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고 향기롭게 - 법정 대표산문선집
법정(法頂) 지음 / 조화로운삶(위즈덤하우스) / 2006년 5월
평점 :
절판


'새해'가 뭐 별거야, 맨날 뜨는 그 해가 그 해지, 라고 투덜거리면서도 내심 '새해'를 맞는 기분은 그렇지 않았던가 보았다.

새해에 읽고 마음을 '맑고 향기롭게' 다스리기 딱 좋을 듯한 이 책에 드디어 눈길이 닿았다.

(분명히 내가 읽고 싶어 사다놓은 책인데도 몇 년이 지나도록 그 자리에 꽂혀 있는지도 모르고 지나가는 책들이 참 많다. 얼른 다들 '시절인연' 닿기를!)

 

'법정'이라는 이름과 딱 어울리는 제목, '맑고 향기롭게'.

읽는 동안 내 마음의 불순물이 많이 가라앉는 기분이었다. (가라앉기만 했을 뿐, 배출은 아직 영영 멀었느니라...)

사실, 좀 삐딱선을 타는 중이라, '대놓고' 가르치려 드는 책들에 자꾸 반감을 표하고 있었더랬다.

'누가 몰라요? 말은 쉽지. 알았다니까요. 했던 말 또 하고 했던 말 또 하고. 쳇, 안 읽고 말지!'

하지만, 이 책 앞에서는 나도 어쩔 수 없이 공손히 무릎 구부리고 두 귀 열고 경청하지 않을 수 없었다.

법정 스님의 힘.

읽다가 나도 몰래 샐쭉해지거나 잠시 해찰을 할라치면 누가 죽비로 어깨를 탁 내려치듯이 다시 정신을 돌리게 만들고 마는 문장들.

 

모든 것을 내려놓고 자신의 본 면모와 만나는 겨울산처럼 나도 내 마음을 겹겹이 둘러싼 찌꺼기들을 잠시 벗겨내고 내 안의 많은 소리들과 만날 수 있었다. 스님의 말씀 한마디에 봉인이 풀린 듯 내 속에서 길어 올려지는 오래 묵은 소란들.

'좋은 말씀' 앞에두고 그 소리가 그 소리, 다 똑같은 잔소리라고 투덜거리는 나같이 못난 인간에게 그 '잔소리' 같은 좋은 말씀들 필요한 이유를 다시 한번 깨달았다. 스스로는 깨치지 못하는 인간이니까. 이렇게 누군가가 (되도록이면 이렇게 넘치는 위엄으로 나를 꼼짝 못하게 만들 분이) "이러하느니라~"라고 말해줘야만 나는 그제야 깨칠 수 있는 작은 인간이니까. 한 번 들으면 두 번 까먹는 어리석은 인간이니까. 그래서 이런 '좋은 말씀'을 늘 곁에 두고 시시로 펼쳐보아야만 내 마음 조금이나마 '맑고 향기롭게' 지킬 수 있을 테지.

 

 

스님의 일기 몇 줄에 마음이 끌리다.

 

부풀어 올랐던 매화 꽃망울이 지난밤 휘몰아친 눈바람에 많이 졌다. 속이 상한다.(2월 22일)

석축 아래서 수선화가 활짝 문을 열었다.(4월 7일)

보성 차 밭에 다녀오다. 햇차의 신선한 향기. 모란 피어나기 시작.(4월 30일)

밀화부리 소리!(머슴새도 지난주에 왔었지) 투명한 5월 햇살, 영롱한 아침 이슬.(5월 7일) _ 246쪽

 

스님의 맑은 일기 닮고 싶어라. 살짝 내 일기장 들춰보니, 에그머니나. 나는 온통, 냄새나는 배설물들 기록 같아라.

나도 언젠가 온갖 잡다한 번뇌에서 벗어나 이처럼 맑고 고운 일기를 쓰고 싶다.

 

 

스님 글을 읽고 그리운 이 생각에 온밤을 뒤척이다.

 

우리가 진정으로 만나야 할 사람은 그리운 사람이다. 한 시인의 표현처럼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는 그런 사람이다. 곁에 있으나 떨어져 있으나 그리움의 물결이 출렁거리는 그런 사람과는 때때로 만나야 한다. 그리워하면서도 만날 수 없으면 삶에 그늘이 진다. 그리움이 따르지 않는 만남은 지극히 사무적인 마주침이거나 일상적인 스치고 지나감이다. 마주침과 스치고 지나감에는 영혼에 메아리가 없다. 영혼에 메아리가 없으면 만나도 만난 것이 아니다. _ 209쪽

 

여러 해를 두고 그리워하는 이가 있다. 그립지만 한 나라 안에 있지 않으니 좀처럼 만날 수 없다. '곁에 있으나 떨어져 있으나 그리움의 물결이 출렁거리는' 사람인데, 때때로 만나지 못하니 삶에 그늘이 지는구나, 한숨 내쉬었다.

그런데 이 글을 함께 읽은 어떤 이가 말하기를, 살면서 그처럼 그리운 대상이 있으니 얼마나 축복받은 삶이냐고 했다. 하아ㅡ 그 이의 말에도 무척 공감했다. 살면서 그리운 이 하나 없는 것보다는, 이렇게 무진장 사무치게 그리워할 수 있는 대상을 품고 살아가는 일이, 더욱 복된 것 같다. 비록, 볼 수는 없어도, '영혼에 메아리가' 울리는 만남을 내 안에 간직했으니, 나는 행복하다.

 

 

스님처럼 홀로 사는 즐거움을 누리는 이가 되고 싶다.

 

고독과 고립은 전혀 다르다. 고독은 옆구리께로 스쳐 지나가는 시장기 같은 것, 그리고 고립은 수인처럼 갇혀 있는 상태다. 고독은 때론 사람을 맑고 투명하게 하지만, 고립은 그 출구가 없는 단절이다.

(……)

홀로 사는 사람은 고독할 수는 있어도 고립되어서는 안 된다. 고독에는 관계가 따르지만, 고립에는 관계가 따르지 않는다. 모든 살아 있는 존재는 관계 속에서 거듭거듭 형성되어 간다. _ 277~278쪽

 

고독하되 스스로를 고립 속에 내던지지는 말자. 맑고 투명하게 홀로 있되, 출구 없는 단절 속에 갇혀 어두워지지는 말자. 관계 속에서 성장하는 인간임을 잊지 말자.

 

 

스님의 말씀으로 오늘도 나를 일깨우며, 오늘 먹은 밥 한톨만큼이라도 내 속이 맑고 향기로워졌기를. 육신이 허기지면 찾아 먹는 밥처럼, 마음이 허기지면 찾아 읽는 책으로 곁에 두고 늘 잊지 말아야지, 다시 한 번 다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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