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으름을 죽여라
구경미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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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 나는 정말이지, 게으름을 죽여야 했다. 아니, 게으름을 죽여야 한다.

할 일이 잔뜩 쌓였는데 세월아 네월아 게으름을 피우고 있다기보다는, 아무것도 할 일이 없어, 할 일이라고는 게으름 피우는 것밖에 없기라도 한 듯한 나날인데……

 

그는 평소 오랜 시간 잠을 잤다. 열네 시간이나 열다섯 시간. 깨어 있는 시간은 고작 열 시간이나 그 이하였다. 깨어나봐야 할 일이 없었다. 하고 싶은 일도 없었다. 할 일이 없다는 것, 하고 싶은 일이 없다는 것이 그를 괴롭혔다. 할 일도 없고 하고 싶은 일도 없으면서 자신이 쓸모없는 인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또한 그를 괴롭혔다. 그는 괴로워서 잠을 잤고 잠이 잠을 불러왔다. 잠을 자는 동안은 괴로움을 잊을 수 있었다. 잠을 자는 동안에는 다소 행복해할 수도 있었다. (207)

 

요즘 나는 잠을 많이 잔다. 열네 시간, 열다섯 시간까지는 아니지만, 평균적으로 삶을 살아가는 이들이 자는 것보다는 많이. 아침(이라고 해봐야 이미 해가 중천에 떴을 시간)에 눈이 떠져도 그냥 도로 잔다. '일어나도 할 일도 없는데 뭐……' 내가 할 수 있고 해야 하는 일이라고는 잠자는 일밖에 없는 것처럼, 그렇게 나는 내 삶을 꿈나라에 버리고 있는 중이다.

나도 이렇게, 평생을(?) 놀고 먹어온 인간은 아닌데 굳이 핑계를 대자면, 그러니까, 지금 내 처지가 '한여름 누렁이' 짝인 게 큰 원인이긴 하다.

 

한가할 때는 한여름 누렁이처럼 늘어지다가도 일단 의뢰가 들어오면 심심한 누렁이에게 쫓겨 필사적으로 달아나는 암탉 신세가 되는 게 바로 나였다. (56)

 

그래, 그게 바로 나다. 직업은 좋게 말하면 '프리랜서 번역가', 현실을 말하면 '반(半) 백조'.

일이 몰릴 때는 미친 듯이 몰려 심심한 누렁이에게 쫓겨 필사적으로 달아나는 암탉 신세가 되어 꽥꽥꽥 울부짖으며 일하다가도, 일이 끊기면 그야말로 '뚝!', 그렇다 '뚝!!' 끊기고 말아 나는 한여름 누렁이 모드로 돌입. (뭐, 이것도 굳이 따지자면 일감을 적극적으로 찾지 않은 내 탓이기도 하겠지만.) 요즘이 바로 그 '한여름 누렁이' 모드여서 나는 정말이지, 무기력증에 빠져들고 있다. 아니, 이미 빠져든 것 같다.

 

밤이면 밤마다 밤을 새워 책을 읽는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야 할 필요가 없으니까, 책은 왠지 벌건 대낮보다 컴컴한 밤에 읽어야 죄책감(?)이 없으니까, 밤이 되면 책을 읽고, 읽다가 중간에 덮어두기도 하고, 다 읽었으면 독후감 쓰고, 이게 요즘 내 '게으름'의 모습이다. 다른 '생산적인' 일은 전혀 하지 않는다는 것. (조카 돌보는 것은 이미 필수 일과이므로 빼고.) 그러다가, 문어발 식으로 읽은 책 몇 권이 머리를 딱딱하게 만들어버려 책 마저도 눈에 들어오지 않게 된 날, '아니, 내가 지금 할 수 있고 하고 싶은 거라곤 책 읽는 거밖에 없는데 이것마저 하기 싫어지면 그 다음 차례는 숨 그만 쉬어야 하는 것 아닌가?!' 기필코 읽고야 말겠다는 의지로 집어든 책이 이 책, 『게으름을 죽여라』였다. 지난번에 얼핏 보니, '백수소설'의 새 지평을 연 작가라고 했다. 그래, 인정하기는 싫지만 '백수소설'이라면, 지금 내게도 많은 부분 공감을 불러 일으킬 것으로 보여, 독서로 지친 마음을 풀어줄 것 같았다. 내 예상은 적중했다. 조금 서글프지만, 이 책의 수많은 문장들에 밑줄을 그으며 '그래, 그렇다니까!' '어이쿠, 딱 내 얘기네, 내 얘기야!!' 쉴새없이 추임새를 넣으며 책을 읽었다. 지금 나는 100% '무기력 백수'의 모습이었던가 보다. 이 책을 읽으며, 이 책에 공감하는 문장들을 보며, 그 사실을 다시 한번 확실히 깨달았다.

 

그때 못 이기는 척하고 아버지의 말을 따르는 게 옳지 않았을까? 못 이기는 척 결혼을 하고 못 이기는 척 회사에 나가고 못 이기는 척, 남들처럼, 그럭저럭, 살았어야 하는 게 아닐까? 나는 아무것도 판단할 수 없다. 나는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다. 아는 거라고는 현재 내게 남은 건 아무것도 없다는 것뿐이다. 그런데 어쩌다 내 인생이 이 모양 이 꼴이 된 거지? (30~31)

 

내 인생이 어쩌다가 이 모양 이 꼴이 된 건지는 모르겠다. (정말 몰라? 이게 다 네 인생에 대한 너의 '무책임함' 때문은 아니고?!) 하지만, 현재 내게 남은 건 아무것도 없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비록 지금은 '한여름 누렁이'이지만, 곧 '암탉'이 될지도 모르고, 그때가 되면 또 닭 멱따는 소리로 울부짖으며 '백수 탈출'을 하게 될지도 모르니까. (그러니까 담당 PM 말로는 다음달부터 새 프로젝트 들어간다고 했던가? 제발, 하루 빨리 시작해줘요!) 그리고 내게는 언제나 꿈이 있으니까. 비록 지금은 그 꿈마저도 흐릿해져갈 지경이긴 하지만, 다시 달리면, 잘 달릴 수 있을 거다. 그때는 게으름을 완벽하게(까지는 아니더라도) 죽이고!

 

지금 내 처지에 비추어보다 보니 백수의 모습과 심경에 상당히 많이 공감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소설 속 모든 주인공이 놀고먹는 건 아니고 모두 게으른 것도 아니다. 게으름과 상관 없는 이야기도 실려 있고. 이야기 한 편 한 편, 향긋한 허브 오일처럼 지친 머리 근육을 부드럽게 풀어주며 나를 다시 '즐거운 독서의 세계'로 인도해 주었다. 그 밤, 이 책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나는 이젠 책조차도 읽을 수 없게 된 거냐고 한탄하며 우울의 구덩이를 더 깊게 팠을지도 모르겠다. 내게는 여러모로 고마운 책이다. 다음에, 이 책을 다시 읽게 된다면, 그 때는 지금 그은 밑줄들을 가벼운 마음으로 스쳐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 '훗, 그때 나는 깊은 백조의 나락에 빠져 있었군. 지금은 아니지 말입니다.' 하면서 말이다.

 

패배의 쓴잔을 높이 들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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