 반발심에서만 비롯된 건 아닌지 고민하고, 비밀 도서관 운영으로 자신의 생활이 흔들리고 개인 시간이 침범당하는 걸 괴로워한다. 또한 자기가 일부 사람들에 대해 편견을 갖고 있음을 시인한다. 사실 결말은 좀 아쉬웠다. 전형적인 해피엔딩까지는 아니더라도 뭔가 나아지거나 해결되는 게 있었으면 좋았을텐데. 그냥 클라라만 성장하고 만다. 그래도 책이 소재여서 재밌게 읽었다.



22.코카인 블루스(케리 그린우드, 한지원 역. 딜라일라북스. 2016. 296쪽)

: 1920년대, 귀족 영애 프라이니 피셔는 파티에서 주인의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훔친 범인을 뛰어난 추리력으로 잡아낸다. 이걸 계기로 하퍼 대령의 눈에 들어 호주에 사는 그의 딸의 안위를 확인해 달라는 요청을 받는다. 아무래도 사위가 딸을 학대하는 게 아닌가 걱정된다고. 귀족들의 한량 놀음에 싫증이 난 프라이니는 호주로 건너가 대령의 딸과 사교계에서 자연스럽게 컨택을 한다.


기대가 컸는데, 시리즈의 첫 권이어서인지 좀 산만했다. 이야기의 전개도, 문장도. 캐릭터들이 마구 튀어나오는 거야 말 그대로 첫 권이니까 그런 거 맞겠지만. 확실히 프라이니는 당대의 금기를 무시하고 자신의 욕망에 충실하며 자기주장이 강한 매력적인 캐릭터이긴 하지만 사건 자체는 좀 허술한 느낌이었다. 



23. 그림자 밟기(루이스 어드리크, 이원경 역. 비채. 2014. 320쪽)

: 아이린은 남편 길이 자신의 일기장을 읽는 걸 알고 있다. 그래서 빨간 표지의 일기장을 적당한 곳에 감춘 뒤 은행의 대여 금고로 향한다. 진짜 속마음은 그곳에 있는 파란 표지 일기장에 쓰인다. 아이린은 남편이 뮤즈이자 그의 그림 모델인 자신의 부정을 의심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고, 빨간 일기장으로 남편을 어느 정도 조종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작가의 자전적 이야기라고 해서 조금 놀랐다. 책 속 남편 길은, 너무 지질했다. 단순히 아내의 일기장을 훔쳐 보는 게 문제가 아니다. 일기장을 훔쳐 보는 마음이 그저 깊은 사랑과 그에 따른 두려움이었다면, 혹은 그저 관음이었다면 이해했을 것이다. 하지만 길은 열등감으로 단단히 싸여 있는 인간이고, 그걸 폭력적인 방법 외에는 표출할 수 없는 인간이고, 그러면서 점점 더 퇴화하는 인간이기 때문에 난 길의 실체가 드러날수록 진저리를 쳤다. 그래도 아이린의 태도로 약간의 희망이 보이지 않을까 했는데, 결말이 그럴 줄이야. 


그럼에도 이 작가의 작품 중 가장 독특한 분위기를 가진 작품이 아닐까 싶다. 내가 이제껏 읽어왔던 작품들과 다른 전개라서가 아니라, 작가의 자전적 이야기여서가 아니라 각 등장인물들이 가진 혼자만의 괴로움과 갈등을 탁월하게 드러내기 때문이다. 이 작가는 읽으면 읽을수록 좋다. 



24. 죽음의 역사(앤드루 도이그, 석혜미 역. 브론스테인. 2023. 468쪽)

: 죽음의 개념 아주 간략하게 개괄한 후 죽음의 원인을 집중적으로 탐구한다. 특히 시기적으로 대규모의 죽음이 일어난 원인을 고찰하는데, 저자가 얘기했듯 초반에는 의학보다는 통계학에 가깝다. 하지만 의학적인 면도 놓치지는 않는다. 시대적으로 높은 사망 원인을 다루면서 바이러스와 세균이 어떻게 전파되고 어떤 방식으로 인체에 치명적인 해를 입히는지, 만성질환은 어떻게 생겨나고 어떻게 우리 몸 안에서 발전하여 죽음에 이르게 하는지 설명한다. 


과거 전염병과 위생 문제, 높은 영아 사망률 등이 주로 사망의 원인이었다면 현대로 올수록 만성질환 특히 치매의 비율이 높아진 게 인상적이었다. 사실, 이런 것은 굳이 이 책을 읽지 않아도 짐작 가능한 부분이고, 정말 흥미로웠던 건 여러가지 소소한 지식들이었다. 가령 19세기까지 의사들은 사용했던 의료 도구나 수술복, 심지어는 손도 잘 씻지 않아서 "유럽에서 출산과 관련된 사망은 수백 년 전 의사들이 개입하기 시작하면서 오히려 훨씬 늘어났다(147쪽)." 든지, 16세기 부터 런던에서 사망자 통계를 내기 시작했는데 이는 역병의 영향이었으며 당시 사망 원인 중에는 '고난과 압박(Trouble and oppression)'도 있었다(32쪽) 든지 하는 것들. 그리고 "매년 전체 사망자 중 1%를 조금 넘는 100만 명 정도가 동물로 인해 사망한다(152쪽)." 는 것도 흥미로웠다.


사실 중요한 건 저자도 얘기했듯 사망 원인 통계 자체가 아니다. 어떻게 하면 자연스럽지 않은 죽음을 감소시킬 수 있을까? "법률, 정책, 공학, 통계, 경제학이 발전했을 때, 또는 의욕과 재능이 넘치는 사람이 사회의 저항을 이겨내고 매우 훌륭한 아이디어를 실천했을 때 진보가 일어났다(411쪽)."



25. 아노말리(에르베 르 텔리에, 이세진 역. 민음사. 2022. 480쪽)

: 3월의 어느날, 파리 출발 뉴욕행 에어프랑스 여객기는 난기류를 만나 크게 요동친다. 승객들 모두 공포에 질리지만 무사히 착륙해 곧 자신들의 일상으로 돌아간다. 철저히 위장한 살인청부업자도, 아버지뻘 남자의 몇 년에 걸친 구애를 받아들인 영화 편집자도, 자신만의 작품은 완성하지 못하고 번역으로 생계를 꾸려가는 소설가도. 그런데 6월에 뉴욕 공항에 착륙한 에어프랑스 여객기에 이들과 똑같은 사람들이 타고 있다. 기장과 부기장, 승무원은 물론 탑승객들까지 모두. 


독특한 소재를 나름 과학적, 철학적으로 풀어냈다. 물론 그 이론이 완벽한 건 아니지만 어차피 평행우주에 관해서는 많은 설들이 있으니. 처음에 살인청부업자의 생활로 시작한 것도 꽤 영리했다. 다만 내가 가장 흥미로웠던 건 작가의 삶이었다. 그야말로 내가 늘 원하는, reset을 제대로 해낸 거 아닌가! 조금 산만하긴 했지만 즐거운 독서였다. 다만, 기존의 공쿠르상 수상작들과는 분위기가 좀 다르기는 했다. 



26. 하지 말라고는 안 했잖아요?(안톤 허. 어크로스. 2023. 232쪽)

: 정보라 작가와 함께 부커상 후보로 올랐던 번역가 안톤 허의 에세이. 번역에 진심이고 문학을 사랑하는, 약간 까칠하고 자기 주장 확실한 저자의 솔직한 글들이다. 앞부분 읽을 땐 타겟이 번역가 혹은 지망생들인가 싶었지만 뒤로 갈수록 독자들도 확실히 알아두는 게 좋을 현실을 이야기한다. 책을 읽으면서 처음 알게 된 사실들이 꽤 많았다. 특히 우리나라가 얼마나 번역가들을 문학의 '도구'로만 취급하는지, 번역에 대한 지원이 얼마나 미비한지, 해외에 우리 문학을 소개하는 게 얼마나 힘든지... 게다가 부커상 국제부문은 원작 자체가 아니라 번역본에 주는 상이라는 것도 처음 알았다. 그래서 번역가와 작가가 함께 후보에 오르는 거였다. 


그래도, 우리나라 독자들도 번역이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알고 있다고 말해주고 싶다. 좋아하는 작가처럼 좋아하는 번역가가 있어서 그가 번역한 책은 믿고 읽는다고. 그리고 이름을 알린 저자가 이렇게 솔직하게 번역을 이야기해 주어서 고맙다고도 말해주고 싶다. 앞으로 우리 문학이 발전하는데 꼭 도움이 될 거라고. 



27. 당신의 남자를 죽여드립니다(엘 코시마노, 김효정 역. 인플루엔셜. 2023. 416쪽)

: 핀레이의 생활은 현재 엉망이다. 남편은 섹시한 부동산업자와 눈 맞아서 집을 나가 바로 한동네에 살고 있고 혼자서 두 아이를 키우는 건 너무 벅차다. 게다가 스릴러 작가인 그녀는 앞으로 쓸 책에 대한 계약금까지 미리 받아서 다 써버렸는데 전남편은 베이비시터까지 해고해 버렸다. 핀레이는 독촉하러 온 에이전트와 동네 식당에서 만나는데, 집에 올 때 보니 남편을 죽여달라며 사례비와 정보가 쓰여 있는 냅킨이 가방에 들어있다. 무시하고 싶지만 금액이 너무 어마어마한데...


제목이 맘에 들어서 집어들었는데 첫부분을 읽으면서 강지영의 『심여사는 킬러』가 생각났다. 사실 핀레이의 좌충우돌이 재밌기는 했지만 심여사만큼은 아니었다. 어쨌든 핀레이는 상당부분 남에게 의존한다. 본인이 워낙 허둥대기도 하고. 그래서 더 현실적이기는 하지만 기왕 휘말릴 거면 심여사처럼 본인의 능력을 발휘하는 게 낫지. 그런 면에서 이 책은 워맨스가 돋보인달까. 역시 여성들의 연대가 답이다. 



28. 한 사람을 위한 마음(이주란. 문학동네. 2019. 304쪽)

: 연작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한 단편들. 모든 화자가 다 다르면서도 다 한 사람인 것도 같고, 어디에선가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 것만 같다. 그렇다고 어디선가 들어본 삶들은 아니다. 평범하고 조용하지만 독특하고 격렬한 삶. 나와는 다르지만 주제넘게 안아주고 싶다거나 토닥거리고 싶다는 마음 대신 옆에 가만히 앉아있어주고 싶은 삶.


덤덤하게 말한다고 해서 아프지 않은 건 아니지. 극복이 아니라 체념. 그래도 살자 하다가도, 사는 게 아니라 견디는 거라 하다가도, 차라리... 하다가도 그냥 돌아보면 시간이 이만큼 지나온 거. 



29. 사방에 부는 바람(크리스틴 해나, 박찬원 역. 은행나무. 2023. 588쪽)

: 1921년 텍사스. 마을에서 가장 부유한 집 딸인 엘사는 그러나 부모와 동생들의 무시와 천대를 견디고 있다. 하지만 우연히 만난 이탈리아계 레이프는 자신감을 북돋아주고, 그와 몸을 섞은 후 임신을 하게 되어 부모에게 쫓겨나 결혼한다. 1934년, 그동안 예쁜 딸과 아들을 낳고 자신을 사랑하지는 않는 남편과 사랑을 듬뿍 주는 시부모와 함께 농장을 꾸려나가는 엘사. 하지만 대평원에는 벌써 몇 달 째 비가 오지 않고 있고, 모래폭풍이 불어닥친다.


대공황기 서민들의 몰락이 뼈아프게 그려진다. 이제껏 이 시기를 배경으로 하는 작품을 읽더라도 대부분 도시에서 어떻게든 버티는 중산층들의 이야기였는데, 이렇게 수직하락한 이들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그린 이야기는 거의 처음인 셈이라 마음이 아파하며 읽었다. 루스벨트 대통령과 뉴딜 정책은 정작 미국의 가장 기본이 되는 농부와 농장에는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았고 거대 농장주들을 비롯해 자본가들은 자기보다 힘든 사람들을 돌아보기는커녕 그들의 상황을 이용해서 더 많은 자본을 축적하기만을 바랐다. 어쩌면 이렇게 가진자들은 전세계 어디서나, 어느 시기나 똑같을까.


암담한 현실을 정말 잘 그려냈지만 이 책은 엘사의 성장기이다. 비록 결말이 조금 마음 아프지만 그래도 희망이 반짝인다. 그래서 우리 모두 아픔을 딛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거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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