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름은 김신데렐라 초승달문고 21
고재은 지음, 윤지 그림 / 문학동네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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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편의 짧은 이야기가 담긴 책이다.

 

사람의 마음을 쏙쏙 읽어주는 것 같은 돈이 등장하는 「나는 보리차가 싫어」

쓸 줄 아는 것이라고는 자기 이름밖에 없는 주희가 곁에 있는 모든 것에 제 이름을 쓰는 「2학년 3반 이주희」

신데렐라가 좋은데 왕자이기를 강요 받는 사내아이의 「내 이름은 김신데렐라」

구구단을 못 외워 나머지 공부를 하는 「희철 선인장」

 

네 편의 이야기가 때로는 재미있게, 때로는 뭉클하게, 때로는 반성을 불러 일으키며 읽혔다.

 

 

가끔, 한정된 돈을 쥐고, 이걸 살까 저걸 살까 망설일 때가 있다. 돈은 딱 요만큼밖에 없는데, 둘 중 또는 여럿 중 하나밖에 살 수 없는데, 나는 과연 뭘 사야 한단 말인가!

그럴 때 돈이, 자기 마음 가는 대로 속삭여준다면...?

책을 살까 옷을 살까, 망설이고 있을 때, "나는 옷이 싫어, 나는 옷이 싫어..." 하고 속삭이는 돈을 보고 화들짝 놀란 순간, 어느새 내 손에서는 돈이 떠나고 그 대신 책이 들어와 있는 거지. (응, 하지만, 돈이 속삭여주지 않아도 지금껏 너는 쭉 그래왔어. 이제 그만 옷이나 좀 사입지 그래?-_-; 돈이 이렇게 말하기 전에. "나는 책이 싫어.")

가족들 먹을 저녁 반찬거리 사러 나간 엄마 눈에 마음에 쏙 드는 블라우스가 들어온다면...? 대부분의 엄마들은 저녁 반찬거리를 사들고 머릿속으로는 그 블라우스를 입은 자신의 모습을 상상해보며 집으로 돌아올 것이다. 그럴 때도 돈이 말을 해야 할 때. "나는 반찬이 싫어, 나는 반찬이 싫어..." 그리고 엄마에게 블라우스를 안겨 주는 거지! (엄마, 엄마도 이제 좀 자신을 위해 소비하세요...)

이런 재미난 상상이 담긴 이야기가 「나는 보리차가 싫어」이다.

우리 꼬마 주인공은 보리차가 싫다며 달아난 돈 대신 무엇을 갖게 되었을까?

 

초등학생 때, 내 모든 물건에는 견출지가 붙어 있었지. 그 위에는 이름 석 자, 혹은 몇 학년 몇 반이 함께 적혀 있기도 하고.

이름을 쓰면 물건을 잃어버리지 않는다. 아니, 잃어버려도 돌려받을 수가 있다.

이름이 써 있지 않은 물건들은 교실 뒤에 놓인 박스에 모였다. 그러면 물건의 주인인 아이들이 와서 제 물건을 찾아가곤 했고.

주희는 제 방 안의 모든 물건에, 교실의 모든 물건에, 심지어는 방에 불어오는 바람에도 제 이름을 써주고 싶어한다. 엄마가 지우고 지우고 또 지워도 주희는 쓰고 쓰고 또 쓰고... 그러다가 필기구를 모두 빼앗기고...

주희에게도 잃어버리고 싶지 않은 것이, 아니 이미 잃어버렸지만 꼭 돌려받고 싶은 것이 하나 있다.

바람에게 '이주희'라고 이름을 써 주었으니, 그 바람이 불고 불어, 아빠의 등 뒤에 가 닿는 날, 주희는 되찾을 수 있겠지?

 

우리 조카 아이는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누가 가르치지도 않았는데, 장난감 통에서 꼭 '사내아이다운' 물건들을 잘도 골라내어 가지고 논다.

제 부모가 사주기도 전부터 칼이며 총 장난감을 사달라고 떼 쓰기도 하고 솜털 귀여운 곰인형보다 자동차나 활동적인 장난감을 좋아한다.

"머스마는 머스마로 타고나는 갑다!" 울 엄마가 그런 손자를 지켜보며 감탄하듯 내뱉는 말.

하지만 혹 사내아이가 곰인형을 더 좋아한다고, 여자아이가 칼싸움을 더 좋아한다고 그걸 굳이 말리고 억지로 못하게 하지는 말아야 한다는 게 평소의 내 생각이다.

지구상의 인간을 딱 두 종류, 남자와 여자로 나누어 그에 따른 '성역할'을 강요할 필요가 있을까?

'인간의 행위나 태도와 관련하여 남녀별로 적절한 것으로 규정된 문화적 기대치'

남녀별로 적절한 것은 뭐고 그렇게 규정된 문화적 기대치라니.

나는 이 세상을 나눌 수 있는 가장 확실한 것은, 단 하나 '개인차'라고 생각한다. 그들을 단지 남자라는 이름으로, 여자라는 이름으로, 하나로 묶어 획일적인 기대치에 도달하게 만들 필요는 없지.

사내아이도, 신데렐라가 좋으면 "내 이름은 김신데렐라입니다"라고 공주 놀이 할 수도 있는 거다.

뭐,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나는 파워레인저다. 음하하하하"하는 우리 조카 녀석은 또 그렇게 철저하게 '머스마'로 타고난 거고... 그런 조카 녀석에게 비록 너는 남자이지만 여성적인 취미도 가져보렴, 이라고 강요할 필요 또한 없는 거고.

 

나는 초등학교 때 딱 한 번 나머지 '공부'를 한 적이 있다. (적어도 내 기억에는, 그 한 번밖에는...)

다른 아이들은 남아서 구구단을 외웠는지 뭘 했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 한켠에서 열심히 줄넘기 연습을 하고 있었다. 이단뛰기를 못 해서, 나머지 연습을 하게 된 것.

그래서 나머지 연습을 해 결국 넘었던가...? 아마 끝까지 넘지 못했던 것으로 기억이 나는데, 확실치는 않다.

희철이는 구구단을 못 외워서, 아니 외우긴 외웠는데 선생님 앞에만 서면 머리가 하얗게 비어 버려서 매일같이 나머지 공부를 한다.

외우고 또 외워도 왜 선생님 앞에만 서면 기억이 안나는지...

홀로 교실에 남아 구구단을 외우던 희철이 마음속에 선인장이 자란다. 아니, 선인장은 교실에서 자라고 있다. 그런데 갑자기 희철이도 선인장이 되어버린다.

마음에 온통 뾰족뾰족 가시가 돋아나더니 걷잡을 수 없는 행동들을 하기 시작한다. 구구단으로 자기를 힘들게 하는 엄마와 선생님에게 '따끔한 맛'을 보여주고 싶었던 걸까...?

가시를 품고 있는 희철이를 안타까운 마음으로 바라보았다.

나도, 마음 속에 가시 품고 사는 날이 많아서, 희철이 마음이 낯설지 않았다. 희철이는 구구단 때문에, 나는 뭐 때문에...?

 

 

짧은 동화 네 편 읽으면서, 참 마음속에 여러 생각들이 많은 시간이었다.

어른이 되어 읽는 동화는, 어린이 때와는 무척 다른 감상을 전해주는 게 확실하다.

단순히 재미나 공감을 떠나, 자꾸 돌아보고 반성하게 만들기도 하고, 추억하게 만들기도 하고, 무엇보다 아이 때는 느끼지 못 했을 어떤 애틋함 같은 게 함께 하니까.

 

그래서, 앞으로도 계속 동화속으로 여행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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